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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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다니엘 10:19
주일오전예배 | 2023-08-1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을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다니엘처럼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또한 이 시대에 다니엘처럼 은총을 크게 받은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가브리엘은 강한 사람 또는 영웅을 뜻하는 게베르와 하나님을 뜻하는 엘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영웅, 하나님은 강하다, 하나님은 나의 강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가브리엘은 미가엘 천사와 함께 성경에 나오는 2대 천사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종종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납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제사장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고, 마리아에게 메시아 잉태 사실을 알린 천사가 가브리엘입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에 지브릴이라는 천사가 나옵니다. 지브릴이라는 천사가 가브리엘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가브리엘을 모든 천사들을 주관하는 천사라고 하며 매우 신성시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가브리엘 천사를 매우 신성시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어떤 피조물도 신성시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가브리엘이 천사들 중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위에 있는 영적 피조물이 인간 다니엘을 <큰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9:23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고 했고, 10: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라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을 세 번이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무다입니다. 하무다는 귀중한 것, 정선한 것, 바람직한 것이라는 뜻으로, 매우 값비싼 옷이나 매우 진귀한 보물, 또는 매우 귀중한 금을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하무드라고 부릅니다. 다니엘은 매우 희귀하고 진귀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또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귀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NIV 성경은 오 높게 존중받는 사람이여!(O man highly esteemed)라고 번역했고, KJV 성경은 오, 위대하게 사랑받는 사람이여!(O man greatly beloved)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높은 존중과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을 하무다, 하무다, 하무다라고 불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천사들에게 하무다라고 불리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제 아내가 제게 이런 말을 해요. “다니엘은 너무 높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니엘을 특별해서 큰 은혜를 받은 사람처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8-9,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5-17, “그가 이런 말로 내게 이를 때에 내가 곧 얼굴을 땅에 향하고 말문이 막혔더니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이 환상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와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하니다니엘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썩은 자, 힘이 다 빠져버린 무능한 자, 잠들고 기절해버리는 자, 말문이 막히고 호흡이 끊어진 자로 기록했습니다. 이게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니엘의 위대성은 그의 인간됨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덕분입니다. 은혜만이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고귀하고 탁월하게 합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큰 은총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실 때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 옥합을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의 많은 죄가 사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7: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해진 이유를 그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사랑하는 자가 큰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무다라는 말은 기뻐하다, 사모하다, 열망하다는 뜻을 지닌 하마드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소망의 사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가슴에 큰 소망을 가진 사람이 큰 은총을 받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40: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앙망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와입니다. 카와는 묶다, 기대하다, 기다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NIV 영어 성경은 소망(hope)라고 번역했고, KJV는 기다리다(wait)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소망하고 끝까지 기다리는 자는 큰 능력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달려가도 피곤치 않는 큰 능력,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큰 힘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받은 은혜를 우리가 동일하게 받았습니다. 다니엘이 받은 은혜는 특별하고, 내가 받은 은혜는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이 세상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유다에서 우상의 나라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은 우상 숭배와 음행과 정욕의 나라였습니다. 밖으로 나가든지 안에 있든지 가증스럽고 음란한 것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성경도 없고, 예배도 없으며, 기도나, 찬송, 믿음에 관한 것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니엘에게 경건한 환경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다니엘은 온통 음란한 것들로 둘러싸였습니다. 그는 바벨론 궁전에서 바벨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음식과 언어를 바꾸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게 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음식들은 유대인들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곳에서도 율법을 지키기로 결단하고,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의 태도는 확고부동했으며, 정중했습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하나님의 자녀답고 품위있고 정중하게 바벨론식 음식을 먹지 않기를 요청했습니다. 그 정중하고 확고부동한 태도가 그를 은혜 입은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다니엘 1:8-9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율법을 지키기로 뜻을 확고부동하게 정하자 하나님은 다니엘이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긍휼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큰 은혜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은 은혜가 끊어진 세상에서도 은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다른 교회 목사님들과 기도 모임을 갖습니다. 