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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소설가 중에 김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숨이에요. 이름이 아주 특이하죠? 하지만 본명은 아니에요. 본명은 김수진이에요. 김숨은 필명인 것 같습니다. 김수진 씨는 자신을 숨(호흡)이라고 했어요. 왜 숨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인생을 호흡(숨)이라고 했어요. 김숨의 「너는 너로 살고 있니?」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김숨 씨가 대만에 사는 민이라는 지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뜸 이렇게 묻더래요. “너는 너로 살고 있지?” 생각지 못한 질문에 김숨은 얼떨결에 “나?”라고 대답을 해요. 그러자 민이 이렇게 말해요. “나는 나가 없다.” 김숨이 다시 물어요. “나가 누구야?” 이때 민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 나 자신! 나는 나 없이 산다. 나 없이도 살게 되더라.” 돈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고, 일에 쫓겨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살다 보면 내가 사는 것 같긴 한데 내 삶에 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의 삶에는 여러분이 있습니까? 제가 이 책을 읽다가 제 아내에게 책 제목을 보여주며 “너는 너로 살고 있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제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 나로 살기 싫어요.”라고 해요. 그래서 왜 나로 살기 싫으냐고 물었더니 나는 죄인이고, 연약하고, 허물 많아서래요.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숨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세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모르셔서 어디 있느냐고 하셨을까요?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은 “왜 너는 너를 잃어버렸니?”라는 의미예요. 아담은 하나님이 아닌 마귀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누군지 잃어버렸어요. 아담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고귀함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담이 뱀의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립니다. 마귀는 나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과 대결을 했어요. 850:1이에요. 엘리야기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갈멜산 제단의 제물들을 태워버렸어요. 엘리야의 승리입니다. 엘리야와 백성들은 도망가는 거짓 선지자들을 잡아 모두 죽였어요.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 왕비가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 원수를 갚겠다고 으름장을 놨어요. 이때 엘리야가 도망을 다거니 하나님께 죽기를 구해요. 이세벨의 협박에 엘리야다운 모습이 완전히 없어졌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말은 왜 너는 너를 잃어버렸느냐는 거예요. 성경은 엘리야가 도망간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요. “그가 이 형편을 보고”(왕상19:3) 엘리야는 사역으로 지쳤어요.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왕비가 죽이려고 해요. 순간 자신이 처한 형편이 쓸쓸하고 처량하고 고독하게 느껴졌어요. 마귀는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삶의 형편으로 나를 잃게 해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마세요. 내 속에는 하나님에 내게 주신 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여러 차례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 질문에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23절)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다, 선지자다,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의 자제였습니다. 요한은 수 없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이나 자신의 가문,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찾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나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합니까? 또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중요합니까? 집안이나 학벌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나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의 말과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의 말이나 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가 아니라 “성경이 나에 대해 무엇이라 하느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사사 시대였습니다. 마노아와 그 부인이 나이가 많았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노아 부부는 아들을 낳고 삼손이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마노아 부부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태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들릴라라는 기생의 치마폭에 싸여 살았습니다. 들릴라는 밤이라는 뜻입니다. 태양이 밤(어둠)에 휩싸여 있는 거예요. 태양은 밤을 끝내고 아침이 오게 하는 존재예요. 하나님은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둠을 끝내기를 원하셨어요. 그런데 태양이 밤에 붙잡혀 있는 거예요. 태양이 어둠과 섞여서 어울리고 있어요. 삼손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원수에게 눈이 뽑히고, 원수의 노예가 됐어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어둠과 섞여 살지 마십시오. 빛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빛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빛을 잃어버리는 순간 원수의 노예가 됩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이스라엘 땅에 새 바람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온갖 좋은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갖다 붙이며 그를 칭송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구세주라고 했습니다. 칭찬은 사람을 우쭐하게 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게 하여 스스로를 잃게 합니다. 그래서 칭찬은 사람을 패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칭찬을 겸허히 수용하면 상급이 있습니다. 잠언 27:21에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단련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시험하다는 뜻입니다. 칭찬은 그 사람이 겸손한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인지 시험하는 것입니다. 칭찬에 시험들지 마세요. 칭찬에 교만해지지 마세요. 칭찬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요한은 칭찬으로 자신을 연단했어요. 요한은 사람들의 말로 자신을 단련했어요. 여러분! 칭찬으로 자신을 단련하십시오. 비방으로 나를 단련하십시오. 사람들의 칭찬에 우쭐할 것 없고,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정죄와 비난과 모욕하는 말에 기죽을 것 없습니다.
