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하나님의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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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29~34
주일오전예배 | 2023-03-1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29절에 이튿날이라고 했습니다. 이튿날은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증거한 그 다음 날입니다. 1:26-27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튿날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오실 메시야를 외친 그 다음 날입니다. 1장에 이튿날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35절에 또 이튿날 요한이 라고 했고, 43절에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라고 했습니다. 1장에 이튿날이라는 말이 세 번 연속해서 나옵니다. 이튿날, 이튿날, 이튿날, 21절에는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왜 이튿날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했을까요? 왜 날을 계속 세고 있을까요? 그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프로젝트가 일상의 날들 속에서 계속 이어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매일 똑같은 날들이 의미 없이 하루, 하루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이 그날처럼 보입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싱겁고 따분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이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는 이유는 시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지난 가을에 화단에 마늘을 심었는데 싹이 아주 조금 났어요. 파종 시기가 한참 지난 때인 12월 중순 쯤에 심었어요. 많이 늦었죠. 심자마자 강추위가 오고 눈까지 많이 왔어요. 지난 겨울 많이 추었잖아요. 그 추위에 덮개도 해주지 못했어요. 눈이 두 달 가까이 땅을 덮고 있었어요. 나무로 땅을 찔러보니 꽁꽁 얼어있었어요. ‘마늘 다 얼어 죽었겠구나!’ 그런데 얼마 전에 시커먼 땅에서 새 싹이 올라오는 거예요. 아내가 그것을 보면서 식물에서 가장 예쁜 것이 새싹인 것 같다는 말을 해요. 마늘의 생명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 눈이 덮인 꽁꽁 언 땅 속에서 생명이 계속되고 있었던 거예요.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자연 현상은 그냥 별 의미 없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세상에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시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반복되는 일상들, 자연현상을 보면서 은혜를 기억하세요. 제가 종종 방송 설교를 듣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전 교회에서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썼어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에요.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면 무죄를 입증할 증거들이 있지만 깨끗하게 교회를 사임했어요. 그 목사님의 이름을 검색하면 맨 위에 대한민국 성범죄자라고 떠요. 책까지 나왔어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어요. 사회에서 매장 당했어요. 사모님이 암에 걸리고 자신도 폐함에 걸렸어요. 살고 싶지 않았을 거 같아요. 그 분이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해요. 새벽에 눈을 떠서 예수님이 보이면 천국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새벽기도에 나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계속되고 있다는 표징이에요. 시간은 은혜의 기회가 아직 내게 남아있다는 표시예요. 죽었다는 것은 이제 시간 속에서의 은혜가 끝났다는 거예요.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은 은혜가 끝났다는 뜻이에요. 거기에는 더 이상의 기회도 더 이상의 은혜도 없어요. 여러분! 시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시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매일 같은 일들이 반복돼 싱겁고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 속에는 은혜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으로 사람을 단련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으로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시간을 참고, 시간을 견디고,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저는 성격이 굉장히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제 아내는 급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항상 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아내를 재촉했습니다. 빨리 하라고. 이러다가 늦는다고. 하지만 지금은 기다리지 않아요. 오히려 아내가 기다려요. 결혼 후 23년이 지난 지금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내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간으로 저를 연단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헬라어로 시간에 세 가지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이온입니다. 아이온은 영원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영원이라는 초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 있어요. 두 번째는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이에요.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한 달이라고 하잖아요. 크로노스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시간이에요. 우리는 크로노스라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어요. 세 번째는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이에요. 의미가 있는 시간이에요. 이것은 일상적인 시간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므로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이에요. 우리는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크로노스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일상의 크로노스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카이로스 시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43대 대통령인 조지 부시는 우등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었고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40대까지 자유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마흔 살의, 어느 주일날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오늘 당신에게 86,400달러를 주겠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오늘 안에서 다 써야 합니다. 만약 쓰지 않으면 그냥 없어집니다. 잘 활용하면 성공합니다. 이 돈은 남에게 빌려줄 수도 없고 저축도 할 수 없는 돈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요 하루입니다. 하루는 86,400초입니다.”