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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아프리카 잠비아에 아주 악명 높은 중범죄 교도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최고 악질 죄수들만 수감되어 있고, 감옥은 온통 굵은 철망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교도소 안에 있는 사방 5미터 크기의 작은 운동장에서는 죄수들이 나와 하루 1시간만 몸을 풀 수 있습니다. 이 교도소에는 변기가 없어 식기로 죄수들의 소변과 대변을 받아냈습니다. 식기에 변을 받아내고, 씻어서 다시 밥을 먹는 거예요. 아--. 구역질나는 냄새와 아프리카의 뜨거운 열기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인간 지옥입니다. 이 지옥 같은 곳에 어떤 무명의 전도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 후에 수용자 120명 중에 80여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중 35명은 사형수입니다. 복음이 악질 사형수들을 무수히 변화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교도소 선교사로 유명한 미국의 찰스 콜슨 박사가 특별 면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찰스 콜슨은 미국 37대 대통령 닉슨의 특별보좌관으로 워터게이트 사건(1972~1974)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교도소 선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교도소 안으로 들어서자 80여명이 일제히 일어서서 4부로 찬양을 불렀습니다. 지옥 같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을 듣고 그는 꿈꾸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죄수들을 바라보는데 그들이 서 있는 뒷벽에 어떤 그림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교도소 벽에 숯검정으로 정교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콜슨 박사는 그들과 함께 서계신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도 찬양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희망과 기쁨과 능력입니다.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광야 보다 더 혹독한 이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붙잡을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붙잡을 것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다 허상입니다. 다 가짜입니다. 다 사라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여러분! 예수님만이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1. 벧엘의 꿈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탈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화가 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집 안에서 칼부림이 나 두 아들 중에 하나를 잃을 것 같았습니다. 이삭, 리브가 부부는 야곱을 하란에 있는 외가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같이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27:42~45에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혈혈단신 하란으로 떠납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800km입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을 때입니다. 하루에 30km씩 쉬지 않고 걷는다면 27일 걸리는 거리입니다. 치안이 좋지 않는 때입니다. 산적이나 들짐승이 출몰하는 때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길입니다. 말할 상대도 없습니다. 이삭은 적어도 2000명 이상의 종을 거느린 엄청난 거부입니다. 그런데 아들 야곱에게 단 한 명의 종도 딸려 보내지 않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집에서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야곱의 나이가 77세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얼마나 처량하고 쓸쓸했을까요? 삼일 정도 걸었을 때입니다. 루스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해가 졌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루스까지는 80km입니다. 추위가 엄습해오고, 사방에서 들짐승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디서 뭐가 나올지 모릅니다. 야곱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루스 들판의 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돌을 베게하고 누었습니다. 처량하지 않았을까요? 하나 뿐인 형에게 내가 몹쓸 짓을 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지난 일들이 후회스럽지 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자기가 누운 루스 들판에 사닥다리가 서 있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이 사닥다리가 뭘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이 사닥다리를 기도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기도가 올라갈 때 은총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기도 사닥다리가 필요합니다. 매우 은혜로운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닥다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술람입니다. 술람이란 말은 성경에서 여기 딱 한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술람은 계단, 사다리라는 뜻입니다. 지금 야곱이 누워서 자고 있는 루스 들판에 천국의 계단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허허벌판 아무도 없는 곳 인줄 알았는데 거기에 천국과 연결된 사닥다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세상과 천국을 잇는 계단, 사닥다리는 예수님의 뿐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계단이시며, 오직 하나뿐인 사닥다리입니다. 술람은 샬롬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말입니다. 술람과 살롬은 다른 뜻이지만 문자적으로 매우 비슷한 느낌을 갖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살롬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샬롬이 있습니다. 야곱은 루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불안하고 두렵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십자가가 천국의 계단입니다.