사람들은 칭찬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리는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제리 트웬티어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공기와 음식, 그리고 물처럼 기본적인 것임을 깨달으라!”(「칭찬의 위력」)고 했습니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4단계가 자기 존중, 인정, 관심, 존경이라고 했습니다. 칭찬이 5단계 중 네 번째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존중, 칭찬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칭찬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마십시오. 비난에서도 자신을 찾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좋아요”를 30,000번이라고 기뻐하고 자랑해요. 반대로 “싫어요”가 3000번이라고 속상해 합니다. 여러분! 그거 다 부질없는 거예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 봉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 들어가면 이성을 잃어버린다고 했어요. 사람들 속에 휩쓸리면 나를 잃어버린다는 거예요. 순간적인 인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례 요한은 성경에서 자신을 찾았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여러분도 성경에서 여러분을 찾으세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에게서 여러분을 찾으세요. 십자가에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나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마세요. 사람들의 말 때문에 힘들어 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말에 여러분이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여러분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붙잡으세요. 십자가에 여러분을 단단히 붙들어 매시고 세상에 흔들리지 마세요.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가 아니라 “성경이 너에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에 집중하세요.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랍비들은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설교를 하기 위해 성전이나 회당이 아니라 광야로 갔습니다. 제가 거리에서 설교한다면 여러분들은 저를 이상한 목사라고 생각하고 우리 교회에 안 나올지도 몰라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빈들에서 설교를 했어요. 성전으로 가지 않았어요. 제도권 밖으로 나갔어요. 왜 요한은 빈들로 나갔을까요? 그것은 더 이상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3:2에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 말씀을 주셨고, 그 빈들에서 목 놓아 말씀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성전에 있는 제사장이 아니라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는 것은 이미 성전에는 말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이 껍질뿐이라는 거예요. 알맹이가 빠졌다는 거예요. 유대교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배당에 모여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 예배라는 제도권 안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곳에, 우리 교회에, 이 제도 안에 하나님이 계신지 생각해봅시다. 껍데기 신앙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만 알맹이 신앙은 오직 주님께 사랑을 받는 자가 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소리는 헬라어로 포네(φωνὴ)입니다. 포네는 소리, 음성, 목소리, 말소리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은 목소리(voice)로 번역했고, 우리말 성경은 소리라고 번역했습니다. 목소리는 몸에 유입된 공기가 폐에 저장되었다가 목구멍과 성대(발성기관)에서 진동을 유발해 입 뒤쪽에 있는 연구개를 거쳐 머리와 콧속(공명기관)을 적당히 울리면서 혀, 이, 입술(조음기관)을 통해 입 밖으로 나오면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목소리는 호흡(숨)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소리라는 말은 호흡(숨)이라는 의미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숨이라는 거예요. 요한은 자신을 숨(호흡)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겸손입니다.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소리가 있어야 전달이 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한 말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전달되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소리의 사전적인 정의는 “물체의 진동에 의하여 사람이나 동물의 귀에 전달되어 청각 작용을 일으키는 공기의 파동”입니다. 소리는 진동이고, 파동입니다. 나는 소리라는 말은 나는 말씀이 전달될 때 일어나는 진동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전달되는 몸부림이라는 거예요.
도로에 표지판이 있습니다. 표지판은 스텐이나 포맥스로 만듭니다. 길이 갑자기 구부러지는 곳에 세워진 갈매기 표지판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이 갈매기 표지판을 그동안 고가의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갈매기 표지판을 팔아먹으려고 몰래 뜯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알루미늄이 아니라 다른 재질로 만들고 있습니다. 표지판은 표지만 하면 되요. 표지판은 잘 보이기만 하면 돼요. 비쌀 필요 없어요. 표지판에 잘 보이라고 금칠할 필요가 없어요. 표지판에 다이아몬드를 박을 필요가 없어요. 표지판을 금으로 만든다면 서로 뜯어가려고 싸움이 날 거예요. 교회는 표지판이에요. 사람들이 교회당에 금칠을 하고 기득권을 주장하며 싸워요. 여러분! 교회는 표지판이에요. 목사는 표지판이에요. 성도는 표지판이에요. 십자가는 표지판이에요. “여기서 예수님이 죽으셨다. 여기서 너희 죄가 여기서 사해졌다. 너희는 구원받았다.”라는 표지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표지판이에요. 표지판답게 삽시다. 싸우지 맙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고대에 왕들이 행차를 하면 앞에서 막히지 않도록 길을 여는 길잡이들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대통령이 나가면 길을 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높은 벼슬아치가 행차를 하게 되면 길잡이가 앞에 먼저 가면서 “모두 물렀거라. 모두 물렀거라.”라고 크게 외칩니다. 그러면 길을 가던 백성들이 길 양 옆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조아립니다. 이때 길을 여는 길잡이를 갈도라고 합니다. 갈도는 외칠 갈(喝)자에 길 도(道)자를 써서 외쳐서 길을 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 말은 요한이 예수님의 갈도, 예수님의 길잡이라는 거예요.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의 길을 곧게 했을까요? 그것은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 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26절에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31절에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33절에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물로 세례를 주게 하셨을까요? 구약 성경에는 물세례가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물세례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러면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는 헬라어로 밥티스마입니다. 밥티스마는 밥토와 밥티조라는 말과 관련된 말입니다. 밥토는 안에 담그다, 아래 담그다, 빠지다, 빠뜨리다, 목욕하다, 씻는다는 뜻이고, 밥티조는 세례를 주다는 뜻입니다. 단어의 뜻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세례는 사람을 물에 완전히 잠기게 했다가 나오게 하는 의식입니다. 침례라고 하죠. 침례교는 아직도 이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침례를 행했습니다.
