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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동성애 앞에서는 법이 필요 없었다

조회수 : 395회

본문 : 창세기 19:4-11
주일오전예배 | 2021-10-2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오늘 설교의 주제는 동성애에 관한 것입니다. 예배 중에 입에 담기 불편한 용어들이 조금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입니다. 듣기 불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잘 들으시고 우리의 후손들, 우리의 사회 그리고 우리 교회를 동성애로부터 지키는데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동성애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심벌은 무지개입니다. 20156월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 결혼 합헌 결정을 내렸을 때 오바마는 백악관의 외벽에 무지개 색 조명을 밝히고 이를 축하했습니다. 1978년 동성애자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무지개는 8가지 색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분홍색을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홍색을 빼고 7가지 색만을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6가지 색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은 동성애가 가지고 있는 영적 특징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6은 완전수인 7에서 1이 모자란 수로 미완성, 불완전, 인간, 사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요한계시록 13:18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3은 완전수입니다. 불완전한 수인 63개가 모였으니 불완전함이 얼마나 완전하겠습니까? 666은 짐승, 즉 사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누가복음 17:28에서 예수님은 롯의 시대 사람들이 하던 일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6가지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섯 색깔 무지개를 선택한 것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사탄의 일임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동성애는 인류를 파멸케 하는 마귀의 아주 강력한 무기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 후에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며 노아에게 약속의 증표로 주신 것입니다. 홍수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본 노아는 비만 오면 얼마나 불안할까요? 하나님은 노아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비가 올 때 노아는 무지개를 보고 안심했습니다. 무지개는 노아에게 은혜롭고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노아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이 무지개를 동성애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지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동성애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동성애의 여섯 색깔 무지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을 오염시키려는 사탄들의 계략입니다. 창세기 9:13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나니라고 했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탄이 변개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것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날뛰고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그대로 있습니다. 변하는 시대에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직전의 스토리를 살펴보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동생애가 얼마나 만연했었는지 그리고 동성애가 사회를 얼마나 사악하고 무질서하게 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그것 앞에서는 법이 필요 없다

 

먼저 소돔 나라에 동성애가 얼마나 만연해 있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돔 성에 밤이 왔습니다. 소돔 시에 광란의 축제가 시작됐습니다. 죄는 어둠을 틈타 독버섯처럼 퍼지고 자랍니다. 여러분은 어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빛 가운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소돔 성의 남자들이 남자의 모습을 한 천사들이 들어가서 쉬고 있는 롯의 집을 에워싸고 롯에게 오늘 밤에 너의 집에 들어온 남자들을 끌어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오늘밤에 우리가 그들과 좀 즐겨야겠다는 것입니다.

 

  • <4-5>
  • 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4절에 젊은이로부터 노인들까지 소돔 성의 남자들이 롯의 집에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 성 남자들 곧 소돔 남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돔의 모든 남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모인 이유는 딱 한 가지, 그것은 롯의 집에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윤간하겠다는 것입니다. 5절 끝에 상관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야다는 알다는 뜻입니다. 야다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아는 것, 마음이나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 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말이 성경에서 성관계에 관한 완곡한 표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원근에서 다 모여”(4)라고 했습니다. 원근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체인데 이 말은 끝, 극단이라는 뜻입니다. 소돔 성 끝에 있는 사람까지 다 왔다는 의미입니다. 또 마지막 남자까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소돔 시의 모든 지역의 모든 남자들, 젊은이에서 노인까지라고 번역했습니다(all the men from every part of the city of Sodom -- both young and old). 소돔 성의 모든 사람들이 롯의 집에 들어간 두 천사를 윤간하기 위해 다 모인 것입니다. 성경은 한 남자도, 한 지역도 빠지지 않고 전역에서 모든 남자들이 다 모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위해 소돔 남자들은 한 덩어리가 됐습니다. 악인들이 악의 축제를 위해 혼연일체가 돼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이게 동성애입니다.

 

로버트 클라우스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회중을 의미한다. (중략) 성령께서 예배하는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서로 연합하게 하시는 곳마다 교회의 신비가 존재한다.” 교회는 모임입니다. 모일 때 하나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오순절 날이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모일 때 성령 강림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46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했습니다. 모일 때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마태복음 18:20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주님이 함께 하시는 신비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모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귀는 세상이 끝으로 갈수록 교회 안에 하나님의 신비가 사라지도록 성도들을 모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 세상은 악을 위해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모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모여주세요. 교회는 모여야 교회입니다. 모이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악보다 더 단단하게 모여야 합니다. 모일 때 교회는 힘을 발휘합니다.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세 겹 줄일까요? 두 줄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한 줄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보일 때 주님이 우리 중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세 겹 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주세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마지막 때 악인들 보다 더 단단하게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끊어지지 않습니다.

