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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1절에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발이 밟힐 정도였습니다. 13절에도 무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마태복음 5, 6, 7장의 산상수훈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산상수훈 서론에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왔다고 했습니다. 지금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라고 하셨습니다. 이 적은 무리는 누굴까요? 22절에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적은 무리는 예수님께 진정으로 배우기를 원하고 예수님의 사상을 진심으로 습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적은 무리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밟힐 만큼 많았지만 예수님께 진정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매우 소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적은 무리 중에 하나입니까?
‘적은’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미크로스(μικρός)입니다. 미크로스는 ‘미미한, 보잘 것 없는, 짧은, 조금’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작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마이크로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무리라는 말이 헬라어로 포임니온(ποίμνιον)입니다. 이 말은 떼, 양떼라는 뜻입니다. 군중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적은 무리여!”라는 말은 “아주 적은 양떼여!”, “아주 조그마한 양 무리여!”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적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좋은 의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애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저의 집 첫째 이름이 주은입니다. 아내가 첫째를 부를 때 이름 대신 주주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다 큰 자녀들을 “애기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작다는 말은 정말 작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적은 무리여!”는 주님의 애정이 가득 담긴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아주 소수의 무리들을 애정이 가득 담긴 말로 부르고 계십니다. “적은 무리여!”는 “사랑스러운 나의 작은 양떼들이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작은 자’라고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베드로의 집에 계실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매고 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자’라는 말이 헬라어로 테크논입니다. 테크논은 ‘아이, 자녀, 아들, 자손, 후손, 얘야, 이 사람아’라는 뜻입니다. “작은 자야!”라는 호칭은 “아이야!”, “아들아!”, “얘야!”라는 의미로 아주 친근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아주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도 주님은 제자들을 “아이들아!”라고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3에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했습니다. ‘작은 자들아’라는 말이 테크논인데 NIV 성경은 ‘나의 아이들아(My children)’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을 “애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21:5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얘들아’라는 말이 ‘아기들아’(파이디아, 갓난아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기들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생했지만 헛수고한 제자들을 아주 애틋하게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주 엄하게 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주 친밀하고 다정하게 대하셨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제자들에게 털어놓으시면서 나누기도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아서 예수님 품을 의지하고 누었습니다. 요한복음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그러면 왼편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크게 하신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듯 작게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을 정도였다면 유다는 예수님 바로 옆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른쪽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기대 누어있었고, 예수님은 유다의 품에 의지해 누어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친근하게 대했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다정하게 대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빵(떡)을 찍어다가 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허벅지를 베게 한 상태에서 빵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얼마나 다정하게 대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잔치의 주인이 빵을 초에 찍어서 주는 것은 아주 귀한 손님에게 베푸는 최고의 호의이면서 특별한 대접이고 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만 빵을 초에 찍어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끝까지 친절과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의 큰 형님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가 같은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가 같다는 말은 형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은 “우리는 형제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들의 위치까지 내려가셨고 사람들을 당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처럼, 형제처럼 다정하게 대하셨습니다. 로마서 8:29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큰 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구가 되셨고, 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딸에 대한 엄마의 애정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주님은 엄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스러운 나의 작은 양 무리들아!”,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야!”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적은 양무리가 되십시오.
적은 무리는 숫자적으로 아주 소수라는 의미입니다. 적은 무리라는 말은 진정한 회심자가 아주 소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하신 시기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후 1년이 훨씬 지나서입니다. 예수님은 잘 가르치셨고, 탁월한 설교를 하셨으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1년 이상을 밤낮없이 가르치시고, 기도하셨으며, 때로는 드시지도 못하시고, 쉬지도 못하시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예수님 보다 더 뛰어난 사역자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회심자는 아주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숫자적으로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교회이었습니다. 그러나 참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계신 교회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약속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장로교 헌법에 시무 장로가 있으면, 조직교회이고 시무장로가 없으면 미조직교회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미조직이라는 말이 교회답지 못한 교회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정말 그럴까요? 큰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교회답지 않은 교회가 아닙니다. 큰 교회는 온전한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부족한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형 마트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이고, 마을의 작은 마트는 시답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트를 보는 기준으로 교회를 보지는 마십시오. 아무리 큰 교회도 이 지구에 비하면 정말 작은 구역에 불과합니다. 지구 인구가 81억입니다. 81억을 지구 인구를 볼 때 10명이나 100명, 10,000명이나 100,000명은 다 같은 보잘 것 없는 소수의 무리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양떼는 항상 적은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약속이 있는 양떼입니다. 마태복음 18:20에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큰 교회에 있다고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교회에 있다고 약속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이든 다수이든 개개인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진다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고 온전한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전에 있던 교회에는 철야기도 불침번이 있었습니다. 권사님들이 조를 1년 365일 교회에서 자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년 내내 기도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쩌다가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 한 번씩 나와서 기도하는 게 전부예요. 예배 인원도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작은 교회는 영적으로 참 가물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큰 교회에는 큰 은혜가 있고, 작은 교회에는 작은 은혜가 있다면 – 물론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 그럼에도 큰 은혜가 은혜인 것처럼 작은 은혜도 은혜라는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큰 파도가 파도인 것처럼 작은 파도도 파도이며, 바다가 물인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도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큰 교회에 있는 큰 은혜도 은혜이며, 작은 교회에 있는 작은 은혜도 은혜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며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부스러기 은혜도 진짜 은혜입니다. 큰 은혜는 진짜 은혜이고, 작은 은혜는 가짜 은혜가 아닙니다. 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주시는 동일한 은혜입니다.
