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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맥도널드의 「빨간 클립 한 개」라는 책이 있습니다. 빨간 클립 한 개를 집 한 채로 바꾼 스토리예요. 맥도널드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여자 친구에게 생활비를 의존하며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백수 청년이었어요. 어느 날 그에게 어린 시절했던 <비거 앤 베터(Bigger and Better) 게임>이 생각나요. 이것은 작은 물건을 들고 돌아다니며 더 크고(Bigger) 더 좋은(Better) 물건으로 바꾸는 일종의 물물교환 게임이에요. 맥도널드는 자신의 블로그에 빨간 클립 하나를 집 한 채와 교환하겠다는 말도 안돼 보이는 목표를 올려놓고 이 게임을 시작했어요. 그는 블로그에 자신의 꿈을 담은 ①빨간 클립을 펜이나 스푼 등의 물건과 교환할 것을 희망한다고 올렸어요. 이틀 후에 밴쿠버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연락이 왔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②물고기 모양의 펜과 빨간 클립을 교환하고 싶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교환한 물건은 몇 백 원도 안 되는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그들이 교환한 이야기들은 밴쿠버까지의 교통비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었어요. 맥도날드는 블로그에 이 펜이 어떤 물건인지, 원래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올렸어요. 그 다음에는 미국에서 교환을 원하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시애틀까지 직접 찾아간 맥도날드는 웃긴 얼굴 모양을 하고 있는 ③문고리와 물고기 모양의 펜을 교환했어요. 이후에 맥도날드는 얼굴 모양의 문고리를 ④바비큐 파티용 스토브로 교환했고, 스토브를 다시 ⑤캠핑용 발전기로, 발전기를 다시 ⑥파티용 맥주와 네온사인으로 교환했어요. 교환이 반복될수록 물건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더욱 풍부해져 갔어요. 맥도날드는 파티용 맥주와 네온사인을 몇 번의 추가적인 교환을 통해 피닉스 지방에 있는 ⑦주택의 1년 임대권과 바꿨고, 주택 임대권을 유명 가수인 앨리스 쿠퍼와의 ⑧데이트권과 교환했어요. 맥도날드는 앨리스 쿠퍼와의 데이트권을 ⑨‘키스 스노 글로브’(kiss snow globe)라는 한정판 장난감으로 교환했어요. 그는 이 교환권을 다시 ‘키스 스노 글로브(kiss snow globe)’를 한 영화 제작자가 제안한 영화 ⑩단역 출연권과 교환했고 그것을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던 한 중년 신사로부터 ⑪주택과 교환하는 데 성공했어요. 빨간 클립 한 개로 교환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의 일이에요. 그는 불과 14번의 교환만으로 빨간 클립 한 개를 집 한 채로 바꾸는 데 성공했어요. 그는 여자 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해 결혼을 하고 지금은 그 집에서 살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담은 책도 펴냈어요. 마태복음 17:20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클립 한 개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카일 맥도날드의 빨간 클립 한 개처럼 작게 시작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기독교의 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독교 최초의 신자들이 나와요.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요. 기독교가 이 두 사람에 의해서 시작된 거예요. 정말 작게 시작했죠. 욥기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성경은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을지라도 자네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걸세.”라고 번역했습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정말 보잘 것 없었었지만 나중은 정말 창대해졌어요. 이 말씀의 은혜가 우리 교회에, 여러분의 인생과 자녀들의 나가는 앞 길에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 중에 하나는 안드레로 베드로의 동생이에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을 성경학자들은 요한이나 도마라고 생각해요.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밝히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근거는 없어요. 그냥 추측일 뿐이에요. 안드레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을 믿고, 최초로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이에요. 기독교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기독교는 이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됐어요.
