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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도로를 달리다가 대형 트럭 뒤편에 붙어 있는 왕눈이와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왕눈이 스티커는 무엇일까? 왜 트럭 뒤에 붙여놓았을까? 이것은 졸음운전을 예방하는 스티커이다. 눈 모양의 반사지 스티커 형태로 전방 주시태만 및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국도로공사가 개발한 것이다. 주간에는 후방차량 운전자의 시선을 유도해서 전방에 집중하게 만들고 야간에는 전조등 빛을 약 200m 후방까지 반사시킨다. 왕눈이 스티커는 ‘감시의 눈’ 효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감시의 눈’이란 그림 또는 사진으로 표현된 눈이 사람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고 스스로 정직한 행동을 유도한다는 이론이다.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면 긴장을 한다.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게 해 졸음운전을 예방한다는 것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시선을 느껴보자. 하나님의 영적 시선을 느끼면 긴장을 해보자.
스가랴서에는 8가지의 환상이 나온다. 밤에 파노라마처럼 8개의 환상이 스가랴 앞에 펼쳐지고 있다. 캄캄한 밤에 펼쳐지는 환상이 얼마나 놀라웠을까? 정말 황홀했을 것이다. 환상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8가지의 환상 중에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환상이 본문에 소개되는 순금등대의 환상이다. 순금등대의 환상은 다섯 번째 환상이다. 8개의 환상 한 가운데 놓여 있다. 이 환상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스가랴서의 중심 말씀이 순금 등대의 환상과 함께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가랴서의 중심 말씀은 4:6이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스가랴서의 중심되는 이 말씀이 바로 순금등대 환상과 함께 선포되고 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대단히 중요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환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여러 번이나 설명해 주시고 계신다.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해설해주신다. 때문에 스가랴 선지자도 이 환상을 보통 환상이 아니라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이 환상에 대해서 하나님께 여러 번 질문한다. 4절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11절에도 묻습니다.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12절에도 묻는다.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까?”
스가랴 선지자가 BC 520년 11월 24일 밤에 환상을 보게 된다. 환상 중에 순금 등잔대가 보인다(2절). 등잔대라는 것은 등대라고도 하는데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금 촛대를 가리킨다. 여러분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강대상 뒷부분 십자가 밑에 금촛대를 놓은 교회가 있다. 이것은 지성소에 있는 등잔대의 모형이다. 모양은 줄기는 하나이고 가지가 일곱이다. 이 촛대 맨 윗부분에 일곱 개에 등잔이 놓여 있다. 또 등잔에 일곱 개의 관이 있다. 그 금등대 좌우에는 감람나무가 서 있다.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흘러 금등대로 공급되고 있다. 지금 스가랴 앞에 나타난 순금 등대의 환상은 참으로 휘황찬란했다. 34kg이나 되는 금으로 금촛대를 만들었다. 금 34kg이면 9066돈이다. 현재 시가로 따지면 약 31억이다(금1돈 348,000원). 높이 152cm이고, 폭은 107cm이다. 가지가 일곱인 금등대, 번쩍번쩍 했다. 등대, 관, 주발, 다 금이었다. 기름도 금기름이다(12절). 이렇게 많은 것들이 스가랴 선지자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많은 것 중에 스가랴 선지자의 눈에 유독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선지자의 눈이 꽂힌 곳이 있다. 무엇일까? 바로 두 감람나무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여쭌다. 11절에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하나님이 대답이 없으시다.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께 다시 묻는다. 12절에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왜 선지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으셨을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이다. 가끔 대답 못할 것 같은 일들을 아주 총명하게 대답할 때가 있다. 아이들이 아주 총명한 대답을 할 때가 있다. 아이들을 키운 부모라면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그게 너무 신기해서 그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어 다시 물어보면 잘 대답하지 않는다. 너무 쉬운 것을 물어보니까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들은 척도 않고 자기 할 일만 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것을 자꾸 물어보면 잘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짜증을 낸다. 얼마 전에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말한 것을 확인하려고 다시 물으니까 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선생님에게 수업에 관계없는 것을 질문하면 대답은커녕 선생님께 혼만 난다. 수학 시간에 생물을 물어보면 선생님께 실례이다. 과학 시간에 영어를 물어보면 안 된다. 영어는 영어 시간에 물어봐야 한다. 엉뚱한 질문을 하면 진지한 수업 시간에 김이 빠진다.
