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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에 교회에서 삶은 계란을 나누어주죠. 요새는 구운 계란을 나누어 주더라고요. 계란은 껍데기 밑에 흰자가 있고, 흰자 안에는 노른자가 있고, 노른자 속에는, 그러니까 한 가운데에는 배아(눈)가 있습니다. 배아(눈)가 있어야 병아리가 되는 거예요. 계란에는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어요. 눈이 있는 계란은 유정란이고, 눈이 없는 계란은 무정란이에요. 무정란에는 배아(씨)가 들어가지 않았어요. 배아가 없으면 아무리 품어도 병아리가 되지 않아요. 그냥 썩어버리고 말아요. 어떻게 보면 배아를 뺀 나머지는 다 껍데기예요. 다 배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눈이 핵심이에요.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배아(눈)와 같습니다. 기독교에 많은 교리가 있어요. 그 중에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기도하고, 예배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도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면 껍데기 신앙에 불과한 거예요. 가짜 신앙이에요. 형식적인 신앙이에요. 죽은 신앙이에요. 무정란 신앙이에요 십자가와 부활이 있어야 살아있는 신앙이에요. 이 신앙이 있어야 부활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신앙은 부활하게 될 유정란 신앙입니까? 아니면 썩어 없어질 무정란 신앙입니까? 죽은 다음 동물처럼 썩어 없어진다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람은 영혼이 있어요.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아요.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면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요.
본문에 왜 기독교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지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때에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 날’이라고만 해도 되는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을 뒤에 덧붙였어요.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강조한 거예요. 그리고 그 날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일주일이 지난 뒤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어요.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8일이라는 기간은 시작하는 날과 마지막 날을 모두 포함한 날로 그 다음 주 일요일, 즉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첫 날에 제자들에게 나타셨고, 다시 나타나신 날도 일주일 후인 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 날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순간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부활의 생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무정란 신앙에서 유정란 신앙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유정란 신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님이 오신 거예요.
사도행전2:1-2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오순날은 일곱 번의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순절은 안식 후 첫날로 주일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이 주일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순절은 구약의 절기입니다. 성령강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님이 오셨을까요?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우리에게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지 않으면 나는 결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께서 여러분들 안에 내주하셔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님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성령강림이 주일에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무정란 신앙이 유정란 신앙이 된 것입니다. 주일 신앙은 유정란 신앙입니다. 주일 신앙이 부활신앙입니다. 주일은 부활의 생명이 있는 날입니다.
안식교가 있습니다. 공식 명칭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입니다. 안식교는 지금도 구약 성경의 안식일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교가 구약의 안식일(토요일)을 아직도 지키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이다. ② 십계명 중에 네 번째 계명이다. ③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셨다. ④ 사도들도 안식일을 지켰다. ⑤천국에서도 안식일을 지킨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안식교인들은 지금도 구약의 안식일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2:11에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절기를 하나님께서 폐하셨습니다. 절기와 안식일을 왜 폐하셨을까요? 구약의 절기는 그림자예요. 골로새서 2:15-17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모형)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과 사도들은 안식일을 지켰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16에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고 했고, 5:18에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셨어요. 사도들도 안식 후 첫 날에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20:7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 새 밤중까지 계속하매” 라고 했습니다. 이 전통이 이방 교회에까지 그대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에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끝난 거예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이제 주일을 지키는 거예요. 안식교는 무정란 신앙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안식교는 실체가 빠진 껍데기 신앙, 그림자 신앙이에요. 사도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했어요. 요한계시록 1:10에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내 되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셨다는 말이 아주 강조되어 있어요. 마태복음28:1, 마가복음16:2, 누가복음24:1, 요한복음20:1에 모두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이라고 했어요. 안식일 다음 날이라고 하지 않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이라고 했어요.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안식 후 첫 날이라는 말을 모두 강조한 거예요. 왜 그럴까요? 창세기 1:2-5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셔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세계를 비추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창조의 첫째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일주일에 마지막 날이라면 주일은 일주일의 첫째 날입니다. 창조가 일주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첫 날에 빛을 만드셨습니다. 부활은 새 창조의 첫 날입니다. 부활은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잉태된 날입니다. 부활은 우리 안에세 새 생명이 시작된 날입니다.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죄로 죽은 사람 속에 새 생명이 창조되는 날입니다. 주일은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우리 영혼에 부활의 생명의 빛이 비추어지는 날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범사에 주님의 부활의 빛이 비춰지기를 축복합니다. 영적인 축복의 날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라고 했습니다. 문들이라고 했어요. 하나의 문이 아니라 여러 개의 문이에요. 제자들은 모든 문을 다 잠그고 꼭꼭 숨어 있었어요. 예수님은 문을 걸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을 마리아에게 나타내지 않으셨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베드로가 애써서가 아니라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도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사람들 중에 함께 계시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을 동안 당신의 사람들과 더불어 계셨습니다. 주님이 숨어있는 자들에게까지 찾아가셨다면 그와 더불어 교제를 열망하는 자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의 숨바꼭질이 있어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하와와 에덴동산 깊숙한 곳에서 가서 숨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가서요. 모세가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요. 거기서 40년 동안 숨어 살아요. 