라고 하시면서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부시는 말씀을 듣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써야겠다.’라고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열심히 살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86,400달러는 당일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축할 수 없습니다. 다음 날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86,400달러를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았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시간은 무의미해요. 하나님 없는 시간은 허무한 시간이에요. 하나님을 만나세요. 요한은 인생을 하나님 없이 무의미하게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시간 속에 담긴 은혜를 알았어요. 시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매일 반복되는 시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무의미했던 날들이 의미 있는 날들로 새롭게 다가왔어요. 하루, 하루가 너무 새로웠어요.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그 날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다가왔어요. 이튿날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예요. 내가 지금 사용하는 시간에 하나님을 초대하세요. 저는 2000년에 아내를 제 인생에 초대했어요. 제 아내가 제 인생의 의미가 됐어요. 이제 내 인생의 날들에 예수님을 초대하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내 인생의 참 의미가 되십니다. 주님 없는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 없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지 마세요.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마흔 살까지 애굽 왕궁에서 살고, 여든 살까지 미디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40, 40년의 삶은 딱 한 줄로 요약이 되요. 초기 40년은 세 글자로 요약이 돼요. 살인자! 다음 40년도 세 글자로 요약이 돼요. 양치기! 정말 허무한 인생이에요. 하지만 마지막 40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경을 썼어요. 그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예요. 모세는 시간 속에서 은혜를 경험한 후 이렇게 노래했어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하루가 쌓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쌓여, 1년이 되고, 1년이 쌓이고 쌓여 일생이 되는 거예요. 하루, 하루가 계속 쌓여 일생이 되는 거예요. 하루는 우리 일생의 시작이고, 일생의 과정이고, 일생의 마침이에요.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날 하루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시간이에요. 그 하루에 예수님이 없으면 영원한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모세는 자기 사는 날을 셌어요. 요한은 날을 세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셌습니다. 은혜가 지금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튿날에도 예수님을 보고 동일한 증거를 했습니다. 36절에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의 증거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했어요. ‘어린 양은 제사의 제물로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한결같이 예수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나침반의 바늘은 어디서나 남쪽과 북쪽을 가리킵니다. 배가 바람으로 아무리 흔들려도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남쪽과 북쪽을 가리켜요. 나침반을 뒤집고 흔들고 집어 던져도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같은 곳을 가리켜요. 바뀌지 않아요. 요한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항상 예수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백성들, 군인들, 세리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취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모두 잘 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요한이 최고로 잘한 일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요한은 감동적인 설교를 하고, 금식하고, 절제하며 검소하게 살아 사람들에게 덕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께 칭찬을 받은 이유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항상 예수님을 가리켰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목사는 윤리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인생과 복에 대해서, 회개에 대해서 다양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목사의 생명은 예수 이름에 있습니다. 목사의 능력과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목사의 생명도, 능력도, 사명도 끝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게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나침반의 바늘처럼 성도는 예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교회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가리키지 않고 다른 것을 가리키는 순간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나침반의 바늘처럼 예수님을 향해 항상 서 계십시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이고 이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교우 한 분이 우리 교회를 떠나게 됐어요. 얼마나 섭섭한지. 제가 떠나는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하고 우리 교회는 항상 여기 있을 거니까, 기도하고 싶고, 교회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우리 교회 이름은 등대예요. 등대는 움직이지 않아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등대가 캄캄한 밤에 배를 안내할 수 있는 것은 땅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등대는 배를 안내할 수가 없어요. 어렸을 때 친구들과 정월대보름에 쥐불놀이 하러 들판 여기저기를 다녔어요. 서리를 하기 위해 밤에 돌아다닌 적도 있어요. 지금은 밤에도 환하지만 그때는 밤이 되면 아무것도 안보였어요. 달이나 별이 뜨지 않으면 칠흑같이 어두웠어요.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서 유일한 빛은 하늘의 달빛과 별빛이었어요. 다른 별들은 다 움직이는데 북극성은 움직이지를 않아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고대의 배들은 북극성을 보고 항해를 했어요. 저는 북극성을 보며 길을 찾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북극성을 자주 바라봤어요. 북극성이 별 중에 으뜸인 이유는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에요. 지극성이라는 별이 있어요. 항상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서 지극성이라고 해요. 지극정성이라는 말이 여기서 왔어요. 그리스도인들은 지극성이 북극성을 항상 가리키듯 항상 예수님을 가리켜야 해요. 지극성처럼 요한은 항상 예수님을 가리켰어요. 어둔 세상에서 요한은 항상 광야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안내자가 되었어요.  

