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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국립공원>에는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세쿼이아 나무숲이 있습니다. 레드우드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115m)가 있는 공원입니다. 제네럴 셔먼 트리(General Sherman Tree)는 지름이 10m, 둘레는 30m, 높이는 90m, 무게는 약 2천 500톤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2200살로 추정합니다. 부피와 무게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합니다. 레드우드 숲의 나무들은 보통 60~70m 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뿌리는 3~4m 밖에 안 됩니다. 바닥에 암반이 깔려있어서 뿌리가 암반을 뚫고 내려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쿼이아 공원은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자주 강풍이 몰아칩니다. 그런데 이곳의 세쿼이아 나무들은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들은 바람이 세게 불면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힙니다. 우리나라 산의 소나무들도 보통 뿌리가 3-4m는 땅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 보다 바람이 훨씬 약한데도 나무들이 뽑히고 부러집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나무들은 뿌리도 깊지 않은데 어떻게 그 거센 태풍을 견디며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을 보존하며 자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레드우드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뿌리가 사방으로 수십 미터씩 퍼져서 다른 큰 나무들과 하나로 엉켜 있습니다. 뿌리가 옆으로 길게 뻗어 주변의 나무들의 뿌리와 얽혀 서로를 단단하게 붙잡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휘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뭄 때는 연결된 뿌리를 통해 영양이 부족한 나무에게 양분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서 강한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오래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숲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나무인 셈입니다. 나무가 사람들 보다 나은 것 같아요. 교회가 이래야 합니다. 수천 년 동안 그 어떤 비바람도 이겨낼 수 있었던 비밀은 서로의 뿌리로 서로를 꽉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여정에는 내적 여정(영적 성숙)이 있고, 외적 여정(섬김, 봉사)이 있습니다. 교회는 내적 여정과 외적 여정이 만나 하나 되어 성숙되어 가는 곳입니다. 교회에 개인주의는 없습니다. 교회에 나는 없습니다. 서로 연결된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옆 사람을 꽉 붙잡고 함께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와서 독불장군처럼 혼자 계시지 마세요. 옆 사람을 붙잡으세요. 바벨론 포로 시대 바벨론 교회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꽉 붙들고 함께 같습니다. 그들이 그 거친 포로 생활에서 부러지거나 뽑히지 않고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꽉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뜻을 정했다는 말씀을 히브리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마음 위에 (~을) 놓다(두다)”입니다. 마음 위에 무엇을 놓았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성경의 음식 정결 규례 때문에 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밑바닥이나 귀퉁이에 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장 윗자리에 두었습니다. 말씀을 마음 위에 두었다는 말은 바벨론 왕궁에서 바벨론 왕의 통치가 아니라 말씀의 통치를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궁에서 바벨론 왕궁의 법도를 따라야 할 포로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궁의 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를 먼저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론 제국은 BC537년에 망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바벨론 제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 바벨론이 살아 있습니다. 이 세상이 바벨론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바벨론에서 살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바벨론에서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위에 두고 사세요. 이 세상의 교회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등대교회는 이 바벨론 제국 속에 있는 교회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국가의 힘과 권력으로 우리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라고 명령합니다. 마귀는 세상 권력과 기관을 이용해 지난 코로나 기간 동안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정치인들을 이용해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교회를 짓밟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교회와 목사와 성도가 느부갓네살에게 머리를 숙이고, 차별금지법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세속주의에 취하지 마십시오. 바벨론주의를 경계하십시오. 이 세상은 오늘의 느부갓네살을 세워 계속 교회를 짓밟으려고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조금도 동조하지 마십시오. 다니엘서는 영적 유대인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영적 바벨론 제국에서 오늘을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등대가 되어 하나님의 빛을 발할 것인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다니엘 시대 많은 유대인들이 느부갓네살에게 무릎을 꿇고 느부갓네살의 음식과 포도주에 취했습니다. 여러분은 느부갓네살에게 무릎을 꿇는 오늘의 유대인이 되지 마십시오. 뜻을 정하십시오.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 위에 두시고 느부갓네살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십시오. 참을 인(忍) 자는 마음 심(心) 자 위에 칼 도(刀) 자가 있습니다. 마음 위에 칼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칼을 품고 참으라고 합니다. 칼을 마음에 품으면 참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사고를 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글자를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 칼을 말씀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성경에 말씀을 검이라고 했습니다. 참는 것은 말씀을 마음 위에 두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인내는 영적 칼인 말씀 마음 위에 두고 바벨론의 유혹과 협박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게 인내예요. 이 세상 바벨론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2-3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말씀을 마음 위에 두고 바벨론의 온갖 시험을 견뎌냈습니다. 말씀의 검을 마음 위에 두고 세상 시험을 견디십시오. 세상 나라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떤 상황에서 뜻을 정했을까요? 1~2절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나라가 바벨론에 짓밟혔을 때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버리셨습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을 짓밟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짓밟힐 때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하나님을 원망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유다인들은 하나님을 믿어서 잘 된 게 뭐가 있냐며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으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가슴 아픈 상황에서 뜻을 정했습니다.
