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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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2:25~33
주일오전예배 | 2023-10-1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인생에서 하지 말아야할 9가지가 있다. 얼굴 찡그리지 말라. 인생승패가 얼굴에서 시작된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게으르지 말라. 게으름은 스스로를 파괴시키게 된다. 좀더 눕자 하면 빈궁이 강도같이 온다고 했다(6:10-11, 24:33). 속이지 말라. 몸에 종기를 키우며 사는 것과 같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못났다 한탄을 말라. 그 모습 그대로 승리를 보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외로워하지 말라. 세상에서 주인공은 당신이다. 낙심하지 말라. 절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시기하지 말라. 시기하는 순간 창조와 생산이 중단되고 만다. 화부터 내지 말라. 화는 이성을 잃어 많은 가슴 멍들게 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했다(16:32). 조급하지 말라. 인생에서 하지 말아야할 9가지 중 첫째가 조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 급한 사람치고 실수를 하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스피드(속도) 시대이다. 빠르지 않으면 뒤쳐진다. 빠르지 않으면 실패한다. 빠르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빨리빨리를 좋아한다. 모든 것에 스피드가 관건이다. 초고속 승진, 급성장, 신속(초고속)배달. 스피드가 우상인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조급하다. 늘 속도에 쫓긴다. 기다리지 못한다. 무엇을 해도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겪는 대부분의 손상은 조급함에서 온다. 조금만 기다렸어도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기다리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나무가 백향목이다. 백향목은 300년을 자라야 목재로 쓸 수 있다. 400년을 자라야 열매를 딸 수 있다. 성경은 의인을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한다. 시편 92: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호세아 14:5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백향목이 자라는 2,000m가 넘는 레바논 산은 오월의 늦봄에도 강한 냉기가 살을 파고든다. 한겨울 같은 강한 추위의 악조건에서도 잘 자란다. 묘목을 심은 후 수 백 년은 자라야 목재가 되니 자라는 것이 참 느리다. 그러나 한 번 자라나면 크고 장대하다. 나무 중에 나무다. 40m까지 자란다. 백향목은 조급하지 않는다. 

나무처럼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경건이다. 경건이라는 나무는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크지 않는다. 급성장이 없다. 초고속 승진이 없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참된 경건은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조급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뜻은 기다릴 줄도 안다는 뜻이다.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간 뿐 아니라 주변 환경을 모두 참을 줄 안다는 뜻이다. 참된 경건은 시간과 환경을 모두 참는다. 요셉은 종살이, 옥살이를 13년 했다. 강간범이란 추악한 누명을 쓰고 살았다. 모세는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살았다. 40년을 살인자, 실패자라는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에게 13년 동안 쫓겨 다녔고, 7년을 헤브론에서 반쪽짜리 왕이 되었다. 13년 동안 반역자로 도망 다니며 살았다. 다윗은 20년 만에 정식 왕이 됐다. 그 동안 온갖 고난을 참아야 했다. 믿음은 기다림이다. 경건은 기다림이다  

오늘 본문에 그 백향목 같은 사람이 나온다. 아주 오래 주님의 강림을 기다린 사람이다. 바로 시므온이다. 의사이었던 누가는 시므온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25절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시므온에 대한 성경의 서술은 네 가지이다. 첫째, 시므온은 예루살렘 사람이었다. 둘째,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셋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넷째, 성령이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4가지는 시므온에 대한 누가의 소개이다. 이 네 가지를 한 줄로 줄일 수 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조급하고 때로는 막막해도 끝까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다. 이 기다림이라는 한 단어 속에 시므온의 경건, 의로움, 인내, 신앙, 인격, , 기도, 성령님의 함께 하심 등이 모두 녹아 있다. 시므온의 신앙을 순서대로 묵상해 보자  

먼저 시므온은 예루살렘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가?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일 년에 3차례씩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이는 곳이다. 예배의 처소이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다. 지구 위에서 유일하게 성전 건축 장소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곳이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당신의 처소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곳이다. 세계 모든 신앙인들의 영적 고향이다. 150개의 시편이 있다. 시인들의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과 성전이다.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노래다.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이 예루살렘을 노래했다. 지금도 세계의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을 사모하고 있다.  

