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아침마다 만족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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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90:14
주일오전예배 | 2023-08-0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오늘 우리는 시편 90, 모세가 쓴 시 중에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시는 150개의 시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3500년 전의 시입니다. 창세기를 모세가 썼습니다. 모세가 이 시를 창세기를 쓰기 전에 썼다면 이 시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글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시간에 성경의 시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시를 읽은 것입니다. 애굽 왕궁에서 왕자로 최고의 영화를 누린 후에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소박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며 어떤 기도를 올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배회하게 될 것이고, 20세 이상 남자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가 애굽에서 나온 지 2년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앞으로 38년을 광야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모세와 아론까지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0세 이상은 앞으로 최대 38년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모두 일시에 시한부 인생이 된 것입니다. 38년 동안 20세 이상 남자 603,550명이 죽었습니다. 여자도 같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38년 동안 죽은 이스라엘 백성수의 수는 약 1,200,000만 명 정도입니다. 하루에 86.5명이 죽은 것입니다. 매일 하루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후회의 눈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동포들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매일같이 남녀노소가 황무지의 벌판에 묻히는 장례식이 있었고, 이 위대한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의 두 눈엔 슬픔과 연민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날의 잘못을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모세는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고난의 날들을 광야에서 보내야 하고,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광야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쳐야 할 무리들을 위해 가장 알맞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이 광야에서 죽어야 한다면, 그리고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면,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면, 주님!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당신의 무한한 자비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로 남아 있는 날이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보낼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을 원망과 불평으로 다시는 낭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들은 모두 주님이 오시지 않는 한 젊거나 늙었거나 상관없이 언젠가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세와 같은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의 남은 날 동안 원망과 불행으로 가득 차 불만족 가운데 얼마나 될지 모르는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을 낭비하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만족한 살 수 있도록, 아침마다 주의 사랑과 자비로 만족하게 해주십시오.” 모세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툼과 싸움과 분열과 미움으로 우리의 생을 허비하지 맙시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만족케 해주십시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신이 소원하는 목표가 있고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환경에 상관없이 만족케 해주시는 삶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행복하고 나은 삶일까요?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삶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목표하고 바라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만족하게 해주시는 삶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고 목표하는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만족하게 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의 주시려고 하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이 같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침마다 만족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다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작년에 금식기도를 했지 않습니까? 저는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랜 기간 금식하면서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제 몸과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못 견딜 정도로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몸이 조치 않을 때도 있었지만 제가 금식기간을 다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몸과 영혼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22-23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는 말씀이 그때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어떤 밤에는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고, 어떤 때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독했고, 어떤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아침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저는 매우 상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마다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제가 적어도 이틀을 더 견딜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넉넉히 견디고, 내일 아침에 새로운 은혜를 충만히 주시지 않아도 하루 정도는 이 악물고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마다 하나님은 어김없이 제게 새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침이 너무 좋아서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주의 은혜로 만족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제 삶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침마다 그리고 인생의 매 순간마다 만족케 해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청년 때 추구하는 것을 장년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추구하고, 백발이 되어서도 계속 추구하는 것 다시 말해서 일생 동안 한결같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 대신에 그를 아침마다 만족케 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그에게 더 큰 축복이 될까요? 