어제 새벽이었습니다. 금요 심야기도회 후에 강단에 있다가 잠이 들었어요. 한참을 자는데 여자 울음소리가 주방 쪽에서 나요. 깜짝 놀라서 나와 보니까 한 여자 청년이 인사불성이 되어 울고 있어요. 제가 교회에 있을 때는 현관문, 주방 쪽 문을 열어놓습니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뭐에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잘 못하고 횡설수설해요. 벌벌 떨어요. 교회인지도 모르고 들어온 거예요. 진정을 시키려고 하는데 진정이 안돼요. 청년이 아빠, 고모부, 또 누가 더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가족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올라오니까 속에 있는 말을 아빠한테 한 거예요. 엄마는 세 살에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아빠가 키웠는데 많이 때린 것 같아요. 술을 마시다가 아빠한데 어렸을 때 상처가 된 것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랬더니 아빠가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태어났다고 하며 때린 거예요. 얼마나 때렸는지 주변 사람이 신고해서 경찰이 출동을 했어요. 그런데 경찰이 가족 일이라 도와줄 수 없다며 그냥 가버렸어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아이가 정신을 못 차리고 횡설수설하는 거예요. 막 몸서리를 치는 거예요. 그러면서 “목사님, 나 좀 보호주세요. 나 좀 보호주세요. 나 죽고 싶어요. 죽을 거예요. 목사님 나 잘못 태어난 거예요? 나 몸부림치며 살았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니에요. 잘 태어났어요. 그냥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래요.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아요. 하나님이 자매를 사랑하시고 자매를 향한 계획이 있어요. 자매는 정말 잘 태어났어요. 열심히 살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시커먼 남자 두 명이 교회로 쑥 들어오는 거예요. 술, 담배 냄새가 확 나요. ‘이게 뭐지?’ 순간 당황했어요. 그 청년이 두 사람을 보자마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목사님!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이게 도와주는 거예요.”라고 하며 막 우는 거예요. 아빠하고 고모부예요.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핸드폰 위치 추적을 해서 교회를 찾아온 거예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아빠인데 가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청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빠에게 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놀라면서 “가라구요.”라고 해요. 아빠를 보내고 청년을 안정시켰어요.
인천에 사는 친구와 연락이 됐는데 친구가 택시를 태워서 인천의 자기 집으로 보내달래요. 집이 인천인데 고모가 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천안에 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고모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또 학대를 한 거예요. 얼마나 머리끄덩이를 잡고 아이를 학대했는지 22살짜리 여자 아이가 정수리가 하예요. 아빠도 때리고 고모도 때리고. 고마웠는지 팔을 겨드랑이까지 걷어 올리더니 삼두근 안쪽, 겨드랑이 가까이에 제 전화번호를 적어달래요. 옷을 걷었는데 팔에 칼자국이 여기저기 있는 거예요. 자해를 한 거예요. 인사불성인 아이를 그냥 택시에 태워 보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서 고민을 하다가 인천까지 태워다주고 왔어요. 가는 중에 머리가 아프다는 거예요. 신경을 써서 그런 줄 알았더니 머리끄덩이를 얼마나 잡아당겼는지 두피가 아팠던 거예요. 불면증으로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자요. 청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소년 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봐서 합격했어요. 아빠가 뭐하느라고 하나 뿐인 딸을 고등학교도 졸업도 안 시켰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땄어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아이가 똘똘해요. 참 불쌍하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천을 갔다 오는데 얼마나 피곤한지. 청년이 술을 마신 곳이 두정동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까지 온 거예요. ‘두정동에서 어떻게 우리 교회까지 왔지!’ 우리 교회로 온 게 너무 놀라운 거예요. 그 청년은 여기가 교회인지도 모르고 온 거예요. 그냥 숨으려고 도망 다니다가 그냥 뛰어 들어온 거예요. 와 보니까 교회예요. 저는 하나님이 그 청년을 우리 교회로 인도하셨다고 믿어요. 환경이 너무 불우한 청년이에요. 심성이 착해요. 하지만 세상적으로 봐줄만한 정말 없어요. 그런데 전에 교회를 몇 번 갔대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믿음이 정말 희미해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이 청년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저희 교회로 인도하셨다고 믿어요. 저는 그 희미한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다고 믿어요. 인천을 갔다 오는데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몰라요. “하나님, 이 청년을 저희 교회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청년 또 있으면 보내주셔도 돼요.”라고 기도하며 왔어요. 우리 교회는 작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교회입니다. 5-6년 우리 교회 다녔던 정 집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모태 신앙이고 나이는 60 정도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리다가 처음으로 울어봤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지만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30~32에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참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20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28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비난하는 투였을까요? 저는 주님께서 부드럽고 무리를 불쌍히 마음으로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혹시 나는 믿음이 작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참 못났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신앙이 참 시원치 않다고 여기시는 분이 있습니까?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못났어도, 시원치 않아도, 그 믿음은 진짜 믿음입니다. 