그러면 세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례에는 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의미하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먼저 물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몸이 70프로가 물입니다. 물만 잘 마셔도 노화를 많이 막을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나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물로 씻으라고 했습니다. 왜 물에 몸을 씻었을까요? 나아만은 침례를 받고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를 받으셨죠? 여러분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이 땅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하늘의 속한 생명입니다. 또 물은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만약 물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온 세상은 정말 더러울 것입니다. 레위기 14:8에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고 했고, 16:24에 “거룩한 곳에서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씻는 것은 일상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어요. 이것을 루터는 매일 세례라고 했어요. 또 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물은 생명이면서 죽음을 상징합니다. 노아 시대이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세례는 일종의 죽음입니다. 세례는 육적인 삶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물에 잠길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고, 물에서 올라올 때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 세상적인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성경의 체계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받습니다. 세례는 몰래 숨어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세례는 결혼식과 유사합니다. 결혼식은 공개적으로 해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결혼식을 하지 않거나 조용히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결혼식은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해요.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부부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공포하는 의미예요. 결혼식은 사회적 공인을 받는 의식이에요.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증인들이에요. “우리는 사랑해서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부입니다.”라고 알리는 거예요. “이제 저는 이 여자만 바라보겠습니다. 이제 다른 여자는 바라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알리는 거예요. 이게 결혼이에요. 세례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이 사람은 이제 내 아들딸이니 건들지 마라.”라고 공포하고 인치는 예식이에요. 또 세례는 결혼식처럼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공포하는 예식이에요. 요즘 세례를 얼렁뚱땅 대충 받기도 하지만 세례라는 것은 결혼식을 하는 신랑신부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여자(남자)만 사랑하겠습니다.”라고 서약하는 것처럼 “이제 저는 핍박이 오고, 고난이 오고, 심지어 죽음이 와도 내 믿음을 지키겠습니다.”라고 공포하는 예식이에요. 나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결혼하는 거예요.
영화, 텔레비전, 유튜브에서 끊임없이 영화와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영화들과 드라마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너는 이성적인 존재이다.”라는 답을 제시합니다. 이것들은 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은 바로 당신의 몸입니다. 당신의 몸을 가꾸고, 사랑하고, 내보이고, 어루만지고, 자랑하세요. 당신은 이성애, 동성애, 성적 갈망을 추구하세요. 당신은 평생에 걸쳐 연애와 밀회와 성적 만족을 누려 마땅한 존재입니다.” 이게 스크린이 오늘 사람들에게 던지고 있는 대답들이에요. 유아인은 배우는 성을 파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학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지적인 존재입니다.”라고 합니다. 학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성이 곧 당신입니다. 당신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추론하는 존재입니다. 인수분해 공식, 미적분 공식, 시사 상식, 영어 단어가 당신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니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쌓으세요. 지식이 바로 당신입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면 우등한 존재가 되고, 못하면 열등한 존재가 돼요. 기업들은 텔레비전, 유튜브, 인터넷을 통해 온갖 광고를 쏟아 놓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광고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제시하는 답은 “당신이 가진 돈이 곧 당신입니다. 인생의 핵심은 돈을 벌고 돈을 쓰는 것입니다. 좋은 핸드폰을 사시고, 좋은 가방을 사시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을 사세요. 이게 당신입니다. 돈이 없다면 대출을 받아서 사면됩니다. 돈을 버세요. 돈을 쓰세요. 돈이 당신입니다.” 현대 세계는 끊임없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당신을 돌봐줄 이는 당신뿐입니다. 당신 자신은 당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과제지요. 스스로를 기르고, 돌보고, 사랑해주세요. 당신이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해야 가치가 생기고 당신이 의미를 부여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 외에 가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을 가장 먼저 돌보고, 만족시키고, 위로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황홀하게 해주세요.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대답은 당신은 세례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을 받으며 주님의 가족이 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루터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세례 받았다는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당신이 알아야 하는 전부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향해 형편없다고, 쓸모가 없다고,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머리를 흔들며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야단을 쳤습니까? 부모입니까? 선생님이었나요? 아니면 주변의 어떤 어른이었나요? 우리는 이런 자책에 익숙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고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상기시킵니다. 예, 맞습니다. 우리는 쓸모없고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녀 삼으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나는 바로 죄인이었지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속의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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