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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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8:1~8
주일오전예배 | 2021-09-0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제가 여기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 근처에 사시는 노인 두 분이 교회에 오셔서 기부를 요청하시길래 아주 조금 드렸습니다. 그 후로 두 분이 계속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오실 때마다 지갑을 갖고 있지 않았고 자꾸 오시니까 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드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또 오셨기에 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안 오세요. 그런데 그게 제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네가 잘못했다. 네가 잘못했다. 그래도 교회에 온 손님들인데 빈손으로 보내면 되니?’ 제 행동이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습니다. 이 일이 제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오시면 내가 대접을 잘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기다리는데 몇 년이 지나도 안 오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다른 분이 오셨습니다  

지난 53일 월요일 밤 830분경이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예배당 맨 뒤 의자에 어떤 남자 분이 편안하게 누워서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편안하게 주무시는 거예요. 얼마나 곤하게 주무시던지 제가 큰 소리로 여러 번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는데도 안 일어나시는 거예요. 너무 안 일어나셔서 제가 당황을 했습니다. ‘왜 안 일어나시지? 어떻게 하지?’ 제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못 일어나시더라고요. 몇 번을 더 소리를 높여 부르니까 그때서야 겨우 눈을 뜨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가 일어나시면서 ! 잘 잤다. 이렇게 편안하게 자 본 게 몇 달만인거 같네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긴 한숨을 쉬시는 거예요. 그리고 한 말씀을 더 하세요. “성전 문이 열려 있으니까 너무 좋네요.” 그때 그분이 하신 말들이 제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어요. 제가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더니 집이 강원도인데 탕정에 있는 아버님 산소에 왔다가 차비가 없어서 왔다는 거예요. 행색을 보니 떠돌아다니시는 분 같아요. 저녁을 안 드셨을 것 같아서 라면을 끓여서 드렸습니다. 정말 친절하게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세요. 5천원을 달라는데 만원을 드렸어요. 만 원짜리 밖에 없어서 바꿔서 드릴까 하다가 그냥 다 드렸습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밥을 못해드린 것입니다. 또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제가 예수님을 대접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속에 무슨 예수님!’이라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드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생각 끝에 예수님이 아니라 거지지!’라는 생각이 아주 살짝 드는 거예요. 그렇게 한 달 23일이 지났습니다. 626, 그날도 저녁에 교회에 왔습니다. 캄캄한 예배당에서 맨 뒤 의자를 보는 순간 제 마음에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는 그때 제 마음에 들었던 생각을 성령님의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히브리서 13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3:2)고 했습니다. 본문은 부지 중에 천사와 하나님을 대접한 아브라함의 스토리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보다 더 강력한 스토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천사와 하나님을 대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부지 중에 천사뿐 아니라 하나님도 대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우리는 부지 중에 천사와 하나님을 박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부지 중에 하나님을 대접하는 기회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지 중에 하나님을 박대하지 마십시오. 지극히 작은 자를 홀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홀대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선을 행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왜 나타내셨을까요? 24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떠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두 천사를 보내셨는데 이유는 그 땅을 벌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유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벌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해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본문(1~15)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예수님을 대접해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을까요? 상수리수풀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의 터전입니다. 창세기에 상수리나무가 여섯 번 나오는데 그 중에 네 번이 아브라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그 중에 세 번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쌓은 것입니다(12:7, 13:4, 13:18).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묵상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상수리나무가 있습니까? 상수리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과 신앙의 터전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상수리 수풀을 신앙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처음 만나 주신 곳이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 <12:6-7>
  •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왜 하나님은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보이셨을까요? 이곳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킨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와서 찾아간 곳이 모레 상수리나무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깁니다. 