하나님의 태도를 인간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아주 퉁명스럽게 대답하신 것처럼 보인다. 13절에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의 뜻은 이것이다. “그것도 모르니? 알면서 왜 물어보니? 그리고 지금은 그런 거 물어보는 시간 아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지금 은혜 시간이니까 은혜 떨어지는 거 물어보지 마!” 지금 하나님의 수업 시간이다. 무슨 과목이냐면 계시 과목이다. 그 계시 시간에 지금 선지자는 세상적인 것을 묻고 있다. 하나님은 깊은 영적인 세계를 강의하시는데 선지자는 엉뚱하게도 세속적인 것을 질문하고 있다. 스가랴가 국어 시간에 영어를 물어본 격이다.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은혜 시간에 은혜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핸드폰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기도 시간에 눈을 감고 잡념에 빠진 것이다. 은혜 시간에 세상 염려하고 있다는 말이다. 스가랴가 그랬던 것 같다.
스가랴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한다.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뭔지 모르겠다는 스가랴에게 하나님이 대충 대답하신다. 14절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지금 하나님의 대답이 어떤가? 이렇게 표현하면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좀 퉁명스럽게 대답하신 것처럼 보인다. 쓸데없는 것을 묻고 있다는 투의 대답이시다. 선지자가 왜 엉뚱한 거에 관심을 갖느냐는 투이시다. 하나님과 스가랴 사이에 뭔가 맞지 않고 있다. 지금 하나님과 스가랴의 코드가 맞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C코드인데 스가랴는 F코드이다. 하나님은 은혜 코드인데, 스가랴는 세상 코드이다. 하나님은 영적 코드인데, 스가랴는 육적 코드이다. 예배는 계시의 해석을 듣는 시간이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하나님께 코드를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코드를 맞추기를 원하신다. 코드가 맞지 않으면 은혜가 흘러가지 않는다. 사람은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은혜를 받으려면 예배 시간에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어야 한다. 항상 그래야 하지만 적어도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께 코드를 맞추려고 해보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스가랴서에는 8가지 환상이 나온다. 환상이 나올 때 스가랴가 질문하면 그때마다 하나님은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셨다.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셨다. 그런데 스가랴가 두 감람나무에 대해서 여쭈었을 때는 잘 대답해주지 않으신다. 스가랴의 질문에 침묵하신다. 그래서 선지자는 재차 여쭈었다. 그런데도 사람으로 말하면 귀찮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주 못마땅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태도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대충 대답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왜 이러한 반응을 보이시고 있을까? 바로 이 부분이 순금 등대 환상의 핵심이다. 왜 감람나무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스가랴에 대해 하나님이 못마땅하신가? 왜 이렇게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시려고 하시는가? 자세하게 대답하시지 않고 대충 “주 앞에 모셔서는 자이니라”고 한 마디 하시고 답을 끝내시는가?