지극히 연약하고 작은 자에게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큰 믿음도 귀하게 여기시지만 작은 믿음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정말 작고 연약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멸치가 생선인가?’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멸치 같은 믿음도 진짜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사람들은 호박꽃도 꽃이냐고 하지만 주님은 호박꽃처럼 못난이 믿음도 진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서기관과 율법사와 같은 신학박사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사두개인들처럼 귀족들이나 왕족이 없었으며,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는 존경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깡촌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촌사람이라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고 했고,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53)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가난했고, 무식했고, 미천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정말 미미해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무시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주님은 아직도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적은 무리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여기 기뻐하다는 말은 참으로 기뻐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어른 양이 아닙니다. 커다란 대형 양이 아닙니다.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은 아기 양이라는 뜻입니다. 어린 양은 작은 양이라는 뜻입니다. 어린양은 미미한 양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코끼리, 하마, 호랑이가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린양이 구원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양을 신봉하는 아주 미미한 양 무리입니다. 그런데 진짜 양 무리입니다. 불리한 조건, 열악한 환경에 열등감을 갖지 마십시오. 피해의식 갖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적은 무리라는 말에는 주님의 특별한 돌보심과 은혜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까마귀를 생각해보고, 백합화를 생각해보라.” 유대인들은 까마귀는 시체를 먹기 때문에 부정한 새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꺼렸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까마귀를 보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까악 까악, 소리도 듣기 싫은 동물이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재수가 없는 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체를 먹어 더럽고, 끔찍하고, 재수가 없는 새까지 돌보십니다. 백합화는 헬라어로 크리나입니다. 백합의 백은 흰 백(白)자가 아니라 일 백(百)자입니다. 꽃이 희다는 뜻이 아니라 일백 가지의 색깔이 있다는 뜻입니다. 백합은 갖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백까지 색깔 중에 어느 것도 솔로몬이 입은 최고의 옷보다 못한 것은 없습니다. 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백합화는 들에 핀 이름 모를 수백 가지의 꽃 모두를 가리키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까마귀도 먹이시고,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들꽃과 수백 가지 이름 없는 들풀까지 입히신다면 너희를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강건하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겪는 질병의 종류는 약 30,000가지라고 합니다.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30,000가지 질병에서 하나님께서 육체적 건강을 지켜주시기를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잘된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잘됨 같이, 잘되고, 여기 잘 된다는 말이 문자적으로 ‘여행을 잘 한다’, ‘좋은 여행’, ‘좋은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천국을 향하는 나아가는 여행입니다. ‘잘됨 같이’라는 말은 인생 여행을 잘 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고 오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영혼과 몸이 건강해서 인생 여행을 잘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이 축복기도가 우리를 향한 축복기도인 줄 믿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까지 여행을 잘 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보증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행을 보증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명령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6번 나온다고 합니다(리차드 범브란트). 많이 나온다는 말은 많이 두려워한다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은 그리스도인들이 물리쳐야 할 최고의 적입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몰골을 한 어떤 노인이 양로원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만히 앉아있는 데도 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심한 중풍을 앓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이 의자에 앉아 벌벌 떨고 있는데 한 신사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노인장.”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신사가 깜짝 놀라서 “저를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장이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나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지요. 주님은 나에게 왕관을 가져다주실 거요.” “당신에게 왕관을 준다고요?” “물론이요. 나는 왕이 될 테니까요” “그것을 어떻게 아시나요?”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그 나라를 상속받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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