기도 모임 중에 한 분이 교회 성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 성도 중에 회사의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아 부장에서 좋은 분위기 흐린다고 부장에게 혼을 맞는 청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어떤 회사 식사 모임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식사 중에 어떤 분이 목사님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목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요즘 목사님들도 술을 먹던데요.”라고 하더래요. 요즘은 목사도 술을 마시고,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술을 마십니다. 세상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음란한 시대에 이 젊은 청년이 술을 안 마시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부장이 외국 바이어를 만나러 갈 때는 꼭 이 청년을 데리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자리에는 이 청년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 참 이상한 일이죠. 청년이 상사들에게 술을 따르며 아부함이 아니라 실력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습니까? 한 번은 바이어를 만나서 식사를 하는 중에 그 외국인이 묻더랍니다. “당신은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데 하나님과 술을 마시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청년은 바이어에게 정중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 바이어가 계약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그렇게 잘 지킨다면 우리와의 약속은 얼마나 잘 지키겠느냐?” 이 청년이 회사의 중요한 계약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은혜를 포기하지 않은 이 청년을 큰 은혜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실거리는 신앙, 신앙의 우물쭈물함, 우왕좌왕하는 신앙, 세상과 믿음을 흥정하는 것, 악과의 모든 협상과 노력과 양보, 다 혐오하십시오. 세상에서 비틀거리지 마십시오. 믿음에 좀 더 분명하고 좀 더 철저하십시오. 더 확고하고, 더 확실하고, 더 진실하고, 더 철저하기를 바랍니다. 가까운 곳에 커피숍이 있습니다. 사장이 안식교인입니다. 오다가다 인사를 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그 사장님은 토요일에 절대로 문을 안 열어요. 제가 몇 년째 왔다갔다하는데 토요일에 나오는 것을 못 봤어요. 이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 생활하는지 몰라요. 우리가 이단보다 나아야지 않을까요? 어중간한 크리스천이 본인의 신앙은 물론 다른 사람의 신앙까지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교회까지 타락시킵니다. 어중간한 크리스천의 어중간한 신앙은 기독교의 타락을 조장할 뿐입니다. 다니엘은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은혜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큰 은혜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은혜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니엘은 하나님을 용기 있기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다니엘은 부름을 받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왕에게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폭군입니다. 절대적인 권력입니다. 그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바닥에 목이 나뒹구는 운명이 됩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미친 사람이 될 것이고 왕궁에서 쫓겨나 들에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는 말을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평안을 연장시키려면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4:27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왕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 벨사살이 왕이 됐습니다. 벨사살은 교만하고 거만하며 방탕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1천 명의 귀인들을 초청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던 그릇들로 술을 마시며 온갖 잡신을 찬양했습니다. 그때 왕이 앉은 맞은편 벽에 커다란 손이 나타나더니 글씨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해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바벨론의 지혜자들이 해석하지 못했을까요? 해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히 왕의 죄를 입에 올리기가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요? 다니엘이 부름을 받고 왕 앞에 나갔습니다.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이것을 해석해주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며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왕이 두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셋째 치리자라는 말은 왕 다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다니엘은 상은 다른 사람에게나 주라고 하고 왕의 죄를 지적합니다. 다니엘 5:22-28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교만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전한 죄를 먼저 분명하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벨사살은 그날 밤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날 밤에 죽을 왕에게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용기 있게 의지함으로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됐습니다. 세상에서 비실거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는 시험을 당하게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다니엘에게도 그와 같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정치인이었습니다. 항상 정치적인 문제에 연루되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엘을 시기해 다니엘을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니엘에게서 어떤 흠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 외에 다른 것에서는 다니엘을 넘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기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자는 법을 만들어 왕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법이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들이 만든 악한 법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이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악법 때문에 기도를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음모가 무서워 창문을 닫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과 동일하게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에게는 사자굴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아무런 상함이 없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큰 은혜를 받았을까요? 