루스라는 말의 뜻은 편도나무입니다. 루스 지역에 편도나무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도나무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하게는 아몬드 나무입니다. 아몬드와 살구 씨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루스는 편도나무가 많은 평범한 지역입니다. 또 루스는 ‘길을 잘못 들다, 이탈하다, 기울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루스를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루스가 하나님의 집이 됐습니다. 야곱은 정처 없이 떠났습니다. 죽이려고 하는 형을 피해 집에서 급하게 도망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루스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어떤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신비, 은혜의 비밀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길을 잃어도, 길을 잘못 들어도 하나님의 집에 이릅니다. 실수해도, 넘어져도, 악인이 수렁에 빠뜨려도, 악인의 올무에 걸려도 결국에는 승리합니다. 은혜가 있으면 루스가 변하여 벧엘이 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벧엘은 예루살렘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곳입니다. 은혜가 평범한 편도나무 숲을 기념될만한 축복의 땅으로 바꾼 것입니다. 루스와 같았던 야곱의 인생이 벧엘이 됐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없으면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헤매며 사망으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천국 사닥다리 되신 예수님께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이 야곱처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루스가 벧엘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는 벧엘이 우상의 집으로 불린 적이 있습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갈 때가 BC 1929년경입니다. 약 1200년이 지난 BC 8세기 중엽 호세아 선지자는 이 벧엘을 벧아웬으로 부릅니다. 호세아 4:15에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벧아웬은 우상의 집, 허무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왜 호세아는 벧엘, 하나님의 집을 우상의 집이라고 했을까요?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섬기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벧엘에서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이 된 것입니다. 벧엘이 다시 루스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었던 곳이 다시 방황의 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에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루스가 벧엘이 되는 경험을 하셨습니까? 그런데 다시 벧엘이 루스가 된 것은 아닙니까? 빌레몬서 1:24에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데마를 나의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데마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와 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초대 선교역사에 바울과 함께 했던 선교사입니다. 벧엘 인생 중에 벧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10에서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데마가 은혜의 길에 있다가 세상길로 가버렸습니다. 벧엘 인생이 루스 인생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벧엘이 루스가 된 경우가 없습니까? 그냥 벧엘로 쭉 사십시오. 다시 루스가 되지 마십시오. 로마서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돈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이르는데 믿음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면 계속 믿음으로만 사십시오. 믿음으로 살다가 불신앙으로 살지지 마십시오. 믿음에서 더 큰 믿음에 이르십시오. 요한복음 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시작한 사람은 계속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시작했다가 세상으로 사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은혜에서 저주로 가는 교인이 있습니다. 은혜에서 더 큰 은혜에 이르십시오. 벧엘이었다가 루스가 되지 마십시오. 계속 벧엘로만 사십시오.
2. 벧엘의 예배
야곱이 자다가 한 밤 중에 일어났습니다. 16절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과연은 ‘진실로, 참으로, 분명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여기에 자신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모태에서 형과 씨름할 때부터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77년 만에 하나님을 처음 느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며 살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까요? 늘 함께 하시는데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입니다. 18절에는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16절에 일어났다는 말은 한 밤 중에 깼다는 뜻입니다. 왜 야곱은 한 밤 중에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 야곱의 심령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라고 했습니다. 잠이 깨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카츠입니다. 야카츠는 ‘일어나다, 눈을 뜨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다, 각성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상기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꿈을 꾸고 눈을 떴습니다. 야곱은 꿈을 꾸고 각성했습니다. 야곱은 꿈을 꾸고 자신을 깨워 일으켰습니다.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새롭게 살자. 내 이전의 삶을 벗어버리자.” 말씀이 우리의 꿈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각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는데,” 이런 영적 부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 에서가 쫓아올까봐서 야곱은 80km를 형 정신없이 걸어왔습니다. 피곤해서 골아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피곤한 몸을 깨워 일으킨 것입니다. 왜 그 밤에 야곱은 자신을 깨웠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경외심 때문입니다. 17절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더 이상 그 자리에 누어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한 밤중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하고 루스를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벧엘 광야에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 하늘의 문이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 하늘의 문이 닫히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곳이 – 가정, 직장 - 지옥의 문이 열리는 곳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옥문을 열지 마십시오. 하늘의 문이 열리는 삶을 사십시오.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을 한 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때까지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 품안에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귀로 들어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한 번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인생의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깊은 영적 잠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잠에서 일어날 것을 요청합니다. 로마서 13:11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마가복음 13:33~37에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자다가 깰 때입니다. 세상 잠에서 일어나십시오.