 

소돔 성의 모든 남자들이 롯의 집을 둘러싸고 천사들을 겁탈하겠다고 소리 지르며 위협하고 있습니다. 보통 나쁜 일은 뒤에 숨어서 몰래 합니다. 나쁜 일은 악인들 사이에 비밀입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무시무시한 일임에도 그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입니다. 거리낌이 조금도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소돔 성에 낯선 외국인들이 들어올 때마다 이런 일이 계속 되어왔다는 뜻입니다. 소돔에서는 나그네에 대한 성폭력이 관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동성 간의 성폭력입니다. 이 일에 모든 남자들이 다 가담한 것입니다. 한 남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소돔은 법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롯은 국가의 법을 집행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하는 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우리의 법관이 되려하는 도다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그가 계속 재판을 하고 있다입니다. 이 말은 낮에 성문에서 재판을 하면 됐지 퇴근하고 집에서까지 이 밤에 우리를 재판하려고 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너 같은 법관 필요 없어. 좀 즐겨보겠다는데 무슨 법이야. 재판 놀이는 성문에서나 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법관을 밀치고 해코지하고 있습니다. 법관을 조금의 망설임이나 거리낌도 없이 해치고 있습니다. 이때 치안을 담당한 경찰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퇴근했을까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경찰들도 이 나그네 성폭력에 함께 가담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의 유력한 인사들이 이 성폭력을 주관한 것 같습니다. 11절에 대소를 막론하고라고 했습니다. 큰 자는 성의 유력한 사람들입니다. 성의 힘 있는 사람들이 동성 성폭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소돔 성에서는 성폭력, 동성애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금지하는 법도, 집행관도 없고 이런 행위를 못하게 말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동성애로 법과 질서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보편화 된 사회가 있을 수 있을까요? 동성애 앞에서는 법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 앞에서는 법이 필요 없었습니다. 동성애가 법 위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멸망하기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동성애가 만든 사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동성애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1990년대 페미니즘 학계를 단숨에 장악해버립니다. 버틀러는 기존의 가정, 결혼, 출산, 남성과 여성 구분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조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별을 해체하고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의 금기를 깨라고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성이 가정을 이루는 사회를 철저히 배격합니다. 하지만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허구성과 반사회성이 입증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반발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청소년들이 타고난 성별을 불쾌해하는 성적 불쾌감 증상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 4천 퍼센트 증가했습니다. 동성애를 허용하는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나라에서 부작용이 생기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철회하려고 하지만 한 번 통과된 법안을 다시 철회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동성애는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반사회적인 것입니다.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기도주세요. 지금은 우리나라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 때입니다.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를 위해 울어주세요. 세상이 암흑입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성도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동성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세상 끝에 가까이에 왔는지 알려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지만 더욱 순결하시고 더 거룩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십시오. 마지막 때입니다. 나와 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도록 기도하세요.

 

2. 이도 저도 아니다

 

두 번째로 롯이 어떤 그리스도인이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입니다. 꼭 성령님에 이끌리어 사십시오. 둘째,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고전2:14). 성령의 일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입니다. 이를 자연인입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셋째,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고전3:1).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이리저리 끌려다는 사람입니다. 롯은 세 번째 육에 속한 사람의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롯은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세상도 원했습니다. 롯은 은혜도 필요했지만 세상적인 즐거움도 필요했습니다. 롯은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의 가치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한 세계를 포기하시고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십시오. 롯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전형입니다. 롯은 이중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중적인 신앙인이 되지 마세요. 롯은 소돔 사람들로부터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뒤로 닫았습니다.

 

