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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성경에 롯에 관해서 가장 자세하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9장입니다. 18장이 아브라함의 천사 영접 스토리라면 19장은 롯의 천사 영접 스토리입니다. 두 이야기는 동일하게 나그네 대접에 관한 고대인들의 전통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나그네에 대한 태도로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차이점)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인지, 왜 롯인지, 그리고 왜 아브라함이 복을 더 받았는지, 왜 롯이 복을 잃어버렸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처럼 롯도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접에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 대한 천사들의 태도도 많이 다릅니다. 이 시간 롯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은혜받고 더 복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1. 저녁 때에
데라에게는 하란, 아브라함, 나홀(창24:15)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3형제 중에 둘째입니다. 아브라함의 형인 하란은 롯을 낳고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보다 먼저 죽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중간 지점인 하란에서 죽습니다. 막내 나홀은 메소보타미아에서 자리를 잡습니다(창24:10, 15). 아버지가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하는 일마다 잘 됐습니다. 조카 롯도 삼촌과 다니면서 큰 부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랐습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성을 위해 기도할 때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구체적으로 롯을 가리킵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롯을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7절에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롯은 삼촌과 함께 다니면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인생의 최고 전성기를 누립니다. 이때의 롯의 영적 상태를 하루의 시간으로 표현한다면 한낮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과 있을 때 최상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올라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롯의 인생이 하향 길로 접어듭니다. 롯의 인생의 내리막길은 삼촌과의 분가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목자들과 삼촌의 목자들이 다퉜습니다. 다툼이 있을 때 롯은 자신의 목자들이 삼촌의 목자들에게 양보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롯은 삼촌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롯은 삼촌과 분가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 하셨습니다. 롯은 복의 근원을 떠난 것입니다. 롯은 약속의 땅 헤브론에서도 떠납니다. 이것이 롯의 인생의 하향 길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복 있는 사람과 함께 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을 떠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믿음이 있는 곳에서도 떠나지 마십시오. 헤브론을 떠난 롯은 소돔 근처로 이사를 합니다. 이때부터 롯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치닫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습니다. 롯이 거하던 헤브론은 소돔보다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내려다보았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롯이 평상시에 소돔과 고모라를 아주 동경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롯은 삼촌과 함께 헤브론 시골에 살았습니다. 롯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도시를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삼촌과 분가한 후에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소돔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창세기 13장 12절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녀 보니 소돔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돔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왜 롯은 소돔 성 안이 아니라 소돔 근처에 자리를 잡았을까요? 성경 기자가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는 말씀을 뒤에 덧붙인 것을 보면 소돔이 좋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악해 살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돔 근처에 살면서 전원생활과 도시생활을 적당하게 병행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롯은 어느 순간 소돔 성 안으로 아예 이사를 합니다. 가나안의 북쪽 나라들이 연합해서 남쪽을 정벌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롯은 소돔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14장 12절에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라고 했습니다. 어느 샌가 롯이 소돔 안으로 이사를 한 것입니다. 롯이 소돔으로 이사하지 않았다면 전쟁에서 예외가 됐을 것입니다. 왜 이 전쟁이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롯에게 소돔에서 나오라는 싸인을 보내신 것은 아닐까요? 롯이 아브라함과 시골에서 살았다면 이 전쟁에서 예외가 되었을 것입니다. 북쪽으로 끌려가는 롯을 아브라함이 군사들을 이끌고 쫓아가 구출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게 하셨을까요? 롯에게 소돔에서 나와 아브라함과 함께 거하라고 싸인을 보내신 것은 아닐까요? 롯은 은혜를 입었지만 여전히 죄악의 소굴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사람은 싸인을 보내도 정말 몰라요. 어쨌든 롯은 소돔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살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그 장소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쇠는 자석에 가까이 있으면 끌려갑니다. 버틸 수 없습니다. 쇠가 자석에 끌리듯 롯은 소돔에 끌려가버렸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소돔은 도시를 동경하던 롯의 마음을 빨아들였습니다. 한 때 신학계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도시는 사탄이 만들고 시골은 하나님의 만드셨다.”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엘룰은 「도시의 의미」라는 책에서 도시에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도시는 나쁘고 시골은 좋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도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역기능을 지적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을 세속화 시키는 도시의 영적 역기능에 흡수되지 마십시오. 도시에 살지 마시고 시골로 이사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롯처럼 세상에 흡수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롯은 소돔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때 롯의 영적 상태는 바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롯은 소돔에서 꽤 성공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천사가 소돔에 도착했을 때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앉다’라는 말이 분사로 계속 앉아있었다는 뜻입니다. 롯은 소돔 성문에 늘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성문 안쪽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습니다. 이 광장에서 상거래, 재판, 계약체결, 광고, 고용 등등 사회의 전반적인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문에는 성의 장로들과 주요 인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롯이 성문에 앉아있었다는 말은 롯이 소돔의 지도층 인사로 그곳 거민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소돔사람들이 롯에서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하는 도다’(19:9)라고 말했습니다. 롯이 소돔에서 법에 관련된 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재판을 했을까요? 어쨌든 회계와 법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롯은 소돔에서 꽤 성공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성공을 축복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롯의 주변에 있었다면 롯을 믿음으로 성공했다며 추켜세우고 축하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외면적으로 롯은 소돔에서 출세한 한 사람입니다. 고위공직자입니다. 하지만 롯은 영적으로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영혼이 썩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기자가 롯의 스토리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한 말이 “저녁 때에”입니다.
