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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풍뎅이, 잠자리, 나비, 똥파리가 숲속에서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풍뎅이가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더니 “너희들! 나처럼 웅하며 날 수 있어?”라며 잘난 체를 했어요. 옆에 있던 잠자리가 풍뎅이에게 질 수 없었는지 제트기처럼 멋지게 비행을 하더니 “너희들! 나처럼 멋지게 날 수 있어?”라고 했어요. 그러자 나비가 큰 날개로 나풀나풀 날면서 “너희들은 나처럼 우아하게 날 수 있어?”라고 했어요. 똥파리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들! 나처럼 똥 먹을 수 있어?” “나는 누구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나 성질을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정체성을 현재의 나는 항상 과거의 나와 같으며 미래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본질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똥파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이 영어로 아이덴티티입니다. 아이덴티티의 약자가 ID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대부분 아이디를 하나씩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아이디가 정체성(identity, identification)의 약자입니다. 저는 인터넷상에서 두 가지 아이디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븐 스톤(sevenstone)입니다. 일곱 개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베드오브다바르(ebedofdabar)입니다. 히브리어로 말씀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아이디를 24-5년 정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든 이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돌멩이다. 나는 말씀의 종이다.” 이게 제 아이디입니다. 이 아이디에 제가 생각하는 저의 정체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디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변하지 않는 나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이 요단강 부근 여러 곳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누가복음 3:7에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스라엘 땅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내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19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은 예수님의 원수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유대인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했습니다. 마태는 5번, 마가는 6번, 누가는 5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는데 요한은 71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이라는 말이 많은 부분 예수님의 원수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오셨는데 원수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원수가 그리스도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의 원수가 목사이고, 장로의 원수가 장로이며, 성도의 원수가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원수라는 말은 주님의 원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바울에게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원수도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원수가 되지 마세요. 교회의 원수가 되지 마세요.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누구냐고 물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20절,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했다는 말은 요한이 한 치의 가감이나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사람들 앞에서 공포했다는 의미입니다. 애매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흐릿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암울한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심중에 요한이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보냈다는 말은 요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대답을 하지 않거나 애매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런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아주 애매하게 대답했습니다. 창세기 3:3에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얼버무려 대답했습니다. 얼버무리지 마세요. 분명하게 대답하세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이 애매한 태도는 하와가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는 뜻입니다. 뱀은 하와의 애매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노 전 대통령이 대답했습니다. “애매하게 믿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니까 솔직한 대답이죠. 그런데 그분의 대답이 오늘의 한국 교회 모습인 것 같습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인 크리스천이 너무 많아요. 노 전 대통령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니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알 수 없느니 애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줄 알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신 것을 알잖아요. 그러면 애매하게 믿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애매한 기독교, 애매한 복음, 애매한 목사, 애매한 크리스천. 애매한 신앙이 기독교를 세속화 시키고 있습니다.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딛고 하나님과 세상을 오가며 적당하게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러분! 애매한 신앙에서 떠나십시오. 크리스천으로서 태도를 분명히 하십시오. 믿는 척, 안 믿는 척 하지 마십시오. 아닌 것은 분명하게 No라고 말하세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요한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 요한은 모두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0장은 요한을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4장은 요한을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구약 예언의 한 부분입니다. 태어날 때 하나님의 직접적이며 기적적인 간섭하심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13에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1:15에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성경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 중에 요한보다 더 높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 대한 호화스러운 호칭들을 모두 거절합니다. 본문에 “누구냐”라는 말이 세 번, “무엇이냐”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그리고 ‘엘리야냐, 선지자냐’라는 말이 한 번씩 나옵니다. 요한은 계속되는 질문에 한결같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28절에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베다니는 두 곳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베다니이고, 다른 하나는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입니다. 베다니의 ‘벧’은 ‘집’이라는 뜻이고, ‘아니’는 ‘가난한’이라는 뜻입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집, 빈민촌, 슬픔의 집, 고통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과 같은 도시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유대 광야 가장자리에 빈민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이고, 요단강은 해발 –200m입니다. 요단강은 바다보다 낮은 곳입니다. 요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이 아니라 낮고 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베다니, 빈민촌으로 갔습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거예요. 요한은 겸손으로 허리를 꽁꽁 동여맨 사람입니다.