35-37절에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어요. 37절의 ‘따르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콜루떼오입니다. 아콜루데오는 ‘뒤 따른다, 따라간다, 동반하다, 함께 따라가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함께, 동시에’라는 말과 ‘길’이라는 말의 합성어로 ‘함께 길을 가다’, ‘동일한 길을 가다’, ‘동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서 계신 그 길에 나도 서고, 예수님의 가시는 그 길을 나도 간다는 말이에요. 내 뜻,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거예요 잠시 잠깐이 아니라 일평생, 영원히 따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가셨나요? 십자가의 길을 가셨어요.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인가요?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뽑아서 로마 병정을 때리셨나요? 자신의 손에 못을 박는 사람들의 손에서 못을 빼앗아 못으로 로마 병정들을 찔렀나요? 아니에요. 맞고 찔리고 죽으셨어요. 어떤 목사님이 천국에는 바보들만 있을 거래요. 예수님은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질한 사람들을 향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어요. 예수님의 길은 바보의 길이에요. 십자가의 길은 바보의 길이에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바보의 길을 가는 거예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거예요. “따르거늘”이라는 말은 두 사람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제자가 되기 위해 따라갔다는 의미예요. 신약성경에 이 단어가 90번 정도 나오는데 80번이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관련해 나와요. 이 따른다는 말은 제자의 삶, 제자도를 나타내주는 거예요. 따른다는 말은 신약성경에 흐르고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예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거예요. 나 욕심, 내 자랑, 내 인생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거예요.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에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두 사람은 그 동안 가르침을 받던 선생님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떠났을까?’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두 번 밖에 증거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예수님을 두 번 밖에 보지 않았어요. 물론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많이 가르쳤을 거예요. 그래도 이 두 사람은 두 번 밖에 본 적이 없는 예수님을 길에서 즉시 따라간 거예요. 이제까지 아무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의 출신에 대해, 학문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틀림없이 예수님의 행색은 초라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두 번 보고 따라간 거예요.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어요. 그들은 앞뒤를 재지 않고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할 정도로 그 자리에서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어요. 존 파이퍼의 「모험이 답이다」라는 책이 있어요.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해요.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모험을 하는 것이다.”(27쪽) 모험이 답이라는 거예요. 케빈 하니 목사님의 「무모한 믿음」이라는 책이 있어요. 케빈 목사님은 무모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라고 했어요. 어느 날 케빈 목사님은 아들과 함께 마을 축제에 참석했어요. 퍼레이드를 하는 아이들이 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더래요. ‘무슨 봉지일까?’라고 생각했어요. 축제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봉지에 들어 있던 사탕을 꺼내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던져주었어요. 이 사탕을 던져주는 아이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졌어요. 한 유형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사탕을 던졌어요. 이들은 사탕을 던지는데 너무 신중한 나머지 퍼레이드 행렬이 한참 진행됐는데도 사탕을 한 번도 던지지 못하더래요. 이와는 극적으로 대비되는 다른 한 유형은 퍼레이드가 시작되자마자 두 손에 가득 사탕을 움켜쥐고 사람들에게 막 뿌리더래요. 그 아이들은 자신이 던지는 사탕을 받기 위해 팔짝팔짝 뛰면서 공중으로 손을 뻗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쁨을 만끽했어요. 멈추지 못하고 사탕을 던지는 기계처럼 아이들은 막 사탕을 뿌렸어요. 목사님의 눈에 그들이 아주 무모해 보이더래요. 전도서 11:1에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탕을 막 뿌리는 아이처럼 신이 나서 형 베드로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어요. “형!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 그는 앞뒤를 재지 않았어요. 그냥 외쳤어요. 형! 형! 내가 메시야를 만났어. 그는 흥분했고, 기뻤고, 감격했어요. 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모해 보였고, 위험해 보였고, 무식해보였으며, 막무가내처럼 보였어요. 믿음은 무모한 거예요.
