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한 번 더

조회수 : 176회

본문 : 요한복음 4:46~54
주일오전예배 | 2023-02-1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 구해 아들의 병을 고쳤습니다. 보렌티우스는 왕의 신하는 믿음이 아니라 단지 믿음의 작은 불씨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작은 불씨를 큰 불로 타게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가 가졌던 작은 믿음의 불씨가 큰 불로 타올랐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작은 믿음의 불씨가 크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하신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 신하가 원했던 것만큼이나 커다란 주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가 찾았던 것같이 우리도 찾고, 그가 얻었던 것같이 우리도 얻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역사에 부딪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성경에만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일기장에도 아주 생생하게 기록되며, 성경 말씀에 불어넣어졌던 성령님의 호흡이 우리 영혼 속에도 불어넣어져 우리 심령에 성령님의 충만한 감동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고열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여러 의사에게 자신의 죽어가는 아들을 보였지만 치료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을까요? 하지만 그 고통은 왕의 신하를 주님께로 태워다주는 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때로 사람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그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신하에게는 아들이라는 십자가가 있었는데 이 십자가가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바로 왕은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에 내리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다가 열 번째 재앙으로 자식이 죽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고,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귀머거리가 알아듣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고통은 귀가 먹은 세상을 향해 외쳐지는 하나님의 축복의 확성기입니다.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고통은 없습니다. 고통이란 하나님의 축복이 변장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은 마귀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변장한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고통을 변장한 하나님의 천사라고 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결코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철학자 폴 틸리히는 인간이 겪는 모든 현상의 수면 밑바닥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일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찬송해야 할 일입니다.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때, 갈 길을 못 찾을 때, 병으로 고통당할 때, 슬픈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한 일들을 생각한다면 고통은 축복이 될 것입니다. 폭풍의 들판에서도 꽃이 피고, 지진 난 땅에도 샘물이 솟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광야에 비록 바람이 불지만 꽃이 피고 샘물이 솟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주님께 나온 여러분들 중에는 어떤 근심이나 염려, 혹은 고통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근심과 고통을 극복하려는 믿음의 몸부림이 여러분을 축복의 항구로 실어다주는 아름다운 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왕의 신하에게 갈릴리에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예언자가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나병을 깨끗하게 하고, 병을 치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고 했습니다. 그 위대한 예언자가 마침 그가 사는 인근 마을인 가나에 왔다는 거예요. 신하는 그 예언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46-47절에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신하는 한 번도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단지 사람들을 통해 그분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불쌍한 사람들을 받아주신다더라. 그분은 죄를 씻어주시고 영혼을 정결하게 해주신다더라. 간청을 들어주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고쳐주신다더라. ‘그러면 내 아들도 고칠 수 있겠네. 나의 간청도 받아주겠네.’ 그의 마음에 믿음의 싹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작은 믿음의 불씨가 켜졌어요.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생겨나곤 합니다. ‘나는 요즘 견딜 수 없는 압박에 시달리는데 주님께 기도하면 이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도 기도해볼까?’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경험한 절친한 사람들이 전해주는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스스로 듣고, 보고, 느끼고, 경험해서 믿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은혜로운 말을 듣고 봄의 따스한 햇살 아래 땅에서 솟아나는 새싹처럼 마음 밭에서 솟아나는 싹이 믿음의 불씨입니다. 이것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런 것을 정말 주의해서 살펴보십시오. 