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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소아시아는 지금의 튀르키예(터키 인의 땅)를 말합니다. 계시록은 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계시)입니다. 그러면 이 일곱 교회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하필 일곱 교회에만 편지를 보냈을까요? 다른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이 없으셨을까요? 이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상의 모든 교회가 일곱 교회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교회는 세상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교회이든지 교회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가 모든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칭찬과 책망을 하십니다. 칭찬만 받는 교회(서머나, 빌라델피아)가 있습니다. 칭찬과 책망을 같이 받는 교회(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은 전혀 없고 책망만 받는 교회(사데, 라오디게아)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정말 끔찍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일까요? 칭찬과 책망을 같이 받는 교회일까요? 아니면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는 교회일까요? 만약 우리 교회가 주님께 칭찬은 전혀 없고 책망만 받는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칭찬듣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책망을 받은 성도입니까? 마지막 때입니다. 일곱 교회 신앙 스토리는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신앙 스토리입니다. 일곱 교회 스토리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신앙을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일곱 교회는 일곱 시대를 상징한다는 주장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 2000년 역사를 일곱 시대로 나누는데 일곱 교회가 순서대로 각 시대를 상징한다는 해석입니다. 첫 번째 에베소 교회 시대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한 AD 30년부터 AD 100년까지로 ‘사도 시대’ 또는 ‘초대 교회 시대’라고도 합니다. 에베소는 ‘바람직한’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사도들의 선교적 열정과 신앙의 정통성, 도덕적 순결로 특징 지워져 첫사랑의 교회로 불릴 만큼 순수하고 아주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바람직한 교회이었습니다. 하지만 말기에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 주님께로 책망을 듣는 교회가 됐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 시대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서머나 교회 시대는 100년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공인한 313년까지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아주 혹독한 박해를 받습니다. 서머나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몰약입니다. 몰약은 향수, 방향제, 방부제로 쓰였습니다. 몰약은 짓눌리고 깨지면 짙은 향기를 피웁니다. 서머나 교회는 몰약처럼 세상의 짓눌림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수록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 교회입니다. 이 시기를 순교시대 또는 박해시대라고도 합니다. 세 번째 버가모 교회 시대는 313년부터 교황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538년까지를 말합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이때 많은 태양신 숭배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태양신교 지도자와 기독교의 지도자에게 태양신교와 기독교를 적당하게 혼합시킨 종교를 만들 것을 요구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수용합니다. 교회가 이교 가르침을 받아들여 이상한 종교로 변질됐습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타협과 배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과 국가가 원하는 종교가 된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세속화 시대 또는 국교시대라고 합니다. 코로나19로 나라가 교회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하면 드리고 들리지 말라고 하면 드리지 않았습니다. 20명만 드리라고 하면 20명만 드리고 15명만 드리라고 하면 15명만 드렸습니다. 4천석, 5천석 되는 교회에서 15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에 지하철 이용자가 730만 명, 버스 이용자가 300만 명입니다. 발 디딜 틈이 없는 지하철은 안전하고 교회는 위험한가요?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곳이 됐습니다. 이게 세속화 아닐까요? 회개해야 합니다.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 시대는 538년부터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까지 1000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538년에 교황은 정치와 군사력을 장악해 유럽의 국왕들을 지배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이때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순교한 사람이 5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비공식으로 죽은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이 5천만 명이니 박해로 고난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이 중세 시대를 기독교의 암흑기라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수고의 향기라는 뜻입니다. 깊은 영적 암흑 속에서도 교회가 수고의 향기를 발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 사데 교회 시대는 1517년 종교 개혁부터 1798년 피우스 교황이 나폴레옹 혁명군에 의해 체포 후 망할 때까지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내세우고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든 개혁자들로 교회는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교황권의 반대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개혁자들이 국가(교회)와 타협을 하게 됩니다. 교회가 다시 암흑기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시대 교회를 “죽었으면서도 죽은 줄 모르는 교회”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이 시기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종교개혁시대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빌라델피아 교회 시대는 교황 피우스가 사망한 1798년부터 19세기 중반까지를 말합니다. 교황 피우스가 사망으로 기독교에 대한 카톨릭의 박해가 위축되자 교회의 선교운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하게 펼쳐집니다. 이 시기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가 필라델피아입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최초의 수도로 계시록에서 이름을 따온 도시입니다. 