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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중국 길림성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인 용정에 있는 비암산 정상의 소나무 옆에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이 일송정입니다. ‘일송정’은 대일항쟁의 역사와 정신이 깃든 곳으로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었습니다. 일송정 소나무 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의지를 불태운 회합의 장소였습니다. ‘일송정’은 대일항쟁의 구심으로 민족주의를 제시하고 실질적으로 대일항쟁을 이끌었던 지도자, 대한독립군단 백포 서일 총재를 비롯한 독립군과 독립 운동가들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안 일본군은 일송정이 있던 비암산을 사격장으로 만들어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사격 과녁으로 쓰고 그것도 모자라 일송정 나뭇가지에 구멍을 뚫고 약품과 후춧가루를 뿌리고 나무 밑 둥에 쇠못까지 박았습니다. 일본 사람 참 지독한 짓 많이 했죠! 소나무는 그렇게 말라죽었는데 1980년 중국 동포들에 의해 일송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지면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주목받게 됩니다. 1991년 옛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어 복원했으나 고사했고 다시 심고 죽기를 여덟 번 반복해서 2003년 아홉 번째로 심은 나무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선구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가곡으로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습니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작시자의 친일행적이 논란이 되어 지금은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선구자(先驅者)는 '앞서 달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행렬에서 맨 앞에 선 사람, 또는 어떤 일이나 사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을 뜻합니다. 1절에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미래의 어느 날입니다. 이 노래는 미래의 어느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게 될 승리의 노래입니다. 승리의 노래라는 점에서 개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날에 부를 노래를 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참 우울하고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고 남쪽 유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소망의 날입니다. 밝은 날입니다. 기쁨의 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가고 있는 어두운 시대에 그 날의 소망과 평안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고 있는 유다 백성들의 선구자가 되어 맨 앞에 서서 이 소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선구자의 노래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 또는 ‘주의 날’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 날은 성경의 예언이 모두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 날은 주님께서 온 우주를 향해 정해놓으신 계획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 날은 악인들이 연약한 자들을 더 이상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며, 불의한 자들이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세상에서 주님의 뜻 때문에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억울함이 해소되는 날입니다. 그 날은 주님의 백성들이 마귀의 훼방과 궤계로 당한 고통과 아픔을 보상받는 날입니다. 요엘 2:21에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라고 했고, 23절에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날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왜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지 않고 그 날이라고 했을까요? 그 날은 정해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정했을까요?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시편 118:24에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날입니다. 반드시 있는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정하신 소망의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은 악인에게는 재난과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축복과 환희와 소망의 날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시며 소망의 노래를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날은 아주 먼 미래에 있는 어느 날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현실의 삶을 사는 우리들은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그 날은 먼 미래의 어느 날이지만 개인의 삶 속에 부분적으로 경험되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내 삶에 임재하실 때 우리는 그 날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주께서 임하실 때 내 억울함과 가슴에 맺힌 한과 답답함이 풀릴 것입니다. 에스더 9:22에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두 날은 유대인들이 원수를 갚은 날입니다. 원래는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작정한 날이었지만 상황이 역전돼 유다인이 원수갚는 날이 되었습니다. 에스더와 그의 삼촌 모르드개는 여호와의 날을 삶에서 경험했습니다. 그 날을 경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날에 유다인들은 너무 기뻐 자기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이 노래를 우리의 땅에서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의 영광과 은혜가 여러분의 개인의 삶에 경험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선구자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견고한’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즈입니다. 아즈는 ‘강한, 견고한, 격렬한, 잔인한, 거친’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강하고 견고한 성읍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원수들에게는 매우 거칠고 잔인한 성이 있습니다. 평지에 무방비하게 세워진 나라는 적의 침입을 쉽게 받습니다. 우리는 평지의 성읍처럼 한 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두려움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하고 견고한 성을 찾아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강한 성에서 안전히 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침에 평강 중에 이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제사를 통해 우리는 안전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곳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영원히 공격받을 두려움 없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깊은 절망으로 인해 짓밟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원수를 위압하고 우리의 마음에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견고하고 강한 성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성경은 “주께서 친히 성벽과 방어벽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성이 강한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성벽과 외벽(방어벽)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벽은 성의 벽이고, 외벽은 성 밖에 있는 보호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벽이시며, 바깥쪽에 있는 우리의 방어벽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중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벽은 단순한 이중벽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벽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벽과 방벽을 겹겹이 세우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벽과 방벽을 겹겹이 세우셔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중, 육중으로 우리를 둘러싸서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이 성벽이 되시고, 하나님이 방어벽이 되신 구원의 성입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성인 하나님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나가지 마시고 여기에 거하십시오.
