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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BC 931년에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망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이 유다를 처음 침공한 BC 60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때 다니엘의 나이는 13세 아니면 14세였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일어난 BC 537년 이후까지 70년 이상을 이방 땅에서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왕들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정부 고위직에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외국 정부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번창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당신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각종 잡신들이 존재했던 우상의 땅에서 당신만이 참 신임을 나타내줄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셨습니다. 그 일을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 네 사람을 이방 땅에서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다니엘의 주제를 믿음의 용기와 헌신과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세상을 지배했던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 앞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당신에게 헌신했던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코로나19로 교회가 세상에 짓밟혔습니다. 교회가 하루에 6개씩 문을 닫았습니다. 하나님께 이 시대에 당신만이 참 신심을 보여줄 헌신된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실까요?
다니엘서는 나라가 망해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거기서 사는 선민들을 대상으로 기록됐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이방 땅에서 징계를 받는 중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주인공은 다니엘, 하나냐, 미시엘, 아사랴입니다. 다니엘과 미사엘의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하나냐와 아사랴의 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라는 뜻이며, 하나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네 사람의 이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우심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당대에 하나님의 역사를 그대로 나타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세상에 나타내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 죄가 쌓이다
1절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김은 남쪽 유다 나라의 20명의 왕들 중에 열여덟 번째 왕입니다. 여호야김 3년은 BC 606년입니다. 바벨론이 남 유다를 세 차례 공격했는데, 606년에 첫 번째 공격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말씀을 면도칼로 잘라서 화롯불에 태워버린 아주 악한 왕입니다. 예레미야36:21~23에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의 귀에 낭독하니 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겨울궁은 예루살렘의 아래쪽을 말합니다.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라고 했습니다. 베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라으입니다. 카라으는 ‘찢다’는 뜻입니다. 칼로 찢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칼로 자른 다음 손으로 찢었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야김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면도칼로 자르고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작게 조각을 내 화롯불에 던져 태워버렸습니다. ‘그것을 연하여’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를 칼로 자르고 손으로 찢는 패역한 행위를 두루마리가 다 없어질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요시야 왕입니다. 아버지는 율법책 앞에서 옷을 찢고 회개했는데 아들은 율법책을 찢어 화롯불에 태웠습니다. 유다가 망하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극히 가볍게 여겼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칼로 잘라버린 적이 없으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말씀은 받아들이고 불편한 말씀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말씀을 마음의 칼로 잘라 버리는 행동이 아닐까요? 마귀가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받아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천사가 받아줄까요? 마귀는 성경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용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 “성경에 …”라고 말합니다. 마귀처럼 성경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지 마세요. 과거에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시위할 때 찬송가를 많이 불렀습니다. 시위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가를 시위하면서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시위하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시위에 이용하라고 성경이 기록됐을까요?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지 맙시다. 말씀을 귀하게 여깁시다. 성경을 귀하게 여깁시다. 성경책을 아무데나 굴리지 맙시다. 이사야 66:2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66:5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떠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해도 여러분은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두루마리를 불에 태운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포로가 돼 쇠사슬로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대하36:6).
삼일교회 조만식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조만식 집사님은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미워하면서 자랐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미움이 아주 컸습니다. 성경은 조 집사님에게 이스라엘의 무협지, 판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친구가 찾아와서 “교회에 가자”며 전도했습니다. 조 집사님은 친구에게 화를 내며, 친구의 성경을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웠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복통과 함께 설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금방 괜찮아 지겠지!’ 집사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설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설사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설사는 그렇게 1년 동안 계속 됐습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검사를 해보았더니 만성대장염이라는 것입니다. 설사가 안 멈출 거라는 말입니다. 이대로 두면 장결핵이나 대장암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부정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친구가 찾아와 기도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조 집사님은 친구를 따라 가평에 있는 ‘강남금식기도원’에 갔습니다. 성전에 들어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성전 벽 쪽에서 양손을 들고 자신을 맞이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조 집사님은 너무 놀라 기절할 뻔 했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조 집사님은 지난 날들을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20일 금식기도를 작정했습니다. 금식을 시작한 날부터 하나님께서 마음에 화평을 주셨습니다. 찬송을 들으며 춤을 추었습니다. 한량없는 기쁨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금식기도 기간 동안 예배와 기도, 성경 읽기를 계속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계속 도와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금식이 끝나는 날, 자신을 그렇게 괴롭혔던 질병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병원에 가서 재검을 받아보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집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몸에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건강하십니다.” 조 집사님은 그 때 의사 선생님의 음성이 천사의 음성처럼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다의 멸망은 여호야김 왕 한 사람만의 죄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선조들의 죄가 쌓이고 쌓였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4:2~4에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망한 것은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므낫세는 여호야김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열왕기하 20:16-18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망한 것은 히스기야의 교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야김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조상들의 죄가 쌓이고 쌓여 여호야김 때 유다가 망하기 시작해 시드기야 때 완전히 망했습니다. 여러분! 죄를 쌓지 마세요. 여러분도 죽고 후손도 죽습니다. 기도와 예배와 찬송을 쌓으세요. 은혜를 쌓으세요. 여러분도 복을 받고 후손도 복을 받습니다.