이게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것을 위해 기도할 은혜를 내려주셔서 그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심문하는 중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심을 예수님께 직접 듣습니다(18:36-37). 빌라도는 예수님께 복음을 일대일로 직접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때 빌라도는 예수님의 심문받는 태도를 매우 놀랍게 여깁니다. 마태복음 27:14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고 했습니다. 놀라워했다는 말씀을 개역성경은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심문 과정에서 예수님을 매우 경이롭게 생각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마음에 믿음의 불씨가 막 생기려고 하는 거예요. 때마침 그의 아내까지 찾아와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자세히 봤습니다. 심문을 했으니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하게 알아봤겠어요.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뭔가 숨겨진 신비가 있음을 느꼈어요. 빌라도의 마음에 믿음이 막 시작되려고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빌라도를 향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어요. 빌라도는 사람들의 억압으로 믿음의 불씨를 살리지 못하고 꺼버렸어요.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께 와서 영생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젊은이는 영생, 내세, 천국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음 속에 믿음의 불씨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계명을 잘 알 것이다. 그 계명들을 지켜라.” 청년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계명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젊은이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그 젊은이를 너무 사랑스럽게 생각하셔서 제자를 삼아 그 믿음의 타오르게 하려고 하셨지만 젊은이는 가진 것이 많아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은 젊은이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불씨가 타려고 하다가 꺼져버렸어요. 한 젊은이가 내세에 관심을 가졌고, 예수님께 복음을 들었으며,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불씨가 타오려고 하다가 꺼져버렸어요. 예수님은 젊은이의 마음에 믿음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 나를 따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그냥 가버렸어요. 스스로 불을 꺼버린 거예요.  

신하의 믿음은 작은 불씨에 지나지 않았지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는 주님을 찾아 혼자 여행을 떠납니다. 왕의 신하에게는 부리는 종들이 꽤 많았을 거예요. 당시 귀족들이 무엇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신하는 종들을 보내 갈릴리의 예언자를 찾아 집으로 데려오게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직접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신하는 몇 사람의 종들을 대동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친구, 재미있는 것, 좋아하는 것, 바쁜 일들을 뒤로 하고 혼자 믿음의 여행을 떠나보세요. 세상 일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찾아 떠나는 영적 여행을 해보세요. 우리는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필요합니다. 왕의 신하는 혼자 예수님을 찾아 다녔고 혼자 예수님께 나와 간청했습니다. 기도라는 바로 이런 거예요. 기도는 예수님께 혼자 나가는 거예요.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 도착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내 4, 아들 11, 여러 명의 딸들과 많은 종들이 있었어요. 야곱은 아내, 자식들, 종들을 다 앞서 보내고 혼자 얍복강 나루에 남아서 기도했어요. 창세기 32: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라고 했어요. 야곱이 홀로 남았어요. 야곱에게는 가족과 사람과 재물이 많았지만 그것이 위기에 순간에는 아무 소용없었어요. 기도는 혼자서 주님께 나아가는 거예요. 기도는 주님과 내가 11로 만나는 거예요.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셨어요.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진실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겨자는 톡 쏘는 맛이 있어요. 강한 것은 눈물이 나게 합니다. 진실한 믿음은 작을지라도 겨자씨처럼 우리 영혼을 짜릿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신하의 믿음은 작은 것이었지만 진짜 믿음이었어요. 그것은 불씨처럼 보이는 가짜 불씨가 아니라 진짜 불씨였어요. 저는 가끔 내 믿음의 불이 진짜인가 고민을 해봅니다. 모양만 불이 아니라 진짜 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주님께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는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으로 재물, 명예, 권력 등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나는 헤롯 왕실의 실세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은 귀한 가문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은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만 고쳐주신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는 오직 한 가지 아이가 죽게 되었다고만 했습니다. 오직 아이를 살려달라고 했어요. 다른 말을 안했어요. 아이를 향한 은혜의 문이 열리기만을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예요.  