이 노래는 성 안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에게 문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들을 들어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의는 히브리어로 에문입니다. 에문은 신실, 믿음, 진리라는 뜻입니다. 신의를 지키는 나라는 믿음을 지키는 나라입니다. 이 성은 믿음을 지키는 나라에게 열려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이 문이 열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에문(신실, 믿음)은 아만(의지하다, 진실하다, 지탱하다)에서 온 말입니다. 아만에서 아멘이 왔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 성문은 아멘하는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 아멘 합시다.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가장 놀라운 기쁨은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 성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 성은 열 두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면에 새 개씩입니다. 어느 서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은 우리에게 항상 어디서나 열려 있습니다. 이 견고하고 강한 성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의 성이 우리에게 닫힌다면 우리의 슬픔은 실로 클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성 밖에 있다면 그 성벽과 성이 강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 안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 때마다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될 것입니다. 구세주가 오셔도 나는 그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고, 정결하게 되어야 하지만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이 있어도 나는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슬픔이 심화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으로 오십시오. 들어와서 노래하십시오. 밖에서 불안해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성이 믿음을 가진 나라들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아멘하는 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성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외인이 아닙니다. 이제 어떤 일도 우리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선구자의 노래가 이제는 나의 노래가 되게 하십시오. 나의 음악이 그치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 이 구원의 성으로 피하십시오.
이 성을 지키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 성을 지키시는 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친히 여러분을 보호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위로하여 주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심지는 등잔이나 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꼬아서 꽂아 놓은 실이나 헝겊입니다. 심지가 견고하게 붙어 있어야 불이 잘 탑니다. 심지가 견고해야 불이 밝습니다. 심지가 단단해야 불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심지가 견고하지 않으면 불이 잘 꺼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심지는 ‘마음속에 품은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어떤 계획 목적을 세워갑니다. 심지라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품은 어떤 계획이나 목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심지는 외적인 환경에 의해서 수시로 바뀝니다. ‘심지가 견고하다’는 말은 주변 환경에 의해 마음에 품은 뜻이 바뀌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유혹과 시련에도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사는 삶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심지를 말씀에 굳게 박았습니다. 그의 심지는 환경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하나님이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십니다.
‘평강하고 평강하도록’이라는 말씀이 히브리 성경에는 ‘샬롬 샬롬’이라고 짧게 되어 있습니다. 샬롬 샬롬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은 ‘완전한 평강’(perfect peac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넘치는 평화라고 번역했습니다. 샬롬 샬롬은 참되고 실제적이고 완전하며 넘치는 평강입니다. 그 길이와 넓이에 있어서 측량할 수 없는 이중, 사중, 칠중의 평화입니다. 샬롬 샬롬은 모든 전쟁이 종결되고 전쟁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직 평강만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와 있고,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누가 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한 여러분들을 감히 누가 해할 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롬8:32),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한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자녀의 영, 사랑과 완전한 확신의 영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평온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화살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십시오. 지옥이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과거의 모든 죄가 완전히 말소되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앞을 내다보십시오. 태양이 영광 가운데 찬란하게 여러분을 비추고 있습니다. 들판을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잘못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여러분의 삶에 불러들이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강을 하나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부분적인 평강이 아닙니다. 평강, 평강을 주셨습니다. 샬롬을 주신 것이 아니라 샬롬, 샬롬을 주셨습니다. 3중, 5중, 7중의 평강, 넘치는 평강, 완전한 평강을 주셨습니다. 마귀가 여러분의 넘치는 평강을 빼앗아 가려고 쏘는 불안의 화살, 두려움의 화살, 염려 • 걱정 • 근심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막으십시오. 여러분의 죄가 사함을 입었고, 그 일이 단번에 모두를 위하여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소유하심으로 여러분이 그의 소유가 되었음을 묵상하십시오. 그는 결코 여러분을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샬롬은 가장 완전한 언어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어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평강을 조금씩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으로 계속 흘러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평강은 실재합니다. 평강은 여러분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 평강을 누가 얻을 수 있을까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 완전한 평화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여기서 신뢰하다는 단어는 ‘위기에 처한 사람이 그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피난처가 될 만한 곳(혹은 사람)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안전하다고 믿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안전한 곳으로 믿고 하나님께로 서둘러서 달려간다는 말입니다. 가다가 의심이 돼서 멈칫멈칫, 주저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곧장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달려가십시오. 하나님께 달려가시면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시편 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대로가 있다는 말은 빨리 큰 길을 통해 시온으로 달려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삼중, 사중으로 된 견고하고 강한 성이십니다. 인생의 위기에 하나님께 달려가는 사람은 완전한 평강, 넘치는 평강을 누립니다.