또 미국 독립혁명과 산업혁명의 중심지였고, 초기 연방정부가 있던 곳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탄생했으며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빌라델피아는 “형제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델리파 교회는 이름처럼 형제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칭찬만 있고 책망의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형제 사랑으로 선교에 전념할 때 칭찬받는 교회가 됩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세계적인 제국이 됩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 설민석 씨가 이 시기 미국 역사에 대해 강의한 것이 있습니다. 제목이 될놈될입니다. 미국은 될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는 것마다 잘 됐다는 것입니다. 세계 선교에 앞장섰을 때 하나님이 미국에 엄청나게 복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이 시기를 선교시대라고 합니다.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는 19세기 말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를 말합니다. 이 시기를 종말시대라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 끝에 나타나는 교회로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입니다. 이상근 박사는 “일곱 교회를 그리스도교의 전 역사로 분류하는 견해가 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가 현대 교회를 표시한다는 데는 타당성이 크다고 본다.”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마지막 시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경고하신 말씀을 통해 오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천 몇 백 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더 많아졌습니다. 참으로 슬프지만 우리 시대에 그 수가 급증하였습니다. 앞으로 더 많아질 전망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뜨겁게 타올랐지만 점점 식어져 미지근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라오디게아인들에게 주어졌던 편지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 주는 편지입니다. 성경 어떤 부분의 말씀도 오래되고 낡고 해져 못쓰게 되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낡은 편지가 아닙니다. 이 편지에는 지금도 빛이 번쩍번쩍 나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여러분의 영혼에 비추십시오.
주님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좋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나쁘다는 말일까요? 나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도 너를 모르는구나! 하지만 나는 안다. 사람들은 실제 이상으로 너를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다. 네 자신도 너를 모른다. 너도 너의 신앙과 행위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큰 착각이다. 나는 사람들이나 네가 생각하는 것 외에 매우 다른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진짜 너를 알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행위들을 예리하고 엄중한 눈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행했는지, 어떻게 행했는지, 왜 행했는지를 아십니다. 예수님은 외부적 활동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내부적 상태로 판단하십니다. 주님은 외부의 화려함과 번쩍거림에 속지 않으십니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견해와 나에 대한 주님의 견해가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매우 슬픈 일입니다. 만일 내가 겉으로는 열심히 있고 눈에 띄는 사람인데 실제로는 열정도 없고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다면 참으로 우울한 일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사랑이 없다면 타락의 슬픈 징조들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진지한 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지게 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불경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적당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편협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포용적인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를 했지만 담담하게 조용히 했습니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들은 점잖고 질서있게 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열정과 활력을 촌스럽고 경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기둥같은 집사와 권사와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열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지덕을 겸비한 목사도 있었지만 영적 뜨거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아무도 불타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아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은혜의 빛은 아닙니다. 그들이 행하는 일들에는 항상 마음이 반만 있었습니다. 반은 죽고, 반은 살아 있는 식입니다. 그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절대로 부담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담스러운 일이 주어지면 부담스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까지 와서 부담스러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힘들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적당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적당하게 예배드리고 적당하게 기도하고 적당하게 봉사하며 적당하게 헌금했습니다. 어떤 일에도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원만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소외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봉사와 섬김을 포기할 만큼 차갑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 모임과 예배와 복음을 거절할 만큼 차갑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진리에 대하여 뜨겁지 않으며, 거룩함에 대하여 뜨겁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차갑거나 뜨거웠다면 기도모임과 봉사를 거절한 것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의 검불들을 태워버릴 만큼 뜨겁지 않았고, 사탄을 화나게 할 만큼 열정적이지 않았으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만큼 열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정말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괜찮아 보이는 교회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들이 “저 교회가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어떻게 행하는지 보라!”