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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불교의 인간관은 주체적 인간관입니다. 불교의 사상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인간 스스로 행한 것에 상응하는 결과일 뿐이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간 자신의 힘 외에 다른 어떠한 것에 기대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유일한 책임자입니다. 문제해결 능력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유교의 인간관은 윤리·도덕적 인간관입니다. 유교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하늘로부터 순수한 선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악에 빠져도 극기복례하여 언제든지 선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악에 빠져도 스스로 악에서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논어》에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했습니다. 도의 주체가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한번 선한 인간은 계속 선하고, 지식을 깨달을 사람은 절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결코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뉴에이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 의학, 철학, 환경, 음악 등의 집적된 발전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문화 운동입니다. 뉴에이지는 “모든 것이 신”(All is god)이라고 합니다(범신론). 그래서 인간도 신(All men is god)이라는 것입니다(신비주의). 인간 안에 신적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문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스타워스> 영화에 보면 ‘포스’라는 것이 나옵니다. 제다이 용사들이 수련을 통해 포스를 증대시켜 초능력을 행합니다. 포스가 무엇일까요? 조지 루카스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젊은이들 안에 있는 일종의 영성을 깨우려는 목적으로 이 영화 속에 ’the Force’를 집어넣었다. 나는 ‘the Force’를 신(god)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조지 루카스는 영화 속에서 하나님 자리에 포스를 넣었습니다. 수련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 철학, 문화 등 현대 사상은 인간을 매우 긍정적으로 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아주 비관적으로 말합니다.
성경은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아담이 범죄를 한 이래 인간은 그 죄에서 돌아설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전적인 무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 신앙의 의지적인 요소가 생겨납니다. 구원은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합니다. 불교의 인간관이 주체적 인간관이라면 기독교의 인간관은 의존적 인간관입니다.
1. 한 가닥 희망, 남겨두심
이사야 선지자는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 또는 죄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5b-6절) 찢어지고 상하고 시퍼렇게 멍이 들고 터졌는데 또 새로 맞은 흔적이 있습니다. 새로 맞는다는 말은 앞으로도 계속 더 맞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죄는 사람이 입은 상처를 갈수록 악화시킵니다. 절대로 호전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치료해줄 존재가 없습니다. 치료해줄 존재가 없다는 말은 그대로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대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류는 죄에 빠져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스스로 치료할 수도 없고 치료해줄 누군가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멈춰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비쳐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은혜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8절 끝부분에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남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타르입니다. 야타르는 “남다, 남기다, 두고 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남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남겨놓은 것입니다. 누가 남겨놓았을까요? 하나님이 남겨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해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셨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했을 것입니다. 인류 또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했을 것입니다.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이것은 1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또 이사야와 선지서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사상입니다. 남겨두심.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은혜를 남겨두셨습니다. 사람이 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해놓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이 말씀을 굳게 잡읍시다. 남겨두심. 인간은 구원에 관해 전적 무능력합니다. 악에서 구할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붙잡으셔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놓으셨습니다. 십자가만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뿐입니다. 남겨두시는 은혜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딜 가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남겨두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에서 완벽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롯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언하며 그곳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롯은 자신의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사위들에게 천사의 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사위들이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농담이라는 말이 웃다, 희롱하다, 장난하다(차하코)는 뜻입니다. 사위들은 롯의 말을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비웃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롯의 탈출과정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강제로 끌고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도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가지 못하고 지체합니다.
