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내가 밤에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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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스가랴 1:7~13
주일오전예배 | 2023-09-1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이 세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유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가 이스라엘 땅에 풍부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각 사람이 자기의 "포도나무""무화과나무" 밑에서 쉬게 될 천년 왕국 시절을 나타내고 있다(미가4:3-4). 야곱은 죽기 직전에 그 아들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장래를 예언했다. 유다에 대하여 말하기를, 가나안에 유다가 차지하는 땅에서는 포도나무가 무성하여 나귀들을 포도나무에 매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고 했다(49:9~12).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한다. 중요 건물에 포도나무 그림을 새겼다.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한다. 올리브는 평화, 영광, 아름다움, 축복, 기쁨을 상징한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한다. 무화과는 종말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세 나무는 일반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상징이다. 특수한 상황 즉 고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나무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가시떨기 나무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상징했던 나무이다. 떨기나무는 고난의 불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또 다른 하나가 있다면 오늘 본문에 있는 화석류나무이다. 

BC 520년에 스가랴 선지자가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주님"의 환상을 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포로가 된 지 70여년이 지나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레스 왕의 특명으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런데 성전은 무너져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수들의 방해로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다.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은 힘도 약하고 재물도 없었다. 주변 민족들이 괴롭혔지만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백성은 실망하고 지쳤다. 그때 스가랴 선지자는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1.화석류나무  

환상 중에 보인 화석류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화석류 나무는 키가 0.5-1.5m 정도 되는 식물이다. 물론 환경이 좋은 곳에서는 7-10m까지도 자라기도 한다. 잎은 아주 짙은 녹색인데 그 모양이 요즘 집에서 많이 키우는 금전수와 비슷하다. 꽃은 6월경에 피는데 희고 아름답다. 모양은 배꽃과 비슷한데 크기는 더 크고 수십 개의 꽃 수술이 밖으로 길게 돌출되어 있다. 열매는 남빛이고 크기는 14-16mm 정도이다. 과일향이 좋아 날 것으로 먹기도 하고 말려서 먹기도 한다. 씨가 많아 예부터 풍성한 결실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나무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특히 베들레헴, 헤브론, 갈멜산, 다볼산에 많다. 

그런데 이 화석류나무는 1년 내내 푸르른 상록수이다. 모양은 전혀 다르지만 우리 나라 소나무처럼 늘 푸른 나무이다. 심훈의 상록수라는 소설이 있다. “상록수 - 항상 푸른 나무제목이 참 멋진 것 같다. 제목만으로도 왠지 모르는 감동이 잔잔하게 가슴에 밀려오는 책이다. 

가난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채영신과 박동혁이라는 두 청년이 교육에 뛰어든다.   채영신과 박동혁은 강연대회에서 만났다. 박동혁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멋드러지게 열강하는 채영신에게 한 눈에 반한다. 채영신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마치 꼿꼿한 소나무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는 박동혁에게 마음이 끌린다. 영신과 동혁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조그마한 소학교를 만든다. 허름하지만 책상도 있고 칠판도 있고 학생도 있는 나름대로 학교의 틀이 잡히게 된다. 그러나 일본 순사들이 조선인의 교육을 방해하던 상황이라 아이들에게 글 한자라도 가르치기가 버거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제 탄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교육열을 불태운다. 마치 상록수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주인공 채영신이 일본 순사에 억압당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해 아이들과 같이 서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그때 채영신이 이렇게 외친다. “배우고 싶은 자는 언제든지 오라” 일제의 갖은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아니 더 푸르게 변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상록수와 같다. 나무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읽는 내내 상록수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의 바람은 대한민국이 상록수 같은 민족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겨울에서 푸른 소나무처럼 늘 푸른 민족이 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화석류 나무가 일년 내내 푸르른 상록수이다. 화석류 나무는 꽃이 피는 봄에도 푸르다. 열매가 익어가는 여름에도 푸르다. 다른 나무들은 겨울 준비 때문에 잎이 갈색으로 변하는 가을에도 푸르다. 나뭇잎이 다 져 버린 한 겨울에도 화석류 나무는 눈 속에서 홀로 여전히 푸르다. 화석류 나무는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상징이다. 언제나 푸르른 상록수,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항상 푸른 나무가 되라. 고난으로 시들지 마라. 추위 때문에 죽지 마라. 상록수가 되라. 

