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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얼굴의 얼은 영혼이라는 뜻이고, 굴은 통로라는 뜻입니다. 얼굴은 영혼의 통로입니다. 그렇다고 얼굴로 영혼이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얼굴은 마치 영혼이 들락날락하는 것처럼 수시로 바뀌는 변화무쌍한 곳입니다. 얼굴은 정직합니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6초입니다. 첫인상은 목소리의 톤 말하는 방법이 13%, 인격 7%, 외모 표정 행동 80%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표정이 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굴은 80개의 근육으로 되어 있는데 이 80개의 근육으로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천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얼굴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얼굴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상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얼굴이어야 할까요?
성경은 다윗의 얼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16:12). 다윗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토브는 ‘좋은, 선한, 아름다운’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말은 내적인 선함이 외적으로 투영되어 들어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겉으로 들어날 정도로 속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을 천사의 얼굴이 되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6장 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라고 했고, 8절에는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했으며, 10절에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장 55절에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읍시다. 우리의 얼굴을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이 되게 합시다. 그래서 등대교회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게 합시다.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를 매우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읽고 또 읽어도 낯선 사람에 대한 아브라함의 친절은 이해하기 참 어렵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어떻게 이렇게 친절할 수 있을까?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경 진리는 사람이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진실하게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맙시다(골3:23). “친절”, “공손”, “겸손” 이것이 아브라함의 얼굴입니다. 이 시간에 소돔의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소돔의 얼굴들
한낮 아주 뜨거울 때에 아브라함이 장막(집) 문 앞에 앉아 있다가 낯 선 사람 셋이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절에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맞은편에 서 있다’는 말을 NIV 성경은 ‘가까운 곳에 서 있다(standing nearby).’라고 했고, KJ 성경은 ‘그 사람(아브라함) 곁에 서 있었다(stood by him).’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은 ‘그(아브라함)의 앞에 서 있다.’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은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서 아브라함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아브라함이 발견하기 쉽도록 아주 가까이 접근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에게 집 바로 옆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주 극진하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세 사람 중 한 분은 구약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이시고 두 분은 천사들입니다. 식사 후에 세 사람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선언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돔을 향했습니다.
<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그들의 몸의 방향이 소돔을 향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 사람은 아브라함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소돔을 향해 서 있습니다.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향해 서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브라함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소돔을 향해서는 무엇 때문에 서 계셨을까요? 그것은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하늘의 사자들께서 마므레(헤브론)와 소돔을 향해 섰는데 하나는 은혜를 위해서 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4천 년 전에 아브라함과 소돔을 향해 서 계셨던 하늘의 메신저들께서 오늘 이 세상을 향해 서 계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땅은 어디이고 심판받을 땅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사는 땅에 하나님께서 심판이 아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땅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세요.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현대의 교회들 앞에 서 계십니다. 어떤 교회에 은혜를 주시고 어떤 교회를 벌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등대교회 앞에 서 계십니다. 우리 등대교회는 은혜 받을만한 교회일까요? 아니면 책망과 벌을 받아야 하는 교회일까요? 예수님께서 지금 서요한 목사를 향해 서 계십니다. 서요한 목사는 은혜 받을 목사인가요? 아니면 벌을 받을 목사인가요?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향해 서 계십니다. 하나님이 서 계신 이유가 은혜를 위해서이기를 소원합니다. 저주가 아니라 복을 위해서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심판이 아닌 은혜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창6:8). 창세기 39장 4절에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라고 했고, 21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2:26에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도록 기도하세요. 예수님께서 예수님 때문에 우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 울어주세요. 다니엘서 9장 23절에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을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너는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고전15:10).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옷을 입듯이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옷을 입고 살 듯이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합니다. 밥을 먹듯이 은혜를 먹어야 합니다. 호흡을 하듯이 은혜를 들이마셔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세요. 은혜 입는 일에 몸부림치세요. 은혜를 입는 일에 목숨을 거세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세요. 아브라함은 은혜를 입었지만 소돔은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입지 못했다는 말은 버림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입지 못한다는 말은 저주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입지 못하면 가롯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면 사울 왕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린 신도가 되지 마시고 은혜를 입는 성도가 되세요. 사람은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은혜 밖에 없습니다. 은혜가 제일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으세요.
16절 앞부분의 ‘소돔을 향하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문자적인 뜻은 ‘소돔 얼굴들 위로 내려다보았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소돔까지는 약 30km 정도로 아득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리입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천사들이었기 때문에 거리는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다보셨던 것처럼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본 것이 “소돔의 얼굴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소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는 말은 소돔의 내적 상태, 영적인 상태를 보셨다는 뜻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에는 인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소돔의 얼굴을 내려다 보셨다는 말은 소돔의 인격을 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소돔의 영적인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악의 얼굴>입니다.