출애굽기 3:1에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했어요. 광야 서쪽으로 갔다는 말은 광야 끝까지 갔다는 의미에요. 모세는 자그마치 40년이나 광야 깊숙한 곳에서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광야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는 모세를 찾아가셨어요. 시편 139:8-10에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어요. 스올은 지옥이에요. 지옥에 내려갔는데 주님이 거기까지 따라오셨고, 바다 끝에 갔는데 주님이 거기까지 찾아오셨어요. 다윗이 진짜 지옥에 갔다는 말이 아니에요. 열한 제자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6:56에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실 때 제자 중에 아무도 유대인의 불의에 항거하며 예수님을 변호한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은 특권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겠습니까? 숨지 마세요. 피하지 마세요. 회피하지 마세요. 도망가지 마세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어떤 선생에게 찾아오셔서 의견을 물으셨어요. “나는 사람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 싶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어디에 숨으면 제일 좋겠냐고 물었더니 어떤 천사는 바다에 깊숙이 숨으라고 하고, 어떤 천사는 산꼭대기에 숨으라 하고, 어떤 천사는 동굴 어둠 속에 숨으라 했지. 너는 무엇이라 하겠는가? 어디에 숨으면 사람들이 나를 찾아내지 못할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해요. “사람의 마음 속에 숨으십시오. 사람들은 설마 하나님이 거기 계시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미 와 계세요.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하나님을 쫓아내요. 제자들처럼, 아담처럼, 모세처럼 숨지 마세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조용히 함께 모여 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세상의 염려와 파당과는 결별하고 있을 때에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제자들은 집에 있는 모든 문을 잠갔습니다.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했습니다. 세상과 연결된 모든 문을 닫았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여러분! 때로 세상을 향한 문을 한 번씩 닫으세요. 유대인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열한 제자들은 주님의 도우심 외에는 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의논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의 일들과 가정의 어려움을 다 제쳐두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향하여 문을 닫고 그 문 안에 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 한 번씩 일상의 문들을 닫고 주님께로만 마음의 문을 여세요. 여러분의 마음이 쇼핑에 몰두하거나 세상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한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나타나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모든 문을 닫아버리고 주님의 은혜만을 기다릴 때 사랑하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문을 닫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임재를 느끼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시끄러운 거리가 아니라 조용한 골방에 주님이 오십니다. 시장 한 복판이 아니라, 회중이나 길거리가 아니라 성소에 있는 사람이 가장 그분을 똑똑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성전에 나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문을 닫으세요. 교회에 와서까지 세상을 향한 문을 열고 있지 마세요. 문을 닫으세요. 그래야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들은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요? 과거 어부이던 시절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 할 때 만선이었던 추억을 이야기 했을까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집에서 행복하게 살던 지난 날들을 이야기했을까요?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그들이 그리던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에 만난 부활하신 주님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길에서 만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 밤에 그들의 모든 대화의 중심은 예수님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관심과 이야기의 초점이 부활하신 주님께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 밤에 그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가득 채운 것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말이 오직 그분께 쏠려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의 생각과 마음이 부활하신 주님께 향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시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천군천사를 대동하시고 이곳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 임재하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문들을 다 잠갔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말씀이 저는 너무 놀랍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자신들이 숨어 있는 곳의 문을 모두 잠갔습니다. 그들은 작은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숨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곳에 들어올 수 없었고, 아무도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셨고 아무도 올 수 없는 그곳에 오셨습니다. 모든 문을 잠그고 있는데 주님이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과 뼈가 있는데 어떻게 벽을 통과해서 오셨을까요? 정말 신비롭고 놀라운 일입니다. 태산이 막아도 주님은 오십니다. 아무리 두꺼운 시멘트벽으로 막아도 주님은 오십니다. 두꺼운 강철로 여러 겹 벽을, 백 개 천개를 쌓아도 우리가 원한다면 주님은 오십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주님은 어디든지 사슴처럼 뛰어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주님은 비둘기처럼 날아가실 것입니다. 주님과 여러분들을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운데라는 말이 헬라어로 메소스(μέσος)입니다. 메소스는 ‘한 가운데, 중앙의, 한 복판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퉁이에 서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옆이나 모퉁이가 아니라 한 가운데 계십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서 당하는 일들, 슬픔, 고통, 아픔의 한 가운데에 계십니다. 스바냐 3:17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했고, 스가랴 2:10-11에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은 내 삶의 한 가운데에 계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 한 가운데 계십니다. 주님은 인류 역사 한 가운데 계십니다. 대통령이, 미국이나 중국, 강대국이 역사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역사의 중심에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십니다. 우리는 중심에 계신 그분을 따라가야 행복합니다. 그분을 따라가세요.
예수님은 오셔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대학교수가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종이를 한 장 주면서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꼭 가지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이 제자는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그 종이에 열심히 적었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러한 것들을 적어 교수님에게 보여드렸습니다. 교수는 그가 적은 내용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그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들은 매우 좋은 것들일세. 그리고 일리 있는 내용일세. 그러나 자네는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 해도 오히려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거리가 될 지도 모르네.” 이 청년은 깜짝 놀라면서 “교수님,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는 연필로 그 청년이 적어온 목록에 Ⅹ로 그어버리고 그 밑에다 ‘마음의 평화’라고 크게 써 주었습니다. 모두 얻어도 평화를 얻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참 평안은 주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참 평안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참 평안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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