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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이룰 성(成)자를 써서 (하나님이) 육신(肉身)을 이루셨다(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인간)이 됐다고 하지 않고 왜 육신이 됐다고 했을까요? 육신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사르크스입니다. 사르크스(σάρξ)는 살, 몸이라는 뜻으로 고깃덩어리, 살코기, 몸뚱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르크스는 아주 원초적인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말은 “말씀이 고깃덩어리가 됐다” 또는 “말씀이 살코기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주 낮고 천한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2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진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은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단 죄만 없으십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3:29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말씀은 강한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성육신은 능력의 말씀이 춥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답답하고 쓸쓸하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슬프고 아픔을 느끼는 연약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볼 수 없는 존재가 볼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죽는 존재가 됐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동정이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체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체휼은 처지를 이해하여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셨습니다. 한 없이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성육신을 도성인신(道成人身)이라고도 하죠. 도(말씀)가 육신이 됐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정신은 강한 자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 권세를 가진 자가 낮고 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극도로 낮고 천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치료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불치병에 시달렸습니다. 사도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수하면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자신은 병으로 죽을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세 번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하나님의 능력은 낮아지고 약해질 때 강해지고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탤런트 차인표 씨를 아시죠? 40대에 차인표 씨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한 간증입니다. 차인표 씨는 모태신앙으로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40여년 이상을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살았습니다. 차인표 씨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별짓을 다 했대요. 심지어 지저스라는 뮤지컬에 4년 동안 예수님 역할로 출연했대요. 그런데도 음성을 안 들려주시더래요. 그러다가 2006년 부인 신애라 씨와 컴패션의 홍보대사가 됐어요. 신애라 씨가 동인도의 콜카타 지방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신애라 씨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됐어요. 신애라 씨는 차인표 씨에게 대신 가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하지만 차인표 씨는 가기 싫었어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다가 결국 끌려가듯이 억지로 가게 됐어요. 가면서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얼굴 섞이는 게 싫어서 혼자 일등석을 타고 갔어요. 봉사를 가는데 일등석 자리에 앉아 왕처럼 간 거예요. 일등석에 자기만 있더래요. 아주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간 거예요. 인도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3-4시간을 달렸더니 시골 교회가 나오더래요. 가는 중에 인솔하시는 서정인 목사님이 이런 부탁을 했대요. “차인표 씨가 지금부터 만날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을 만나시면 아이들을 꼭 안아주십시오. 안아주면서 ‘너희들은 귀한 존재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해주십시오.” 차인표 씨는 그런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교회 앞에 수백 명의 아이들이 서 있더래요. 모두 구겨지고 더러워진 흰 옷을 입고 있어요. 그 중에 6-7살쯤 돼 보이는 남자 아이가 차인표 씨를 보고 손을 내미는 거예요. 차인표 씨는 무심코 그 아이의 손을 잡았어요. 그 아이의 손을 딱 잡는 순간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듣고 싶던 예수님의 음성이 그 아이를 통해서 들려왔어요. “인표야! 잘 왔다. 내가 너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이 아이 옆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태어났단다.” 아이들을 만나서 해주려고 했던 말을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자신에게 하시더래요. 차인표 씨는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찾아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헤매고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아이 옆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마태복음 5:3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아주 낮고 천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성육신은 기독교 신학의 최고의 신비입니다. 그러면 왜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을까요? 그것은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애로우스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걸리지 않은 병은 치료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 되시지 않는 한 그의 영혼을 구원시키실 수 없었을 것이다.” 존 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닏. “육신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연약해지기 쉽고 피곤해지기 쉬우며 고통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그야말로 육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모든 나약한 점들을 모두 간직한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풀과 같이 나약한 인간이 되셨다는 뜻입니다(존 라일 요한복음1, 48-49쪽).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왕이나 귀족처럼 다르 게 사신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하게 우리처럼 사셨다는 뜻입니다. 낮춘다는 뜻의 헬라어가 타페이노스입니다.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의 문자적인 의미는 ‘땅 바닥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땅 바닥에 엎드리다’입니다. 성육신의 정신은 땅 바닥에 엎드리는 것, 땅 바닥 위로 올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땅 바닥에 엎드리신 것입니다, 피조물 앞에 엎드리신 것입니다, 성육신은 땅 바닥 밑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거하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스케노오입니다. 