27절에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신발의 끈을 푸는 일은 노예들이 했습니다. 여기서 신은 샌들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신발이 아닌 샌들의 끈을 풀고 샌들을 벗겨드리는 일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하찮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종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23절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곳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복된 자리입니다. 요한이 광야로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가진 겸손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왕복을 입고 연설을 하는 헤롯을 보고 사람들이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헤롯이 그것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헤롯은 벌레밥이 됐습니다. JMS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연예인들이 열광하는 사람들과 개인의 삶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낍니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쾌락에 빠집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마십시오.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선지자냐? 계속 되는 질문에 요한은 한결같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수백, 수천 번 이런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몰려드는 사람들과 그들이 던지는 칭찬의 소리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습니다.
존 라일 감독은 자신의 요한복음 강해 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은사나 금전이 일할 시간이나 널리 사용될 수 있는 능력을 공히 소유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겸손만은 누구나 소유해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아름답게 나타날 은혜이다. 우리가 임종을 맞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무한한 겸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때는 우리의 삶 전체가 길다란 불온전함의 목록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존라일, 요한복음 1권, 68쪽) 앤드류 머레이는 기독교를 겸손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가장 낮추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간다고 했습니다. 또 가장 낮은 겸손이 가장 높은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기원전 600년 경 고대 그리스 세계에 일곱 명의 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사람은 탈레스(Thales of Miletus, 624- 546 BC)라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탈레스는 “남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충고(조언)하는 일이라고도 함)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두 번째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탈레스가 대답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은 잘 보입니다. 그래서 충고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정체성을 찾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목사는 위험한 직업입니다.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교만해지기 쉬워요. 정체성을 잃을 수 있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수많은 설교를 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교만해지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실제 보다 더 낮추어서 대답했습니다. 더 겸손해졌어요. 이것이 사도 요한의 겸손입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자신을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23절,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사야 40:3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평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말은 길을 반듯하고 평탄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대로라고 했습니다. 대로는 히브리어로 메실라입니다. 메실라는 인공적으로 만든 큰 길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자연스럽게 난 길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난 길을 히브리어로 데레크라고 합니다. 메실라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 큰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대로는 하나님이 오시는 길입니다. 주의 길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오시는 큰 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난 길을 닦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길을 닦는 모습을 봤어요. 시골길은 대부분 꼬불꼬불한 오솔길입니다. 그런데 들판 한 가운데로 큰 길을 냈습니다. 어른들은 삽과 곡괭이로 길을 닦았어요. 포크레인이 없던 시골 마을이었어요. 길을 닦는데 삽 한 자루가 전부였어요. 그렇게 닦은 길로 마차, 손수레, 자전거가 다녔어요. 만약 닦아놓은 길이 없었다면 우리는 논두렁 같은 길로 풀숲을 헤치며 걸리고, 빠지고, 비틀거리며, 학교를 갔을 것예요. 그런데 누군가가 닦은 길이 있었기에 배울 수 있었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며, 물건을 살 수 있었어요. 도로가 없는 세상은 정말 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길이 없으면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 사람들이 오고갈 수 없어요. 모든 것은 길을 통해서 오고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페르시아 왕의 길이 있습니다. BC 6~4세기 페르시아왕들은 서 아시아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키루스 2세는 인도 국경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습니다. 영토가 너무 넓어 키루스 2세와 그 이후의 왕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거대한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길이 다리우스 대왕이 만든 <왕의 길>(Royal road)입니다. 왕의 길은 지중에 동쪽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산궁을 잇는 길이었습니다. 왕의 길은 2700km에 달하는 긴 길이었습니다. 왕들은 길 곳곳에 군대를 배치해 수비와 교통을 정리했습니다. 또 로마의 길이 있습니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후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와 아시아까지 정복했습니다. 로마는 이렇게 넓은 땅을 통치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로마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처럼 쭉 뻗은 가도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작은 길을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전성기 때에 이 도로는 40만 킬로미터에 달랬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로마는 도로가 발달했습니다. 주요 도로는 돌을 얹어 반듯하게 포장했고, 나머지는 자갈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도로 덕분에 로마인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군대의 이동이 수월해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자금이 오가자 생활이 아주 풍요로워졌습니다. 이 도로로 로마에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물건들이 올라왔습니다. 로마 상인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은 잘 건설된 도로망 덕분이었습니다. 최초로 만들어진 아피아 가도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도로에 가면 로마 시대에 새겨진 수레바퀴 자국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도로에 고대 카타콤의 이정표가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의 무자비한 공격과 공작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동맹국들과의 결속을 유지하고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도 이 길을 통해서 동맹국들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길을 통해서 소통하는 것이 로마의 힘이었습니다. 로마의 힘은 도로에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 시대에 이 도로를 통해 세계 각지로 복음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또 중국과 인도, 서남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있습니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이 유럽에 팔렸기 때문에 비단길이라고 불렀습니다. 상인들은 이 비단길을 통해 여러 국가들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무역의 꽃을 피웠습니다. 이 외에도 사하라 사막의 교역로가 있고, 잉카의 길, 인도반도의 대로, 대서양 횡단로, 9289km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경부고속도로가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없었다면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우리나라는 서울로 대부분의 도로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서울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각종 농산품이 다 있습니다. 만약 도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도로를 통해 군사, 경제,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길 때문에 부요해졌고, 길 때문에 편리해졌습니다. 길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것이 막힙니다.