성경은 이런 무모해 보이는 사람들의 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어디로 갈지 아직 지시하지 않았어요. 이런 무모한 요청이 있나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짐을 싸서 무작정 떠났어요. 아브라함처럼 무모한 사람이 있을까요? 무모한 요청에 무모하게 순종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무모한 사람의 대가예요. 다윗은 키가 3m에, 갑옷을 입고, 칼과 창과 방패로 무장한 골리앗을 향해 돌멩이 다섯 개 들고 달려들었어요. 얼마나 무모해 보였는지 골리앗은 다윗을 비웃었습니다. 베드로는 한 밤 중에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소서.”라고 했어요. 물 위를 걷다니요? 베드로는 주님께 무모한 일을 구했어요. 그런데 주님도 무모한 말씀을 하세요. “물 위를 오라.” 주님이 오라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정말 바다 한 가운데서 물 위로 뛰어 내렸어요. 네 사람이 중풍병자의 침상을 매고 예수님께 왔는데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침상을 내렸어요. 이런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있을까요?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와서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었어요. 성경은 무모한 사람들의 행전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위험을 전혀 감수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잡고 있는 헌 밧줄을 놓아야 새 밧줄을 잡을 수 있다. 똑같은 일을 비슷한 방법으로 계속하면서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두 제자는 새 줄을 잡기 위해 과감하게 헌 줄을 놓았어요. 성경의 믿음의 인물들은 낡은 자신의 줄을 과감하고 놓고 주님의 새 줄을 잡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헌 줄을 놓으세요. 그리고 주님의 새 줄을 잡으세요. 이전에 살던 똑같은 삶을 반복하지 마세요. 버리세요.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보세요. 세상의 썩은 줄을 놓고, 주님의 줄을 잡으세요. 그래야 삶이 새로워져요. 교회 역사는 이 무모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어요.
그런데 두 사람의 행동이 조금은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사람은 선생님과 원수를 지거나 등진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떠났어요. 물론 요한 선생님이 이해를 했을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가 있잖아요. 함께 했던 동료들과의 우정, 인간관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과 동료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거예요.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요청하고 있어요. 성경만 그럴까요? 이 세상 모든 원리가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나를 포기해야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지 않나요? 주님을 만나는데 인간적인 이해관계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돼요.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 세상 어떤 관계 보다 먼저이어야 해요. 봄이 왔습니다. 제가 옆에 있는 방에서 화분에 블루베리 나무를 하나 키우고 있어요. 지금 싹이 예쁘게 나고 있어요. 블루베리는 꽃이 아주 예뻐요. 작지만 정말 예쁘고 탐스러운 꽃입니다. 겨우 내내 추위를 이기고 피운 꽃이에요. 아무리 예쁘고 정성이 들어가 있지만 꽃을 버리지 않으면 열매가 열리지 않아요. 난은 꽃이 참 예뻐요.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난은 꽃이 6개월 이상 피어 있어요. 난은 꽃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해요. 비워야 채워집니다. 버려야 얻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1장 35절에서 51절까지에는 열두 제자 중에 다섯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섯 명의 부르심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안드레처럼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경우이에요. 35-37절에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이라고 했어요. 두 번째는 빌립처럼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경우예요. 43절에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했어요. 빌립은 길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아주 드문 경우입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나 나다나엘처럼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경우예요. 40-42절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했어요.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됐어요.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어요.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를 받았어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예수님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어떤 사람은 친구나 이웃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녀요. 아주 드문 경우지만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병이나 사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믿어요. 그 외에 아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는 과거에 세례식을 할 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간증문을 받는 교회를 다닌 적이 있어요. 그들 중에 아주 드라마틱하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 두 명을 뽑아서 세례식 전에 간증을 하게 했어요. 간증문을 읽다보면 특이한 내용이 없이 아주 평범한 분들이 있어요. 구원받았나 싶을 정도로 신앙이 맹숭맹숭해요. 반면에 어떤 분의 간증문은 읽다보면 가슴이 울컥해요. 아주 드라마틱해요. 소설 같은 삶을 사신 분들도 있어요. 이렇게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게 했어요. 그런데 평이하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드라마틱하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됐느냐가 신앙의 우열이나 신앙의 상태를 나타내지는 않아요. 드라마틱하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평범하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보다 신앙이 더 나은 것은 아니에요.
역사상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안드레예요. 빌립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에 의해 직접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세 사람 중에 가장 평범하게 부름을 받은 사람은 베드로예요. 안드레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라는 의미가 있고, 빌립은 예수님의 의해 직접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름의 모습을 볼 때는 베드로보다 두 사람이 훨씬 드라마틱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머리가 된 사람은 베드로예요. 부름 받은 모습으로 볼 때는 베드로나 가롯 유다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끝은 완전히 다릅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을 따라가 한 사람은 사도가 됐지만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학자들을 요한이라고 말하지만 근거는 없어요. 예수님을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예수님을 믿었느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내가 현재를 어떻게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됐는지를 중요시 여기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근거를 내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이유를 내게서 찾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 뜻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출발점이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어떤 이단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었을 때의 간증문을 써서 갖고 다닙니다. 저도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저 보고 자신의 간증문을 보여주며 나는 이렇게 거듭났는데 당신은 어떻게 믿게 됐냐고 따져 물어요. 왜 그 사람이 그 간증에 목을 맬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구원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거예요. 자기처럼 구원받은 고백과 드라마틱한 감동이 없으면 구원받았는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아니에요.