<1절> 저녁 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저녁 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11절). 하나님과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시간은 한 낮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에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창18:1)라고 했습니다. 날이 뜨거울 때라는 말은 한낮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한 시간은 해가 중천에 떠있는 한낮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한창 활동하는 시간입니다. 밤이 되려면 먼 시간입니다. 그런데 두 천사가 롯을 방문한 시간은 해질 무렵인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성문은 저녁 때 해가 지기 직전에 닫힙니다. 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롯이 두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루의 중간에 하나님을 만났다면 롯은 하루가 끝나는 시간에 천사들을 만난 것입니다. 롯은 끝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양 옆에는 두 강도가 함께 매달렸습니다. 한편 강도가 죽기 직전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일생을 강도로 살다가 인생 끝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받은 아슬아슬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포도원에 이른 아침에 들어온 사람이 있고 3시, 6시, 9시에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11시에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의 11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5시입니다. 6시에 일이 끝난다면 한 시간 전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끝에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아침에 일찍 들어온 사람들이 늦게 들어온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끝에 있는 사람을 부러워해요.
롯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끝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큽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한낮에 찾아가신 반면 천사들은 롯을 저녁 때 찾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상태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밝은 대낮이라면 롯의 영적 상태는 해가 지고 성문이 닫히기 직전인 저녁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성공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소돔의 내로라하는 고위공직자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지고 있는 해였습니다. 영적으로는 바닥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할 때는 한낮이었는데 지금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여유가 있는 밝은 한낮입니까? 아니면 롯처럼 아슬아슬한 저녁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영적 상태를 가늠하지 마십시오. 세상 기준으로 믿음을 측정하지 마세요. 만약 롯처럼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지는 황혼이라면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영적 한낮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3장 1절에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광야 서쪽까지 갔습니다. 서쪽은 해가 지는 쪽입니다. 광야 서쪽까지 갔다는 말은 광야 끝까지 갔다는 뜻입니다. 갈 데까지 갔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가 자기 인생이 끝났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모세의 인생은 해가 지는 저녁과 같았습니다. 지평선에 겨우 걸려있는 해 같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인생 끝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저녁이 아니라 한낮인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롯처럼 저녁이 되지 마시고 아브라함처럼 한낮이 되십시오. 은혜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서 계시지 마시고 하나님의 더 넓은 은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은혜인지 죄인지 모르는 애매한 회색지대에 있지 마십시오. 확실한 은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더 기도하고 더 찬송하시고 더 예배하십시오. 가만히 있는 물은 썩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십시오.
2. 이럴 거면 왜?
