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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서성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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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8:22-33
주일오전예배 | 2021-10-0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BC 4세기경, 그리스에 '피시아스라는 사람이 억울한 일에 연루되어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왕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피시아스의 친구인 다몬이라는 사람이 왕을 찾아왔습니다. “폐하! 제가 친구의 귀환을 보증하겠습니다. 그를 집으로 잠시 보내주십시오.”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너는 진심으로 피시아스를 믿느냐?” “.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왕은 허락하는 조건으로 다몬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약속했던 날이 되었는데도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몬은 교수대로 끌려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스를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다몬은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제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세요. 분명 사정이 있을 겁니다.” 왕이 집행관에게 교수형 집행을 명령했습니다. 바로 그때 멀리서 피시아스가 고함을 치며 달려왔습니다. “폐하, 제가 돌아왔습니다.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은 아름다운 그들의 우정에 감동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주노라.” 왕은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 번 사귀어 보고 싶구나.” 여러분에게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야고보서 2: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15:14). 그리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친구를 오헵이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친구를 필로스라고 하는데 이것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라틴어, 불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도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친구입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둔 우리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친구는 친구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부르신다는 것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친구에게 하듯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친구에게 가듯 주님께 좀 더 가까이 가십시오. 

아주 뜨거운 어느 날 낯선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아브라함의 집 앞에서 서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분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식사 후에 아브라함은 세 분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임을 알았습니다. 세 분은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나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서 가셨고 아브라함은 한참을 따라가며 배웅을 했습니다. 얼마나 갔을까요? 두 천사는 계속 소돔을 향해 갔지만 하나님은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가지 않으시고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멈추어 서 계셨습니다.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22b)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NIV 성경은 이런 각주를 달았습니다. “Masoratic text : an ancient Hebrew scribal tradition but the Lord remained standing before Abraham.”(맛소라 사본 : 고대 히브리의 필사의(서기관의) 전통이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서 계셨다.) 맛소라 사본은 6-7세기 히브리의 맛소라 학자들에 의해서 남겨진 성경 사본입니다. 맛소라는 전통 또는 말을 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맛사르에서 온 말입니다. 맛소라 학자는 AD 500년부터 1000년까지 구약 성경의 본문을 보다 더 정확하게 후대에 남기기 위해 수고한 히브리 학자들입니다. 고대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성경을 모두 손으로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기 다른 많은 성경 사본들이 존재하게 됐고 어느 것이 맞는 사본인지 분간하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맛소라 학파가 생긴 이유는 여러 시대에 걸쳐서 내려오는 성경의 본문을 변형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많은 부분 맛소라 학자들의 헌신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헌신이 없으면 복음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이 맛소라 학자들은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다라는 말씀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서 계셨다.”라고 했습니다. 맛소라 학자들은 본문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 중심 신앙입니다.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 세 분 중에 두 분은 소돔을 향하여 갔고 한 분 하나님은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22절의 앞 문장을 볼 때 맛소라 학자들이 남긴 본문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친구처럼 마주 서 계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 여러분은 사람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이고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드릴 때 옆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지 마시고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4천 년 전 아브라함 앞에 서 계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서 계십니다. 그 분이 지금 내 앞에서 서성이고 계십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너무 무거워 그것이 모든 사실인지 내가 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20-21>
  •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두 천사와 함께 소돔과 고모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천사만 소돔으로 보내시고 당신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잠시 보류하시고 아브라함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계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 앞에서 머뭇거리며 그대로 서 계실까요? 그 이유는 소돔에 아브라함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롯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서”(21)라는 말씀은 심판에 대한 예시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소돔에 내려가심은 소돔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심판에 대해서 듣고서도 하나님께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머뭇거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서 심판을 위해 소돔으로 더 가시지 못하시고 계속 머뭇거리신 것입니다. 심판을 행하셔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걸리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신 것입니다. 심판이 아브라함 때문에 잠시 보류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이 가진 힘입니다. 이것이 친구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가지 못하시고 아브라함 앞에 서 계시면서 아브라함이 당신에게 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주변에서 서성이시는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빨리 진행하시지 않고 서성이실까요? 그것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걸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즉시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를 보내신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에 은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게 하는 이유는 주님께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 때문에 내 앞에 멈추어 서서 서성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서성이심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때 한 번에 끝내시지 않으셨습니다. BC 606, BC 598, BC 606년 여러 차례에 걸쳐 조금씩 심판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머뭇거리신 것입니다. 은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10장과 11장에 예루살렘에 관한 심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십니다. 