야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18절에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라고 했습니다. 돌을 세웠다는 말은 예배를 위한 제단을 쌓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것은 예배입니다. 이제까지 야곱은 한 번도 주도적으로 예배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했고,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는 아버지 이삭이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에 항상 수동적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제 스스로 예배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돌을 세운 것입니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예배입니다. 야곱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루스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소나 양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참석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가대나 헌금위원, 대표 기도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허허 벌판에 돌멩이 하나뿐입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곳에서 예배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이 예배하려고 일어났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정말 초라하고 볼품없는 예배입니다. 2014년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들어오더니 예배는 드리지 않고 계속 앞뒤, 전후좌우, 위를 계속 훑어보는 거예요. ‘왜 그런가? 무엇을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대표기도 끝나고 나니까 없어졌어요. 그리고 앞에 큰 교회로 간 거예요. 우리 교회가 너무 초라했던 거예요. 요즘 큰 교회, 아름다운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교회에 비해 우리 교회는 너무 초라하죠.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야곱의 예배가 얼마나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우리에게 모델이 되는 예배입니다.
야곱은 돌멩이에 기름을 붓습니다. 야곱이 돌멩이에 기름을 붓는 행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별입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보통 구별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기름을 부어 하나님 앞에 쌓은 제단을 구별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마음과 몸에 기름을 부어 구별한 예배입니까? 아니면 대충 드리는 예배입니까? 이슬람에는 우두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두는 손 - 팔 – 입 속 – 얼굴 – 머리 – 목 – 발 순서로 닦는 것입니다. 이슬람은 예배 전에 우두를 해야 합니다. 우두를 하지 않고 드린 예배는 무효입니다. 그렇다고 예배 전에 이슬람교도들처럼 몸을 깨끗하게 씻자는 말이 아닙니다. 몸을 씻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구별된 예배를 드리자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당시는 화폐가 없었습니다. 물물 교환하던 시대입니다. 기름이 돈입니다. 형을 피해 도망치는 상황에서 적어도 한 달 이상의 여행을 위해 챙긴 것이 기름입니다. 이 기름으로 양식을 구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야 합니다. 또 기름은 약으로 사용됐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름은 여행자에게 생명과 같이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기름을 돌 위에 쏟아 부어버립니다. 이제까지 야곱은 기름을 위해, 기름을 붙잡고, 더 많은 기름을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을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고 있습니다. 야곱이 돌에 기름을 부은 것은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목숨을 건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에 목숨을 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목숨이 어려우면 뭔가를 예배에 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너무 값싸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예배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제 야곱이 가진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가장 귀한 것을 소유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기름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교회를 두 번 못갔습니다. 한 번은 주일 아침 11시에 군장 검사를 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행군이 있었습니다. 행군을 하면 전날 군장 검사를 했습니다. 월요일 행군이니까 주일날 아침에 군장 검사를 한 거예요. 왜 하필 11시입니까? 제가 교회를 갔겠어요? 군장 검사를 갔겠어요? 다른 사람들 다 군장 검사를 갔는데 저는 교회를 갔습니다. 부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한 사람이 없어졌잖아요. 교회 갔더니 군종이 기다리고 있어요. 교회가 부대 밖에 있었거든요. 부대에서 교회로 연락이 온 거예요. 돌아가라는 거예요.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는 거예요.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군종한테 쫓겨났어요. 물론 저녁 예배는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맞으면서 끌려가더라도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목숨 걸고 예배드렸어야 하는데... 뭐가 무서워서 그때 예배도 안 드리고 돌아갔지!’ 이런 후회가 있습니다. 지금 이슬람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총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런 교인들 때문에 소말리아, 아프카니스탄 같은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번은 하계종합훈련을 위해 토요일에 행군을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밤새도록 걸어서 다음 날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2시간 정도 남겨놓고 다리를 뼜습니다. 자존심에 절뚝거리며 산길을 갔습니다. 도착해서 전투화를 벗어보니 발목과 발이 퉁퉁 부어있습니다. 도착한 곳은 세 개의 도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강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앞에는 강, 뒤에는 산입니다. 강변에 천막을 쳤습니다. 아침을 먹고 예배 시간이 돼서 지휘 본부로 가서 종교행사 없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이상하게 보는 거예요. 밤새도록 행군하고 왔는데 자야지 무슨 예배냐는 거예요. 저를 광신자처럼 취급하는 거예요. 잘 대구도 안 해줘요. 산골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교회가 없어요. 아무도 예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일인데 아무도 주를 찾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막사로 돌아와서 혼자 주여! 주여! 하다가 잠든 적이 있습니다. 지금 와서 가끔 후회하는 것은 혼자서라도 숲 속에 들어가서 예배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왜 나는 예배하지 못했을까? 아무도 주님을 찾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왜 주님을 찾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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