<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공적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사람들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레 땅에 또 문제가 생깁니다. 조카 롯과 분쟁이 생긴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롯과 분가하면서 이주한 곳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입니다.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이 분가할 때 롯은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처럼 아름답고 살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로 갔고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이주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롯은 강남으로 간 것이고 아브라함은 산골짜기로 들어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문화가 발달해 아름답고 살기 편리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갔을까요? 거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주셨던 상수리나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무들 아래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예배, 찬송, 기도, 묵상했습니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장소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거나 우상시한 것은 아닙니다. 나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롯이 볼 때 광야로 가는 삼촌이 얼마나 미련해보였을까요? 아브라함의 식솔들이 아브라함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저는 부교역자로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제가 큰 도시로 사역지를 옮기면 아내가 좋아해요. 작은 도시로 가면 아내가 싫어해요. 지금은 달려졌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말하면 롯은 지혜와 안목이 있는 사람이지만 아브라함은 답답하고 앞뒤가 막힌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롯은 복을 받은 사람이지만 아브라함은 그 반대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역전됩니다. 하나님은 역전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역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역설적인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역전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에게 역전시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전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이주해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 중심의 인생을 삽니다.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의 중심지입니다. 세상 번영 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로 가서 도시 문화에 취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도시문화에 너무 취하지 마세요. 롯이 되지 마세요. 아브라함이 되세요.  

저 어렸을 때 살던 마을 뒷동산에 아주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30-40m가 족히 넘는 큰 나무였습니다. 두 아이가 팔을 벌리고 감싸도 나무 둘레를 다 싸지 못할 정도로 컸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그 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나무에 칼로 이름을 새기고 올라가고 매달렸습니다. 그 나무 밑에서 찜뽕이라는 공치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 단오 날에 마을 어른들이 그 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어주었습니다. 그 그네가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들판이 훤히 보였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그 언덕으로 불어왔습니다. 여름에 그 언덕에 있으면 더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 나무 바로 앞에 저희 집이 있었습니다. 심심할 때면 그 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아침을 먹으면 그 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친구들을 기다렸습니다. 그 나무는 수 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잘 보였습니다. 여름에 수영하러 냇가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겨울에 사냥하러 숲속을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저는 친구들과 그 나무를 바라보며 집으로 왔습니다. 저 멀리 그 나무가 보이면 안심이 됐습니다. ‘이제 집에 거의 왔구나!’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에 그 나무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하며 걸었습니다. 그 나무는 제 어린 시절에 저의 놀이터였고 친구였으며 먼 길을 갔다가 돌아올 때 내가 가는 길의 이정표였습니다. 그 나무는 힘들 때 저를 쉬게 해주는 쉼터였습니다. 그 나무는 제 기억 속에 보름달처럼 둥그렇게 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의 플라타너스나무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상수리나무 아래는 마음의 집이었고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상수리나무는 영적 안식의 장소였습니다. 상수리나무는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에게 친구였고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멀리 떠났다가 집으로 올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 근처에 우뚝 서 있는 상수리나무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아 집에 거의 왔구나!’ 하나님께서 상수리수풀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의 터전으로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삶의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할 수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우리 인생들에게는 상수리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후 상수리나무는 하나의 상징이 됩니다. 야곱이 어머니의 유모인 드보라가 죽자 그를 벧엘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 상수리나무를 알론바굿이라고 불렀습니다(35:8). 통곡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야곱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가 있었습니다. 딸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두 아들이 주변에 사는 한 족속을 전멸시켰습니다. 야곱에게 큰 위기가 닥칩니다. 그때 야곱은 아내들의 귀고리와 아내들이 섬기던 우상을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새롭게 시작합니다(35:4). 상수리나무가 야곱 가정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세겜의 상수리나무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함께 예배하던 곳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첫 발을 내디딘 곳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할아버지의 신앙이 아들에게, 아들의 신앙이 손자에게 전수되었습니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족장들의 신앙이 후대로 전수되는 장소였습니다. 여러분! 후대에 여러분의 믿음이 전수되는 상수리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 상수리나무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 후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만의 상수리나무 아래를 만드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족속에게 고난을 당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기드온에게 나타났습니다. 