주님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거의 죽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하는 문제가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말씀드리십시오.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했어요. 둘째 부인이었던 브닌나가 아기도 못 낳는다며 한나의 마음을 격동시켰어요. 한나는 마음이 슬펐어요. 한나는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했어요. 이게 기도예요. 저는 때로 기도할 때 한나처럼 하나님께 나는 마음이 슬픈 목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 나는 마음이 슬픈 남자입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나는 마음이 서글픈 인생입니다. 이런 기도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무한한 자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한나는 42녀를 낳았습니다. 왕의 신하는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라고만 했어요. 나는 아들이 아파서 마음이 답답한 아빠입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아빠입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엄마입니다. 기도는 내가 처해 있는 위험과 슬픔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신하는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왕의 신하를 꾸짖으십니다. 4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이한 일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네 믿음이 정말 미미하구나!”라는 의미예요. 예수님이 신하의 마음을 아신 거예요.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거예요. 다른 것은 거의 없어요. 신하는 처음에 예수님에 대해 어떤 호칭도 쓰지 않아요. 그냥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세요.”라고만 했어요. 예수님의 꾸짖음을 들은 후에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해요. 여기 라는 말은 단순한 존칭이에요. 영어 성경은 Sir이라고 번역했어요. 우리말에 선생님정도 되는 호칭이에요. 학생이 스승에게 하는 존칭이 아니에요. 왕의 신하는 헤롯의 신하라는 말이에요. 이들은 로마 황제만을 주(Lord)라고 불렀어요. 왕의 신하는 아들이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절박한 마음에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을 라고 부르지 못한 거예요.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병을 고치는 의사나 이스라엘의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거예요. 이 사람은 그저 예수님께 아들만 고쳐달라고 떼를 썼어요. 이것이 바로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믿음이 작다고 꾸중을 듣지만 포기하지 않아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는 끈기 있기 요청해요. 이것은 그의 믿음이 비록 작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은 일시적인 생각이나 갑작스러운 자극적인 것이 아니었어요. 비록 적으나 진실된 믿음을 갖는 것이 위대한 신학적 교리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갖고서도 주님께 마음이 없는 믿음을 드리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주님은 꽉 찬 머리보다 비어 있어도 진실한 가슴을 원하세요. 저의 말을 듣고 계신 여러분 말씀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주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불씨처럼 작아도 진실한 믿음이 필요해요. 신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거의 몰랐고, 믿음의 고백을 할 줄도 몰랐어요. 오직 하나 예수님께 가면 아들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알았어요.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 고친다더라. 아픔을 해결해주신다더라. 누구나 받아주신다더라. 이게 그가 아는 것 전부예요. 정말 작은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이것 하나만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거예요. 이게 이 사건의 핵심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보기 너무 어려운 간청을 들어주신 거예요. 정말 부족한 믿음이었어요. 아주 작은 불씨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신하의 믿음을 꺾지 않으십니다. 그 믿음의 불씨가 계속 타오르게 하셨어요. 마태복음 12: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고, 꺼져가는 심지는 꺼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굳게 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다시 타오르게 하시는 분이세요. 예수님은 우리의 작고 미약한 믿음이 활활 타오르기를 원하세요.  