스케노오(σκηνόω)는 ‘천막(텐트)을 치다(세우다), 천막(텐트)에 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가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세우셨다)’, ‘그가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사신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성육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천막집을 세우시고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 가운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임재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신 사건을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이 성막 중에 거하셨던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광야 생활 중에 천막 속에 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약의 그 옛날 집을 철거 하시고 새 집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구약의 당신의 옛 집인 성막을 무너뜨리시고 새 집을 지으신 사건입니다. 복음서의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새 집 짓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박대영). 계획자는 하나님이시고, 기술자는 예수님이시며, 도구는 십자가입니다. 마태복음 27:50-52에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성막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성막이 필요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 옛 천막집이 폐기되고 새로운 집이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로 옛 천막을 찢으시고, 새 천막을 세우신 것입니다. 성막의 휘장이 찢어지는 순간에 무덤들이 열리며 죽은 자들이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옛 집을 무너뜨리고 새 집을 짓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육신은 예수님이 새 집을 지으신 사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새 집을 지으려고 하실까요?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 성막(텐트)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몸은 이제 하나님이 거하시는 텐트입니다. 따라서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말은 “나는 예수님이 사시는 텐트가 됐다. 나는 하나님의 새 집이다.”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박대영). 여러분! 이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로운 텐트가 되었습니다. 죄로 폐가가 된 인간의 몸을 십자가로 예수님께서 새로운 집으로 조성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이 거하시는 새 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새 집입니다. 헌 집이 아닙니다. 폐가가 아닙니다. 천국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살 집입니다. 요한복음 14:3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1: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예루살렘 성이 된 것입니다.
저 어렸을 때는 이가 빠지면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를 집 지붕 위로 던졌어요. 그래야 이가 새 이가 난다고 생각을 했어요. 민속 신앙이죠. 요즘은 이렇게 하는 아이들이 없죠.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지금도 빠진 치아를 어깨 뒤로 집 지붕을 향해 던진다고 합니다. 브라질 어린이들은 빠진 이를 창밖으로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가 새 이를 준다고 합니다. 민속 신앙이 많이 비슷하죠. 어쨌든 헌 이가 빠져야 새 이가 나는 거예요. 이가 그대로 있으면 새 이가 나지 않아요. 헌 이가 있으면 새 이가 삐뚤게 나요. <두꺼비집짓기놀이>가 있습니다. 한 손을 땅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다른 한 손으로 모래로 덮어 두꺼비 집을 만드는 놀이에요. 손을 모래를 덮은 다음 손을 빼도 모래가 무너지지 않도록 두드려서 다져요. 그런 다음 손을 빼요. 하지만 모래에 끊기가 없으니까 잘 무너지죠. 그래서 두꺼비집짓기놀이는 비가 와서 모래가 젖었을 때 주로 합니다. 모래를 다지면서 이런 노래를 불러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손으로 모래를 두드리면서 박자를 맞추면서 부르죠. 이런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꺼비 중에 옴두꺼비라는 종이 있습니다. 옴두꺼비는 평상시에 독사를 보면 피해요. 그런데 알을 갖게 되면 도리어 독사를 찾아가서 독을 내뿜으며 싸움을 걸어요. 그러다가 독사에게 잡아먹힙니다. 일부러 잡아 먹히는 거예요. 두꺼비는 독사에게 잡아먹히면서 남겨둔 독으로 독사를 쏩니다. 독사는 죽게 되죠. 그러면 옴두꺼비 뱃속의 알들이 엄마 두꺼비와 독사를 먹이로 하여 새끼 옴두꺼비로 태어납니다. 두꺼비집짓기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 중에서 ‘헌 집’은 바로 자식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어미를 말하고, ‘새 집’은 새끼 옴두꺼비 자식들을 뜻해요. 엄마가 죽어야 새끼가 태어나는 거예요. 엄마가 안 죽으면 새끼가 태어나지 못해요. 헌 집이 무너져야 새 집이 생기는 거예요. 성육신의 목적은 죽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엄마예요. 엄마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살아난 거예요. 죽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걸리지 않은 병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 되시지 않는 한 그의 영혼을 구원시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목적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집을 짓기 위해 오신 거예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은 매우 빛난 광휘를 말합니다. 이사야 4:5에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화염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29-31에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은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2:11에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창조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영광을 이론적으로 빛, 권세, 능력 등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영광은 이론적이기 보다는 체험적인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금식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화를 함으로 인해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출애굽기 34:29-30에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자 그것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봤어요. 스데반 집사님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자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변했습니다. 사도행전 6:15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경험하는 영광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다보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집니다. 그런데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다보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모세처럼 얼굴이 빛이 나거나 스데반 집사님처럼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도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영광을 경험함으로 어두웠던 얼굴이 환하게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지난 2월 17일 금요일 8시 20분이었습니다. 금요일 심야기도회 전에 예배실 뒤에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가슴과 복부에 하얀 빛 같은 것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저는 앞을 보고 있었는데 제 가슴과 복부에 하얀 빛 같은 것이 보이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그 순간 갑자기 제 마음에 소망이 막 넘치는 거예요. 