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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에 있었던 기사입니다. 리우 무하이는 젊은 시절 아들 셋을 부양하기 위해 홀로 도시로 나가 일을 했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꽤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리우는 남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리우는 아들들의 효심을 테스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거지처럼 누추하게 옷을 입고 아들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리우는 가장 먼저 장남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장남은 거지꼴을 한 아버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 아버지인 척하는 거지? 우리 아버지는 도시에서 성공하신 부자야. 지난 달에도 돈을 보내주셨어.”라며 그를 내쫓았습니다. 리우는 “나는 네 아빠가 맞아. 사업이 망해서 거지꼴이 됐단다. 아들아 날 거둬줄 수 있겠니?”라고 했습니다. 장남은 리우를 밀면서 “저리 가요. 나는 당신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실망한 리우는 둘째 아들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지꼴을 한 아버지도 본 둘째 아들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라며 애써 아빠를 모른 척하려고 했습니다. 리우는 큰 상실감에 빠진 채 막내아들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누추한 모습의 아빠를 본 막내아들의 태도는 두 아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은 아빠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으며 “아빠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일단 우리 집으로 가요. 이제 내가 아빠를 모실게요.”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아내에게 “아빠 몸보신 시켜드려야 해. 어서 시장에 가서 고기 좀 사와.”라고 했습니다. 막내아들과 며느리는 리우에게 진수성찬을 차려드렸습니다. 리우는 밥상에서 막내아들에게 “내가 사업이 망해서 모든 재산을 잃었는데 날 받아줄 수 있겠니?”라고 물었습니다. 막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껏 아빠가 우리 키우기 위해 타지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제가 아빠를 돌봐야죠.”라고 했습니다. 며느리 역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막내아들 부부의 태도에 감동한 리우는 눈물을 쏟으며 아들 부부에게 사실을 실토했습니다. 리우는 변함없는 효심을 보여준 아들에게 현금 88만 위안(한화 1억 5천)을 상속해주기로 했습니다. 나머지 재산도 모두 막내아들에게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친절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입니다. 크레스토스는 ‘친절한, 선한, 착한, 관대한, 너그러운, 덕스러운, 은혜로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입니다. 크레스토스, 크리스토스, 헬라어에서 그리스도와 친절이란 말이 모음 한자 차이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시대에 이방인들은 크리스토스와 크레스토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사용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과 친절한 사람들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친절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친절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표지인 친절이 있으십니까? 교우에게, 이웃에게 항상 인도적이고 따뜻한 사람이 됩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본 세 사람에게 36리터의 빵과 어린 수송아지 요리를 제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9절의 ‘그들’은 하나님과 천사들입니다. 16절에 그 사람들이 소돔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19장 1절에는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세 분 중에 두 분은 천사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10절에 ‘그가 이르시되’라는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그 때에 주께서 말씀하셨다.’라고 번역했고 우리말성경은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했고 22절에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했습니다. 세 분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수행천사입니다. 세 분의 정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하나님과 두 천사의 식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식사가 마쳐질 때까지 세 분의 신분을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한 것입니다. ‘성경 시대에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현 시대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성경이 이 시대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유효할 것입니다. 여러분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메시지를 잊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의 친절을 잊지 마십시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식사를 마친 후에 세 분이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과 천사가 사라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었을까요? 아닙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과 천사들은 이 말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아브라함에게 밝힌 것입니다. 또 우리가 왜 여기 왔는지 온 목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요즘은 서양문화가 보편화되어 손님이 오면 부인이 남편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지만 과거 동양에서는 손님이 와도 여자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실에 있거나 종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살폈습니다. 아브라함이 손님들 곁에서 서빙을 하는 동안 사라는 안에서 손님들을 조심히 살폈을 것입니다. 이것이 동양의 전통입니다. 아브라함은 식사 중에 아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세 분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네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아브라함 앞에서 밝힌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식사 중에 세 분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그 자태가 남다르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막연하지만 그분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영적인 기품과 위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뜸 사라의 안부를 묻자 아브라함은 세 분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직감적으로 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두 천사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소돔 성의 롯의 집으로 갔을 때 소돔 사람들 모두가 밤에 롯의 집 앞에 모여 두 사람과 상관해야겠다며 두 사람을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상관한다는 말은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천사들을 색다르고 고우며 잘 생긴 미소년 정도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똑같은 천사들을 보고 아브라함은 영적 기품을 느낀 반면에 소돔 사람들은 성적 충동을 느꼈습니다. 극히 타락한 인간상입니다. 소돔 사람들이 얼마나 음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똑같은 교회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위엄을 느끼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우습게 여깁니다. 현시대의 타락상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어떻게 느끼십니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영적 감흥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두려워하세요.