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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가 16강에서 붙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겼죠. 그런데 오심 논란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심판을 매수했다는 것입니다. 심판 매수의 근거는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한국이 압도적으로 파울을 많이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를 덜 받았다. 둘째, 전반 5분 페널티킥 선언은 심판의 의도적인 오심이다. 셋째, 연장전에서 토마시가 골을 넣었음에도 무효 처리되었다. 넷째, 토티의 퇴장은 심판의 의도적인 오심이다. 다섯 째, 모레노 심판은 마약 운송 등의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럼으로 월드컵에서도 매수를 받았을 것이다. 이탈리아 축구 응원단은 심판 판정에 강한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의 결과는 부조리한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이번 경기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허위입니다. 반칙, 한국 27개, 이탈리아 23개, 경고 한국 4개, 이탈리아 3개, 슛 한국 12 이탈리아 11, 유효슈팅 한국 8 이탈리아 5, 골 점유율 한국 56%, 이탈리아 44%입니다. 그런데 일부 광분한 팬들은 거친 시위와 난동을 일으켰고, 폭력사태라는 극단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한 사내가 집에서 총기를 가지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마침 집에 있던 아내가 막아섰습니다. “잠깐 여보 지금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이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어.” “난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제발 1분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깐 앉아서 내 말을 들어봐” 그는 아내의 호소에 들고 있었던 총을 내려놓았습니다. 이 사람이 흥분한 상태에서 총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일부 사람들은 불의한 세상을 한탄하며 인생을 비관해 총기난사를 하고, 묻지 마 폭행을 하고, 삶을 포기합니다. 불공평한 세상, 불의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스가랴 선지자는 밤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스가랴가 보았던 비전이 내 비전이 되고, 스가랴가 받았던 말씀이 내 말씀이 되어 불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1. 내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스가랴 선지자가 다리오 왕 2년(BC 520년) 11월 24일 밤에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필름이 영화처럼 스가랴 앞에서 돌아가는 거예요. 스가랴는 8개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영화는 어떤 느낌일까요? 한 번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스가랴가 환상을 보는 중에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신 분에게 묻습니다. “내 주여! 이들은 무엇입니까?” 9절에 “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서 있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습니다. 붉은 말, 자줏빛 말, 백마가 세상을 두루 다니며 살피고 있습니다. 스가랴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계신 분에게 “내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가랴는 누구냐고 묻지 않고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세 말이 하는 일이 무엇이지 물은 것입니다. 스가랴는 계시(환상)의 의미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주님께 여쭌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계시입니다. 성경 계시를 보시다가 궁금해서 주님께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계시에 대한 스가랴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AD 95년경,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하늘의 보좌가 보이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계신데 그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들려져 있습니다. 고대 로마 세계에서는 유언장에 일곱 인을 찍어 유언자가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죽은 이후에는 합법적 절차를 밟아 뜯어보게 했습니다. 유언장을 아무렇게나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유언장을 열지 못한다는 것은 유언자의 유언이 그대로 묻혀버린다는 뜻입니다.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는 성경(특히 계시록)입니다. 일곱 인을 떼지 못한다는 것은 성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억울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큰 소리로 엉엉 울었습니다. 계시록 5: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그때 장로 중에 하나가 요한에게 울지 말라며 인을 뗄 분이 계시다고 계시해줍니다.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러분! 성경에 관심이 있습니까? 성경 말씀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이 땅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렇지 않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 하나님의 뜻 등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복, 형통, 물질, 성공, 출세입니다. 성도가 잿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첫째가 주의 이름입니다. 둘째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셋째가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넷째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땅에서 성경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예레미야 36:36-37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필수조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속히 계시록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요한의 애통과 호소가 필요합니다.
어떤 젊은 여성이 책을 한 권 읽으려 했으나 너무 재미가 없고 딱딱해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한 청년을 만나 사랑을 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자신이 전에 읽으려다가 포기한 책의 저자였습니다. 그는 그 책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지루하고 딱딱하던 책이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여인은 책을 금방 독파했습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재미없던 책을 그토록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책이 재미있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면 성경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책이 됩니다. 성경말씀에 대한 관심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척도입니다. 성경에 대한 관심은 믿음의 척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이것이 언제 이루어지나요?”라고 묻는 관심과 소망이 필요합니다.
2.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합니다!