유다에서 바벨론까지는 1,800km입니다. 다니엘은 1,800km를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의 나이 13세 아니면 14세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생이 가도 가도 끝이 나오지 않는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짓밟힐 때 죽었을 것입니다. 어딘가로 포로로 끌려갔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형제가 있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죽거나 바벨론 어딘가에 포로로 끌려왔을 것입니다. 부모와 형제가 다니엘의 눈 앞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이 어린 나이에 불안장애나 공포장애를 앓지 않은 것이 신기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른도 제 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였다면 미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았을까요? 다니엘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뜻을 정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조그만 일에도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며 힘들어합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약할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물론 자신이나 다른 것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단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다니엘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음식법을 만든 사람은 왕입니다. 왕이 법입니다. 사람들은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의 음식들은 바벨론 제국 내에서 최상의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먹고 좋은 성적 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자고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불복종은 처벌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불복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위축감이 네 사람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암담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런 용기와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다니엘은 13세, 14세 나이에 바벨론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창대해졌습니다. 이게 믿음의 힘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다니엘이 신비로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끄럴까요? 다니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다니엘은 환경이 좋을 때 뜻을 정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뜻을 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뜻을 정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뜻을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선민들은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레11:3-4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라고 했습니다. 9절에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라고 했습니다. 이 외에 새나 곤충 중에서도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유한 백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나, 직장이나 돈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이고 가장 큰 이유입니다.
둘째,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를 거절한 이유는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바벨론 우상들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벨론 왕족들에게는 바벨론 민족의 고유 신인 벨이나 느보 같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이 제공됐습니다. 왕족들은 왜 먼저 음식을 신들에게 바친 후에 먹었을까요? 바벨론 사람들은 신에게 제사할 때 음식을 제물로 바치면 그 음식에 신의 호의가 내려진다고 믿었습니다. 그 음식을 먹으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사를 지낸 후에 음복을 합니다. 제물에 정성을 담아 조상에게 드리면 조상은 제물을 흠향한 후에 그 제물에 복을 담아 후손에게 돌려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삿밥을 먹으면 제수가 좋다고 제삿밥을 얻어먹으러 다녔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왕실의 주방에서 나오는 모든 음식은 먼저 신에게 바쳐서 왕실과 나라가 신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신들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호의를 갈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은 그 신의 혜택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백성의 주인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바벨론의 신의 혜택을 입고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에게도 동일한 음식이 제공됐습니다. 그 음식을 주는 것은 이제 너희들도 바벨론의 신의 은택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고국 땅에서 섬기는 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너희의 주인은 바벨론 신이다. 이제 바벨론 신이 너희를 먹여주고 재워줄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바벨론 신의 은택으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신을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지 바벨론 신이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나의 주인님의 은혜로 살았고 앞으로도 나의 주님의 은혜로만 살 것이다.” 이것이 다니엘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식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조선인들의 이름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때 강렬하게 저항하는 조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꾸는 데는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 보다 이름을 바꾸는 게 더 심각한 것 아닌가요? 또 바벨론의 문화와 풍습을 배우는 것에도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먹는 문제는 저항을 했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거절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먹는 것과 신앙의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무엇이든 먹어도 좋지만 선악과는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먹어라, 먹지 말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동안 광야에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하루치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거둬서 남으면 벌레가 생기고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한 번에 일주일 치를 거두게 하셔도 되잖아요. 그런데 매일 거두게 하시는 거예요. 남는다고 썩게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썩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40년 동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법을 주셔서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시기도를 하셨는데 마귀가 와서 먹을 것으로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드셔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꼬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곡식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먹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아주 심하게 다투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강이 나오는데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 잎사귀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있다고 했습니다. 잘못 먹으면 병이 들고 잘 먹으면 치료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또 이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요? 계시록의 생명나무는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그 생명나무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사라진 생명나무가 성경 마지막에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이 먹는 문제로 시작해서 먹는 문제로 끝나고 있니다.