호주는 코알라, 캥거루의 나라입니다. 캥거루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캥거루는 30~40일 만에 새끼를 낳는데 막 태어난 새끼는 2.5cm크기에 1g밖에 안됩니다. 정말 작습니다. 털도 없는 핏덩이입니다. 어미 캥거루는 새끼를 자연주머니에 넣어서 4~5개월을 키웁니다. 새끼는 엄마의 배에서 엄마의 체온을 느끼며 자라면 훨씬 잘 자란다고 합니다. 2010년 3월 25일 호주에서 몸무게 900g의 미숙아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의사는 소생술을 했지만 첫째 아기를 살리지 못했다며,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아기를 엄마 품에 안겨줬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숨을 내쉰 것입니다. 이후에 아기는 고르게 숨을 쉬더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엄마 품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캥거루 케어’라고 합니다. 캥거루 케어는 엄마가 완전히 눕지 않고 몸을 약간 뒤로 젖힌 후에 가슴 위에 아기를 올려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엄마와 아기의 피부가 직접 닿도록 엄마는 아기를 맨몸으로 안고, 배꼽에서 가슴까지 서로의 피부를 완전히 밀착시킵니다. 1983년 콜롬비아의 헥토르 마르티네즈 박사에 의해 시작된 이래 수많은 어린 생명이 캥거루 케어로 살아났습니다. 서울대병원에서도 700g으로 태어난 아기가 있었는데 캥거루 케어를 통해서 완전히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간 사례가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아기는 10개월 동안 엄마 뱃속에 있다가 나옵니다. 엄마 품은 아기에게 사랑과 회복의 자리입니다.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코로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완전한 평안을 누립니다. 이사야 40:11에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피난처이십니다. 일상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찾아올 때 눈앞이 캄캄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질 때 우리를 사랑의 품에 안으시고 위로하시며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삶이 고단할 때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캥거루 자연 주머니입니다. 하나님의 자연 주머니 속에서 쉬십시오. 그러면 영혼이 쉼을 얻고 회복을 얻습니다.
남아프리카 출신의 닉 프라이스(1957년1월28일, 남아프리카 공화국)는 골프 선수가 있었습니다. 골프계의 원로로 지금은 각종 세계 대회 단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닉 프라이스는 골프를 잘하는 것은 물론 슬럼프가 없는 선수로 유명합니다. 골프 선수가 슬럼프에 빠지면 보통 헤어 나오는데 몇 년 걸리지만 그는 슬럼프를 금방 극복하는 편입니다. 닉은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격려가 슬럼프에서 벗어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닉! 골프가 잘 안 되면 휘파람을 불어라.” 그래서 슬럼프가 오면 필드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휘파람을 불라는 말은 노래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슬럼프가 오면 노래를 부르십시오.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이신가요? 그래도 노래를 하십시오. 시험을 이길 것을 믿으시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처럼 그 날을 소망하며 노래하십시오. 선구자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시편에 보면 많은 시에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 다윗이 아들이 반역했을 때 도망가면서 지은 시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다윗의 식가욘> 식가욘이라는 말은 슬프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슬플 때 지은 탄식시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깃딧'은 아마 블레셋 성읍인 '가드'에서 전해 온 악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의 믹담시>, <다윗의 시, 곧 성전낙성가> 부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은 삶에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항상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항상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롭고 쓸쓸하고 답답할 때 풀피리를 불렀습니다. 수금을 연주했습니다.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우리도 힘들 때 휘파람을 불어봅시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노래를 합시다. 노래하며 삽시다. 찬송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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