여주성결교회 이성관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33살에 혼자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밥을 한 번 해서 일주일 동안 먹었습니다. 국은 콩나물과 미역국, 된장국을 끓여 이틀 정도의 간격으로 먹었습니다. 어느 날 오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와서 미역국에 밥을 말아 앉은 채로 먹고 있었습니다. 웬일인지 그날따라 미역국에 말은 밥이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목사님의 마음에 “너, 왜 유학 온 줄 아느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정말 갑자기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까지 목사님은 왜 유학을 왔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렴풋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특전을 베푸시는 것이 아닐까’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목사님의 마음에 다시 들렸습니다. “너는 평균 이하의 목사가 될 수준이어서 다른 목사들과 최대한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보낸 것이다. 다 네 할아버지의 순교(임자도 진리교회, 이판일 장로)와 아버지의 원수용서(이인재 목사)로 인해 네게 베푸는 은혜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눈물이 터져 나오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자기가 받고 있는 은혜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쌓아놓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쌓으며 사세요. 사랑을 쌓으세요. 덕을 쌓으며 사세요. 죄를 쌓지 마세요. 미움을 쌓지 마세요.
시편 31:19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하나님이 쌓아두신 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쌓아놓다는 말히 히브리어로 차판입니다. 차판은 숨겨놓다, 비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은밀히 준비해놓으신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필요할 때 하나님이 그 은혜를 쓰신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가족을 위해 은혜를 쌓아두십시오. 여러분의 가족과 후손을 위해 저주를 쌓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잠언 14:26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주님을 경외하면 강한 믿음이 생기고, 그 자식들에게도 피난처가 생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면 환란 날에 자식들에게 피난처가 생긴대요. 죄가 아니라 은혜를 쌓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2. 주인님께서
2절에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주’라는 말이 6천 번 이상 나옵니다. 6000번 이상의 주라는 말 중에서 본문에 나오는 주라는 말이 제 뇌리에 가장 강하게 박혀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다른 분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3882번 이상, 여호와라는 말은 7324번, 예수라는 말은 1298번,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500번 이상 나옵니다. 성경의 장수는 총 1189이고, 절수는 31,102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20,000이상 나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3절에 두 번 이상 나오는 셈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너무 많아서 다른 곳의 주라는 말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만은 잊어버려지지가 않습니다. ‘주께서’라는 말은 667번 나옵니다(개역개정). 667번의 ‘주께서’ 중에 본문의 ‘주께서’라는 말이 제 심령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다니엘 1장 2절의 주라는 말을 읽을 때는 글자가 아주 선명하고 진하게, 뚜렷하고 크게 보이는 것 같아요. 성경 다른 부분을 읽을 때는 딴 생각을 하며 읽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라는 말을 읽을 때는 딴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을 기록하실 때 성령께서 다니엘의 마음을 더 강하게 감동하셨기 때문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부분의 ‘주’를 읽을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깁니다.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떨리고, 때로는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하게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을 원고로 옮길 때도 계속 두렵고 떨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주라는 말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주입니다.
‘주’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입니다. 아도나이는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주께서’라는 말은 ‘나의 주인님께서’라는 뜻입니다. ‘주께서’라는 말은 유다 왕 여호야김과 성전의 그릇들 얼마가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어간 것은 내 주인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유다가 망한 것은 유다가 무능해서이거나 작전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이긴 것은 바벨론이 유다보다 군사력이 강해서이거나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는 마르둑, 벨, 느보 등의 여러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우상들이 여호와 하나님 보다 강하기 때문에 바벨론이 유다를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바벨론이 유다를 이기도록 하신 분은 나의 주인님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너희들의 주인이 아니라 내 주인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내 주인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바벨론 땅에 사는 유다인들과 바벨론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다니엘은 그들에게 이 일을 하신 분은 너희들의 주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님은 너희의 주인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님은 유다의 주인이면서 바벨론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내 주인님이 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주인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이나 여호와라는 말 대신 주인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라고 했습니다. 바벨론과 느부갓네살 왕은 그냥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잠언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그냥 하나님이 심판의 날에 쓰인 악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신앙입니다. “주께서”, “나의 주인님께서” 모두 내 주인님의 손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성전의 그릇 일부를 가지고 가서 시날 땅에 있는 자신들의 신전 보물창고에 두었습니다. 시날은 어떤 곳일까요? 시날은 바벨론의 고대(창세기) 명칭입니다.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의 평지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다른 지역 보다 지대가 낮습니다. 노아 홍수 때 사람과 동물들의 사체가 이곳에 모였습니다. 사체가 얼마나 모였을까요? 시날 땅은 수 없이 많은 사체들이 모인 더러운 곳입니다. 그곳은 저주받은 곳이며 죽음의 땅입니다. 이곳에서 바벨론이 시작됩니다. 니므롯이 시날 땅에서 나라를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0:10에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고 했습니다. 니므롯은 세상의 첫 용사입니다. 창세기 10:8에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고 했습니다. 용사라는 말은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들을 압제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폭군이며 전제 군주라는 의미입니다. 니므롯은 폭정을 일삼은 세상의 첫 전제군주였습니다. 니므롯은 시날 땅에서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이것이 구 바벨론입니다. 이곳에 바벨탑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다시 바벨론이 세워집니다. 이것이 신 바벨론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벨론은 신 바벨론입니다. 시날에 시체들이 모였습니다. 여기서 니므롯이 나라를 세우고, 바벨탑이 세워지고, 신 바벨론이 세워집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요한계시록 18:2에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더러운 곳이며 귀신의 처소입니다. 이 더러운 곳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던져졌습니다. 바벨론은 저주의 땅이며 죽음에 땅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던져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룩한 백성들이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이 복을 버리고 저주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거룩한 기구들이 시날 땅에 던져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민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기구들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자신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계속 더럽혔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더럽고 저주받은 죽음 땅에 던지셨습니다. 거룩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구별하십시오.