그런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번에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안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이동하십니다. 아주 조금 이동하셨습니다. 단번에 떠나지 못하시고 머뭇거리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다시 문지방에서 동문으로, 동문에서 동쪽 산으로 조금씩 조금씩 떠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단번에 떠나시지 않으셨을까요? 죄악으로 예루살렘을 심판은 하시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예루살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떠나시지 못하고 심판 중에 머뭇거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이 걸리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셔서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동쪽 산에 그대로 계십니다. 왜 거기에 계실까요? 다시 은혜를 주시기 위해 예루살렘 주변에서 머뭇거리시는 것입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집에서 서성이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예루살렘 동쪽 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서성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 주변에 서성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로 가시기 전에 아브라함의 집 앞에서 서성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을 때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IV 성경은 가까운 곳에 서 있다(standing nearby).’라고 했고, KJ 성경은 그 사람(아브라함) 곁에 서 있었다(stood by him).’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은 (아브라함)의 앞에 서 있다.’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은 아브라함의 장막 바로 앞에서 서성이고 계십니다. 왜요? 아브라함이 영접해드리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서성이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맞아들이십시오. 여러분!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도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주님을 더 깊이 영접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서 서성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주님을 내 마음의 집에 맞아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을 즉시로 떠나시지 않고 무덤 주변에서 서성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무덤을 즉시로 떠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무덤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의 돌문은 굴려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에는 천사 둘이 하나는 머리 편에 다른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울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 계셨을까요? 마리아의 바로 뒤편에 계셨습니다.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행동이 참 재미있으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무덤으로 오시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처럼 누우셨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기다리셔도 되고 서서 기다리셔도 되잖아요. 또 무덤 입구에 계셔도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천사들만 남겨 놓으시고 다른 곳에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마리아의 뒤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주인을 잃어버려 절망으로 우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써프라즈를 하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나 여기 있지!”하고 뒤에서 친구처럼 깜짝 놀라게 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예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울면서 예수님을 찾는 거예요. 영화를 보면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미소를 지으세요. 그 순간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봐요. 절망이 순간 하늘을 찌르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을 바로 떠나셨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부활 후에 무덤에서 서성이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 무덤에서 서성이시는 분이십니다. 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고 무덤에서 서성이지 않고 그냥 떠났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시면 예배가 끝나도 조금 서성이다가 가세요. 일어났다가 다시 앉아서 눈을 감고 기도하고 십자가도 바라보고 조용히 말씀도 생각하다가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예수님 만나는 일 보다 더 급한 것이 있습니까? 교회에 오시면 좀 서성이다가 가십시오. 요즘은 코로나라 오래 계시기 어려우신가요? 제가 교회에서 나가려고 엘리베이터를 누르면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게 아니라 내려갈 때가 있어요. 다시 올라오려면 한참 걸립니다. 저는 그때 다시 예배실로 들어와서 서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나!’ 잠깐이라도 서성이고 잠깐이라도 눈을 감습니다. 저는 어제도 교회에서 계속 서성였습니다. 교회에 오시면 도망가지 마시고 좀 서성이다 가세요. 교회가 애굽도 아닌데 출애굽하듯 가시지 마세요. 예수님이 교회에서 서성이며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이 왜 여기 계시겠어요.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개인 앞에, 교회 앞에, 그리고 세상 앞에서 계속 서성이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서성이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로 요한의 눈에 띈 예수님의 신체 부분이 발입니다. 요한계시록 113절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라고 했습니다. 촛대는 교회입니다. 왜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부분이 예수님의 발일까요? 주님은 교회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당신의 자녀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2학년 개강하는 날이었습니다. 전날 교회 유년부실에서 잤습니다. 유년부실에 앞뒤로 문이 두개 있는데 방해받지 않고 자고 싶어서 자기 전에 문을 잠갔습니다. 아침이 돼 햇살이 창으로 비춰와 살짝 깼지만 조금 더 자려고 눈을 감았습니다. 비몽사몽간에 머리맡에 누군가가 끌리는 옷을 입고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머리맡에서 무언가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늘로 가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주변에서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1절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 사이를 거니시고 계십니다. 또 예수님은 세상에 서 계신 분이십니다. 10:1-2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서 계십니다. 왜요?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1854년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만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홀만 헌트는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마음의 문 바깥에 서성이고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 문은 여태껏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여러 가지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고 문의 손잡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손잡이는 안에만 있는 것 같습니다. 집 주인이 예수님을 아주 거리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을 열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지만 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예수님은 들어가시지도 못하고 떠나시지도 못하고 계속 문 밖에서 서성이고 계십니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320절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아주 거리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등대교회가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들어오시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제 자신도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집 밖에 세워둔 것은 아닌지. 내가 예수님을 거리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밖에서 서성이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 사람의 집 주변에서 서성인 적이 없으십니까? 이 말을 꼭 하고 싶어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한 적은 없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서 여러분의 주변에서 맴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시려는 목적은 더불어 함께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밖에 세워두지 마시고 집 안으로 맞아들이십시오. 