  • <6:11-12>
  •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여호와의 사자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기드온을 사사로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신 곳이 상수리나무 아래입니다. 기드온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예배한 후에 그곳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했습니다(6:24). 기드온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1대 왕인 여로보암이 벧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올라와 제단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자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졌습니다. 여로보암의 우상제사를 망쳤습니다. 화가 난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려고 손을 펴자 손이 말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역을 마치고 다시 고국 유다로 돌아갈 때에 상수리나무 아래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왕상13: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인생 순례 길에 잠시 머물렀다가 갈 수 있는 영적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상수리나무 아래는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입니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찬송하고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묻는 장소입니다. 상수리나무 아래는 영적 안식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24년 전에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주님의 뜻을 물을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장소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 여러분을 만나러 오시는 상수리나무가 있습니까? 주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그를 보셨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상수리나무 아래입니다. 여러분! 상수리나무 아래로 오십시오. 상수리나무 아래에 은혜가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아래에 생명과 안식이 있습니다. 상수리나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시고 상수리나무를 중심으로 인생을 사십시오. 상수리나무 아래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쉼터입니다. 상수리나무를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상수리나무 아래에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했습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의 바람에 베임을 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바람이 그루터기까지는 없애지 못합니다. 거룩한 씨가 바로 그루터기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의 때에 거룩한 상수리나무 그루터기가 되십시오. 마귀가 상수리나무를 흔들고 상수리나무를 자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 지키세요. 상수리나무 아래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사람의 모습을 하셨습니다. 15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171절에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18장에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세 사람 중에 둘은 천사이고 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는지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지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는지 확인하시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두 천사가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집을 지나려하자 아브라함이 집 문에 서 있다가 달려 나가 영접했습니다. 

<18: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세 분을 라고 부른 것은 아브라함이 예수님과 천사를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행을 보고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란 것을 느끼고 높여서 부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 분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식사 중에 풍겨 나오는 영성과 자태에서 더욱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세 분이 여호와의 사자들임을 짐작했다가 내년 이맘 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것임을 확실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처음에는 세 분을 나그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분을 아주 깍듯하고 풍성하게 섬겼습니다. 세 스아로 빵을 만들었습니다. 한 스아는 12리터입니다. 세 스아는 약 42리터입니다. 밥 한 공기가 쌀 100g입니다. 42리터이면 420인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양의 빵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세 분을 아주 풍성하게 섬겼습니다.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고 엉긴 젖(요구르트)과 우유도 내놓았습니다. 손님에게 새끼 염소를 대접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대우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기름지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크입니다. 라크는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연하고 부드러워 먹기 좋은 고기를 말합니다. 송아지가 남성형입니다. 아브라함은 연하고 좋은 수송아지를 잡은 것입니다. 소고기 중에 최고는 어린 수송아지 고기라고 합니다. 송아지를 고를 때 종들을 맡기지 않고 직접 골랐습니다. 7절에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에게 최고로 대접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대접하려면 좋은 것으로 하세요. 내가 안 먹는 것, 내가 안 쓰는 것, 좋지 않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지 마세요.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식사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시중드는 태도입니다. 보통 음식이 나오면 주인은 손님과 같이 먹습니다.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세 분이 식사할 때 같이 먹지 않습니다. 같이 먹지 않는다는 말은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앞에서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어디서든지 주인 행세를 하지 마세요. 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아브라함은 식사를 하는 대신에 서빙을 했습니다. 종들이 해야 할 서빙을 자신이 직접 한 것입니다. 

