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이 보다 더 큰 일 누가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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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43~51
주일오전예배 | 2023-03-2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영국의 버나드 쇼라는 사회비평가가 그림 애호가들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로댕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같은 그림인데 어떤 화가의 그림은 좋아하고, 어떤 화가의 작품을 싫어한다는 것이 이상해서 파티를 열고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초청했어요. 파티 분위가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버나드 쇼가 들어가서 그림 한 점을 가지고 나와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 여기 아주 훌륭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봐 주세요.” 사람들의 관심이 그림에 집중되었어요. 그때 버나드 쇼는 이 그림은 로댕의 작품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그 작품을 아주 혹독하게 비평하기 시작했어요. “그림이 그림 같지도 않다.” “색이 우중충하다.” “구도가 맞지 않는다.” “저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느냐?” 아주 혹독한 비판을 막 쏟아놓았다고 합니다. 그 때 버나드 쇼가 안색을 고치더니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이 그림이 로댕의 작품인 줄 알고 가지고 나왔는데 이게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네요.” 장내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편견!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한 사람의 노력을 순간 물거품이 되게 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내가 가진 생각이 편견이라는 것을 내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빌립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떻게 즉시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어요. 그 순수한 믿음이 정말 부럽고 놀랍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43-44절에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빌립, 안드레, 베드로 세 사람은 벳새다 사람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요한과 그의 형제인 야고보도 고향이 벳새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열둘 중 다섯의 고향이 벳새다인 거예요. 요한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세 사람이 모두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었다고 언급을 했어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맹인을 고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등 많은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벳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 안 믿는 거예요. 얼마나 믿지를 않는지 예수님께서 아주 혹독하게 책망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1: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화 있을진저! 슬프다, 아이고.”라는 의미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벳새다는 기적을 많이 일으켜도 도무지 믿지 않는 아주 완고한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빌립이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는 말씀은 세 사람이 아주 깊은 죄악의 수렁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믿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믿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빌립처럼 정말 깊은 수렁에서 건짐을 받은 거예요. 시편 40:1~3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고 했습니다. 빌립,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수렁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셨을 때 빌립은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 살지만 빌립처럼 순전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바닥에 살아도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벳새다가 사악한 죄악의 도성이었다면 갈릴리와 나사렛은 아주 촌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투박한 사투리를 썼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이 예루살렘이나 여리고 같은 도시에 사서 무화과를 주세요.”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도시 사람들은 그 갈릴리 사람이 나귀를 달라고 한 것인지 양을 달라고 한 것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6:72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말씨를 보니 예수와 같은 당이라고 한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적 태도도 뚜렷하지 않고 어중간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신앙은 이것저것 섞인 혼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정통 유대인들에게 무식한 촌놈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특히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 한 가운데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벳새다에서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듯이 나사렛 또한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촌사람들에게서 기독교가 시작된 거예요. 그 투박한 촌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기독교가 싹이 났어요. 지구의 한 구석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거예요. 벳새다는 어부의 집, 어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표현해서 죄송하지만 생선 비린내가 나고, 거칠고, 투박한 말이 오가는 오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을 날 수 있느냐? 이지성 작가가 젊은 시절에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어요. 한 출판사 직원이 계속 퇴짜를 놔도 계속 원고를 보내는 이지성 작가에게 당신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은 0.000000001퍼센트라고 충고를 했대요. 그런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어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확률은 0.00000000000001퍼센트도 안 됐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어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선한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선한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꾸기 시작하신 거예요. 이게 기독교예요. 이게 십자가예요. 예수님은 지금도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우리에게 선한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도시 사람들에게 무식한 촌놈이라고 조롱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보세요. 마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거지이며 소경이었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웃을 때 쓰던 말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그 말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빌립은 거지들이 쓰는 말조차 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구세주를 만난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빌립의 기쁨이 여러분이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 8:17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고, 예레미야 29: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비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가와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아요.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그것이 소중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도 감격이 없습니다. 은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그것이 소중한지 몰라요.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릅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면 밟아버릴 거예요. 돼지에게 가장 좋은 음식은 구정물이에요. 썩은 음식을 좋아해요. 은혜는 그 가치를 알고 갈망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만난 감격으로 흥분해 있는 사람들에게 나다나엘이 찬물을 끼얹습니다. 말을 통해서 볼 때 나다나엘은 배운 사람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이것은 성경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구약 성경에 한번도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선지자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7:52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갈릴리에서 선한 것이 날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지식 때문에 망할 때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식이란 18세까지 습득한 편견의 집합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렌스 피터는 교육은 더 높은 수준의 편견을 얻는 방법이다.”라고 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편견이 심하다는 거예요. 지식이 편견이라는 거예요.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 믿음, 내 인생, 내 행복을 방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지식을 버리세요. 내 경험, 내 생각, 내 지식을 버리세요. 그게 나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 내 영혼의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편견은 은혜를 막습니다. 바울은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겼어요. 하나님 앞에서 지식도 경험도 가진 것도 다 내려놓으세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편견으로 가득 찬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라  