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과 대화 중에 수가성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4:19) ‘내가 보니’는 ‘내가 주의해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여인이 대화 중에 예수님이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에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나오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5)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자연스럽게 메시야를 생각한 것입니다. 여인의 집중력이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가 설교할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님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세상 생각을 하십니까? 찬송하실 때 예수님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생각하십니까? 예배 시간만이라도 예수님께 집중하세요. 이 말 후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네가 말하는 내가 그라”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이 순간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여러분! 여인의 영성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 몇 마디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젖을 뗀 어린 소년 사무엘이 성소에서 자려고 누어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십니다. 사무엘이 자다가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가 부르셨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엘리가 부르지 않았다며 가서 자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다시 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이 다시 엘리 제사장에 달려갑니다.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이 부르시는지 사람이 부르는지 분간을 못했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알았지만 나이 많은 노제사장도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지 몰랐습니다. 어린 아이도 어른도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지 못하는 영적으로 둔감했던 때가 엘리 제사장 때입니다.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예배는 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어요. 신앙생활은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인지 우연이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 재수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수도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며 매일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수도사에게 나타나셔서 수도사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깜짝 놀라 기절했습니다. 수도사가 정말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쥐 생각밖에는 없었느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우즈라고 하는 어떤 여인이 특권을 얻어서 평생 바라던 영국 여왕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생 중 처음이자 마지막 되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그는 여왕을 뵈러 가면서 사랑하는 고양이를 데리고 갔답니다. 고양이는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쥐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 고양이는 쥐 잡느라고 돌아다녔습니다. 고양이에게는 쥐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고양이는 한 번도 여왕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궁전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영국 황실에 들어가서 쥐만 찾다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는 영적 황실입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곳에서 오셔서 세상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께 집중하세요. 예배를 드린 것으로 만족하지 마세요. 마음을 주님께 모으세요. 그래야 주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주님을 알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구약 성경이 예언한 그 사람을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며 “나를 아십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즉시로 대답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반문하지 않습니다. 확인하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즉시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서 묵상하며 영적으로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가지 아래에 앉아 율법을 배우고 기도와 명상을 했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말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로 예수님의 오심을 소망하며 경건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서 기도와 묵상을 했습니다.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은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수리나무 아래로 하나님이 진짜 오신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다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화과나무 그늘입니다. 교회가 상수리나무 아래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을 영적으로 경험하세요. 은혜를 받으세요. 그냥 가지 마세요. 그래야 삶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주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세상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늘 그 모습 그대로 허덕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으세요. 은혜를 사모하세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한참을 걷고 한참을 설명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24:25) 영적으로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더디 믿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 되십시오.
아브라함은 영적 감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는 말에 “당신들이 누군데 왜 남의 아내를 찾습니까?”라고 되묻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장막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유목민들의 장막은 보통 중간에 칸막이가 쳐져 있어 바깥쪽과 안쪽으로 나누어집니다. 바깥쪽은 남자가 손님들을 대접하는 방으로 사용했고 안쪽은 내실로 여자가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 집 구조도 똑같습니다. 대문 쪽에 있는 사랑채는 남자가 사용했고 안쪽에는 안채는 여자가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바깥주인, 여자를 안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사라가 있는 곳은 장막의 내실이었을 것입니다. 장막에 있다는 말은 안주인으로 남편을 섬기고 가정을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사라가 장막에 있다는 말은 여인으로서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편 128:3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다’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내실에 있어야 합니다. 내실이 여인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합니다. 여성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그럴지라도 여성으로서의 자리는 집안의 내실입니다. 사랑채가 아닙니다. 집 밖이 아닙니다. 여성들이여! 내실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내실을 지키십시오.