고 칭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게으르고 가식되다고 하십니다. 다른 성도가 “당신은 참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군요! 믿음도 좋고 봉사도 잘 하고 기도도 잘 하는군요.”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만약 예수님과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다르다면 그것은 가장 사악한 방법으로 형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전화사기(보이스피싱), 투자사기, 정치사기, 결혼사기, 카드사기, 계약사기, 저축사기, 환불사기 등등 사기의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사기 중에 가장 최악의 사기가 종교사기가 아닐까요? 가장 추악한 사기가 믿음사기, 신앙사기가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보는 것과 주님이 아시는 것이 전혀 다르다면 이것이 종교사기가 아닐까요? 가식, 위선, 거짓, 연극, 이런 것은 하지 맙시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에 매우 뜨겁고 건강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4:15-16에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또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그 편지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어떤 영적 각성을 요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비난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매우 건강하고 모범적인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락하였고, 이전의 열성을 잃으면서 차가워졌으며, 무관심하고 부주의하고 태만한 교회가 됐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고 하는 가짜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사도들이 없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사탄의 회당이라고 불릴 만큼 아주 강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박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세상의 혹독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박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버가모에 사탄의 권좌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안과 밖으로 어려운 일을 당한 교회가 버가모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과 같은 교인이 있었고 그를 용납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부적인 박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부자였습니다. 교회가 부요하고 평안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왜 열정이 사라졌을까요? 어려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부요해서 일까요? 부요와 평안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영적으로 병들게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에서 겪는 가시는 우리를 바로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내 심장을 기도로 뜨겁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믿음을 회복합시다.
사람들은 더웁지도 차지도 않은 중간 상태에 있을 때에는 극한 죄악 속에 있을 때보다 회개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바울은 아주 심각한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에게 돌로 맞아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7:57-58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돌로 세게 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돌로 칠 때 첫 번째 증인이 죄인의 뒷머리를 잡고 숙이게 한 다음 돌로 쳐 넘어지면 두 번째 증인이 돌로 죄인의 가슴을 쳤습니다. 그런 다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돌을 던짐으로 죽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방법입니다. 옷을 벗어 사울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책임져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박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바울은 심각한 예수님의 반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했습니다. 반면에 가말리엘은 예수님을 반대하지도 찬성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말리엘은 당대 제일가는 율법학자로 사울의 스승입니다. 그는 인격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5:38-39) 가말리엘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욕하지도 않았지만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최고의 학자, 최고의 인격자, 최고의 합리주의자, 가말리엘은 후에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저는 가말리엘이 죽을 때까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마음을 갖고 있는 교회는 복음을 반대하는 이단들보다 더 악을 끼칩니다. 반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도는 교회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보다 교회를 더 해칠 수 있습니다. 반마음, 반믿음, 반신앙, 반기도, 반예배, 반찬송, 반동의,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미지근함은 소름끼치도록 혐오스럽고 악한 것입니다. 제가 너무 과격하고 심하게 말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주님은 더 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절) 토하여 버린다는 말이 헬라어로 에메오(ἐμέώ)입니다. 에메오는 ‘먹었던 음식을 쫘악 토해내다, 뿜어내다, 구토하다, 토하다, 혐오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구역질난다, 매우 역겹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함이 너무 역겨워 견디지 못해 하십니다. 이 말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입 속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입 속에 있었습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의 입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입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입 속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 줄 아십니까? 주님의 입 속에 있는 사람은 그가 당하는 아픔과 억울함이 주님에 의해 날마다 하나님께 아뢰어집니다. 로마서 8:34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입에 넣으시고 씹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세상 어떤 사람의 입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을 끊임없이 씹을 것입니다.
