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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느 젊은 부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예상치 못한 큰 폭풍을 만납니다. 배가 파도에 부딪쳐 요동치며 크게 흔들렸습니다. 놀란 부인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고, 부들부들 떨면서 안절부절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데 당신은 그렇게 여유로워요? 무섭지 않으세요?” 남편은 난데없이 옆에 있는 칼을 집어 들더니 아내의 가슴을 향해 겨누고 물었습니다. “무섭소?” 부인은 “아니요. 아니 당신은 이런 상황에 장난이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남편이 다시, “내가 한 번만 휘둘러도 당신은 다치거나 죽을 텐데 그래도 안 무섭소?”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여전히 “안 무서워요”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왜 무섭냐는 식의 표정이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한 번만 휘둘러도 내 목숨을 앗아갈 만 해요. 만일 이 칼이 강도의 손에 있다면 당연히 무서워하겠죠. 그러나 지금 이 칼은 사랑하는 사람 손에 있어요. 나는 당신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아요. 그래서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맞아요. 당신이 방금 내게 이 풍랑이 왜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죠? 대답해 줄게요. 나는 이 풍랑이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 손 안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어요.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내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조금도 안 무서워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굳게 믿는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어떤 역경이나 고통이 나의 삶을 흔든다 해도 두렵지 않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1. 9와 10 사이
1절에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나신 것이 일곱 번입니다. 물론 삶의 여러 가지 일들에 간섭하신 것까지 따지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실 때마다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건 직후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창11:32~12:1).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안 좋은 일로 갈라섰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셨습니다(창13장). 가나안 북방 연합군이 남방을 짓밟고 롯을 포로로 끌고 갈 때 아브라함이 쫓아가서 조카 롯을 구하고 집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창14-15장). 항상 사건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사건도 없는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건도 없는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여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기자가 아브람의 나이가 99세이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합니다. 왜 ‘아브람이 99세’이었다는 말을 하나님이 나타셨다는 말 앞에 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제외하고 여러 번의 ‘아홉수’를 살게 됩니다. 우리가 아브람처럼 99세까지 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뒷자리가 9가 되는 나이는 여러 번입니다. 29살이 있습니다. 39살, 49살이 있습니다. 그리고 59살, 69살, 79살, 89살이 있습니다. 아홉수, 즉 나이의 끝수가 아홉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아홉수가 넘어갈 때 사람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아, 이제 50이구나!’, ‘아, 이제 60이구나!’, ‘아, 내가 70이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그 동안 내가 잘 살아왔나!’ 회한이 있습니다. 씁쓸한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잘 살아야 할 텐데...’ 이것이 나이의 끝수가 아홉일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종종 9라는 숫자를 삶의 어떤 고비, 결정적인 순간과 연결해서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3:1에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 이름으로 고치는 순간이 유대인 시간으로 9시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그 때가 9시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서게 되는 순간이 9시이었습니다. 고넬료라는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0:1~4에 있는 말씀입니다. 1~3절에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라고 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간이 9시이었습니다. 성경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시간이 제 9시이었습니다. “꽉 찼다.” 이런 의미입니다.
레위기를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레위기 25:22에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에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째 해부터 여섯째 해까지 열심히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해에는 안식년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식년이 일곱 번이면 49년이 되는데 50년째는 희년으로 또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2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먹고 살아요?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희년을 앞둔 여섯째 해에는 땅에서 3년 동안 먹을 것이 나오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일곱 번 째 안식년은 49년, 그리고 50년째는 희년입니다. 희년이 지난 다음에 땅의 소출을 다시 먹게 되는 해가 아홉 째 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6시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시간은 9시입니다. 마태복음 27:45-46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 모든 구속 사역이 다 이루어지는 순간이 9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생을 9시에 마치셨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9시에 기도하면 응답이 잘된다. 9시는 기도 응답의 시간이다. 9시에 기도하면 병을 고침 받는다. 9시에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9시에 기도하라.’ 이런 말이 아닙니다.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이 숫자를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홉’은 단지 아홉을 가리키는 숫자가 아닙니다. 10이라는 만수를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고비를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누구나 이 아홉이라는 삶의 고비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넘어가시길 소원합니다. 어떤 때는 숨이 막힙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그래서 이 아홉수에서 포기합니다. ‘도저히 못가겠다.’고 9 앞에서 포기합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는 이 ‘아홉수’를 불길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홉수에 실패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아홉수는 복된 수입니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 조금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왜 꼬리가 아홉 개일까요? 중국, 한국, 일본에는 구미호라는 여우 설화가 있습니다. 구미호는 꼬리가 9개, 나이는 999살입니다. 조금만 더 살면 인간이 됩니다. 베트남에는 구미호가 건군신화에 등장합니다. 아홉이라는 것은 바로 삶의 마지막 고비를 의미합니다. 이 고비를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인생을 때로 지난 삶을 반성합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지난 날을 반성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그 때 조금만 더 참을 걸’, ‘그때 그거 하나만 참았으면 되는데’, ‘그것만 참으면 됐는데’, ‘왜 못 참았을까?’ 여러분! 왜 그것만 참으면 될까요? 9라는 수가 넘어가면 10이라는 만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69세도 아닙니다. 79세도 아닙니다. 99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80대 노인이 180만 명입니다. 그러면 90대는 얼마나 될까요? 26만 명입니다. 갑자기 1/7로 확 줍니다. 그러면 100세 넘는 노인은 얼마나 될까요? 작년 12월 통계에 의하면 8859명입니다. 만 명이 안 됩니다(2021년 12월에는 7961명). 1/29로 확 줄어버립니다. 아홉 수를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시겠죠? 아브라함이 99세라는 말은 삶의 고비 중에 고비, 고비의 끝에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꽉 찼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잘 살고 있는데 왜 고비입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고비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24년입니다. 아들이 없자 첩을 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13살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의 아들에 꽂혀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얼마나 꽂혀 있었는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17:18에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라가 아들을 낳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비약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이 아들이면 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꿈을 접어버렸습니다.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접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접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포기해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조금만 더 내게로 오라는 거예요. 한 발자국만 앞으로 더 나아가라는 거예요. 이제 이 고비만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99세를 맞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에요. 아홉의 아홉 수, 99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요청이에요.