  • <6-7>
  •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소돔 사람들은 매우 위협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롯은 폭도들의 행동을 제지했습니다. 9절에 몰려온 많은 사람들이 롯을 밀치며 문을 부수려고 했을 때 롯은 저항하며 끝까지 문을 지켰습니다. 폭력배들의 행동이 아주 거셌지만 롯은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저항한 것입니다. 이런 행동으로 볼 때 롯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롯처럼 하십시오. 여러분의 집의 문을 여러분이 굳게 지키십시오. 문 앞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물러서면 문이 부서집니다. 마귀들이 여러분의 가정의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저는 종종 교회 문 앞에 서서 하나님 이 문을 지켜주십시오. “이곳에 악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집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 문에 유월절의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제가 성전의 문지기가 된 것처럼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의 영적 문지기가 되십시오. 남편과 자녀를 기도로 지키십시오. 롯은 문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누구도 폭도들을 제지하지 않을 때 롯은 그들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이런 행동을 볼 때 틀림없이 롯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롯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롯은 소돔 사람들의 악을 자신이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돔 사람들에게 해결방안을 하나 제시합니다.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내게 딸이 둘 있는데 그 딸들을 내어줄 테니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들에게는 못쓸 짓을 하면 안 되고 딸들에게는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아마도 롯은 동성 겁탈이라는 큰 죄를 좀 더 작은 죄인 이성 겁탈로 막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큰 죄를 작은 죄로 막을 수 있습니까? 죄는 죄로 막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악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방법입니다. 죄는 의로 막아야 합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이 세상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롯이 나그네들을 위해 딸들을 겁탈하도록 내어준 것은 욥의 영적 기준이 흐려졌다는 뜻입니다. 롯이 소돔에 살면서 신앙의 기준이 흐려진 것입니다. 이것은 롯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에서 나오다가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됐습니다. 멸망하는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포기한 것입니다. 소돔에서 빠져나온 후에 롯은 두 딸과 산에서 삽니다. 이때 큰 딸이 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의인의 가정에서 근친상간이라니요? 롯과 그의 아내, 그의 두 딸이 소돔에 살면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동성애는 사람들의 가져야 할 기본적인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동성애는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동성애는 국가를 무너뜨립니다. 동성애는 의의 기준을 무너뜨립니다. 동성애는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퀴어라고 불렀습니다. 퀴어는 낯선, 이상한, 괴상한이라는 뜻입니다. 퀴어 신학자들은 기독교 정통 신학의 중심 주제는 아주 낯설고 이상한성격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정말 낯설고 이상한 현상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부활, 승천, 양성론 등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모두 낯설고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 자체가 낯설고 이상하기 때문에 동성애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바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성애가 교회의 중심부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동성애를 배격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신앙의 기준을 흐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타고 있습니다. 혼합주의가 교회 신앙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기준이 흐려지면 안 됩니다.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말씀 앞에서 물러서지 마십시오.

 

롯은 소돔 사람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소돔 사람들은 롯을 이 자(사람)”라고 했습니다. “이 자라는 말을 개역성경, 표준새번역 성경, 우리말성경은 모두 이 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떠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롯이 소돔으로 이사한지 2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소돔 사람들은 롯을 소돔 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롯은 소돔 사람들을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소돔의 주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롯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세상과 어울리려고 하지 마세요.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교회와 세상은 어우릴 수 없습니다. 어울리려 할 때 롯이 되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파멸 밖에 없습니다.

 

몇 달 전에 남자 화장실 좌변기 뒤쪽 사각 모서리 부분에 작은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쳤습니다. 얼마 후에는 소변기와 소변기 옆에 있는 부스 사이에도 작은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쳤어요. 얼마 전에는 소변기 안에 거미줄을 쳤어요. 보는 순간 기가 막혔습니다. 거미줄이 어떻게 됐을까요? 청소하는 사람에 의해 끊어졌을 것입니다. 거미는 자기가 있는 곳에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 거미를 보면서 사람이 거미하고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롯은 자신을 소돔 시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롯을 소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떠돌이, 나그네, 외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롯은 소돔에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소돔에 집을 짓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썩은 냄새가 났을 텐데 그냥 사는 거예요.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을 했을 텐데 그냥 사는 거예요. 끊어질 줄도 모르고 산 거예요. 거미처럼 산 거예요. 소돔이 영적으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롯은 소돔을 끝까지 놓지 못합니다.

 

여러분! 거미줄 같은 것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나라 증류주 판매율이 2001년부터 14년 동안 연속 1위라고 합니다. 증류주는 브랜디, 위스키, 보드카, 데킬라 같은 술입니다. 술 끊으세요. 거미줄입니다. 술 안마시면 고급차 살 수 있어요. 돈 의지하지 마세요. 세상 의지하지 마세요. 거미줄입니다. 거미처럼 살지 마세요. 하나님 의지하세요. 롯은 거미처럼 끊어질 것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미줄인지 몰랐습니다.

 

3. 눈이 어두워질 때

 

마지막으로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린 소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폭도들의 폭주가 계속되자 천사들이 행동을 개시합니다. 천사들은 손을 내밀어 문 밖에 있는 롯을 집 안으로 어들였습니다.

 