이때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예수 이름이에요. 예수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이 없어요. 우리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은 거예요. 내 경험, 내 간증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출생이 거지같으면 어때요. 출발이 1등이면 뭐해요. 출생이 하늘에서 떨어졌든 땅에서 솟았든 무슨 상관이에요? 중요한 것은 부름을 받은 후에 내가 믿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그 은혜를 헛되게 하고 있는지 그 은혜를 가치 있게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아닌가봐? 나는 이상하게 태어났어. 나는 싹부터 글러먹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해요.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했어요.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가시와 엉겅퀴로 끝났어요. 창세기 3:18에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라고 했어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시작했어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흙으로 끝났어요. 창세기 3:19에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어요. 시작은 에덴인데 끝은 가시와 엉겅퀴였어요. 시작은 하나님의 형상인데 끝은 티끌, 먼지예요. 은혜를 헌신짝처럼 버렸어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시작한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시작한 거예요. 십자가로 시작한 거예요. 똑같아요. 내 경험으로 시작한 거 아니에요. 시작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요.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세상고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이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성령과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거예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거예요. 예수 이름만 보이는 거예요. 자꾸 내 간증을 보면 안돼요. 자꾸 사람을 보지 마세요. 자꾸 간증을 보고, 사람을 보니까 흔들리는 거예요. 시작에 우열이 없어요. 문제는 마지막에 베드로처럼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느냐 아니면 가롯 유다처럼 은혜를 헌신짝처럼 버리느냐는 거예요.
두 사람이 따라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 말씀은 “나를 따라오는 이유가 진리를 위해서이냐? 아니면 부와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이냐? 만약 너희가 이 땅 위의 것을 원한다면 돌아가라”라는 의미예요. 두 사람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랍비는 “나의 선생님, 나의 위대하신 분, 나의 크신 분, 나의 풍부하신 분”이라는 뜻이에요(캠벨 몰간). 두 사람은 예수님을 나의 위대하신 분이라고 고백했어요.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위대하신 분인가요? 아니면 하찮고 별 볼일 없는 그런 분인가요?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정말 크신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말은 “어디에 사십니까?”라는 의미예요. “나는 선생님이 머무시는 곳에 가서,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나의 위대하신 분, 나의 풍부하신 분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나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라는 의미예요. 두 사람은 예수님을 자체를 구하고 있어요. 여러분! 교회에 나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구하십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가장 복된 기도는 예수님을 구하는 기도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구하십시오. 두 사람은 예수님을 구했어요.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날 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어거스틴은 그날 밤을 이 두 사람에게 지극히 복된 밤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교회는 예수님이 이 두 사람을 놓고 하신 설교에서 시작됐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시작됐어요.
안드레는 그날 밤 예수님을 만나고 형 시몬에게 달려가 “형 내가 메시아를 만났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려가요. 안드레는 가슴이 뜨거웠어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시몬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듣다’라는 뜻이에요. 갈대, 흔들림, 변덕스러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바위조각, 돌멩이라는 뜻입니다. 페드로는 헬라어로 게바와 같은 뜻입니다. 페트라는 바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음, 갈대, 흔들림, 변덕스러움이라는 이름을 돌멩이, 바위조각이라고 바꾸어주신 거예요. 예수님은 왜 시몬을 게바로 바꾸어주셨을까요? 충동적이고 불안정하며 동요하는 성격이었던 시몬을 기독교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잘 듣고 반석처럼 흔들림 없이 살아야 합니다.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이 설교를 잘 하는 목사님을 찾습니다. 정말 말씀을 사모해요. 그래서 말씀을 열심히 듣습니다. 핸드폰, 컴퓨터, 라디오로 길을 가면서, 산택하면서. 설거지하면서, 청소하면서, 설교를 열심히 듣습니다. 그런데 듣기만 할 뿐 들은 대로 살지를 않습니다. 듣고 말씀대로 살아야 게바가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4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혼돈한 세상에서 말씀대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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