실연을 당한 총각 비둘기가 우울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얘, 눈송이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비둘기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별거 아닐 거야.” 참새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데 눈이 오기 시작했어. 사뿐사뿐 작은 가지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그 눈송이들을 세기 시작했지. 정확하게 374만 1,952개의 송이가 내려앉을 때까지는 가지가 밑으로 휘어졌을 뿐 별일이 없었어. 그런데 다음 눈송이가 내려앉자 가지가 부러졌어.” 이 말을 들은 총각 비둘기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무(無)에 가까운 눈송이의 무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하나의 가치, 그러나 그 하나가 나뭇가지를 꺾었습니다. 총각비둘기는 다시 용기를 내어 처녀 비둘기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절해 온 처녀 비둘기가 기쁘게 허락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끝까지 가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물은 100도가 되지 않으면 결코 끓지 않습니다. 90도가 되면 조금 끓고, 95도가 되면 좀 더 끓다가, 100도가 되면 완전히 끓는 게 아닙니다. 물은 반드시 100도가 되어야만 끓습니다. 물은 더블 아홉수인 99를 넘어야 끓어오릅니다. 20도와 99도는 분명하게 차이가 나지만 물이 끓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그런데 1의 차이가 물을 바꾸어놓습니다. 증기기관차는 수증기로 움직이는 차입니다. 그런데 수중기의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켜야 움직입니다. 수증기의 게이지가 200도가 되면 조금씩 움직이다가 212도가 되면 완전히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증기기관차는 211도가 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212도가 되어야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차가 움직일 때까지 불을 땝니다. 1도 차이로 끓느냐 끓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1도 차이로 기관차가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99도, 211도에서는 절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작 1도 차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1도만 더 앞으로 나아갑시다.
2. 엘 샤다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라는 말입니다.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샤다이’는 ‘전능한’입니다. 그래서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샤다이라는 말에서 샤드는 ‘가슴’이라는 뜻이고, ‘아이’는 ‘나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ai’ 또는 ‘i’는 ‘나의’라는 뜻입니다. ‘샤다이’는 ‘나의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엘 샤다이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란 뜻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은 나의 가슴’, 또는 ‘하나님은 나의 심장’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의 심장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심장처럼 쿵쿵 뛰면서 내 안에 계시다면 무슨 염려,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라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연결되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젖먹이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아이가 끊임없이 울 때 그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가슴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가슴만이 아기에게 생명력을 계속해서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젖먹이 어린 아기에게 어머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어머니의 가슴을 가나안 땅과 같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어머니의 가슴에도 젖과 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흐르는 젖과 꿀을 먹고 자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마의 젖가슴 같이 포근한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매우 강력한 남성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부드러운 어머니의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어머니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32:11에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새끼를 등에 업은 어미 독수리에 비유하셨습니다. 이사야 42:14에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이 차서 헐떡이며 해산하는 여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사49:15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어머니”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엘로힘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어 명사는 여성, 남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엘”이 여성명사입니다. 그런데 엘로힘은 남성 복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 같은 마음을 가지시고 계십니다. 요즘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단이 있어서 조심스럽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어머니처럼 포근합니다.