<20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얼굴은 아주 무거운 죄악의 얼굴이었습니다. 소돔의 또 다른 얼굴 하나는 <폭력과 압제의 얼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20절)라고 했습니다. 부르짖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제아카입니다. 제아카는 부르짖음, 호령, 곡성, 도움을 구하는 외침, 아픔(애통)의 울부짖음이라는 뜻입니다. 제아카는 압제당하는 사람들, 학대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하늘을 향한 애절한 호소를 표현할 때 쓰는 관용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한 맺힌 부르짖음, 아픔의 울부짖음이 있었습니다. 부르짖음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 소리가 하나님께 들렸습니다. 21절에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라고 했습니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소돔과 고모라가 행한 모든 일과 그 일로 인해 약한 자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들렸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는 억울함과 고통의 소리는 하나님을 향한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지 않았더라도 불의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픔의 소리, 고통의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마세요. 교회에서, 내가 선 곳에서 소돔에서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세요.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연애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만 맞습니다. 두 명의 천사들이 소돔에 있는 롯의 집에 들어갔을 때 소돔 백성들이 노인이나 젊은이를 막론하고 부끄러운 행위를 하기 위해 원근에서 모두 모여 롯의 집을 에워싸고 두 사람을 끌어내라고 협박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두 천사를 얼굴이 잘 생긴 소년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롯이 두 사람을 내주지 않자 그들은 문을 부수려고 했습니다. 나그네를 대놓고 범하려고 위협하는 모습에서 소돔 사람들의 부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그네를 매우 친절하게 대접하던 아브라함의 시대에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폭거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따뜻한 인간애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소돔의 얼굴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인격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면은 폭력과 압제의 얼굴, 쾌락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돔에서는 억울한 자들의 부르짖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압제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소리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소돔으로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창세기 13장 10절에 소돔과 고모라를 여호와의 동산과 같다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다른 곳 보다 더 많이 입은 땅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특별은혜도 입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북방 5개국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해 사람들과 재물과 양식을 모두 약탈해갔을 때 아브라함이 집에서 훈련한 318명을 군사를 데리고 쫓아가서 5개국 연합군을 무찌르고 조카 롯을 구하고 재물도 모두 찾아왔습니다. 318명이 어떻게 5개국 연합군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 전쟁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나아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여기에 소돔 왕이 함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 앞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소돔 왕과 소돔의 백성들은 전쟁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선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소돔 왕과 소돔 사람들은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영어로 sodom은 지명을 뜻하기도 하지만 죄악의 장소라는 관용어로도 쓰입니다. sodomy라는 말은 ‘남색, 동성연애, 수간’이라는 뜻입니다. sodomite는 ‘동성연애자, 남색자’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 미국에 소돔법이 있었습니다. 소돔법은 동성연애 금지법입니다. 현대 소설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소돔과 고모라」에서 동성애자들을 ‘소돔인’이나 ‘고모라인’이라고 부릅니다. sodom이라는 말이 죄악의 관용어, 타락의 관용어가 됐습니다. 이것이 오늘 소돔이라는 말에 남겨진 얼굴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도시의 얼굴일까요? 하늘 높이 쌓아올린 고층 빌딩이 도시 얼굴일까요? 고급 아파트 단지, 각종 편의 시설, 잘 조성된 공원, 깨끗한 거리가 도시의 얼굴일까요? 아닙니다. 도시의 얼굴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의 얼굴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얼굴을 갖고 계십니까? 뻔뻔한 얼굴, 교만한 얼굴, 냉정한 얼굴, 사나운 얼굴, 비겁한 얼굴, 위압적인 얼굴, 죄악의 얼굴은 안 됩니다. 인도적인 얼굴, 정의로운 얼굴, 정직한 얼굴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아픔의 부르짖음, 고통의 부르짖음이 없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의 주경란 권사님이란 분이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차에도 얼굴이 있어요.” 이 말은 차에 주인의 얼굴이 나타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17-8년 전에 들은 말인데 잊어버려지지가 않아요. 여러분의 차의 얼굴은 어떤 얼굴입니까? 나를 통해 나타나는 우리 도시의 얼굴은 어떤 얼굴인가요? 소돔의 얼굴인가요? 아니면 은혜로운 얼굴인가요?