틀림없이 후자가 그에게 더 커다란 축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만족한 삶을 모세가 말한 것처럼 이른 아침에, 즉 인생의 초기에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 심지어 훌륭한 사람들까지도 헛된 것 때문에 이른 아침, 젊은 시절을 낭비하여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오후에 와서 지난 날의 행복했던 날과 모두 다 사라진 전성기를 되돌아보는 슬픈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단지 저녁 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만족과 참 즐거움 가운데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을 뿐입니다. 인생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거하고, 죄로 인하여 뒤섞인 괴로움이 없는 화평과 행복을 우리가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를 떠나서 바랄만한 인생이 아닐까요? 모세는 이것을 인생의 최고의 이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모세의 이 견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 공사가 엉터리로 된다면 이후에 아무리 고도의 기술로 건축을 계속 한다고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집을 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기초가 중요합니다. 인생이란 집의 기초가 단단하고 우아하게 되었다면 정말 축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기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모세는 이제 일어나는 젊은 세대들이 이른 아침을 낭지하지 않도록 이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시를 쓸 때는 아마도 100세는 넘었을 것입니다. 100세가 넘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 시를 썼다면 자신과 그들이 이제 더 이상 남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매 순간 하나님의 자비로 만족한 삶을 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아침마다 만족케 해주시는 은혜가 제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을 원망과 불평, 미움과 다툼으로 허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 담긴 모세의 기도의 정신입니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옵소서!” 모세의 이 기도는 모든 사람의 갈구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만족케 하옵소서. 만족케 하옵소서.”라고 불교도도 울부짖고 있고, 이슬람교도도 울부짖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울부짖고 있습니다. “우리를 만족케 하옵소서! 만족케 하옵소서!”라고 온 세계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상 각처에서 들을 수 있는 울부짖음입니다. 신문, 인터넷 기사, 텔레비전, 영화, 유튜브 등등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만족한 삶을 찾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인간의 마음은 하늘로 향하지 않고, 세상의 시간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직도 솔로몬이 노래한 헛되고 헛되니라고 한 것들에서 만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모음으로써 만족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일정한 금액의 돈을 모으고 싶어 합니다. 돈을 모은다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주된 목표가 될 수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목표만큼 돈을 벌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돈을 원했습니다. 돈은 돈을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많이 가질수록 더 궁핍함을 느낍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이 많은 사람이 만족했다는 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침대 위에 돈을 쌓아놓고, 돈과 함께 잠들고, 돈과 함께 일어나 돈과 함께 걷고, 돈과 함께 먹어도, 사람은 돈 때문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요즘 고급 음식점에 가면 금을 뿌린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금이 피부 미용에 좋다고 해서 화장품에 금을 넣습니다. 동의보감에 금은 정신을 맑게 하고 경기와 간질병을 진정시키며, 혈맥을 조성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에서는 금이 몸에 좋다는 증거는 조금도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장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도 금을 먹고 있습니다. 내가 금을 먹었다는 만족감일까요? 사람이 돈을 먹으면 만족할까요? 여러분! 우리 영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신비롭고 고귀한 것입니다. 영혼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은 진실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마음은 순금보다 훨씬 더 귀하고 백합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신비롭고 놀랍고 고귀한 것이 과연 이 세상의 감각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명예를 추구해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잠언 22:1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총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가리킵니다. 명예가 재물보다 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명예, 명성, 칭찬, 존경이 만족을 가져다준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명예의 최고봉에 올라갔던 이 땅에의 정치가들 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거짓과 위선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잠시 동안 가졌던 권력은 애연가들이 빨아들이는 한 모금의 담배 연기에 불과했습니다. 담배의 성분이 애연가의 건강에 독이 된 것처럼 그들의 권력은 그들의 인생에 독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명예와 명성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정죄와 수군수군 하는 말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칭찬, , 시선, 존경에 매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종이 됩니다. 사람은 결코 명예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담대하십시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매이십시오. 그러면 이 세상의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쾌락에서 만족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가생활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요즘에는 익스트림 스포츠가 인기가 많습니다.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십니까? 인간의 영혼 가운데는 만족을 모르는 말거머리 같은 탐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잠언 30:15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두 딸은 거머리 앞뒤에 있는 빨판입니다. 거머리는 피를 먹어도, 먹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거머리를 말씀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고 한 없이 늘어나는 거머리의 배와 같습니다. 사람의 정욕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유사 이래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갔지만 바다는 차지 않았고, 바다는 무엇을 던져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와 유사합니다. 솔로몬은 사람의 욕망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묻어도 족한 줄 모르는 무덤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잠언 27:20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죽음, 지옥, 무덤을 의미합니다. 아바돈은 멸망, 죽음의 자리, 저승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무덤처럼 만족을 모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만족을 찾아야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구해야 합니다.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납니다. 만약 여러분이 고라니였다면 봉서산에 올라가서 풀을 뜯고, 도토리를 주어먹고, 시원한 나무 그늘에 누어서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몇 년 전입니다. 