동화작가이면서 시인인 정채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문학상(1983), 한국잡지언론상(1984), 새싹문학상(1986)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문학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정채봉 씨가 글을 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정채봉 씨의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도 못합니다. 시인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정채봉 씨는 성장하면서 외로움을 글쓰기로 달랬다고 합니다. 이분이 쓴 시 중에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시인은 엄마의 얼굴을 모릅니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엄마가 하늘에서 휴가를 나올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계시는 엄마가 /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 반 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 단 5분 /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품속에 들어가 / 엄마와 눈맞춤하고 /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 숨겨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 엉엉 울겠다
아브라함은 99세에 꿈을 접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도 접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라의 좌절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그들 곁에 따뜻하게 다가와 그들을 위기에서 건져내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엘 샤다이, 어머니 같은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해 있는 위기가 무엇입니까? 가정의 위기입니까? 직장의 위기입니까? 관계의 위기입니까? 자녀의 위기입니까? 경제적인 위기입니까? 당신의 위기를 아무도 몰라준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며 아브람의 나이 99세- 모든 꿈을 버려야 했던 절망의 끝에서 찾아오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 나의 가슴이신 하나님, 지금도 쿵쾅쿵쾅 뛰고 있는 나의 심장과 같으신 하나님, 그 따뜻하신 능력의 하나님의 품을 의지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엘 샤다이를 만나십시오.
3. 신자가 되라
1절 끝부분에 “…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내 앞에서’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내 얼굴 앞에서’입니다. ‘행하여’라는 말은 ‘걸어가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행하여’라는 말은 ‘내 얼굴 앞에서 네가 스스로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얼굴 앞에서 행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올 때만 신앙생활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명성훈 박사는 행복한 교회생활의 성장을 위한 십계명에서 “교회 밖에서 더 열심히 믿으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멘 할렐루야 하지 말고 교회 밖의 모든 생활 터전에서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아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이 되라고 합니다. 여러분! 목사 앞에서 믿음 좋은 사람인양 가면을 쓰지 마십시오. 교우 앞에서만 온유하고 겸손한 척 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진실합시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 동료 직원 앞에서 더 잘 믿는 신자가 되십시오.
아브람이란 말은 본래 “높으신 아버지,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새 이름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들(무리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가족, 부족 심지어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많은 열방에 영향을 끼치는 자로 쓰시겠다는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의 본래 이름 -“높으신 아버지” 혹은 “존경받는 아버지”의 뜻도 아주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경 받을 만한 인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상으로 더 중요한 가치는 거룩한 영향력을 확산하는 것입니다. 17:15–16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게도 새 이름을 주십니다. 사래에서 사라가 되게 하십니다. ‘사래’는 ‘공주’라는 뜻이고 ‘사라’는 많은 민족들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요즘 남자들은 왕자병에 여자들은 공주병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딸들의 가장 고귀한 가치는 공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법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의 조건 중에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흠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흠이 있는 것으로 드리면 안 됩니다. ‘제물이 흠이 없다’는 말과 본문 말씀의 ‘완전하다’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로 완전히 깨끗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삶으로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요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삶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도록 하여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라. 그리고 바른 길만 걷도록 하여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전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새벽기도가 끝난 후에 앉아서 조용히 묵상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이 음성을 하나 주셔요. “목사가 되라” 집에 가서 아침 먹기 전에 아내에게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뭐냐?”고 했습니다. “오늘 새벽에 하나님이 나에게 ‘목사가 되라’는 감동을 주셨다”고 했더니 대뜸 “당신 이미 목사잖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예, 맞습니다. 저는 이미 목사입니다. 당시 목사 안수 받은 지 14년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마음에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무렵 제가 만난 목사님이 한분 계셨어요. 류심언 목사님입니다. 류 목사님이 제가 다니던 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오셨어요. 아이보리색 양복에 하얀색 백구두를 신고 오셨어요. 1년 후배 중에 조○○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지금 몽골 선교사입니다. 그 친구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류심언 목사님을 길에서 만났는데 깡패인 줄 알았다는 거예요. 기도원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교회차를 타고 기도원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답니다. 기도원 입구에서 어떤 분이 기도원이 어디냐고 길을 묻더래요. 껌을 짝짝 씹으면서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깡패더래요. 그런데 예배 시간에 강단에 담임목사님하고 함께 올라와서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깡패가 회개하고 목사가 된 경우가 좀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면서 나는 목사가 되도 그냥 솔직한 한 인간적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들의 전형적인 스타일 있잖아요. 성격이 온유하십니다. 말씀 하실 때도 조용조용하십니다. 걸을 때도 천천히 점잖게 걷습니다. 반면에 저는 말이 빨라요. 천천히 걸으면 답답해요. 3보 이상은 뛰어야 해요. 성품이 온유하지 못해요. 성격이 다혈질이에요. 전혀 제 삶이 목회자와는 멀어요. 그래서 저는 목사가 되도 삶은 이 모습 이대로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어디 가서도 목사인척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사가 되라는 거예요. 그냥 신분만 목사가 아니라 삶 전체가 목사가 되라는 거예요. 여러분! 신자가 됩시다. 교회에서만 신자가 아니라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신자가 됩시다. 진실합니다.
데이비드 듀플레시스 박사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신앙이 ‘얼음 위의 진리’라면 성령충만한 신앙은 ‘불 위의 진리’라는 말을 했습니다. 얼음 위의 진리는 냉랭하고 딱딱하여 아무 냄새도, 아무 영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 위의 진리는 마치 불고기가 불에 구어지면서 좋은 냄새를 내듯이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천하에 퍼뜨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냉동 스테이크 같은 신앙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불같은 성령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향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을 요구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완전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참된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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