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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제가 자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가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죄 밖에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10번씩, 20번씩 합니다. 100번 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받은 은혜를 가만히 생각하다보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은혜를 정말 많이 받았는데 받은 만큼 살지를 못해요. 은혜에 비해 제 삶이 너무 턱 없이 모자라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죄가 너무 많아서 죽을 것 같아요. 정말 괴로워요. ‘이러다가 벼락을 맞아 죽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요. 그 때 제가 하는 기도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할 말이 없어요. 잘한 것은 없고 잘못한 것 밖에 없어요.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눅18:10).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생활이 참 거룩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어떻게 기도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게 될까요? 아니면 세리처럼 기도하게 될까요? 정말 하나님 앞에 섰다고 생각하시고 속에 있는 생각을 진심으로 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이사야는 고난의 때에 예언했습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선지자의 예언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와 백성이 패역해져 제 멋대로 행할 때 그들을 일깨우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고난의 원인을 지적하고 그들을 회개로 이끌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간곡히 청원합니다. 이사야를 따라가 보십시오. 다는 못하더라도 1장만이라도 따라서 해보십시오. 천천히 읽어도 5분이면 충분합니다. 선지자의 말씀에 회복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계속 죄와 그 결과가 고통이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죄에 빠진 인간들은 매우 비합리적입니다. 변명거리가 전혀 없음에도 변명거리를 찾아내 기어코 자신의 죄를 합리적으로 포장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합니다. 역리를 순리하고 하고 순리를 역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포장하지 마십시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통첩입니다. 그 최후의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삶의 혁신입니다. 삶의 변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라는 초청입니다. 이 시간 이 두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삶의 혁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6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씻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하츠입니다. 라하츠는 ‘목욕하다, 씻다, 몸을 정결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목욕은 성경에서 세례 혹은 회개의 의미로 종종 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한 사람입니다. 영적 목욕을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살면서 죄로 더러워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로 계속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라는 말은 하나님의 회개의 요청입니다. 이것은 영적 목욕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 씻음을 말합니다. 죄의 씻음을 말합니다. 요즘 같은 여름에는 자주 씻습니다. 물을 가까이 합니다. 또 코로나로 손을 자주 씻고 소독합니다. 그런데 영적 씻음은 이것보다 더 많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회개하세요. 기도와 말씀으로 영혼을 씻으세요. 이것이 이 고난과 패역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악한 행실을 버리며”라고 했습니다. 버리다(쑤르)는 말이 벗어나다, 쫓아버리다는 의미입니다. 옳지 않은 악한 행실을 쫓아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과거를 벗어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십시오.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은 씻은 후에 깨끗함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씻었으면 다시 더러워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악행을 그치고’라고 했습니다. 그치다(하달)는 말이 그만두다, 포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행하던 악행을 포기해야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포기하세요. 세상에서 도망치세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이것이 목욕한 자의 삶입니다.
잠언 26:11에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개는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습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는 것은 개가 아주 튼튼하고 정상 컨디션이라는 증거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가 아프다는 말입니다. 이런 때는 병원에 가보아야 합니다. 소는 풀을 먹은 후 한가할 때 꿀렁거리며 먹은 것을 토해 씹어서 다시 삼킵니다. 소가 토한 것을 다시 삼킨다는 것은 아주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돼지는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도 다시 진탕에 들어가 뒹굴며 놉니다. 이거 아주 정상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토한 것을 먹지 않습니다. 사람은 목욕을 한 다음에 몸을 다시 더럽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목욕한 사람들입니다. 과거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그런데 자꾸 과거로 돌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 돼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부족입니다. 자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면 조금 더 기도해 더 많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은혜를 더 받으십시오. 과거의 삶을 덮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더 큰 은혜를 받으십시오. 은혜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며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17절>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선행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선행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타브입니다. 야타브는 ‘좋게 만들다, 잘 되게 하다, 단장하다’는 뜻입니다. 야타브는 무엇이든지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선행은 사람들을 좋게 만드는 거예요. 일을 좋게 만드는 거예요. 상황을 좋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도. 일도, 분위기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좋아져야 합니다. 나 때문에 나빠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좋게 만들어 주세요. 교회를 좋게 만드는 성도가 되세요. 우리 모두 서로를 좋게 만드는 성도가 됩시다. 서로를 나쁘게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배우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마드입니다. 라마드는 ‘배우다, 익숙하게 하다, 훈련시키다’는 뜻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반복, 훈련으로 무언가를 익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행을 배우라는 말은 좋게 만드는 일을 반복 훈련해서 습관이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선행이 습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게 만드는 것이 습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악행이 습관이 되면 안 됩니다. 정의를 실현하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사회적인 약자들을 변호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어떤 교회는 마귀의 친구가 있어요. 그래서 교회를 나쁘게 하려고 애를 써요. 할퀴고 찌르고 꼬집어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어요. 가만히 못 있어요. 괴롭히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마귀의 친구가 되지 마십시오.