기도는 우리 앞에 서 계신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것입니다. 두 천사는 계속 소돔으로 가고 하나님은 가시다가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가시지 못하고 멈추어 서시더니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상수리나무 수풀에서 벗어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런 요청을 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위해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응답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기도하게 하실 때 기도하세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기도를 포기하지 마시고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멈추어 서시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간절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과 마주 대하고 서 있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간절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편 51: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고 했습니다. 상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솨바르입니다. 솨바르는 산산조각 나다,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다, 갈기갈기 찢기다, 박살나다는 뜻입니다. 통회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따카입니다. 따카는 무너지다, 으스러뜨리다, 짓밟히다, 으깨지다는 뜻입니다. 상한 심령은 산산조각난 심령’, ‘박살난 심령이라는 뜻입니다. 통회하는 마음은 으스러진 마음’, ‘짓밟힌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는 짓밟히고 으스러진 심령들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으시려면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32:32). 엘리야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벽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22:44). 호랑이가 닭을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호랑이는 닭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호랑이는 한 끼 식사를 위해 뛰었지만, 닭은 살기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실력이 있다고 경기에서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실력이 아니라 간절함이 승패를 가를 때도 있습니다. 때론 간절함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너무 편하고 살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의 정신력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간절함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간절함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간절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문 밖에 서성이게 합니다. 기도의 생명은 간절함에 있습니다. 

제가 먼저 교회에서 초등부를 맡아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달란트 잔치라는 게 있습니다. 출석하면 10달란트, 전도하면 20달란트, 예배 잘 드리면 3달란트, 이런 식으로 한 학기도 동안 아이들에게 달란트를 지급하고 학기가 끝날 때 달란트 잔치를 합니다. 달란트 시장에는 학용품, 장난감, 먹을 것, 악세사리, 운동기구 등등 수십 가지의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동안 받은 달란트로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참 재미있어 해요. 그런데 달란트 시장을 하는 중에 한 아이가 한쪽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쫓아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정말 의외의 대답을 하는 거예요. “집에 다 있어서 살게 없어요.” 말도 행실도 바른 모범생이었습니다. 신앙도 좋은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달란트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살 것이 없는 거예요. 한 학기 동안 모은 달란트가 쓸모가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울은 거예요. 정말 풍족한 세상입니다. 집에 다 있어요. 돈 주고 사면됩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없어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간절해야 합니다.  

둘째, 친밀함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친밀한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정말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더 바짝 다가갔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14:36, 4:6, 8: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이유를 그들이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 다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친밀함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2 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위해 생명을 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위해 우셨습니다. 나사로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울지 마십시오.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친구는 되지 마십시오.

  • <22:12-13>
  •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어떤 왕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을 때쯤 왕이 손님들을 보러왔습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왕이 잔치를 위해 준비한 예복 보다 자기 옷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왕이 그 손님을 친구여!”라고 불렀습니다. 여기 친구가 헬라어로 헤타이로스입니다. 헤타이로스(ἑταιρος)는 동포, 동료, 이웃이라는 뜻입니다. 헤타이로스는 공적인 자리에서 동료를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수백 명의 학교 동창들은 다 친구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모르는 사람, 얼굴만 아는 사람, 이름만 겨우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필로스가 아니라 헤타이로스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650절에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26:5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친구가 헬라어로 헤타이로스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헤타이로스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헤타이로스의 운명이 무엇입니까?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필로스로 불리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헤타이로스로 불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여러분을 필로스,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친구는 친구의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께 친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아브라함은 친구되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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