와서 보라머뭇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곰곰이 이것저것 따져보라고 말합니다. 사물의 본성과 이치를 곰곰이 따져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의 본성이 깊이 썩어 냄새가 나는 상태를 안다면 결코 우리의 이성으로 그 분을 발견할 수 없음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혹을 가진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 관해 어떤 의심이 있습니까? “와서 직접 눈으로 보십시오.” 오셔서 그분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지 주님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선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누추한 곳에서 무엇인가 기대하지 않지만 주님은 거기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지만 세상을 바꾼 믿음이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키며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간사(δόλος)라는 말은 미끼라는 뜻입니다. 그 속에 간사가 없다는 말은 그 속에 미끼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미끼를 던지듯 말을 툭 던집니다. ‘아니면 말고식의 말을 툭 내뱉습니다. 그런데 그 툭 던지 말 때문에 상대방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마음이 벼랑으로 한 없이 떨어지기도 해요. 어떤 번역가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을 그 속에 야곱이 없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사기꾼을 꼽는다면 첫 번째가 야곱입니다. 형이 사냥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어요. 배고픈 형에게 말을 툭 던집니다. “, 내가 이 팥죽 줄게. 형의 장자권을 나한테 줘.” 배고픈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팥죽에 팔아버렸어요. 야곱의 간사함으로 가족은 찢어집니다. 하지만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천사는 야곱에게 이제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후에도 계속 야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야곱은 20년 전에 하나님께 벧엘에 하나님은 단을 쌓겠다고 서원하고 그 서원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10년 정도 흘렀을 때 야곱이 그 서원을 지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 말에 미끼가 없는 사람, 생각과 말이 똑같은 사람, 그가 바로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했기에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너를 보았다고 하셨을까요? 1세기 성경 시대에 이스라엘의 작은 시골 마을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토라를 공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우 덥습니다. 하지만 그늘은 아주 시원합니다. 랍비들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토라를 가르쳤습니다. 무화과나무 가지가 무성해지면 외부와 어느 정도 차단이 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속에서 무화과 열매 향기를 맡으며 기도와 묵상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배우고 기도와 명상을 했습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성경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기다렸고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학교였고, 기도실이었으며,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화과나무 아래는 오늘 우리 교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가르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나다나엘처럼 거룩한 곳이 있습니까?  

창세기 12: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머문 곳이 상수리나무입니다.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고, 상수리나무 근처에 살다가,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하란에 갔다가 돌아와 세겜에 거하다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상들과 더러운 잡다한 것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거기에서 과거의 삶을 정리하며 회개한 거예요. 또 야곱은 어머니의 유모가 죽자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고 거기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직전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돌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서약하게 했습니다(24:26).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백성들에게 학대를 당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은 그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6).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수리나무는 하나님을 만나는 상징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으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니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이 다락방에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셨고, 승천하신 후에는 이 다락방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다락방은 한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부활 후에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었습니다. 요한복음18: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곳이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집에 계신다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26:6, 9:33).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계시던 집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나다나엘이 주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 있습니까?  

여러분! 등대교회가 여러분에게 주님을 만나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되고, 상수리나무가 되며, 마가다락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내 무화과나무 아래로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무화과나무를 지키세요. 무화과나무를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 무화과나무 아래로 주님이 오십니다.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 양식이 있고, 쉼이 있고, 보호가 있으며, 하나님의 영예가 있습니다. 잠언 27:18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여러분의 영적 무화과나무를 지키세요.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양식을 먹고, 거기서 나오는 축복을 얻게 될 거예요.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아래서 토라를 공부하고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주님을 육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시간동안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영적으로 만나주셨던 주님을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그분이 바로 영적으로 만났던 그분이라는 것을 나다나엘은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만나자마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다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후에 천국에 갔을 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천국에 갔을 때 주님이 낯 설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누가 주님인지 몰라보면 안 되지 않을까요?  

나다나엘이 주님을 알기 전에 주님은 이미 나다나엘을 아시고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인생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의 기쁨과 남모르게 흘리던 눈물과 그가 하나님 앞에 드리던 기도를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한숨과 의심과 두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잠자리와 안방에 있을 때 주님은 여러분을 보셨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기 훨씬 이전부터 주님은 여러분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소망과 갈망하는 바를 알고 계시며 철두철미하게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옛날부터 주님은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여기서 이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나다나엘을 아신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이것 보다 더 큰일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이 말씀은 창세기 28:12의 말씀과 거의 흡사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야곱이 벧엘에서 돌을 베고 자고 있습니다. 꿈에 자신의 머리 위에 사닥다리가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사닥다리 위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했고, 요한복음 1장에는 인자 위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늘로 연결되어진 사닥다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로 연결시키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천사들의 원래 거처는 하늘입니다. 그래서 내리락오르락 하는 것이 원래 정석입니다. 만약 천사들이 내리락오르락 한다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수종을 들기 위해 그렇게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그들이 수종드는 이가 하늘이 아닌 아래 즉 땅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을 수종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들은 단지 주님을 수종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수종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자 즉 심부름꾼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을 때는 천사들이 우리의 대적이었고, 귀신들이 우리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후부터는 천사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었고, 귀신들이 우리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천사들은 우리를 친절하게 도와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4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제 천사들은 우리를 섬기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8: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천사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서 무엇을 할까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의 보호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두려워마세요. 주님의 보내신 천사들이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일 누가 볼 수 있습니까?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큰 일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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