성경은 신앙과 먹는 것을 아주 긴밀하게 연결시킵니다. 교회 안에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먹는 것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 먹는 것을 신앙과 이상한 방식으로 혼합시키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이 신앙과 같은 말은 아니지만 먹는 것과 신앙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먹는 일에 진심입니다. 믿음은 먹는 일에 진심입니다. 신앙인은 먹는 일에 진심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먹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먹는 것과 믿음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음식과 입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거나 막 먹지마세요. 먹는 일과 무관한 신앙은 정말 의미 없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믿음을 지키세요. 먹는 것을 지키는 것은 내 자신, 내 가족과 내 인생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서 다른 사람들이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는데 먹지 않았습니다. 한 번, 두 번만 안 먹는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먹지 않았습니다. 3년이면 1095끼입니다. 네 사람은 식사 시간마다 채소만을 먹으며 식당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 냄새를 3년 동안 견뎌야 했습니다. 동료들이 얼마나 비웃고 조롱했을까요?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잘났냐고, 너희들 토끼냐고, 중이냐고, 산으로 들어가지 그러냐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친한 동료들 중에는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며 진심으로 권하는 친구도 있었을 것입니다. 네 사람은 3년 동안 이 비웃음과 유혹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헌신했습니다. 믿는다는 말이 believe이고, 사랑한다는 말은 belove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헌신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헌신하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희생하십시오. 희생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먹는 것에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왕의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먹는 일은 별것 아닌 하찮은 일이 아니라 우리 삶에 가장 중앙에 있는 것입니다. 왜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음식을 주었을까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음식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음식을 안 먹겠다는 것은 내 주인은 바벨론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먹여주시고 살에 하시는 분은 나의 주인님이신 하나님이시지 저 우상 단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우상이 베푸는 호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시대입니다. 아무리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도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내 주인님을 다른 신으로 바꾸지는 맙시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맙시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믿음 잃지 맙시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사랑도 잃고 믿음도 잃고 인생도 잃습니다. 여러분! 먹고 사는 일을 잘 하세요. 구별하세요. 잘 드세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세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진미로 몸과 영혼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다니엘이 뜻을 정한 이유는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너무 쉽게 더럽힙니다. 자존심을 지키세요. 고린도전서 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구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구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바카쉬인데, 이 말은 ‘간청하다, 찾다, 추구하다, 얼굴을 구하다’는 뜻입니다.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은혜를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이 은혜 입기를 간청하자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를 베풀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엄마가 자식에게 갖는 애정과 사랑과 연민이라는 말입니다. 환관장은 부모와 형제를 잃고 이억 만 리까지 포로로 끌려온 다니엘에게 부모 같이 은혜와 사랑과 애정을 베풀었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하나님이 환관장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그냥 사람은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
은혜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베풀지 않으시면 아무도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다니엘은 은혜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생명, 남편, 아내, 자식,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나의 주인님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주인님의 은혜를 입을 때 우리는 형통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가 페르시아 제국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은혜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왕비 선발전에 출전합니다. 에스더는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에게 은혜를 입습니다. 에스더 2:9에 “헤개가 이 처녀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으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고 했습니다. 헤개는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입니다. 에스더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입습니다. 에스더 2:15에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왕에게 은혜를 입습니다. 에스더 2:17에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라고 했습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것은 예뻐서가 아니라 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사람들의 은혜를 입습니다. 출애굽기 3:21에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사람에게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의 은혜를 입습니다. 출애굽기 11:3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2:36에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저희 부대는 여름에 대대별로 하계종합훈련을 떠났습니다. 여름철이다 보니 장마철에 훈련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한 대대가 야간에 산을 행군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와서 계곡물이 많이 불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거기를 건너가야 했습니다. 중대원들은 나란히 서서 양손으로 옆에 있는 대원의 허리를 서로 끌어안고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운데로 갈수록 물이 깊고 물살이 셌습니다. 물이 배 높이까지 불어 있었습니다. 등에는 군장이 있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입니다. 험한 산 속입니다. 손을 놓치면 대원들이 균형을 잃고 급류에 휩쓸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부대원들은 물살이 센 중앙으로 갈수록 옆의 대원들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습니다. 그날 밤 중대원들은 계곡을 안전하게 건넜습니다. 군에 있을 때 럭비를 했습니다. 우리팀 7명, 상대팀 7명이 스크럼을 만들고 공을 빼앗으려고 상대팀을 어깨로 밀어냅니다. 밀 때 앞에는 세 명 뒤에는 네 명이 섭니다. 앞에 세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허리를 숙이고 상대팀을 밉니다. 뒤에 네 명이 앞의 세 사람 사이에서 앞 사람의 허벅다리를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를 어깨로 밉니다. 이때 팔이 풀리면 안 됩니다. 서로를 꽉 끌어당겨야 합니다. 그래서 힘을 하나로 낼 수 있습니다. 밀 때 힘이 부족한 선수가 있습니다. 상대팀의 강한 선수와 부딪치면 밀립니다.
강상구의 「힘들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에 록펠러에게 어머니가 남겨준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저자가 크리스천처럼 보입니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구구단을 암기하는 것, 도공이 좋은 도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가마 준비가 아니라 좋은 흙을 찾는 것이 기본이라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기본은 성공의 핵심이며, 기본을 충실히 실천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작할 때, 어려움을 만날 때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기본은 기초라고 생각하는데 기본은 기초가 아니라 최고의 자리를 얻는 기회라는 거예요.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으로써 첫사랑의 마음이고, 긍정과 희망을 간직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심은 시간이 지나가면 부정적인 생각에게 조금씩 그 자리를 내어주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성공을 원한다면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여러분! 성공을 원하십니까? 신앙생활에 승리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복을 원하십니까? 초심으로 돌아가십니다. 기본으로 돌아십시다. 성경이 기본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십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기본을 붙잡았습니다. 이것에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에서 창대하게 된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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