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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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6:22~27
주일오전예배 | 2022-12-1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이성미 집사님은 아버지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고 기도라는 걸 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게 해주세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쉬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건강검진센터에서 사회를 봐주고 공짜 검진권을 얻게 되어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아버지가 검진을 받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검진 센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너희 아버지...백혈병이시다. 1년 정도 사실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에요. “하나님, 제가 아버지 예수님 믿게 해달라고 했지 병들게 해달라고 했어요? 왜 우리 아빠가 아파야 하는데요?” 이성미 집사님은 하나님께 악을 쓰며 울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치 독이 오른 뱀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교회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성미 집사님은 너무 놀랐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그냥 교회에 가시더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의사가 말한 1년이 아닌 10년을 더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때 멋대로 소리 지르고 몸부림치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후 집사님은 자신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의 생각과 방법은 나와 다르다는 걸 분명히 알았으므로 주님께 맡기를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새벽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하는 일이 잘 되며, 질병이나 고통, 불의의 사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믿지는 맙시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들의 삶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출세하고, 형통하며, 성공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잘되는 것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지는 맙시다. 신앙생활에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도 환경을 탓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지 마세요.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불평하지 마세요. 이사야 55:8-9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하늘에 있다면 인간의 길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높고 깊은 뜻을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튿날’(22)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 떡 두 개로 5천 명을 먹이신 그 다음 날입니다. 바다 건너편은 벳세다로 무리들이 예수님께 물고기와 떡을 받아먹은 곳입니다. 무리들이 52어 기적이 있었던 곳에 가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전 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갔는데 예수님이 그 배에 함께 타지 않으셨기 때문에 무리들은 벳세다에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디베랴에서도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3절에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고 했습니다. 배가 여러 대인 것을 보면 예수님을 찾는 무리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떡 먹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벳세다는 말씀을 듣던 곳인데 떡 먹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떡 먹던 그 곳이라는 말은 무리들이 벳세다에 온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떡과 물고기를 더 먹고 싶어서라는 의미입니다. 무리들이 벳세다를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 들었던 곳이 아니라 떡을 먹던 곳으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등대교회 이 터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도들과 은혜로운 교제를 나누던 거룩하고 구별되며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그런 장소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고 애써주시기 바랍니다. 천박하고, 상스럽고, 야비하며, 싼티 나는 곳이 아니라 숭고하고 품위가 있고 성도들의 깊은 신앙의 흔적이 있는 장소가 되도록 애써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느 교회를 가든 다니는 교회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터전이 되도록 애쓰시기를 바랍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곳을 거룩하게 구별합시다. 제가 고등학교 때 다니던 교회 1층에 유치원이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이 다 퇴근하고 찬송하는데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이 제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저는 그 유치원을 유치원보다는 주님을 만났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청년 때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새벽 예배 후에 기도를 하다가 피곤해서 눈을 붙이려고 난로 옆에 잠깐 누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그 새벽기도실 난로 옆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들로, 바다로, 그리고 여러 마을로 다니고 있습니다. 24절에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찾다는 말이 성경 헬라어로 제테오(ζητέω)입니다. 제테오는 찾아다니다, 찾아 헤매다, 수색하다, 조사하다, 검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제테오는 샅샅이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무리들이 디베랴에서 벳세다로 왔습니다. 벳세다에도 예수님을 찾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여러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이 벳세다에서 모여 함께 예수님을 찾기 위해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무리들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배를 타지 않고는 가버나움까지 오기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여기에 계신지 의문을 가진 물음입니다. 