나폴레온 힐의 「습관이 답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힐은 우리가 평상시 하는 행동의 약 40%는 습관이라고 합니다. 하루 행동의 40%가 습관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말, 행동, 일 심지어 생각까지 습관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습관이 된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뇌가 실패하도록 프로그램이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믿음이 돼서 프로그램처럼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기 전에 이미 실패하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하는 이유는 내 삶이 실패하도록 뇌가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실패, 나쁜 것, 불행이 습관이 되면 안 됩니다. 악이 습관화되면 안 됩니다. 선이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행복, 은혜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해로운 사람과 어울리면 부정적이고 해로운 사람의 성향이 무의식적으로 답습이 됩니다. 사람은 사귀는 사람들의 수준만큼 성공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믿음이 나쁜 사람을 만나면 믿음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심술쟁이를 사귀면 심술쟁이가 됩니다. 원망쟁이를 만나면 원망쟁이가 됩니다. 여러분의 뇌 속에 선이 프로그램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좋게 만드는 것이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나도 아내도 자녀도 내 삶도 좋게 만드십시오. 나보다 약한 자, 나보다 없는 자, 소외된 자를 좋게 만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자비와 정의를 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혁신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초청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후의 호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 우리를 향하신 매우 놀랍고 애절한 하나님의 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호소라기보다는 간청, 애원, 혹은 매달림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매달리고 계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도대체 인간이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그토록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시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버리시면 되지 왜 버리시지 않고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그것도 배은망덕한 인간들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리실까? 하나님은 자존심도 없으신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호소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18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말 성경은 단순한 명령형으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오라!”는 말 뒤에 간청형 어미인 ‘나’란 말이 붙어 있습니다. ‘나’는 ‘청컨대, 제발, 부디, 원컨대’라는 의미입니다. 간절한 요청을 할 때 이 어미를 붙입니다. 그러니까 “오라!”는 말의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제발 와라”입니다. 좀 더 의역한다면 이런 말이 됩니다. “원컨대 나에게 오라!”, “제발 좀 나에게로 와줘!”, “내가 애원하는데 제발 좀 와! 정말 부탁이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절한 마음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초청받은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하나님께 공로가 있는 사람들일까요? 충성스러운 일꾼일까요? 아니면 품위가 넘치는 귀족들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행악의 종자, 패역의 자식들입니다. 배은망덕하고 성전을 짓밟았으며 하나님을 조롱한 자들입니다. 죄악으로 맞고 멍들고 터져 전혀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음란하고 악한 사람들입니다. 주홍 같은 죄, 진홍 같은 붉은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지옥에 빠져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애타는 말로 초청하십니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데 제발 나에게로 와라! 제발 좀 와줘! 부탁이다. 초청이라기보다는 애원이고 매달림입니다. 자존심을 다 버리시고 바지 끝을 잡고 늘어지듯 하나님이 인간에게 매달리고 계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을 붙들고 돌아오라고 매달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떠난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을 간절한 마음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라!” 여러분! 이것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것 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있을까요?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다는 말씀 외에 이것 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애절한 마음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바지를 붙들고 매달리며 오라고 요청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오십시오. 제발 세상으로 가지마시고 하나님께로 오십시오.
성경 전체 메시지는 “오라!” 이 한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평소에 하시던 대로 똑같이 에덴동산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느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달아난 것입니다. 아담이 보이지 않자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오실 때 아담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하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왜 도망갔니?’, ‘왜 나에게로 오지 않니?’, ‘문제가 생겼으면 내게로 뛰어와야지! 도망가면 어떻게 하니?’ ‘빨리 내게로 와라!’는 의미입니다. 아담아! 내게로 와라. 내게로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렴. 네 자신을 위해 왜 그랬는지 내게 변명을 해보렴. 숨지 마라. 도망가지 마라. 내게로 와라. 내게 해결책이 있단다. 다른 데로 가면 안 돼! 하나님은 아담의 말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말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하나님께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젖을 뗀 후에 성소에서 혼자 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와서 내 말을 좀 들어봐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사무엘아! 백성들, 레위인, 심지어 제사장까지 다 나를 떠났단다. 어른들은 다 나를 떠났어. 내게 오는 사람이 없어. 이제 내가 말할 어른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내게로 오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여쭈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것은 오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초대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선지자들이 외쳤던 외침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사도들 이후 지난 1900년 동안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오라는 초청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 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있습니까? 오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왜 있습니까? 오라고 외치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오십시오.