기도하려고 새벽 2-3시 경에 봉서산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가로등 불빛 아래서 고라니 한 마리가 아주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유유자적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고라니는 이것이 다입니다. 고라니는 결코 하나님께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고라니는 거기서 그렇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돼지도 만족하고, 참새도 만족하고, 개도 만족합니다. 그런데 사람만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만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아담에게 만족을 잃게 했습니까? 죄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전인 창세기 1장을 보십시오. 온통 만족으로 충만합니다. 창세기 1장에는 피조물이 완성될 때마다 온 세상에 좋다는 말씀이 울려 퍼졌습니다. 창세기 1:3-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반복해서 계속 나옵니다. 영어 성경은 Goo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면서 Good! Good! Good!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다음에는 very good!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족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만족하게 만드셨습니다. 태초에 이 세상은 만족으로 충만했습니다.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에덴에서 충분히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사람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죄가 우리를 불만족하게 합니다. 죄가 원망, 불평, 짜증나게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 이후 죄의 맛을 잊지 못해 만족을 위해 더 큰 죄, 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고, 죄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새끼 호랑이를 동자승이 발견하고 불쌍해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돌봐주었더니 새끼 호랑이가 살아났습니다. 동자승은 새끼 호랑이에게 절간에서 먹는 것만을 주었습니다. 호랑이는 초식동물로 키워졌습니다. 하루는 동자승의 실수로 손가락에서 피가 났습니다. 동자승은 피가 아까워 자신의 손가락을 호랑이에게 물렸습니다. 호랑이가 피를 빨아먹는데 피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순간 잠재해 있던 육식의 본능이 깨어났습니다. 호랑이는 피로 만족하지 못하고 피를 빨아먹다가 손가락을 뜯어먹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손을 먹고, 나중에는 팔을, 그 다음에는 동자승까지 먹어버렸습니다. 동자승을 잡아먹은 후에는 절간의 모든 스님을 잡아먹습니다. 호랑이가 피 맛과 고기 맛을 안 것입니다. 피 맛을 아니까 은혜를 알면서도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동자승을 잡아먹은 것입니다. 죄의 맛은 이렇게 강렬한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지식, 이성, 의지를 압도하고 짓밟고 비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을 모릅니다. 이 불만족의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은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만족을 구해야 합니다. 

만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족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없이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분 없이 우리가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매우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필요성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눈에는 반드시 빛이 필요합니다. 눈에는 빛이 필요하듯 인간의 영혼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필요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만족을 원한다면 이와 같은 생각의 자세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창조주와 화해를 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퍼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피의 맛을 호랑이 식욕과 같은 죄의 욕망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꾸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래야 우리 삶에 하나님의 만족이 퍼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면 나는 만족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아직도 본성이 있으며 그로 인하여 여러분은 싸우고 씨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삶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를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를 만족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만족을 줍니다. 이것은 커다란 신비이고 위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태어났고, 결코 만족을 모르는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만족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합니다. 만족이 없는 세상에서 만족을 찾는 것은 백사장에서 콩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콩을 찾으려면 콩밭으로 가야 합니다. 백사장에서 콩을 찾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만족을 찾지 마십시오. 

우리가 만족을 찾으려면 만족을 주시는 분에게로 가야 합니다. 봉서산이 저기에 있습니다. 저는 종종 봉서산에 오르고 싶지만 피곤하고 덥고 귀찮아서 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봉서산에 오르고 싶으면 덥고, 땀이 흐르고, 귀찮은 마음을 이기고 올라가야 합니다. 귀찮고 땀이 난다고 봉서산을 내게로 끌고 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족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만족을 원한다면 만족의 산이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끌고 오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능자 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엘 샤다이를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만족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만족하도록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만족은 하나님 성품입니다. 만족한 삶을 원하십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만족의 산이신 하나님께로 가십시오.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월 스미스가 자기 친아들과 출연한 영화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너무 가난해 부인이 집을 나갔습니다. 월세를 내지 못해 아들과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크리스는 지하철 화장실에 휴지를 깔고 아들을 그 위에 재우고 하염없이 웁니다. 돈이 없어서 아들을 차이나타운의 가난한 동네에 있는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유치원 벽에 happyness라고 써져 있습니다. 원래는 happiness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수준의 유치원인 줄 아시겠죠? 어느 날,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벽에 써진 ‘happyness’를 크리스가 ‘y’‘i’로 고쳐주며 아들에게 왜(Why) 나는 행복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기보다는 행복이란 것은 내(I)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의미가 있는 영화입니다. 크리스는 후에 성공한 사업가가 됩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고 명성을 얻어서 행복했을까요? 그는 행복을 찾았을까요? 인간은 아무도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없습니다.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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