롯이 성문에 앉아 있다가 두 천사를 보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자신의 집에 유숙할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롯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롯은 간청을 해 천사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식사로 무교병을 대접합니다. 천사들은 식사 후에 잠자리에 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롯이 두 천사를 대접한 대략입니다. 그런데 롯의 대접이 아브라함의 대접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롯은 천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천사들을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18장 2절에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을 보자마자 즉시로 달려 나갔습니다. 천사들이 가까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더 다가간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롯은 천사들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자신의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롯은 천사들이 자기 앞으로 올 때까지 보지 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못 본체 한 것일까요? 천사들이 자기 앞에 왔을 때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롯의 친절은 버스 안에서 노인을 보고 못 본체 하다가 자기 앞에 왔을 때 민망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정도의 친절입니다. 물론 끝까지 모른 체 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친절입니다. 성문에는 많은 소돔 사람들이 함께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천사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소돔 사람들에 비해 롯의 태도는 훨씬 나은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받는 사람 쪽에서는 달갑지 않는 친절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롯은 천사들 앞에 넙죽 엎드리며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천사들이 거절하자 롯은 억지로 천사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3절의 간청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밀다, 강요하다, 가두다’는 뜻입니다. 롯은 억지로 두 천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본다면 나그네에 대한 롯의 태도는 아브라함 보다 훨씬 헌신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몸을 굽히기는 했지만 몸을 땅에 대고 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그네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롯의 태도는 지극히 형식적으로 변합니다. 롯은 천사들에게 식사로 무교병을 제공합니다. 무교병은 이스트를 넣지 않은 뻣뻣한 빵입니다. 무교병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기념하는 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에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으며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조상들의 고난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3절에 무교병을 고난의 빵(대하18:26)이라고 했습니다. 무교병이라는 말은 맛없는 빵입니다. 롯은 천사들에게 맛없는 빵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맛있는 빵을 제공합니다. 18장 6절에 떡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우가입니다. 보통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입니다. 우가는 레헴 보다 더 고급스러운 빵으로 뜨거운 돌에 구운 팬케이크입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가들은 케이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에게 맛있는 팬케이크를 대접했습니다. 그것도 세 스아의 케이크입니다. 1스아는 12리터입니다. 아브라함은 36리터로 만든 엄청난 양의 케이크를 천사들에게 대접한 것입니다. 또 기름지고 좋은 수송아지를 잡아 하인들에게 요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엉긴 젖과 우유까지 제공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친절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이 식사를 하는 내내 옆에서 서서 종처럼 시중을 들었습니다. 팬 케이크는 아내 사라가 준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축 떼로 달려가 좋은 송아지를 잡아왔습니다. 종들은 그것을 요리했습니다. 온 집안이 손님 대접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천사들에게 무교병만을 제공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문 앞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땅에 엎드려 넙죽 절을 하며 대하던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나그네들이 속으로 이럴 거면 차라리 들어오라고 하지나 말지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천사들이 롯의 초청을 처음에 거절한 것이 아닐까요? 줘서 기분 나쁜 선물은 하지 마세요. 베풀었는데 상대방을 찜찜하게 하는 친절은 베풀지 마세요. 하시려거든 진심으로 하세요.
롯의 친절은 아브라함의 태도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소돔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것이었습니다. 나그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신앙의 경건성이 아직은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형식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있을 때는 친절한 척 하고 사람들이 없을 때는 막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나중에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납니다. 사람이 있을 때 말고 아무도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 앞에서는 롯처럼 땅에 엎드리듯 넙죽 절하지만 보지 않는 곳에서는 막나가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롯입니까? 신사입니까? 아니면 무뢰한입니까? 사람들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한결같다는 말입니다.
3. 미궁 속으로
하나님은 두 천사와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방문하셨습니다. 하지만 롯에게는 두 천사만 보내십니다. 두 천사만 보내시고 왜 롯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을까요? 성경이 침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롯에게 자신을 분명하게 나타내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롯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모호했습니다. 왜 롯이 하나님의 은혜에 모호한 사람이 됐을까요? 그것은 롯이 약속의 땅 헤브론을 떠나 소돔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아브라함처럼 은혜가 분명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롯처럼 모호한 신앙인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롯의 길을 가지 마십시오. 애매한 신앙인 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의 길을 가십시오. 확실한 믿음의 길을 가십시오. 20년 30년 신앙생활 했는데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면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믿음이 선명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확실하게 보여야 합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때 영적으로 최고의 상태였습니다. 밝은 대낮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그의 인생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롯을 대한 태도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롯이 천사들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자신의 집에 들어갈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거리에서 밤을 지내겠다며 거절했습니다. 롯은 천사에게 거절당한 사람입니다. 엎드려 절하면서까지 요청했는데 왜 천사들은 거절했을까요? 롯의 집보다 거리가 나은 걸까요? 반면에 아브라함의 요청에는 거절을 하지 않고 바로 응했습니다. 천사들이 두 사람을 차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의 태도입니까? 아니면 롯의 태도입니까? 롯의 태도를 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십시오.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식사 후에 천사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과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롯의 집에서는 식사 후에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습니다. 왜 아무런 말씀이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롯을 차별하신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이 식사하는 동안 줄곧 옆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대화 상대가 됐습니다. 갈 때는 좇아 나와서 배웅을 했습니다. 하지만 롯의 집에서는 천사들이 어떻게 식사를 한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없이 무교병만 먹었습니다. 롯은 천사들 곁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롯이 천사들에게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도 않은 것입니다. 롯은 천사들을 영접했는데 결과는 영접인지 배척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롯의 인생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을까요? 밝은 한낮 같았던 롯의 인생에 왜 땅거미가 지는 저녁이 됐을까요?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롯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입니까? 왜 아브라함은 복을 더 받고 왜 롯은 복을 잃어버렸을까요? 하나님이 차별하신 것일까요? 여러분! 천사들에게 거절당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는 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점점 하나님의 은혜가 선명해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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