3. 왕 앞에 서기 위하여
느부갓네살은 가장 유능한 고대 통치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복자이면서 행정과 건축에 전문가였습니다. 그에게는 새 제국의 체제 안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하는 땅 어느 곳에서든지 최상의 젊은이들을 데려와 왕궁에서 자신을 섬기고 각종 사무를 보도록 했습니다. 느브갓네살이 최상의 젊은이를 뽑는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왕족이어야 합니다(3절). 둘째, 귀족이어야 합니다(3절). 왕족 아니면 귀족만을 데리고 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출신을 아주 중시 여겼습니다. 셋째,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워야 합니다(4절). 흠이 없다는 말은 신체적인 어떤 약점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은 얼굴은 물론 신체 골격까지 좋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얼굴이 잘 생겨도 신체 골격이 좋지 않거나 약점이 있으면 안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연예인 이상의 외모를 가진 사람들로 뽑았습니다. 넷째, 머리가 좋고 사려가 깊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입니다(4절).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4절)이라고 했습니다. 출신도 좋고, 얼굴과 몸도 아름다우며, 공부도 아주 잘하는 사람을 뽑은 것입니다. 다섯째, 소년이어야 합니다(4절). 느부갓네살은 아직 세상의 어떤 사상들로 때가 묻지(때묻다) 않은 어린 소년들을 데려와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쳐 자기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이미 생각과 사상이 굳어져서 가르치기 힘들고 자기에 사람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어린 소년들을 데려다가 바벨론의 사상을 주입시켜 자기의 신하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어도 왕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3년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5절>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페르시아는 14세의 소년을 3년 동안 가르쳐 17세 왕 앞에 서게 했습니다. 바벨론 시대에서 비슷한 교육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소년들은 3년 동안 왕을 섬기는 법과 왕궁의 법도와 바벨론의 언어와 학문을 배웠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수련 과정을 잘 통과한 사람만 자기 앞에 서게 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5절) 왕 앞에 선다는 것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 교육을 받을 동안에는 왕이 지정한 음식과 왕이 지정한 포도주만 먹을 수 있고, 왕이 지정한 용품만 쓸 수 있습니다. “왕이 지정하여”(5절) 5절에 왕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오고 왕을 지칭하는 그라는 인칭대명사가 1번 나옵니다. 왕! 왕! 왕! 왕!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왕인 내 앞에 서려면 자격을 갖추라는 말입니다. 내 앞에 서려면 예의를 갖추라는 말입니다. 내 앞에는 아무나 못선다는 것입니다. 나를 아무렇게나 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아무나 만나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왕 앞에 나가려면 이름도 바꾸어야 합니다. 7절에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궁에서 세상 왕을 섬기는 법도를 배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다니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를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세상 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세상 왕이 주는 음식은 세상 왕 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을 섬기는 예법을 배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생각했습니다. “세상 왕을 섬기기 위해 이렇게 준비한다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다니엘이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뜻을 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은 탕자 같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높은 사람을 만날 때,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 그에 맞게 옷도 입을 입습니다. 격식에 맞는 옷을 입지 않으면 불편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데도 법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 때나 격식 없이 받아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바른 태도를 가지고 섬겨야 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의 법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를 배워야하지 않을까요? 다니엘은 세상 왕 앞에 나가는 법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를 고민했습니다.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신하로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음식 외에는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세상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교향곡의 아버지’인 하이든은 교향곡을 가장 많이 작곡했습니다. 그는 교향곡의 형식을 완성시킨 고전 음악의 대가입니다. 그는 ‘천지창조’라는 불후의 오라트리오를 작곡했으며 이것은 헬델의 ‘메시야’와 쌍벽을 이룹니다. 하이든은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교회 음악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감동적일 수 있습니까?”그러자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종종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묵상의 시간을 가질 때 알 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힘이 솟아납니다. 그러면 마치 악곡이 춤을 추는 것처럼 머리에 떠오르고 그 때 펜을 들어 작곡하게 됩니다. 그 때 나는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이 용서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즐거움과 환호에 찬 심령으로 주님께 경배드리는 곡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실 때 무엇을 하시다가 오셨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다가 오셨습니까? 아니면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오셨습니까? 아니면 다투다가 오셨습니다. 예, 좋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오셔도 다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왕 앞에 나가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 마음의 가짐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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