간절한 하나님의 초청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구약 성경은 저주로 끝이 납니다.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4:6) 이것이 구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만약 이렇게 성경이 끝이 났다면 인류는 전멸했을 것입니다. 인류가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것이 신약입니다.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직접 외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오라!”, “와서 보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아직 끝내지 않으셨으며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초청을 거절했고 우리에게 죄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 “와서 보라!” 이 외침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십시오. 교회로 오십시오. 십자가로 오십시오. 십자가 외에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끝나기 전에 오십시오. 나중에 오지 마시고 지금 오십시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다 가기 전에 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간절하게 초청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변론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서로 변론하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서로 이야기해보자, 서로 따져보자, 너와 나 잘잘못을 이야기해보자’라는 말입니다. 잘잘못은 서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끼리 따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변론이라는 것은 법정적인 술어입니다. 변호사와 검사가 대등한 입장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변론이라는 것은 자유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재국가에서는 변론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주장을 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입니다. 전혀 죄가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이며 벌레 같은 인간에게 잘잘못을 함께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도 패역무도한 죄인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자유가 정말 놀랍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없이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겸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반역한 우리들을 향해 내려오셔서 “오라! 우리가 토론해보자. 난 네게 말했고, 이제껏 네게 선지자들을 보냈단다. 내가 이제껏 네게 호소했지만,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단다. 오라! 내가 내려갈 것이다. 오라! 우리가 그것을 올바르게 결말을 내 보자. 너희는 너희들의 주장을 펼쳐라. 나는 내 주장을 펼치마.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론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벌주시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이미 용서라고 결론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변론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카흐입니다. 야카흐는 ‘분명하다, 판단하다, 이치를 따지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합리적으로 따져 중재를 하거나 입증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변론하자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중에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 했는지 꼼꼼하게 따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시시비비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시시비비를 가려보나마나 인간이 잘 못했습니다. 인류는 심판당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변론의 결론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변론하자는 말은 인간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좋은 결론을 내보자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보자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사야 6장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때 이사야의 입에서 즉시로 터져 나온 말이 이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 말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그 때 입에서 나온 것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말을 할 필요도 할 수도 없습니다. 이 한 마디면 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로 이사야의 입에 있는 죄를 모두 태워버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야, 네 많은 죄가 사해졌다. 너는 죽지 않고 산단다. 걱정하지 마.” 이사야는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와 변론하는 사람이 받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변론하십시오.
이 근처에 사시는 어떤 교회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집안이 평안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 분이 교회를 다니는데 교회에 가면 누가 자기를 부를까봐 빨리 왔다고 합니다. 교회에 가는 이유가 집에 오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 큰 병이 생겼습니다. 본인은 암에 걸렸습니다. 우울증도 왔습니다. 언니가 남편에게 폐가 되니까 사람들에게 우울증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더래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남편이 교회를 안 나가게 됐습니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고 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갔습니다. 오전 10시에 교회에 가서 저녁 8시에 왔다고 합니다. 남편이 출근하면 집 정리를 하고 매일 교회를 갔습니다. 전도사님과 교회에서 밥도 해 먹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늦은 오후가 되면 교회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아무도 없는 예배실에서 혼자 기도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저예요? 제가 그렇게 잘못했나요?” 이렇게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분하고 원통해서 매일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맞더래요. 처음에는 “하나님, 왜 하필 전가요?”라고 기도했는데 나중에는 “제가 맞네요.”라고 기도가 나오더랍니다. 내가 죄인이었다는 거예요. 내가 잘못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당신 교회 다니더니 몸이 좋아지네.”라고 하더랍니다. 이제는 병이 다 치료됐습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 한 마디가 그 집사님을 치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변론을 해보세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세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 기도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잘못했습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가 마주앉아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 토론을 했습니다. 세 친구는 욥에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없다며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정죄합니다. 하지만 욥은 잘못이 없다며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부당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정죄했습니다. 욥은 세 친구에게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욥기는 42장까지 있는 긴 책입니다. 42장 중에서 반 이상이 욥의 말입니다. 그것도 철학적인 말들입니다. 욥기를 읽어보세요. 정말 어렵습니다. 그 많고 어려운 욥의 말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잘못이 없다.”입니다. 욥기는 성경 지혜서 중에 첫 번째 책입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 자신의 무죄를 변론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정죄하며 자신이 무죄하다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면서도 절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의 교만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매우 비이성적입니다. 모든 것을 다 동원해 자신이 정의롭다고 변론합니다. 절대로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났을 때 욥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욥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의 이 말들을 한 마디로 줄이면 “잘못했습니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욥은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말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대에 가장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동방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니 죄인이었습니다.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말도 없었습니다. 오직 욥이 할 수 있는 변론이 있다면 이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초청이 들리십니까? 오라! 원컨대 나에게로 오라! 하나님의 애원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 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을 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 서 계십니까? 이전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 나오십시오. 나왔지만 뒤로 돌아가셨다면 다시 나오십시오. 주님께만 내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주님께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흰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옷은 이 세상 어떤 세탁소에서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의 흰 옷입니다. 너무 흰색이라 빛이 나는 옷입니다. 천사와 같은 옷입니다. 이 세상 어떤 디자이너도 만들 수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완전한 옷입니다. 흠이 없는 옷입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천사들이 보고 말할 것입니다. “오! 정말 축하할 일이다. 저 사람은 타락해 온갖 죄로 더러워졌는데 하나님의 초청을 듣고 돌아와 죄 용서함을 받고 우리와 같은 옷을 입었네!” 여러분! 주님께로 오십시오. 주님의 초청에 응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아5: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여러분! 주님의 동산으로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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