시므온 때 예루살렘은 어떠했을까? 부패의 온상이었다. 제사장들은 장사하는 사람들과 결탁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들을 판매하고 이득을 챙겼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셨다. 제사장직을 돈을 주고 샀다. 뇌물이 성행했다. 제사장이 부패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직 매매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 앞에 예배가 온전히 드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온전한 예배가 없을 때 사회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사회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났기 때문에 그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온전한 예배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필요하다. 시므온은 부패한 곳에서 살았다. 아주 타락한 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는 부패하지 않았다. 죄악에 오염되지 않았다. 그 부패한 시대에, 부패한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됐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자. 내 가정, 내 직장, 내 교회, 우리 사회의 은혜의 통로가 되자. 이 세상에 은혜의 통로가 필요하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필요하다. 

둘째, 성경은 그를 가리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다. ‘의롭고라는 말은 공정한’, ‘정의로운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누가가 기록했다. 시므온에 대한 누가의 평가이다. 누가의 눈에 보이는 시므온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누가는 이방인이다. 누가는 여러 사람들의 말과 먼저 기록된 성경을 보고 성경을 기록했다. 사람이 보기에 공정한 사람이다. 정의로운 사람이다. 이거 참 힘든 일이다. 불의한 세상에서 공정하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이 평가는 단순한 사람의 평가만은 아니다. 누가가 이 말씀을 기록할 때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기록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동시에 시므온에 대한 성령님의 평가이기도 하다. 사람이 보기에도 성령님께서 보시기에도 시몬은 의롭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면 의롭다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의로운'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롭다고 말한다.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예수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십자가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자. 하나님과 벽을 만들지 말자. 이런 시므온에 대해 누가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경건한 사람이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여기 경건하다는 말은 독실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독실하자. 두려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자. 시므온은 하나님에 대해 독실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다’, ‘하나님을 심각하게 생각하다는 단어의 어근에서 온 말이다. 히브리서 3:1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다. 텔레비전에 몰두하는 것 반 정도만 예수님께 몰두해보자. 시므온은 은혜에서 떠난 사회에서 살았다. 부패한 사회에서 살았다.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사회에서 살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사회에서 살았다. 그런데 시므온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식적인 예배 사회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렸다. 어떻게 시므온은 그 진흙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었을까? 참으로 놀랍다. 

제가 청년 때 천안 삼거리 공원 연못에 연꽃이 폈다. 여름에 아산의 신정호에 가면 연꽃이 핀다. 연꽃은 흐르는 물에서는 피지 않는다. 고인 물에 핀다. 진흙탕에 핀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썩은 진흙탕에서 피는 꽃이 연꽃이다. 그러면서 진흙탕에 오염되지 않는다. 진흙탕에서 더럽혀지지 않는다. 진흙탕 속에서 아주 순백색의 꽃이 핀다. 아주 짙은 붉은 색의 꽃이 핀다. 연분홍 꽃이 핀다. 자주색의 꽃이 핀다. 연꽃에 관련된 4자 성어가 많이 있다. 그 중에 이제염오(離諸染汚)라는 말이 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아름답게 꽃피우는 사람을 의미한다. 불여악구(不與惡俱)라는 말도 있다. 연꽃잎 위에는 한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이 연잎에 닿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진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엔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악과 거리가 먼 사람, 악이 있는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또 본체청청(本體淸淨)이라는 말이 있다. 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잎을 유지한다. 바닥에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입은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시므온은 연꽃과 같은 사람이었다. 진흙탕 사회에서 살았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살았다. 진흙탕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살았다. 시므온은 불의, 불법, 사기, 뇌물 등 온갖 죄악의 진흙탕 속에서도 죄의 오염을 받지 않았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과 어딜 갔다. 그런데 근처에 있는 사람이 핸드폰으로 찬송을 듣고 있었다. 저는 반가워서 저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인가 보다고 했다. 그랬더니 같이 간 사람이 충격적인 말을 했다. “나는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믿지 않는 사람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은 세상이 됐다. 목사나 안 믿는 사람이나 성도나 세상 사람이나 구분이 안 되는 세상이 됐다. 세상이 진흙탕이 됐다. 이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자. 