<18: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은 세 분이 상수리나무 아래서 식사를 하는 동안 종처럼 그 옆에 서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더 없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피며 서 있었던 것입니다. 종들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대신 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극진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손님을 최고로 대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의 수하에는 적어도 2000명의 종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부입니다. 족장()이었고 제사장이었으며 선지자입니다. 이 정도의 지위에 있었던 아브라함이 손님들에게 이렇게 했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공손하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는 얼마나 겸손해야 할까요? 여러분! 겸손하세요. 다른 사람을 공손하게 섬기세요. 잘난 체, 있는 체 하지 마세요. 갑질하지 마세요. 섬기세요. 아브라함에게는 섬김의 상수리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예배의 상수리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배의 사람입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섬김의 상수리나무가 있었습니다. 상수리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섬기는 겸손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믿음과 삶이 균형잡힌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주일날 교회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하여 아름다운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인간적이라야 하고 인도적이라야 하며 늘 따뜻하고 겸허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요한 증거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눈 감고 주님만 부르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인간관계가 안 믿는 사람과 차이가 없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십시오. 이웃을 돌아보시고 연약한 자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십시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웃을, 내 옆에 있는 성도를 주님 대하듯 합시다. 그리스도인들이 뻣뻣하면 안 됩니다. 적어도 세상 보다 따뜻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님을 잘 대접하는 풍속은 고대 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풍속은 아직까지 이슬람 문화권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교회에서 선교 세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으로 단기 선교를 다녀온 여 집사님의 사례 발표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서 머무르게 됐는데 집주인이 저녁 식사로 닭요리를 대접했습니다. 두 사람이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 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다가 밖에 나갔는데 그 집 식구들이 먹다 남은 닭요리를 먹고 있더래요. 알고 봤더니 그 닭이 그 집에 유일한 가축이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그 닭이 낳는 알이 그 집 최고의 식품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난한 집인지 짐작이 가시죠. 그런데 처음 본 외국인 손님들에게 집에 있던 유일한 가축을 잡아서 대접한 거예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풍습이 남아 있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전혀 이해가 안 되시죠. 이런 풍습이 이슬람 사람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가 이슬람 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오면 서로 인사하세요. 뭐가 그렇게 뻣뻣해요. 믿는 사람들은 공손해야 합니다. 교회 새 신자가 오면 반갑게 맞이해 주세요. 처음 교회에 오면 얼마나 서먹서먹해요. 교회가 세상 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교도들 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보다 못하면 되겠습니까?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풍습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손님이 오면 잘 대접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속이었습니다. 사랑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이웃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손님들, 나그네들이 묶는 방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부잣집에는 사랑을 베푸는 방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한 쪽에 남들을 대접하는 사랑방이 있어야 해요. 사랑을 베푸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황혼축객비인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황혼에 손님을 쫓아내는 것이 인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교통, 숙박시설,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산 너머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도 몰랐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손님이 오면 사랑채로 모신 다음 같이 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들었습니다. 동방세계에서 일반적인 도덕관념은 불쌍한 사람, 괴로운 사람, 어려운 사람, 외로운 사람을 돌아본다는 것, 즉 약자를 잘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도덕으로 흘러내려왔습니다(김홍전). 

몇 달 전에 어떤 시골교회 목회자 자녀가 학원을 가고 싶어 하는데 못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왜 이 말을 들었을까?’ 고민하다가 학원비의 일부만이라도 후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후원했습니다. 그러다가 감사한 일이 생기면 조금씩 떼어놓았습니다. 55000원이 모아졌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그 목사님에게 학원비와 함께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왜 이렇게 많이 보냈냐고 전화가 왔습니다. 55000원이 큰 돈인가요? 작은 돈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것이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게는 작은 돈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큰 돈이 될 수 있습니다. 커피 한 잔에 5천 원입니다. 열 잔이면 5만원입니다. 커피 두세 잔 덜 마시고 만원씩이라도 도우며 사세요. 시골, 낙도, 산간벽지에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의 생활이 정말 어렵습니다. 5천원이면 북한에 성경을 한 권 보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 <13:1-3>
  •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여러분! 형제를 계속 사랑합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맙시다. 생활의 어려움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합시다. 학대받는 자를 생각합시다. 이슬람 사람들의 친절 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친절이 더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전통 미풍양속에 남아 있는 친절 보다 교회의 친절이 더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예배의 상수리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섬김과 사랑의 상수리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배의 상수리나무, 기도의 상수리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김의 상수리나무, 사랑의 상수리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주여만 외치지 맙시다. 눈을 감고 찬송만 하지 맙시다. 눈을 뜨고 주님의 이름으로 연약한 자를 돌아봅시다. 부지 중에 천사와 하나님을 대접한 아브라함의 섬김과 공손함을 기억합시다. 뻣뻣하고 냉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항상 마음이 따뜻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을만한 그릇이 된 것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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