사람들은 놀라운 사람, 신비한 사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처럼 다니엘이 놀라운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하지 않았고 은혜를 선택하고 은혜를 소망하며 은혜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큰 은총의 사람이 된 것은 은혜를 포기하지 않고, 은혜를 끝까지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한결같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이 큰 은총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에도 은혜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가 없다고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포기하지 않으면 큰 은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포기하지 않으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결코 어느 순간에도 은혜를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정말 희귀하고 진귀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해보십시오. 비웃습니다. 오래 전에 한학을 공부하신 노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더니 제 이야기를 다 듣더니 피식 웃더라고요.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예수님 믿으십시오.”라고 했더니 그 분이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학을 공부한 똑똑한 사람이지만 십자가의 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이해 못하는 신비로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참으로 진귀하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늘에서 내린 이슬이 아브라함의 머리에 떨어져 흘렀고, 다니엘의 어깨를 적셨으며,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북한에 949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캐나다 큰빛교회의 임현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북한 군인에게 신라면을 끓여줬더니 북한 군인이 남한 사람들은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느냐며 놀라더래요. 한 그릇을 더 먹더니 군인의 눈빛이 흠모와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더래요.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라면을 좋아하시는 분도 있지만 너무 흔하고 몸에 안 좋다고 안 먹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라면이 너무 흔해서 음식 중에 아래쯤에 있어요. 오늘날 교회가 많아 성도들이 은혜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본 회퍼 목사님이 20세기 초 독일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은혜를 값싸게 보는 것이라고 했어요. 시편 39:11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라고 했습니다. 영화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무다입니다. 본문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좀 벌레는 아주 조금씩 갉아먹어요. 그래서 갉아먹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중에는 못쓰게 돼요. 소멸하다는 말이 녹슬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버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하무다(큰 은혜)를 좀먹음 같게 하신다는 거예요. 큰 은혜가 녹슬어 없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값싼 것은 아닙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은혜를 라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 구원, 십자가, 교회, 은혜를 정말 귀하게 생각합시다. 시편 19: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했고, 욥기 23:12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라고 했으며, 시편 119:127“”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깁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노래>가 있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네. 단지 조금 늦을 뿐이라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의 처절한 삶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마음과 육체를 단련시켰습니다. 이 수용소에 한 젊고 유능한 외과 의사가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매일처럼 가스실과 인체실험실로 끌려가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바라보며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란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방에서 밖으로 나가 작업하는 시간이 되면 흙 속에 몰래 파묻어 둔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꺼내 그것으로 면도를 하며 얼굴을 단정히 하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상황 속에서 외모를 가꾸는 일은 정말 어리석은 일인지라 남들은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얼굴을 다듬었습니다. 나치스들은 면도질로 말끔한 절망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일찍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고 죽을 차례를 자꾸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치가 패망하는 날을 맞았고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를 떠나던 날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것은 바로 깨진 푸른 유리 한 조각이었습니다. 그 외과의사는 나중에 스웨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유월절이 올 때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약간 바꾸어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늦는 법이 없다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이라네.” 죽음 앞에서도 매일처럼 자신의 모습을 가꾸며 절망 대신 희망을 심은 그는 마침내 나치의 잔악함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희망을 잃고 절망할 때만 죽음이 우리를 삼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고 그 소망을 하나님의 사랑과 이어져 있음으로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담대히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는 말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기독교를 겸손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겸손하라는 말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수백 배 더 많이 나옵니다. 성경은 성도의 두려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를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종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다음에 천사는 평안하라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썩고, 죽은 사람처럼 되어 쓰러져버린 다니엘을 일으켜 세웁니다. 18-19절에 하자크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18절에는 천사가 다니엘을 만지만 강건케 했다고 했습니다. 이 강건함은 단순히 육체적 강건함이 아닙니다. 마음과 영혼의 담대함입니다. 천사는 다니엘을 어루만지며 강건하게 했습니다. 19절에는 천사가 반복해서 강건하라고 했더니 다니엘인 힘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마음도 몸도 강건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그의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삶의 엄중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미이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천사가 쓰러져버린 다니엘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의 위대성은 다니엘의 탁월한 인간성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만이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여러분! 은혜받으십시오. 은혜의 사람이 되십시오. 큰 은총의 사람이 되십시오. 어떤 순간에도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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