여러분의 기도가 세상적인 것이고, 지극히 인간적이며, 개인에 관한 것이라도 기도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인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욥기 38: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새끼 까마귀가 울어도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어미 까마귀가 아니라 새끼 까마귀입니다. 정말 미미한 존재예요. 새끼 까마귀가 영적인 기도를 하고 있나요?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나요? 아니에요. 먹을 것이 없어서 울고 있어요. 기도한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서 그냥 운 것뿐이에요. 배고프다고 울어댄 것뿐이에요. 까마귀는 나방, 잠자리, 나비 곤충을 잡아먹어요. 사람이 버린 음식, 썩은 음식을 먹어요. 정말 하찮은 존재예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먹이세요. 그렇다면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는 당연히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까마귀 보다 훨씬 낫지 않으신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가 기도한다면 그것이 비록 인간적인 것이지만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비록 정말 작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비록 작은 불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끄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십시오. 속에 주님을 향한 불씨처럼 작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끄지 말고 그 것이 자라도록 하십시오. 그 믿음으로 주님의 발 앞에 나와 엎드리십시오.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안심하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예수님께서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가나에 다시 오셨다는 거예요. 영어 성경에는 이 사건의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 번 더 그가 갈릴리 가나를 방문하셨다.”(Once more he visited Cana in Galilee). 영어 성경은 한 번 더”(once more)라는 말로 이 사건을 시작해요. 예수님께서 한 번 더 가나에 오신 것을 강조한 거예요. 예수님이 한 번 더 가나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왕의 신하를 만나 그 아들을 살려주셔서 그의 마음에 시작된 믿음의 불씨를 살리시기 위해서예요. 예수님이 가나에 오셔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다음에는 명절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바로 올라가십니다. 51절에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고 했어요. 가나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계셨어요. 예루살렘에 계시다가 사마리아를 거쳐 가나에 오셨다가 명절 때문에 왕의 신하를 만난 후에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러니까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오신 거예요. 400km가 넘는 거리를 왕의 신하를 만나기 위해 걸어서 오신 거예요. 이 사람의 마음에 믿음의 불씨가 생긴 것을 아시고 그것이 꺼지지 않고 크게 살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먼 거리를 오신 거예요. 그래서 성경 기자는 한 번 더 가나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한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생긴 믿음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크게 타오르기를 원하세요. 연기만 나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연기만 나면 코가 맵고 눈물이 나요. 여러분! 세상의 일을 뒤로 하고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을 찾아 믿음의 여행을 떠나보세요. 그분을 만나야 우리의 믿음의 불이 타오릅니다. 

저는 결혼하려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저는 그 분들에게 사람을 소개시켜주었어요. 어떤 사람은 장사하려고 교회에 나오고,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려고 나옵니다. 교회에 나가면 좋다고 나온 사람도 있어요. 설문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개인적인 필요 때문이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교회 나오는 것 좋다는 말은 아니에요. 처음에는 이렇게 교회에 나왔지만 우리는 여기서 머물지 말아야 해요. 처음에는 개인적인 절박함 때문에 교회에 나왔지만 예수님을 만나야 해요. 이것이 이 사건을 기록한 성경의 목적이에요.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세우셨을까요? 하나님이 필요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필요와 인간의 필요가 만나는 곳이에요. 인간이 자기 필요 때문에 나와 신앙이 성숙에 하나님의 필요를 깨닫고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이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나가야 해요.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집에서 온 종들을 만납니다. 그 종들은 주인에게 아들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신하가 종들에게 아들이 나은 시간을 물어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집안이 다 믿었습니다. 53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왕의 신하, 부인, 아들, 그리고 종들까지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온 집안이 어떻게 다 믿게 되었을까요? 왕의 신하가 집안 식구들에게 예수님을 만나 자기가 경험한 일을 모두 설명한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된 거예요. 왕의 신하는 가족과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시지도 않고 있는 곳에서 네 아들이 살아났다.”라고 한 마디만 하셨는데 그 시간에 아들의 병이 고침 받았어.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그분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이 틀림없어.” 남편의 말에 아내가 대답합니다. “여보, 우리 아들이 순간적으로 건강해졌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났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그 멀리서 말씀만으로 사람의 병을 고치시니 얼마나 놀라운 분이세요. 여보! 나는 그분을 믿어요.” 아들도 엄마를 따라 아빠에게 고백합니다. “아빠! 나는 이제 죽는 줄 알았어요. 아무런 힘도 없었고 살 소망도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지고 새 힘이 솟아났어요. 나도 나를 살려주신 그분을 믿어요.” 하인들도 말합니다. “주인님! 우리도 그분을 믿습니다. 우리는 치료의 과정을 눈으로 봤어요. 그분은 신적인 권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왕의 신하의 마음 속에 있던 작은 믿음의 불씨는 크게 타 올라 온 가족의 마음을 뜨겁게 타게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왕의 신하의 믿음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왕의 신하처럼 주님께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을 만나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이전글 하나님의 어린 양
다음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은혜 내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