11절,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하더라” 땅을 두루 다니며 살피고 돌아온 천사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우리가 이 땅을 두루 다니면서 살펴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평안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솨브입니다. 야솨브는 ‘앉다, 눕다, 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평안하다는 말은 사람들이 앉아 있거나 누워있을 정도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해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사를 다닐 필요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조용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솨카트입니다. 솨카트는 평온, 평안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평안을 뜻하는 단어가 둘입니다. 하나는 샬롬이고, 다른 하나는 솨카트입니다. 샬롬이 완전한 회복과 치유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솨카트는 아무 문제가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 전쟁의 위협이 전혀 없는 편안한 상태입니다. 문자 그대로 평온함을 의미합니다. 페르시아는 칼과 창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피로 세운 나라입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들은 아주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 유다 백성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돈도 없고, 힘도 없어, 성전 건축을 하다가 16년 동안 중단했다가 이제 힘을 모아 겨우 다시 시작했습니다. 매우 불안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빼앗고, 피를 흘리고, 사람들을 죽인 나라들은 평온하고 조용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라는 말은 “세상이 불의하고 불공평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20대의 한 청년이 고등학교 여학생을 성폭행해 7년 동안 옥살이했습니다. 이 청년은 출소 후에 항소를 했고, 재판이 재개됐습니다. 그리고 48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는 70이 훨씬 넘어 있었습니다. 무죄를 선고받는 자리에서 그 노인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이 노인의 인생을 누가 물어줄 수 있습니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아빠 찬스, 엄마 찬스로 이마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는 사람에게 갑질을 당하며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교 폭력, 성폭력, 사기, 등의 가해자는 행복하게 잘 사는데 피해자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강박장애 등으로 숨어서 고통스럽게 삽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평등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때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불의와 불공평 앞에 쓴 웃음을 지어야 합니다. 2000년에 빌 게이츠는 캘리포니아 바실리아의 마운틴 휘트니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학생들에게 인생에 참고가 될 충고 열 가지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열 가지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특강에서 좋은 인용구가 되고 있습니다. 열 가지 중에 첫 번째가 “인생이란 원래 공평하지 못하다. 그런 현실에 대해 불평할 생각하지 말고 현실을 받아들여라.”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첫 번째로 꼽은 인생 충고가 불공평입니다. 이것은 그가 겪은 경험일 것입니다. 여러분! 회사, 식당, 마트, 제과점, 백화점 등 어딜 가든 갑질하지 마시고, 섬기며 사십시오. 사람들을 예수님 대하듯 하십시오. 불의한 세상에 불의함을 더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천사가 탄식하는 세상을 만들지 마십시오.
붉은 말, 자줏빛 말, 흰 말이 페르시아를 두루 다니며 살피고 돌아와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신 분에게 보고 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평화롭게 조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핏빛으로 물들인 나라는 평화로웠습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화석류나무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이 불의한 세상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선민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탄식합니다. 12절,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천사는 얼마든지 힘으로 원수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갚는다면 무력으로 피를 흘려 세상을 정복한 바벨론, 페르시아와 뭐가 다를 게 있습니까? 이것은 여호와의 천사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천사는 하나님 앞에 탄식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구하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방법입니다. 십자가가 방법입니다.
로마서 12:19~21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불씨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불씨가 종종 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옆집에서 불씨를 빌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오히려 원수에게 숯불을 제공함으로써 따뜻한 온기와 양식을 조리할 수 있는 자비를 베푼다”, “상대방은 그 숯불이 너무 소중하여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고 운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의 의미로 원수에게 매우 적극적인 호의를 베풀라는 뜻입니다. 악을 이기는 것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칼을 이기는 것은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방법은 기도, 십자가, 성경입니다.
3.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
여호와의 천사(개역성경은 사자)의 탄식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13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선한 말씀이라는 말을 NIV 성경은 “친절한 말씀”(kind words)이라고 했고, KJV는 “좋은 말씀”(good words)이라고 했으며, NASB는 “자비로운 말씀”(gracious word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분노의 말씀, 진노의 말씀, 고통의 말씀이 아니라 친절하고 선하고 은혜로우며 좋은 말씀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선한”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토브는 선한, 좋은, 기뻐하는, 아름다운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좋다는 말씀이 토브입니다. 이 토브는 가장 좋은 상황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 기쁨과 감격과 행복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토브라는 말이 행복이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신명기 10:13에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행복이라는 말이 토브입니다. 너무 좋다는 의미입니다. 또 토브가 복이란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시편 73:28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복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마태복음 5:3~12에 팔복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기 복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인데 이 말을 영어로 bless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blessing은 bleed, 피를 흘리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복을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상대를 축복할 때 갓 블레스 유(God bless you)라고 합니다. 로마서 4:7-8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참다운 복은 십자가입니다. 선한 말씀은 용서의 말씀, 친절하고 자비로운 말씀입니다. 선한 말씀은 행복한 말씀, 행복하게 하는 말씀, 기쁜 말씀, 기쁘게 하는 말씀입니다. 선한 말씀은 십자가의 말씀, 나를 구원한 말씀입니다.