지고가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이로입니다. 아이로(αρω)데리고 올라간다, 메고 간다, 가져가 버리다, 없이 하다, 제거하다, 치워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말은 세상 죄를 메고 가져가 없애버리는 어린 양또는 세상 죄를 메고 올라가 제거해 버리는 어린 양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메고 십자가에 올라가 그 죄를 없애버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애버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속죄 제물로 소, , 염소, 비둘기 같은 짐승들이 쓰였습니다. 어린 양은 모든 속죄제물의 대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위해 자신이 어린 양을 준비했습니다. 이때 준비된 양은 나의 어린 양입니다. 인간의 어린 양입니다. 인간의 어린 양은 인간의 죄를 위해 인간이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 양은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해 준비한 어린 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산적한 문제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있고, 가정의 문제, 인생의 문제가 있으며, 사람, 질병, 죽음, 미래, 사회, 국가, 전쟁 등등 수 없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죄 때문에 오셨을까요? 성경을 보십시오. 죄 때문에 죽음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죄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죄 때문에 살인하고, 죄 때문에 미워하고, 죄 때문에 재난이 있고, 죄 때문에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죄 때문에 전쟁이 생겼습니다. 모든 게 죄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을 기록하셔서 읽게 하시고, 제사제도를 만드셔서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씻게 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죄를 회개 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진짜 문제는 죄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이 문제가 아니에요. 직장이 문제가 아니에요. 죄가 문제예요. 성경은 끊임없이 죄, , , 그리고 회개, 회개를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의 문제를 해결하세요. 회개해야 해요. 사람은 쉴 새 없이 회개해야 해요. 죄를 회개하면 다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주춧돌이며 기둥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에 우리에게 예수님 보다 더 평안함을 주는 주제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보다 강인함을 주는 힘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보다 더 부요함을 주는 보물은 없으며, 예수님 보다 더 풍요로움을 주는 것은 없으며, 예수님 보다 더 행복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7: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눈물이라는 말은 모든 삶의 고통의 문제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것은 모든 삶의 고통이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이 목자가 되실 때 우리 눈에서 모든 고통의 눈물이 사라집니다. 계시록 21: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은 어린 양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은 자들의 명부입니다. 어린 양만이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진리는 이 우주에서 가장 장엄하며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른 것은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19681224일 아폴로8호 우주선과 우주인은 인류 최초로 달을 선회했습니다. 7개월 후인 1969720일 닐 암스트롱을 태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습니다. 이때 암스트롱은 달의 표면을 걸었습니다.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신문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1726일에 제임스 어윈이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에 도착했습니다. 어윈은 달 위를 걷는 것은 물론 달의 지면 이동차를 운전해 이동까지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달에 도착해 달 위를 걷거나 차를 몬다는 것은 확실히 경이로운 일이요, 그 소식을 접한 세계인이 흥분하기에 충분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달에 착륙한 것이 아무리 역사적인 일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구에 오셔서 땅 위를 걸으신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그 어떤 힘이나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만 가능합니다. 닐 암스트롱은 달에 착륙해 돌아온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일보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 그런데 어윈은 자신의 수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달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후, 끝없이 펼쳐진 저 광활하고 거대한 우주가 단 하나님의 질서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더욱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쯤 인간이 달 위를 걷고 있다고 또 다시 대서특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구에 오셔서 지구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사건임을 나는 지금 달 위에서 통감하고 있습니다.”(이재철, 요한복음 중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는 것 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뉴스는 없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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