셋째,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라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때이었다. 구약 말라기에서 신약 마태복음까지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영감 받은 선지자가 없었다. 선지자가 없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400년 동안 침묵하셨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암흑기이었다. 사무엘상 3:1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했습니다. 희귀하기는 했지만 없지는 않았다. 신구약 사이를 중간기라고 한다. 중간기에는 희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 지도자들의 부패로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든 때이었다. 예수님이 52어로 5천명을 먹이시자 이를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빵을 주니까 왕을 만들자고 했다. 예수님만 왕이 되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았다.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백성들은 곳곳에서 당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너무나 혼란한 시대이었다. 사람들의 가슴에 한이 맺혀 있다. 가슴에 응어리 진 것이 많았다. 얼마나 지독하게 악한 시대가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전통 술은 막걸리이다. 막걸리는 발효된 술이다. 맛이 순한 술이다. 한여름에 들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이 땀을 식히기 위해 두어 잔씩 마시던 술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소주가 유행했다. 소주는 독한 술이다. 알콜 도수가 20도 전후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독한 술이 있다 고급 위스키이다. 위스키는 알콜 도수가 43도이다. 고급 위스키는 17년 이상된 술이다. 아주 독한 술이다. 영국 국제 주류시장 연구소가 고급 위스키 판매 현황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11년 동안 우리나라가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인구 5천만이다. 미국은 3억이다. 중국은 14억이다. 그런데 고급위스키를 가장 많이 소비했다. 주류 업계는 이 현상을 원샷 문화와 폭탄주 문화 때문으로 풀이한다. 왜 이렇게 독한 술이 많이 팔릴까? 응어리 진 것이 많다. 가슴에 맺힌 것이 많다. 사람들이 독해졌다. 독한 것은 독한 것으로 풀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독한 술로 자신을 푼다. 더 독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하지만 독한 술이 우리 마음을 풀어주지는 못한다. 독한 술이 응어리진 우리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한다. 

22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선거가 왜 이리 많은지. 선거철만 되면 저마다 자신만이 백성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시장을 돌면서 사람들의 손을 잡아 준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안아준다. 하지만 모두 정치인들의 제스쳐에 속고 있다.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시장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표 때문에 우리를 아주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민을 위로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막걸리도 소주도 고급 위스키도 그리고 어떤 정치인도 우리의 위로자는 아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다. 세상에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400년 동안의 침묵, 그러나 시므온은 소망 없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다.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다. 은혜를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그 기다림 때문에 시므온은 죽지도 못했다. 29절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는 고백은 시므온이 얼마나 오래 동안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는지 알 수 있다. 결코 하나님을 포기하지 말자. 결코 은혜를 포기하지 말자. 믿음을 포기하지 말자. 끝까지 기다리자.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에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다. “아버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딸의 요청에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 희망이라고 지었다. “너는 희망이야. 감옥에 있는 동안 희망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예수님의 이름이 hope 아닌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결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소망이다. 소망이라는 말은 없지만 우리에게 계속 하시는 말씀은 소망이다. 가슴에 품은 희망이 부서지고 깨져 절망하고 있는 분이 있는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 온 시므온을 통해서 이 소망(희망)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하기를 소원한다. 예수님을 가슴에 품는 그날이 올 까지 결코 기다리자. 소망을 포기하지 말자. 

넷째, 성령이 위에 계시더라고 했다. 성령이 시몬의 발밑에 있지 않았다. 성령이 시몬 위에 계셨다. “성령이 위에 계시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시므온은 성령의 임도하심을 따라 살았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유익대로, 내 정욕대로 산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았다. 성령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의로우면 사실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살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세상은 불의하다. 시므온이 사는 세상은 더욱 불의했다. 공의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이었다. 그런 시대에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도 경험하지만 정말 힘들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한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적당하게 거짓말하고 적당하게 죄를 지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았다. 그에게 성령의 지시가 있었다.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지시이다. 

어느 날 시므온은 성전에 올라가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성전에 올라가다가 아기를 안고 성전에 올라가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행색을 보아하니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기 위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마음을 성령께서 감동하셨다. 시므온은 아기 부모에게 요청을 했다. '실례하지만 아기를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아이를 안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셨다. 그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다. 29-32절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시므온은 갓난아기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이루어놓으신 구원 사역을 모두 알고 있다. 역사를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믿기가 너무나 쉽다. 하지만 시므온은 그렇지 않다. 시므온은 이제 난지 8일 밖에 안 된 아기에게 경배를 드렸다. 왕도 아니다. 아직 어떤 설교를 하신 적도 없다. 어떤 기적을 일으키신 적도 없다. 얼굴에서 빛이 난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을 때처럼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도 아니다. 흠모할만한 아무것도 없다. 아기의 부모는 행색이 초라하기까지 했다. 성령의 감동 외에는 어떤 외적인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자. 아기 예수님을 우리 품에 안을 때까지 시므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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