시편에 아주 중요한 길이 나옵니다. 그 길은 시온의 대로입니다. 시온의 대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고라 자손은 그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 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대로는 시온을 향해 마음 속에 난 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길입니다. 믿음의 길이고 영적인 길입니다. 이 길은 육신의 욕망을 거스르는 길입니다. 내 자신을 부인하는 길입니다. 세상과 반대되는 길입니다. 요한이 주를 위해 준비한 길은 보이는 육신의 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오시도록 하는 마음의 길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대로를 놓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오시는 하나님의 대로를 놓는 방법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는 것은 세례 요한이 만들기를 그렇게 원했던 주의 길을 우리 마음에 닦는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 사이는 약 43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이 시기는 국제적 격변기입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 제국(BC 400-BC 331)이 헬라 제국(BC 331-BC 63)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하고, 헬라가 다시 로마(BC 63-70)에 의해 점령을 당했습니다. 세계 4대 제국 중 3대 제국이 이 시기에 일어나고 망했습니다.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고 유대인들에게 헬라 문화를 강요하면서 유대교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헬라의 안티오쿠스 4세는 BC 2 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8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고, 돼지로 제사를 드렸으며,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게 했습니다. 성전에 제우스 신상까지 만들어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끊어진 것입니다. 길이 끊어진 시대입니다. 암흑시대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격변기 마지막에, 길이 없어진 끝에 출연해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길이 끊어진 시대에 광야에서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광야에서 길이 됐습니다.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노먼 슈바르츠코프라는 미군 사령관이 있습니다. 노먼의 자서전인 <영웅은 필요 없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노먼이 군 생활의 초기에 군 생활에 회의를 느껴 군복을 벗으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업무에는 관심이 없고 자리만 보전하려는 간부들을 몰아세웠다가 오히려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노먼 중위에게 탐 월란 소령이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그것에 접근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지, 첫째는 떠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자리를 고수하는 것일세. 그래서 언젠가 더 높은 계급으로 승진하면 그 문제들을 해치우는 것일세. 그러나 잊지 말게. 자네가 떠나면 나쁜 놈들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노먼은 나쁜 놈들이 이기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군에 남았습니다. 베트남에서 대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대가 이동하는 중에 흑인 병사 한 명이 지뢰를 밟아 다리가 한쪽 날아갔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병사는 부들부들 떨며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가까이 가는 병사는 없었습니다. 어디에 지뢰가 있는지, 적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노먼은 흑인 병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병사를 엎고 지뢰밭에서 나왔습니다. 지뢰가 어디서 또 터질지, 어디서 베트콩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자기도 다리 한 쪽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흑인의 인권이 거의 없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백인 최고 지휘관이 흑인 사병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지뢰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노먼은 군인들의 길이 된 사람입니다. 노먼은 미군의 개혁의 길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우리 앞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이 길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이 길이 막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하는데 오히려 길을 더 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분열하고, 미워하고, 싸워서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주님께 대하여 닫혀버렸습니다. 주님을 위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대로를 만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주의 길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 길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십시오. 요한처럼 길을 만들다 요한처럼 예수님께서 밟고 가는 길이 되십시오. 이 시대에 주님을 위한 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길이 되신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길이 됩시다. 마태복음 23:1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길을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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