<벧전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베드로 사도는 사라가 남편을 주라고 칭하고 순종한 것이 선이라고 했습니다. 사라는 일생을 남편을 주인이라 부르며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내 부인이라고 하지 말고 동생이라고 하라는 말까지 순종했습니다. 자신이 다른 남자에게 팔려갈 때도 남편에게 순종했습니다. 남편이 남편답지 못할 때도 남편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면 되지 왜 사라를 찾으실까요? 아들을 낳았을 때 가장 큰 복은 누구입니까? 사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자식이 있습니다. 사라가 왜 복을 받았을까요? 사라는 여성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이 지금 사라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사라 인생의 실존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실존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영적 내실에 서십시오. 영적 성소에 서십시오.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는 자리입니다. 사라가 내실에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에게 24년 전에 한 약속을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를 “내년 이맘때”라고 했습니다. 내년 이맘때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기한이 이를 때에”라고 번역했습니다. ‘내년 이맘때’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살아있는, 소생하는, 신선한, 생명의’(하이)라는 단어와 ‘시간, 때’(카에트)라는 단어가 합해진 말입니다. 내년 이맘때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소생하는 때, 신선한 때, 생명의 때라는 뜻입니다. 어떤 번역가는 “내년 이맘때”라는 말을 “그 봄에”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는 시간이 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내년 이맘때라는 말은 ‘봄이 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때라는 말이 그냥 평범한 때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24년 전의 약속을 아주 특별한 봄에 이루실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그것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모든 일에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내년 이맘때’라는 말은 ‘내가 정한 시간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정한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한 시간입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1년 동안 떠나계시다가 1년 후에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인생의 딜레마 중에 가장 큰 딜레마를 내가 개입해 이제 해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면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아주 특별한 봄이 될 것입니다. 장기간 계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코로나 블루>란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코로나19’와 ‘우울(blue)’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코로나19로 정상적인 생활이 되지 않아 장기간 집에 갇혀 지내면서 사회적 고립감이 증대돼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코로나로 세상이 우울합니다. 코로나뿐만 아니라 다른 일로도 우울합니다. 하지만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돌아오십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시면 우리 인생의 아주 특별한 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Surely I will be back. 주님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우주에 아주 특별한 봄이 올 것입니다. 우주 최대의 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사라가 장막에 있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이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장막이 상수리나무와 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계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창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그런데 사라는 이미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생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오라흐인데 이 말은 ‘길, 통로, 행로, 습관, 방식, 발자취, 진로’라는 뜻입니다. 끊어지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달입니다. 하달은 ‘그만두다, 금하다, 포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다는 말은 여성으로서의 길, 행로가 막혔다, 여성으로서의 방식, 진로, 습관을 그만두었다(포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라는 여자로서의 길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사라는 여자로서의 행로가 막힌 사람입니다. 여자들만이 가는 길, 여성으로서의 인생이 끝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사라는 여자로서 낙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다니요? 내년이면 90입니다. 너무 기가 막힌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에 사라의 속에서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12절)라고 했습니다. 요즘 신조어 중에 ‘웃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기고도 슬프다는 의미입니다. 여자로서의 길이 끝난 사람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에 사라는 웃기면서도 서글펐습니다. 노쇠하다는 말이 낡아서 너덜너덜해졌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두 번이나 누이 동생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이나 남의 아내가 될 뻔했습니다. 여종이 아들을 낳았다고 무시했습니다. 이제 여자로서의 생이 끝났습니다. 몸도 마음도 세파에 시달려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는다니요? 그냥 웃음이 나와 버렸습니다. 사라의 웃음이 무슨 웃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슬픔의 웃음인지 조롱의 웃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웃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웃음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는 쓴 웃음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놀랍니다. 그것은 사라가 믿지 못함에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처음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큰 웃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무도 없는 장막 속에서 혼자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은 후에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창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I will be back. 주님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여러분에게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인생에 아주 특별한 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시대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시대입니다. 자기 배만 채우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듯이 친절이라는 마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크레스토스)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자비라는 말이 크레스토스입니다. 긍휼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읍시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오른편에는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두실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자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양과 염소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친절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곳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만큼 친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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