이 나무의 특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향기이다. 화석류는 꽃이 피면 그 향기가 매우 향기롭다. 화석류 열매에서도 독특한 향이 난다. 나무 자체에도 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가시에 찔리거나 꺾어진 상처에서까지 향기가 난다. 꽃에, 나무에, 그리고 상처에서까지 향기가 난다. 이것이 화석류 나무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솔로몬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아가2:2)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노래도 있다.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성경에서 말하는 백합화는 수선화이다. 이 수선화는 홍해 연안에 흐드러지게 많이 피어 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이리 저리 흔들릴 때마다 향기가 더욱 멀리 날아간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향기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 꽃이 이리 저리 흔들릴 때 향기는 더욱 멀리 퍼진다. 그런데 향기가 더 많이 날릴 때가 있다. 바로 백합화가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려 가시에 찔릴 때이다. 바람과 가시는 백합화에게 아픔이지만 그 아픔이 꽃을 더욱 향기롭게 한다.  성도는 세상에서 연약한 백합화와 같다. 꺾으면 꺾일 수 밖에 없는 화석류 나무와 같다. 세상으로부터 쉽게 상처를 입는다. 때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자식에게서 상처를 입기도 한다. 너무나 믿고 신뢰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입는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심한 상처를 입는다. 어떤 경우에는 일어날 힘조차 전혀 없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큰 상처를 입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망하고 불평해야 하는가? 좌절하고 낙망해야 하는가? 실의에 빠져 있어야 하는가? 삶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술과 쾌락으로 마음을 달래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석류 나무처럼 그 상처를 통해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야 한다.  하나님은 모진 고난 속에서 밟히고 찢기고 꺾일수록 더 짚은 향기를 토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로 화석류 나무라고 하신다. 화석류나무 그리스도인, 상록수 그리스도인.  화석류 나무를 히브리어로 하다스라고 한다. 에스더서에 보면 에스더를 하닷사(2:7)라 불렀는데 이 하닷사라는 말이 화석류 나무를 가리키는 하다스에서 왔다. 에스더를 하닷사라는 부른 이유를 탈굼은 에스더가 바르고 정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에스더는 바벨론 포로의 후손이다. 에스도는 포로 생활 중에서도 하닷가였다. 고난 중에서 개, 돼지가 되지 마라.  

바울은 말한다. 디도서2:7-8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그리스도인은 정숙한 사람들이다. 성도는 바른 사람이다. 고난 중에 술이나 쾌락에 우리 몸을 내어 맞기면 안된다. 고난 중에도 화석류 나무처럼 단정한 사람이 되라. 여러분에게 고난 중에 상록수와 같은 자태가 있으시길, 고난 중에서 백합화 같은 향기가 있기.

 

2.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한 사람  

그러면 이 화석류 나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성경은 화석류 나무가 골짜기 속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탄 한 사람이 서 있다.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환상” 골짜기이란 말의 원뜻은 어두운 그늘혹은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란 말이다. 이 말을 70인경은 깊은 그늘진 산이라고 번역했다. 우리 삶의 그늘진 곳이 바로 골짜기이다. 그래서 이 골짜기에는 슬픔이 있다. 골짜기에는 아픔이 있다. 골짜기에는 고통이 있다. 이 골짜기에 우리가 홀로 있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그런데 그 골짜기 깊은 곳에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있다.  한 사람”(8), 그는 누구인가? 9절에서 스가랴는 그 사람을 내 주여!”라고 부른다. 11절과 12절에서는 한 사람여호와의 천사라고 불렀다. 개역 성경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했다  

이 여호와의 천사는 누구인가? 이 여호와의 천사는 광야에서 아들 이스마엘과 헤매는 하갈에게 나타나 샘물이 터지게 하셨다(16:16,17,10,11). 이 여호와의 천사가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무엇으로 예배를 해야 할지 말씀하셨다(22:11). 이 여호와의 천사가 광야 가시떨기 가운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사명을 주셨다. 이 여호와의 천사가 삼손의 부모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나 그들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13:15-20). 이 여호와의 천사는 누구인가?  바로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이시다.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셨다. 우리 주님은 신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12제자들과만 함께 했던 분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도 수없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셨다. 신약시대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그리고 현재에도 이 여호와의 천사를 만나야 문제가 해결되어진다. 여호와의 천사를 만나야 골짜기에서 샘물이 터진다. 