<창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인도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차입니다. 야차는 나가게 하다, 분리하여 데리고 나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천사들이 지체하는 롯을 강제로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 받았을 것입니다. 또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와서 피하는 과정에서도 천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길에서 멸망했을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멸망할 것을 아는 데도 지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도망하라는 말을 네 번 합니다. 도망하라. 도망하라. 도망하라. 네 번째는 속히 도망하라고 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멸망할 세상에서 도망하라고 가르치는 곳입니다. 목사가 누구입니까? 물질에서 도망하라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쾌락에서 도망하라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도망하십시오. 세상에서 속히 도망하십시오. 롯의 사위들처럼 제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천사들이 롯을 아주 급하게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롯이 피난처에 도착할 때까지 천사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알고도 자신을 멸망에서 구원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앞에서도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구원에 관한한 전적으로 무능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부르심과 죄사함의 은혜 때문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라는 말은 ‘그의 위에 있는 여호와의 인자로 말미암아’라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롯의 위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롯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남겨두셔서 롯이 산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봅시오. 하나님의 남겨두심, 이것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일생동안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탈북할 때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있답니다. 압록강을 죽음의 강이라고 합니다. 압록강 건너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거기서 꽤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탈북할 때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듯이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탈북자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갑니다. 중국에 들어간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탈북자들끼리 하는 말이 있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십자가 있는데 가면 산다.” 아무데나 가면 바로 고발당해 바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탈북자들 사이에 불문율이 있습니다. 십자가 있는데 가면 산다는 것입니다. 아주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 십자가 있는데 가면 산다.” 십자가 있는데 가면 목사님들을 만나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있는 이곳으로 오십시오. 교회로 오십시오. 구원은 여기뿐입니다. 다른 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은혜를 남겨놓으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이곳으로 오십시오. 여러분! 교회로 오십시오.
2.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해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셨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지금 유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겨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남겨두셨을 때,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10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을 소돔의 관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너무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사야 선지자는 정치 지도자들을 소돔의 관원, 백성들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톱으로 켜서 몸을 두 동강 내서 죽였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정치 지도자나 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습니다.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영적 현주소를 묻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선민 이스라엘 같은데 내적으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이 말은 너희들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모양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속은 우상의 자녀, 마귀의 자녀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네 위치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네 신앙 이대로 좋으냐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한번 깊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가 영어로 repent입니다. re는 다시, pent는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repent는 ‘다시 생각하다. 마음을 고치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나를 다시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 신앙이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나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회개입니다. 여러분! 조금 배우고 조금 있다고 약한 사람들에게 갑질한다면 그 사람이 소돔의 관원입니다. 누군가 나 때문에 억울하고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바로 소돔의 관원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또 내가 고모라의 백성이 아닌지 생각해봅시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한 밤 중에 잠자리에 들지 않고 롯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밤이 되면 일찍 주무십시오. 이 나라가 밤이 되면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버립니다. 곳곳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집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회개합시다. 우리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속성을 빼어버립시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듣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솨마입니다. 솨마의 뜻이 듣다, 들은 것을 이해하다, 순종하다, 청종하다, 경청하다, 갈망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은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순종이 무엇일까요?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22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내 마음을 뒤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른다는 말은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마음에 맞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판단에 불합리하고 모순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하고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왓슨의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왓슨은 제자도의 핵심은 순종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전적이며 비타협적인 순종의 삶에로 우리를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문화의 관점에서 보다 합리적인 노선을 선택함으로 그리스도의 부름을 제한하고 또 그의 엄격한 요구를 완화시키려는 유혹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상습적인 말버릇은 예수님 당시와 현대의 상황은 다르다는 것이다.”(305페이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나쁜 말버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시대와 지금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나쁜 말버릇부터 고쳐야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크리스천은 자기가 순종해야 할 말씀을 선택하고 그것만 지킵니다. 순종하기 싫은 말씀은 모른척하거나 자기를 합리화해서 안 지킵니다.
지키다는 말이 솨마르입니다. 솨마르는 지키다, 보호하다, 품다,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는 뜻입니다. 저주라는 말이 솨마드입니다. 솨마드는 황폐하게 하다, 진멸하다, 멸절시키다, 저주하다는 뜻입니다. 솨마르와 솨마드는 모두 솨마에서 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솨마르)이 복이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저주(솨마드)입니다. 선지서가 17권입니다. 첫 번째 책인 이사야서는 들으라, 솨마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저주, 솨마드로 끝납니다.
<말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저주받았다는 말로 끝이 납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저주로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여러분의 인생을 저주가 아니라 복으로 끝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을 듣고 인생을 복되게 살다가 복되게 천국 가십시오. 인생을 복으로 마치십시오.