주님은 한계를 가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종종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답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예수님의 신비로움을 이해하거나 믿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무리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랍비,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물고기 다섯 마리와 떡 두 개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표적이 갖는 의미보다는 떡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무리들은 정말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찾음이 예수님을 원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떡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열열이 찾은 이유가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와 욕망의 만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다시 듣고, 이전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예수께 감사드리려는데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빵과 고기를 전날처럼 배불리 먹고 싶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벗어납시다. 세상적인 이익을 위하여 신앙을 고백하려는 생각 자체를 멀리 던져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실로 가장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공금을 계속 훔쳤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닌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사탄에게 영혼을 줘버렸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믿으면 밥을 준다고 속삭입니다. 밥을 주지 않으면 교회 다니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육신의 필요와 만족을 위해 마귀에게 영혼을 팔지 마십시오. 가롯 유다의 제자가 되지 맙시다. 무리들의 후예가 되지 맙시다.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이기를 바랍니다. 육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육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는 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직장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건강 때문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 괜찮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여러분! 무리들의 열심이 내 열심이 되게 합시다.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찾아 어디든지 가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하지만 무리들의 내적 욕구를 본받지 맙시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도 예수님을 찾고 계신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찾는 상태는 선과 악이 함께 뒤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빛의 요소가 많이 있지만 어둠의 요소 역시 많이 있습니다. 빛도 아니고 밤도 아닌 희미한 여명이 밝아오는 상태라 하겠습니다. 희망은 있지만 아직은 구름에 덮여 있는 상태입니다. 어두운 빛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를 아십니까? 하구에서는 바닷물과 육지의 민물이 만납니다. 그래서 염분의 농도가 변화무쌍합니다. 바다의 밀물과 강에서 내려오는 물이 부딪칩니다. 강 하구의 물은 바닷물처럼 완전한 소금물도 아니고 소금이 없는 완전한 민물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기에 있는 물들이 작은 강줄기를 벗어나 커다란 대양에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은혜의 바다로 들어오셨습니다. 요즘 날씨가 아주 춥습니다. 그런데 이런 추위에 목련 나무에는 털이 복슬복슬 난 봉우리가 져 있습니다. 목련의 봉우리는 아직 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꽃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추우 속에서 그 봉우리를 보며 봄의 희망을 봅니다. 목련의 봉우리는 엄동설한에 사람들에게 봄의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지만 영혼의 봄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불경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반역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은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 위에 올라타셨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슬프고 답답하고 애처로우며 우울할지라도 봄이 오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청각 장애인으로 남아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연 것은 매우 잘 한 일입니다. 제가 설교에 탁월하지 않아 설교를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의 예배와 기도와 말씀이 삶에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더라도 진리를 듣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여러분의 이 방향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로 계속 가십시오. 이 방향으로 계속 가십시오. 뒤돌아서지 마십시오.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결코 애굽 세상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받지 마십시오. 과거에 여러분은 멸망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예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죄와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되는 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이 소망하는 제일 목적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 있다면 최고의 희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상태에는 불확실한 점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해도 복음의 대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복음의 대명령에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행복한 반열에 속할 것입니다. 복음의 대명령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갈보리 십자가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을 물리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만일 제가 큰 병이 걸렸다고 생각해봅시다. 저는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병원을 다니며 치료 방법을 열심히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찾는 것만으로 병이 치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낫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병원을 다녀도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병이 낫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에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습니다. 번쩍이는 빛과 덮쳐오는 어둠은 순간순간 반복됩니다. 이 마음의 상태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분들은 찾기만 하지 마시고 구원의 잔을 마시십시오. 샘물가에만 서 있지만 마시고 물을 마십시오. 여기는 생명수 샘물가입니다. 물가에 나오셨다면 물을 마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주님의 손과 발을 만지십시오. 여러분이 보고 들은 바를 믿으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복음의 진리를 믿으십시오.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며, 여러분의 마음의 어둠이 물러갈 것입니다. 