<시편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스가랴가 환상을 보고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주님께 여쭙는다. “내 주여 이들이 무엇입니까?”(9a)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9b) 지금 주님은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계시다. 이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다.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무엇인 내가 네게 보이리라주님께서 보여주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갈 길을 모른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갈 길을 알려 주신다. 이 여호와의 천사를 만나야 갈 길이 보인다. 길을 물으러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 여호와의 천사 앞으로 나오라  

이는 여호와께서 당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10)라고 했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천사는 우리에게 갈 길만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사정을 모두 알고 계신다. “두루 다니라고이 말은 어느 한 구석도 남김 없이 모두 살펴본다는 뜻이다. 아주 사소한 문제까지 알고 계신다. 작은 나의 삶도 살펴보신다. 창세기 1:3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고 또 이 땅위의 모든 사정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간들의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살피신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애정을 갖고 계신다. 문제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해결해주신다.

 

3.내가 밤에 보니  

그런데 스가랴가 그 이상을 밤에 보고 있다. 8, “내가 밤에 보니스가랴가 밤에 환상을 봤다. 하나님이 밤에 환상을 보여주셨다. 스가랴서에 내가 보다는 말이 총7번 나온다. 그런데 그 7번 중에 첫 번째인 18절에만 내가 밤에보았다고 했다. 나머지 6번은 스가랴가 환상을 언제 보았는지 시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물론 스가랴서의 8가지 환상을 하루 밤에 보았기 때문에 밤이라는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꼭 밤이라는 말을 첫 번째에만 쓸 필요도 없었다. 

구약의 스가랴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같은 묵시록이다. 묵시록에 동일하게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이 보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스가랴서 보다 내가 보다는 말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요한계시록에는 내가 보다는 표현이 최소한 40여번 이상 나온다. 그런데 40여번의 내가 보다라는 말 가운데 밤에 본다거나 혹은 낮에 본다는 말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사도 요한은 스가랴 보다 더 많은 환상을 계속해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 시간을 한 번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는 왜 환상을 밤에 보았음을 언급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음침한 골짜기와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밤과 같은 곳이다. 밤에 사람들은 죄를 범한다. 어떤 호텔리어가 그랬다. 호텔이 낮에는 각종 회의와 토론의 장인데 밤만 되면 쾌락의 장소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밤에 사람들은 술에 취한다. 밤에 사람들은 쾌락에 빠진다. 밤에 죄짓고, 밤에 타락하고, 밤에 못된 짓을 한다. 죄인들에게 밤이 죄악의 밤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밤은 그리스도인을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밤이다. 죄인들은 밤에 죄악 세상으로 나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간다. 죄인들은 밤에 쾌락의 장소로 나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장소로 나아가야 한다. 시편 134:1-2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학교 교정에 후박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면 꽃이 피는데 냄새가 매우 향기롭고 짙다. 그런데 이 향기가 밤이 되면 더욱 진해진다. 꽃은 밤이 되면 그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려면 밤에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상을 발견해야 한다. “내가 밤에 보니밤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상을 발견해야 한다. 밤에 죄악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을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바울은 말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13> 

우리는 지금 밤과 같은 세상을 지나고 있다. 고난의 밤을 지가고 있다. 아더 애쉬라는 흑인 테니스 선수가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에서는 흑인에게 테니스를 금지시키는 법이 있었다. 지금도 테니스는 흑인에게 진입장벽이 있다. 유명 선수 중에 비너스 윌리엄스 자매 외에는 흑인 선수가 별로 알려지지 않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애쉬는 68US 오픈, 70년 호주 오픈, 75년 윔블던에서 우승했다. 그래서 윌블던의 영웅이란 별명도 얻게 됐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88년 심장 수술을 하다가 수혈을 잘 못 받아 에이즈에 감염됐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위로의 편지를 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 세계에 5억명의 어린이가 테니스를 배우고, 5000만 명이 테니스 경기를 하며, 50만 명이 프로 선수이고, 5,000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출전해 보고, 50명이 윔블던에 출전하고 단 1명이 결승전에 오른다. 그리고 나는 윔블던에서 우승했다. 윔블던 우승 트로피를 들었을 때 하나님 왜 하필 나입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 왜 하필 나입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고난의 밤을 지나고 있다. 고난은 힘든 것이다. 고난이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원망하기 쉽다는 것이다. 보통 때 말로 인해 넘어지지 않던 사람도 고난 중에는 원망하다 넘어진다. 고난으로 인해 약해진 인생이 원망으로 곧장 붕괴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원망은 나를 파괴시켜 성한 곳이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멸망한 이유가 원망이었다. 고난 중에 스가랴가 환상을 봤다. 그 환상으로 스가랴는 고난을 극복했다. 우리는 스가랴와 같은 환상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스가랴가 기록한 환상을 우리의 환상으로 받자. 그리고 우리도 이 환상으로 밤과 같은 세상에서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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