  • <10-11>
  •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 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감격했습니다. 폭도들 앞에 혼자 겨우 버티고 있는 롯을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건져주신 것입니다. 롯은 너무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손을 펴서 롯은 구하셨어요. 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 아세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9:29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라고 했습니다. 롯이 폭도들에게 맞아죽지 않고 건짐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입은 은혜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자녀와 남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죄악과 세상 위협 앞에 서 있을 때 여러분을 건져주시는 천사의 손길 있기를 바랍니다. 복은 고사하고 자녀가 나 때문에 저주를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자기 때문에 자녀들이 저주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저희 교회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롯을 끌어들인 다음에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 문을 천사가 닫아주십시오. 우리 성도님들의 집 문을 천사가 닫아주십시오. 우리 집 문을 천사가 닫아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좋은지요. 천사가 닫아준 문! 천사가 지켜주는 문! 어떤 문을 천사가 지켜줄까요? 이스라엘의 첫 유월절 밤에 죽음의 저주의 천사가 애굽을 지나갔습니다. 애굽의 처음 난 것은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에서 예외가 된 집이 있습니다. 집 문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집 문에 영적 어린 양의 피를 바르십시오. 그래서 저주가 여러분의 가정을 유월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십시오. 조금만 믿지 마시고 굳게 믿으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이 거하는 집 문을 하나님의 천사가 지켜주십니다. 롯처럼 믿지 마세요. ‘롯도 하나님이 지켜주셨는데 나도 지켜주시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롯은 아브라함이 아니었으면 소돔과 함께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의 눈을 모두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갑자기 앞을 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쾌락을 위해 여전히 문을 찾았습니다. 헤맸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기진맥진했다 또는 지쳤다는 뜻도 됩니다. 개역성경은 곤비했다고 번역했습니다. 맹인이 됐는데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계속 롯의 집 문을 찾은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은 멈출 줄 모르는 폭주하는 기관차 같았습니다. 이들의 행동이 정말 놀랍고 섬뜩하지 않습니까? 맹인이 됐는데도 쾌락을 중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자 중에서 치료를 받고 전향한 사람이 신문에 기고를 했습니다. 그분이 말에 의하면 동성애는 전혀 정서적인 것이 아니랍니다. 오직 쾌락 밖에 없답니다. 다른 것은 전혀 없답니다. 맹인이 됐음에도 쾌락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 롯의 집으로 들어가려는 소돔 사람들을 보세요. 재앙이 시작됐는데도 죄악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보십시오. 여러분! 이게 동성애에 빠진 소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신문에 기고한 사람이 동성애가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너무 미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하는 말이 동성애는 다른 것은 일체 없고 오직 쾌락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쾌락이 사람을 죄악의 끝으로 한 없이 몰고 가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동시에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늘에서 벌을 내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두려워하며 회개해야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 성에 가서 40일 후면 이 성이 무너질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이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했습니다. 사람만 금식한 것이 아니라 짐승까지 금식을 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요나가 예언하기 직전에 니느웨 성에 지진과 월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진과 월식이 연달아 생기자 사람들이 두려웠던 거예요. 그러던 차에 요나가 니느웨 성이 망한다고 하자 모두가 회개한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지진과 월식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징조가 있으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회개하세요. 그것이 사는 방법입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총장이 김의환 목사님이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몪사님은 교수가 총장이 되기 전에는 미국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미국에는 지진이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나면 교회가 꽉 차더래요. 사람들이 불안하니까 교회로 오는 거예요. 그래서 김의환 목사님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대요. “하나님! 가끔 적당하게 한 번씩 흔들어 주세요.” 사람들이 징조를 보고 하나님 앞에 서는 거예요.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눈이 어두워졌는데도 회개는커녕 폭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회개했다면 소돔이 망하지 않고 살지 않았을까요? 의인 열 명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마지막 살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여러분! 세상 살다가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리세요. 이것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막막할 때, 앞이 캄캄할 때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 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아들을 낳고 사라와 불화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아들과 함께 내쫓았습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 아들과 함께 죽게 됐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갈이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하갈이 샘물을 발견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에게 마시게 하였더라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광야에서 죽지 않고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 대결을 펼쳤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뒤에는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왕궁에서 후원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숫자도 850명입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혼자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후원자도 없습니다. 행색도 거지처럼 초라합니다. 그런데 참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 선지자 사이에서 이쪽으로도 못가고 저쪽으로 못가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참 신앙과 세상 권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왔다 갔다 하지 마세요. 참 신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가짜 신을 버리세요. 로마 신화에 야누스라는 문을 지키는 신이 있습니다. 이 신은 뒤통수 쪽에 얼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 앞뒤 얼굴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의 얼굴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쪽 얼굴은 포기하십시오. 세상의 얼굴을 포기하십시오.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갈팡질팡하지 마십시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세계 3대 퀴어 축제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서 해마다 열립니다. 예루살렘에서도 해마다 퀴어 축제가 있습니다. 지난 6월에도 코로나 백신 접종 후에 이스라엘이 집단 면역을 이루었다며 그 상징적인 행사로 예루살렘에서 퀴어 축제를 했습니다. 7500명이 퍼레이드를 했습니다. 성지 예루살렘이 소돔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 예루살렘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세상 끝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인류의 구원을 이룬 예루살렘이 소돔처럼 동성애의 도성이 되고 애굽처럼 우상의 나라가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이 이렇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을 이루신 거룩한 땅을 동성애자들이 음란으로 더럽히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로 변해가고 있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면서 주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웁시다. 회개합시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세상이 심판 받을 때 은혜를 입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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