인류는 불이 난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집 밖에서 자는 사람을 깨우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자는 사람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자기가 죽게 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살려달라고 간절히 소리를 칩니다. 그때 소방대원이 불 가운데로 사다리를 내려줍니다. 그 사람은 사다리에 올라타야 구조를 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라는 집 밖에서 집 안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불타는 집에서 나오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내려주신 구원의 사다리에 올라타십시오. 십자가가 구원의 사다리입니다. 이 십자가 사다리는 여러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그것입니다. 이것을 물리쳐버린다면 완전한 절망으로 가는 서곡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찾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에 믿음으로 올라타십시오. 찾는 것이 필요하지만 찾는 것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의지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새벽별이 비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절망을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절망이 교회 뒤편에 서 있는 저 봉서산 보다 더 큰 거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 절망이라는 거인은 아주 시커먼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망의 거인은 음산한 그림자로 저의 영혼을 짓밟아버리는 <잭과 콩나무>라는 동화에 나오는 무지막지한 거인과 같습니다. 인류는 봉서산과 같은 거인의 성에 갇혀 있는 포로와 같습니다. 인류 절망이라는 거인의 성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약속의 열쇠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이며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열쇠가 이미 여러분의 마음에 심겨져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 열쇠를 꺼내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절망이라는 거인의 성에서 나와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절망이라는 거인이 쫓아오고 있습니까? 지옥이 쫓아오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어떤 무엇도 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품 속으로 뛰어 드십니다. 그러면 당장에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중학교 때 저의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버님이 집에서 키우는 개를 데리고 산에 나무하러 가셨습니다. 개는 아버님이 나무를 하시는 동안 옆에서 뛰어 놀았습니다. 한참 나무를 하는데 개가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서 보았더니 몸의 모든 털들이 바늘처럼 곤두서 있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오줌을 질질 싸고,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왜 그러지 하는데 개가 아버님 품속으로 와락 뛰어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개를 품에 안고 개가 갑자기 왜 그럴까?’라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머리털이 바늘처럼 쭈뼛 서고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흐르고 아주 싸하더랍니다. 그리고 뇌리에 호랑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더랍니다. 아버님도 몸이 굳은 사람처럼 꼼짝을 못하겠더랍니다. 고개를 돌려 뒤도 못 쳐다보겠더랍니다. 아버님은 개를 품에 앉고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개가 품에서 나간 후에 뒤를 보니 호랑이 발자국만 남아 있었습니다. 개가 주인의 품에 뛰어들어 보호와 평안을 찾은 것처럼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의 품으로 뛰어들어 평안을 찾으십시오. 결코 스스로 평안을 찾거나 다른 곳에서 평안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거기서 찾은 평안은 잠시 뿐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찬양할 때 영혼으로 찬양하십시오. 기도할 때 영혼으로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주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품에 안겨 나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주님의 품에서 영원히 사십시오. 못자국난 손을 뿌리치지 마시고, 가시 면류관에 찔린 예수님의 이마를 외면하지 마시고,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음성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믿음이란 좀 더 깊고 신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적으로 뭔가를 뭉클함을 느껴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하며,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미신적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놓치게 하고 믿으면 죄 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망각하게 합니다. 믿음은 그냥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냥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가슴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 예수님의 가슴에 안기는 거예요. 절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냥 믿으십시오. 그냥 맡기세요. 

예수님은 육신의 욕망과 필요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물리치거나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27절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썩는다는 말을 NIV 성경은 ‘spoi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spoil상하다는 뜻입니다. ‘썩을 양식상하는 양식입니다. 썩는다는 말을 KJVNASBperish로 번역했습니다. perish사라지다, 죽다, 붕괴되다, 파괴되다는 뜻입니다. ‘썩을 양식죽을 양식, 사라질 양식, 붕괴될 양식입니다. 세상 양식은 아무리 먹어도 죽습니다. 세상 양식은 먹어도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 양식을 너무 탐하지 맙시다. 썩을 양식을 일하지 말라는 말씀은 게으름을 조장하고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정당한 수단들을 소홀히 하거나 악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육신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의 필요를 위해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하지만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일에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썩을 양식이 있다면 썩지 않는 양식도 있습니다. 상하는 양식이 있다면 상하지 않는 양식이 있습니다. 없어지는 양식이 있다면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양식이 있습니다. 거짓 양식이 있다면 참된 양식이 있습니다. 그 양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없어지거나 상하지 않는 영원한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쳤다는 말은 도장을 찍었다는 뜻입니다. 도장이 찍힌 문서는 아무나 열어볼 수가 없습니다. 권한이 있는 사람만 열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인을 치신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인을 쳤기 때문에 인이 쳐져 있는 양식을 먹을 권한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쳤다는 말은 일임했고, 위임했으며, 구별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곳에는 영생하는 양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영생하는 양식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찰스 웨슬리가 어느 날 서재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으려니까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살 길을 찾아 그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찰스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설교자이며, 찬송가 작시자입니다. 새는 공포에 싸여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푸드득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옷자락 속에 깃들였습니다. 찰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는 어린 새를 쓰다듬어 창밖으로 놓아 보내고 일어나 불현듯 그 마음에 떠오르는 노래를 읊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곧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라는 찬송입니다.

  •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 사랑 많은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 풍파 지나가도록 나를 숨겨주시고 /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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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영혼 피할데 예수 밖에 없으니 / 혼자 있게 마시고 위로하여주소서
  • 구주 의지하옵고 도와주심 비오니 / 할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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