3. 가짜 예배와 가짜 기도를 모두 중지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예배를 드렸는지 그리고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셨는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 마디로 너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은 너희가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정말 듣기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배와 기도를 모두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대해 아주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11절 앞부분에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최고의 유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아무런 유익이 없는 예배를 드리지 맙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한국 교회와 이 나라와 내 가정, 내 남편, 내 자녀, 그리고 우리 등대교회에 유익한 예배가 되도록 성심을 다해 드립시다. 또 11절 뒷부분에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예배가 되도록 예배합시다. 13절 앞부분에 헛된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제사는 무가치한(솨웨) 것이었습니다. 13절 중간에 “분향은 내가 가증이 여기는 바요”라고 했습니다. 가증이 여긴다는 말은 구역질나도록 싫다(토에바)는 뜻입니다. 13절 끝부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선이고 의입니다. 그런데 악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 하나님은 내 마음이 정한 절기를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내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영 자체이시지 영혼이 있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싫어한다는 말은 극도로 싫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짐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예배가 기쁨이 아니라 괴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짜 예배에 지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극도로 혐오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 드렸습니다. “무수한 제물”(11절)이라는 말은 “풍성한(로브, ‘풍성함’, ‘많음’, ‘크다’, ‘중다하다’, ‘허다하다’. ‘무수하다’)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나는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11절)이라고 했습니다. 살진 짐승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할 때 짐승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서 드렸다는 뜻입니다. 구약 말기 말라기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숫염소의 피’(11절)라고 했습니다. 피는 제사의 필수요소입니다. 하나님은 피 없는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에 번제, 제물, 분향, 월삭, 안식일, 대회, 성회, 절기라는 말이 언급된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정말 열심히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정해진 절기와 예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이렇게 싫어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싫어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첫째, 보이기 위한 예배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여기에 '~처럼 보인다'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값비싼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은 없고 껍데기뿐인 예배입니다. 여러분! 보이기 위한 예배, 찬송, 봉사, 헌금은 하지 마십시오. 예배 쇼, 봉사 쇼, 헌금 쇼 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가지고 장난하지 마십시오. 찬송, 봉사, 헌금 가지고 장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거지가 아닙니다. 장난하려거든 차라리 헌금을 하지 마십시오. 둘째,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입니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밟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마스입니다. 라마스는 짓밟다, 밟아 뭉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성전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이름의 존귀하심과 거룩하심을 밟아 뭉개고 유린하고 짓밟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이스라엘에게 마당을 짓밟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등대교회를 짓밟지 마십시오. 짓밟으러 교회에 오지 마십시오.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등대교회를 짓밟고 장난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만 열심히 드린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아주 열성적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손을 펴다’는 말은 새가 날개를 활짝 펴듯, 장막의 덮개 천을 활짝 펴듯 기도할 때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쭉 뻗고 두 손바닥을 활짝 펴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할 때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손을 곧게 폈습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드는 이유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기 위한 제스쳐로서 사안의 긴급성과 간절함을 나타냅니다(시28:2, 134:2, 스9:5). 찬양할 때 손을 드는 것은 경배를 표현하는 제스쳐로서 감격과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토라를 읽을 때 손을 드는 것은 율법에 대한 인정과 거기에 대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고 아주 간절하게 열정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또 많이 기도했습니다. ‘많이’라는 말이 무수하다, 중다하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으면 무수한 기도라고 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기도와 그 열정적인 기도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눈을 가리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피가 가득하다는 말은 사악한 악행이 수도 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온갖 나쁜 짓을 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또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악행을 하면서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악행을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회개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회개하지 않는 기도, 자기 자신에 대한 뉘우침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예배하기 전에, 기도하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나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여러분! 가짜 예배, 가짜 기도를 모두 중지합시다. 그리고 진짜 예배, 진짜 기도를 드립시다. 손에 묻은 피를 씻으세요. 회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합시다. 예배와 기도에 헌신하세요. 코로나 시대에 가장 큰 헌신은 예배와 기도에 대한 헌신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각종 헌신예배가 있습니다. 헌신을 위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헌신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헌신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처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로 헌신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예배의 헌신자입니다. 코로나로 많은 교회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예배의 불과 기도의 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배와 기도의 불을 밝힐 헌신자들이 필요합니다. 진짜 예배에 헌신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남겨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이 시대에 남겨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시대를 위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도록 우리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예배로 코로나 시대를 밝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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