저의 어머님이 사시는 시골 마을 입구에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옆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정자에 그늘을 만들어 줘 뜨거운 여름에도 시원합니다. 정자에 동네 어른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아주 보기가 좋습니다. 어른들이 한 여름에 그늘에 앉아서 들판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운치가 있습니까? 그런데 저의 어머님은 거기에 잘 안 나가세요. 그래서 제가 어머님께 나가셔서 마을 어른들과 이야기도 하시고 놀다 오시라고 해도 안 나가세요. 어느 날 제 아내가 정자에 계신 어른들에게 드실 것 좀 갔다 드렸어요. 그리고 좀 앉아 있다 왔어요. 그런데 이야기 주제가 전부 남 이야기인 거예요. 아내가 너무 불편하더래요. 이야기를 하는 중에 어른 한 분이 일어나서 집으로 가셨데요. 일어나자마자 남아 계신 분들이 그분을 욕하는데 깜짝 놀랐데요. 그러다가 또 한 분이 일어나서 가시니까 바로 그 분을 욕하더래요. 딸이 어떻고, 아들이 어떻고, 언제 어디서 뭐를 했고... 다 나오더래요. 알고 봤더니 무서운 곳이더래요. 아내가 집에를 와야 하는데 자기 욕을 할까봐 못 일어나겠더래요. 그래서 다 가실 때까지 끝까지 앉아 있었대요. 좋은 곳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나쁜 어른들일까요? 아닙니다. 순박한 분들입니다. 나쁜 분들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이 원래 그런 곳입니다. 사람들을 씹어대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댑니다. 마귀는 계속 우리를 씹어댑니다. 마귀를 참소자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10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참소하는 자입니다. 참소한다는 말이 씹는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정죄하는 자입니다. 정죄한다는 말이 씹는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할까요? 마귀의 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입 속에 넣고 씹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말에 상처를 입고 고민하고 우울해하고 삶을 포기합니다. 세상은 마귀의 입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입에 넣으시고 씹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올리십니다. 우리 아픔을 어루만지십니다. 호세아 2:14에 “말로 위로하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싸매시고 고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위한 기도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호사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저를 변호하십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요한이는 아무 날 아무 시에 이런 죄를 졌습니다. 목사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습니다.”라고 참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변호하십니다. “하나님! 마귀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요한이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이는 무죄입니다.” 마귀는 너는 목사도 아니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를 목사로 택했다고 하시며 세워주십니다. 저는 행복한 목사입니다. 여러분도 행복한 성도들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기도와 변호가 예수님의 입에서 지금도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매우 강력합니다. 그 기도의 결과로 나타나는 복은 셀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중보의 기도를 감당하시던 입에서 뱉어져 주님께 속한 교회가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변호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택한 자들을 위해 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뱉어지는 순간 기도는 멈출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의 입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 있는 성도가 되세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했습니다. 아멘은 “진실로, 참으로, 그대로 되게 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실, 참이십니다. 충성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피스토스입니다. 피스토스는 믿음, 신실,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멘이십니다. 국어사전에서 아멘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자기도 진실로 그 내용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 우리는 기도, 찬송, 말씀 후에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멘을 끝이 아니라 앞에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했습니다. ‘진실로’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멘입니다. 신약 성경을 읽다가 “진실로”라는 말이 나오면 아멘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가복음 13:30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마태/마가/누가복음에 52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말씀 앞에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아멘이라는 말을 겹쳐서 사용했습니다. 요한복음 6:47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멘 아멘”입니다. 요한복음에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25번 나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아멘이라는 말을 한 번만 기록했는데 요한은 두 번 이어서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아멘 아멘”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 앞에 하신 아멘이라는 헬라어로 “진실로”라고 번역하지 말고 그대로 “아멘”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왜 예수님은 아멘을 말씀 끝에 하지 않으시고 앞에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아멘이 없습니다. 아멘이 없는 시대에 아멘합니다. 고린도후서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없고, 예수님에 대한 확신도 없으며, 말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없습니다.
어떤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와서 억울함으로 풀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재판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과부는 밤낮 없이 와서 재판장에게 호소합니다. 재판장이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너무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줬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비유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결론 후에 한 마디 더 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에 믿음이 없다, 말세에 아멘이 없다, 말세에 기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라오디게아 시대입니다. 아멘이 없는 시대입니다. 아멘 없는 시대에 아멘 합시다. 믿음도 없고, 기도도 없고, 확신도 없는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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