소망이 넘치니까 기쁨이 솟는 거예요. 한 달 전이나, 일주일 전이나, 저는 똑같은 사람이에요.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냥 소망이 막 넘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냥 기뻐요. 그 순간 제 얼굴이 달라졌겠죠. 저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에요. 여러분! 세상이 주는 소망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소망을 소유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이 아주 조금, 아주 살짝 우리 영혼이 스치기만 해도 우리 영혼은 달려져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본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완료입니다. 현재 완료형은 과거에 시작된 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보는 거예요. 또 본다는 말은 체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체험할 수 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에 그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비로운 경험을 어떻게 하게 됐을까 생각해봤어요. 그 주간에는 제가 다른 때 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었어요. 물론 성경을 읽는다고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저는 성경을 읽으면 힘과 소망이 생겨요. 평안해져요. 말씀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단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을 때 이스라엘의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오늘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는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습니다. 비느하스의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아기를 낳고 죽으면서 이가봇이라고 했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1에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희귀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카르입니다. 야카르는 ‘보배롭다, 귀중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주 귀한 보배처럼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바드입니다. 카바드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겁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을 무겁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제사와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오늘 우리 등대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내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지 기도해봅시다.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도록 애를 씁시다. 말씀과 예배와 교회를 무겁게 생각합시다. 사무엘상 2:30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존중히 여기다는 말씀이 히브리어로 카바드입니다.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 이 두 가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황금비율로 연합이 되어 충만하게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둘은 따로 떨어지면 안 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은혜와 연결된 정의만이 정의다운 정의가 될 수 있다.”(정의란 무엇인가?)라고 했습니다. 만약 부모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받아주고 용서만 해준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반대로 부모가 아이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매일 다그치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모가 아이의 실수를 단 한 번도 용납하지 않고 잘못할 때마다 회초리를 때린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은혜(사랑, 긍휼) 없는 진리는 숨이 막히게 할 것입니다. 은혜 없는 진리는 사람을 바리새인처럼 만들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 없는 은혜는 방종하게 할 것입니다. 구원파처럼 이단이 될 것입니다. 은혜 없는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진리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와 연결된 진리가 참 진리이고, 진리와 연결된 은혜가 참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은혜도 담고 있고, 진리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도 담고 있고, 정의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세요. 그리고 진리를 구하세요. 어느 하나만을 구하지 마세요. 기도하고 말씀도 보세요. 기도만 하지 마세요. 은혜받고 말씀도 보세요. 은혜의 사람도 좋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사람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은혜와 진리의 사람이 되세요. 은혜와 진리로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양념과 소스를 만들 때 중요한 것은 비율입니다. 비율이 달라지면 똑같은 양념인데 맛이 달라집니다. 비율에 따라 값비싼 일류 요리가 되기도 하고, 맛없는 삼류요리가 되기도 합니다. 비율이 중요합니다. 향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향 재료를 어떤 비율로 넣느냐에 따라 값싼 향수가 되기도 하고 비싼 향수가 되기도 합니다. 코카콜라는 매일 200개 국가에서 매일 200억 잔이 팔립니다. 초당 2만 잔이 넘게 팔리고 있습니다. 이 음료의 맛의 비밀은 들어가는 재료에 비율에 있습니다. 비율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황금비율로 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서는 은혜와 진리의 향수가 최상의 상태로 우리에게 풍겨 나옵니다. 저에게 은혜와 진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은혜와 진리를 적당하게 배합하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매우 은혜로운 사람이 됐다가 어떤 때는 매우 진지한 진리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인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성실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인색하고 완고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최상의 비율로 배합이 되어 충만하게 존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황금 비율로 배합이 되어 최상의 맛을 내고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를 원하신다면 사람에게 가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런데 은혜가 진리 보다 앞에 있습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진리입니다. 은혜로 구원받고 진리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요리에 고추장을 먼저 넣느냐 설탕을 먼저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설탕을 먼저 넣으세요. 당근을 준 다음에 채찍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실랑이가 붙으면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상대를 긍휼을 베푸세요. 은혜가 먼저입니다. 기독교인은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진리입니다. 출애굽기 34:6에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자비와 은혜가 먼저입니다. 진실보다 인자가 먼저입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한 번 밖에 안 나오는데 은혜라는 말은 세 번 나옵니다. 자비, 은혜, 인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다음에는 진리를 베푸세요.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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