이유가 있다. 한국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단들이 참 많았다. 지금도 자칭 재림주라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20여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단의 교주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이렇게 지칭한다. “동방의 의인, 이긴 자, 철장 권세를 받은 자, 보혜사, 생명나무, 그리고 감람나무” 자신을 감람나무라고 한다. 감람나무라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인 예수라는 것이다. 전도관(천부교)의 교주 박태선은 자신을 감람나무라고 했다. 나중에는 자신이 천지를 만든 하나님이라고 했다. 우주를 만든지 3조 억년이라고 했다. 부천 소사, 양주 와부면, 경남 동래면에 아직도 신앙촌이 있다. 신천지 신앙의 뼈대가 천부교와 같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도 자신을 감람나무라고 했다. 지금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도 자신을 감람나무라고 했다. 이단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감람나무란다. 감람나무라는 말은 재림 예수라는 말이다.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의미이다. 두 감람나무가 얼마나 좋아 보였던지 이단의 교주들까지 감람나무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을 감람나무라고 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감람나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여기서 감람나무는 누구일까? 오실 메시야인가?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둘”이라는 숫자가 강조가 된다. 두 가지, 두 감람나무, 기름부음 받은 자 둘(14절), “둘”이라는 숫자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메시야가 둘이라는 말인가?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란 뜻인가? 분명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는데 예수 외에 다른 구원자가 또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14절에 “이는 기름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신경이 쓰인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지 주인 앞에 서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감람나무를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두 감람나무”는 누구인가? 두 감람나무는 일차적으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뜻한다. 한 사람은 정치적 지도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종교적 지도자이다. 한 사람은 세상적 지도자이고, 한 사람은 영적 지도자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당신 최고의 권력자이었고,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영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세속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스가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상이 누구이었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이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면서 묻고 또 묻는 것이었다. 스가랴가 왜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 포로에서 돌아와 보니 뭐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게 없었다. 나라가 혼란했다.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다. 그래서 나라를 바로 세울 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왜 스가랴가 두 감람나무를 유심히 바라보았을까? 바로 이스라엘 나라를 바로 세울 힘 있는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힘이 있는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 많이 가진 사람, 남들 보다 재능이 많아 보이는 사람, 실력 있는 사람, 많이 갖춘 사람, 그래서 뭔가 새롭고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기업에서는 그런 사람을 선발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준다. 스가랴는 피폐해진 나라의 상황을 보면서 순간 그런 세상적인 것들에 눈이 쏠렸다.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뭔가 큰 일을 할 것 같은 사람들이 큰 일을 했는가? 나라를 바로 세울 것 같은 사람들이 나라를 바로 세웠나? 아니다. 오히려 나라를 더 힘들게 했다. 백성들을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했다. 지금 스가랴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두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 시키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두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이다. 그런데 두 감람나무, 즉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에게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스가랴의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그의 태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질문에 대답도 않으셨다. 재차 물었을 때 하나님은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시고 끝내신다.
그것은 스가랴는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눈이 어디로 향하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크고 힘 있고 위대하고 대단한 무엇에만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선지자라고 하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관심을 어디에 두시는가?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가?’ 이 부분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데 스가랴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퉁명스럽게 대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가 무엇에 관심을 갖기를 원하셨는가? 오늘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에 관심을 갖기를 원하시는가? 10절에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고 했다.
먼저 여기에 일곱 개의 눈이 등장한다. 그 눈은 온 세상을 두루 행하는 눈이라고 했다.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눈이 아니다. 세상 곳곳을 샅샅이 살피는 눈이다. 그 눈이 한 개가 아니라 일곱 개라고 했다. 그 눈이 성경은 여호와의 눈이라고 했다. 여호와의 눈이 일곱 개로 표현되어 있다. 일곱은 완전수이다. 눈이 일곱이라는 말은 완전히 본다는 의미이다. 그 두루 행하는 눈이 어디로 향하여 있다고 하는가? 요한계시록 1:14에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했습니다. 눈을 불꽃같은 눈이라고 했다. 온 세상을 두루 행하는 일곱 개의 눈, 불꽃같은 눈, 눈 앞에 뭐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눈이 아니다. 흐리멍덩한 눈이 아니다. 그 어떤 것도 피하거나 감출 수 없는 불꽃같은 눈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눈이다. 이 불꽃처럼 빛나고 움직이는 눈이 어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까?