위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니훔입니다. 니훔은 “안락, 위로, 위안, 연민, 자비”라는 뜻입니다. 니훔은 라함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라함은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측은히 여기다, 숨을 쉬다”라는 뜻입니다. 위로하는 말씀은 측은히 여기는 말씀, 우리를 숨 쉬게 하는 말씀입니다. 위로하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 우리를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사역을 하는 동안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가버나움이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에 가면 입구에 'CAPHARNAUM THE TOWN OF JESUS(예수님의 마을 가버나움/카파르나움)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3년 공생애 동안 선교 기지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위로의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이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불의한 세상을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 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 불의하고 패역하며 괴로운 세상을 바로 이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제가 5월 21일 주일 아침 7시 조금 넘어서 식은땀이 나도록 배가 아팠습니다. 5-6시간 정도 아팠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복강동맥박리가 의심되니까 당장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라는 거예요. 태어나서 복강동맥박리라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병원에서 나와서 복강동맥박리라는 말을 검색해 봤어요. 복강동맥은 대동맥 밑에 있는 것으로 길이가 1.25cm예요. 박리는 동맥의 내피가 찢어지는 거예요. 내피가 찢어지면 그 자리로 피가 밀고 나가 퉁퉁 붓다가 터지면 갑자기 죽는 거예요. 돌연사입니다. 아는 의사 집사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목사님, 그거 급한 거니까 빨리 병원으로 가세요.”라고 해요. 그러면서 2009년도 경북대학교 연구보고서를 보내주라고요. 그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까지 복강동맥박리라는 병이 세계적으로 25건 밖에 안돼요. 증상은 배가 아주 아프고, 식은땀이 나는 거예요. 2009년까지 치료방법이 없었어요.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접수를 받는 의사가 이걸 우리 병원에서 치료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요. CT를 찍었더니 복강동맥박리가 맞으니 당장 입원하래요. 새벽기도도 해야 하고, 주일 예배도 드려야 해서 퇴원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거 터지면 죽습니다. 급하고 위험한 겁니다.”라고 하면서 입원을 하래요. 저는 이미 연구 보고서를 읽고 왔잖아요. 병원에서 터져도 죽고, 밖에서 터져도 죽어요. 치료법도 없어요. 터지면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나가려고 하니까 죽어도 우리 병원 책임이 없다는 각서를 쓰고 나가래요. 그래서 각서를 쓰고 나왔어요. 그리고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고 사무실 청소를 하고, 짐도 정리했어요. 죽을 준비를 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아프기 전 후에 보여준 꿈과 감동들이 생각이 났어요. 그러면서 ‘아! 나 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가실 거였으면 이런 것을 안 보여줬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저는 꿈을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고등학교 때 너무 사모했던 창세기 28:15, 하나님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주신 말씀이 생각이 났어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때 이 말씀이 얼마나 좋았든지 이 말씀이 꿀보다 더 단 거예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말씀을 나에게 주셨다면 나는 죽지 않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꿈도, 마음의 감동도, 환상도 다 잘못될 수 있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은 잘못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래서 아내에게 그랬어요. “여보! 나 안 죽어! 울지 마. 하나님이 나 고등학교 때 창세기 28장 15절 말씀을 주셨어!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신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 나 안 죽어. 울지 마.” 그때 서울 S병원에 예약된 상태였습니다. 아내에게 “S병원 안 갈게. 가도 소용없어. 나 안 죽어.”라고 했어요. 그래도 병원은 가래요. 그래서 S병원엘 갔더니 “이 부분은 위험한 부분이라 수술을 안 합니다. CT를 보고 의료진과 토의를 할 겁니다. 수술 방법이 생기면 전화를 할 겁니다. 그때 올라오면 됩니다.”라고 해요.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여요. “그런데 전화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약도 없고, 치료법도 없어요. 저는 약도 없고 치료법도 없어서 너무 감사해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 수 있잖아요. 저는 죽어도 괜찮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왜요. 저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도 없고 치료법도 없지만 저에게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붙잡은 것은 딱 한 가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제가 죽으면 천국으로 인도할 거고, 죽지 않는다면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여러분! 이 세상은 불의하고 불공평하며 패역합니다. 아프고 괴롭고 억울하며 답답하고 씁쓸하고 찜찜하고 슬픈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불의한 세상을 무엇으로 살까요? 리웨이원의 「결국 이기는 사람들의 비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불공평한 세상에서 발견한 10가지 성공법칙>입니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 10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첫째, 피라미드 불변의 법칙, 세상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불공평한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2대8 법칙 : 인생의 은인이 될 20%에 집중하라. 세상을 지배하는 20프로와 관계를 맺으라는 거예요. 셋째, 임파워먼트(관리강화, 권한 위임) 법칙 : 혼자 영웅이 되려 하지 말고 함께 해내라. 독불장군,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는 거예요. 넷째, 눈덩이 효과 : 해야 할 일을 선별하지 않으면 불어난 일에 잡아먹힌다. 우선순위에 따라서 일을 하라는 거예요. 리웨이원은 불공정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저는 불공정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 위로의 말씀을 갖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5: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5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시자는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1:13) 또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 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합1:17)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성루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렸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1~3)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거짓되지 아니하고 때가 되면 반드시 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사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을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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