무엇이 교회의 얼굴일까요? 아름답게 건축한 예배당일까요? 교회마다 달려있는 십자가가 교회의 얼굴일까요? 깨끗한 시설일까요? 아닙니다. 성도가 교회의 얼굴입니다. 사랑의 얼굴, 겸손의 얼굴을 하세요. 무뚝뚝한 얼굴을 하지 마시고 아브라함처럼 친절의 얼굴을 해주세요. 여러분의 얼굴이 등대교회의 얼굴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는 등대교회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소돔의 얼굴을 하면 안 됩니다. 폭력의 얼굴, 압제의 얼굴, 갑질의 얼굴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소돔에서 나던 폭거의 소리가 나면 안 됩니다. 말과 행동으로 성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소돔 사람이 되지 마세요. 교회에서 억울함의 울부짖음이 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미워하고 싸우고 다투고 울부짖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우리 교회를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하던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아래처럼 만들어주세요. 스데반 집사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합시다. 그래서 등대교회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게 합시다.
2. 하나님의 친구가 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세 사람이 소돔으로 갈 때 전송하기 위해 한참을 따라갑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카퍼바누케까지 갔습니다. 카퍼바누케(카파 바루카, Cappar Bharucha)는 헤브론의 북동쪽에 있는 언덕으로 마므레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사해가 내려다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사해 근처 어디쯤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에 만들어진 전설입니다. 이것은 유대 랍비들의 주장일 뿐 정설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꽤 멀리까지 전송을 나온 것 같습니다. 16절의 ‘전송하러 함께 나갔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전송하기 위해 함께 걸었다’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전송하기 위해 멀리까지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친절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친절 그 이상이 것입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을 존중하는 아브라함을 높여 친구가 되게 했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이같은 논의는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롭고 놀라운 장면입니다. 출애굽기 33:11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 한 선지자입니다. 또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식사를 같이 하고 함께 걷고 오래 동안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대해 협상한 것에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할 때 천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만나실 때는 두 천사를 대동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고 여기에만 있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사람이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 상의하듯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으시고 함께 논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섯 번이나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아브라함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논의를 사람과 논의하듯 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4-15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대로 사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모든 계획이 성경에 다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셨다는 증거입니다. 이사야 41장 8절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 아브라함이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벗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장래를 말씀하셨습니다. 18절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강대한’이라는 말 앞에 ‘반드시, 필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어정쩡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반드시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하십니다. 은혜는 우리를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창세기 12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가지 더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9절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찐(진짜) 목적입니다. 혼자서 배 두드리며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의 성숙을 통해 더 발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내 삶과 내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 발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찐(진짜) 목적입니다.
사무엘상 2:30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했습니다.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세상은 하나님을 멸시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더욱 존중하십시오. ‘존중히 여기다’는 말이 ‘무겁다’는 뜻입니다. 멸시하다는 말이 가볍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고 가볍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가볍게 여기시지 않고 무겁게 여기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무겁게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무겁게 대접하셨습니다. 무겁다는 말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주세요.
9월 21일 EBS의 <위대한 수업>이라는 프로에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인 주디스 버틀러가 강연을 합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이론가이며 퀴어 이론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소아성애와 근친상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합의만 한다면 어린 아이들도 얼마든지 타락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부모-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타락한 행위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일방적 침해라고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낙인이 없다면 근친상간이 해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마와 아들, 아빠와 딸 사이에도 얼마든지 욕망을 해소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꺼내기도 정말 민망한 주장을 대학 강단에서 텔레비전에서 하는 사람입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결과 남자와 남성적인 것은 남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여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고, 여자와 여성적인 것은 여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남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남자가 얼마든지 여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얼마든지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정말 제 정신이 아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미국 명문대학교 교수입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 교육방송에서 강연을 합니다. 지금 세상이 정상이 아닙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 정도면 세상이 끝입니다. 잘못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마귀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후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동성연애는 단순히 동성연애가 아닙니다. 동성연애는 단순히 비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악의 최극단이 동성연애입니다. 타락의 최극단이 동성연애입니다. 최악의 불의한 사회로 만드는 죄악이 동성연애입니다. 돈이 생겨 넉넉해지면 사람들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가 술입니다. 여러분! 술을 끊으세요. 술이 죄악의 시작입니다. 둘째가 쾌락입니다. 쾌락에 빠지지 마세요. 가정을 지키세요.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집니다. 셋째가 마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동성연애입니다. 동성연애는 죄악의 끝입니다.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더 이상의 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악하게 만드는 것이 동성연애입니다.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고 있습니다. 최고의 엘리트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평등법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안 됩니다. 차별금지법은 악법 중에서도 악법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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