4:10에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고 했다. 이 말은 스가랴 선지지에 대한 하나님의 호통이다. 왜냐하면 스가랴가 두 감람나무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하나님의 관심, 일곱 개의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시는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시선을 두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작은 일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멸시하는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하며 선지자를 호통 치시고 있다. 여기에 작은 일의 날이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문자 그대로 작은 일, 보잘 것 없는 일을 의미한다. 인간들이 생각할 때 보잘 것 없는 작은 일에 여호와의 눈이 고정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자그마한 일, 보잘 것 없는 일, 그 일을 누가 하고 있는지 그 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10절에 다림줄이 나온다. 다림줄을 잡고 있는 스룹바벨을 언급하고 있다. 스룹바벨이 누구인가? 당시 총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서 다림줄을 잡고 있다. 다림줄이란 건축할 때에 평형을 잡는 자그마한 도구이다.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도구이다. 그것을 총독이 내려와서 잡고 있다. 총독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작은 일을 하고 있는 스룹바벨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스룹바벨은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자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현장에 찾아와서 다림줄을 잡고 있다. 노가다 십장도 아니다. 십장을 돕는 보조 역할을 총독이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하나님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나 같은 사람이 이런 하찮은 일을 하다니” 이런 자들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신가? 하나님은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서 별 볼일에 보잘 것 없는 일에 들어나지 않는 일에 자신의 온몸을 던지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 여러분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얼마나 가졌는가?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서도 대접을 받고 대단한 일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가까운 권사님이 한 분이 있다. 오래 전의 일이다. 당시는 집사이었다. 교회에서 세미나를 했다. 세미나 전에 밥을 먹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할 사람이 모자랐다. 세미나 중에 그 분을 나오라고 해서 설거지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막 화를 내는 것이다. 나를 만만하게 보고 이런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집사님이 섭섭해서 사과했다. 그리고 설득을 했다. 그런데 받아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봐도 아는 척도 안 하고, 말도 안했다. 얼마나 힘이 든지.... 한참이 지난 다음에 화가 풀렸다. 설거지 굳은 일이다. 저는 그래도 편하게 생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불렀는데 그 분은 나를 만만하게 봤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줄 믿는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의 온 정성을 쏟는 스룹바벨을 보시면서 그 앞에 놓인 태산을 평지로 만들어주시는 그런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맞보게 하신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7절)
작은 일이라고 멸시하지 말라. 하나님의 일은 작은 일이 없다. 마태복음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크든 작든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름대로 여러 가지 직분을 주셨다. 그런데 그 일이 내 나이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내 세상적인 직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요셉을 보라. 제국은 아니었지만 당대 아프리카 대륙의 판도를 장악하고 있던 나라이었다. 바로 왕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면서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보좌뿐이라고 했다. 창세기 41: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4절에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라고 했다. 요셉이 애굽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애굽은 이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곡식 장사를 했다. 56-57절,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요셉은 왕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작은 일에 충성했다.
모세를 보라. 모세가 왕자일 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셨나? 그의 직위와 권세를 이용하셨나. 전혀 그렇지 않다. 모세가 촌부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칠 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셨다. 다윗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다윗이 들판에서 양을 칠 때 보고 계셨다. 사무엘하 7:8에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라고 했다.
둘째, 작은 일이라는 것은 작은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은 사람이다. 일곱 눈을 가진 하나님의 관심은 크고 위대한 사람, 대단한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관심은 작은 자에게 있다. 두 감람나무에 있지 않다. 우리 주님을 보라! 주님의 관심은 항상 작은 자에게 있었다. 소자에게 있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아, 어린 아이, 강도 만난 자, 어부, 상처 입은 자, 탕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다.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위로하고 일으키고 치료하셨다. 열 두 해를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로 와서 남몰래 옷자락을 만질 때 그 손길을 놓치지 않으셨다. 그 연약한 손길을 놓치지 않으셨다.
스스로 가장 작다고 여기시는가? 모든 사람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일곱 개의 눈을 가지시고 작은 나의 아픔 고통 삶을 완전하게 바라보시고 계시다. 사람들은 높은 것, 권세 있는 것, 큰 것, 위대한 것에 관심 갖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다.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것, 작은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의 큰 날이 작은 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말구유에서 시작하셨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에 맞추자. 그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찾아 하자. 마태복음 25:23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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