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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서는 대선지서 5권(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소선지서 12권(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도합 17권입니다. 선지서가 많지만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죄의 책망입니다. 둘째, 심판의 경고입니다. 셋째, 회복의 예언입니다. 이 셋 중에 중심된 메시지는 회복입니다. 회복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치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지서는 회복 혹은 치유입니다.
<리셋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reset은 되돌리다, …을 고쳐[다시] 놓다, 초기화, 재설정이라는 뜻입니다. 리셋증후군(reset 症候群)은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리셋 버튼만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세계에서도 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리셋 증후군 환자들은 문제가 있을 때 리셋버튼만 누르면 없던 일처럼 할 수 있는 컴퓨터와 같이 현실에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더라도 리셋 버튼만 누르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삶에 리셋버튼이 있다면 그것을 눌러 처음 상태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종종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원상복구”, “처음으로” 그런데 인생에는 리셋 버튼이 없습니다. 인생은 리셋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생의 리셋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선지서입니다. 저는 선지서가 리셋 버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리셋하는 버튼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싶다면 선지서를 마음의 손으로 꾹 누르십시오. 인생이 완전히 리셋될 때까지 계속 누르고 계십시오. 선지서에서 손을 떼지 마십시오.
또 리빌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리빌딩은 개축, 고쳐서 다시 지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프로 스포츠에서 “팀의 구성원이나 시스템을 리셋, 물갈이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서는 인생을 리빌딩하는 책입니다. 지금 내 인생이 싫지 않으십니까? 만약 인생을 리빌딩하고 싶다면 선지서를 읽으십시오. 계속 읽으십시오. 그리고 선지서에서 하는 말씀대로 하십시오. 인생이 리빌딩됩니다.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양 7천 마리, 낙타 3천 마리, 소 천 마리(5백 겨리). 암나귀 5백 마리와 많은 종들을 잃어버렸고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죽었으며 발바닥과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너무 아파 깨진 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고 친구들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옷을 찢고 티끌을 날려 머리에 쓰고 7일 동안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인생이 리셋 됐습니다. 그 방법이 회개입니다.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욥기에 회개라는 말이 이곳에 한 번 딱 나옵니다. 욥이 이전에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잘 못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고난당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자 회개가 그냥 나왔습니다. 여러분!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자 회개가 그냥 나왔습니다. 욥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욥의 인생을 리셋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리셋된 것이 아니라 처음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42:12-13에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우리 인생을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리셋시키면 이전보다 더 복이 있습니다. 선지서는 바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바로 인생 리셋 버튼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이사야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책으로 17권의 선지서 중에 첫 번째 책입니다. 맨 앞에 있다는 말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서는 선지서 중에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신약성경이 적어도 65회 이상 이사야서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가 중요한 이유는 책이 담고 있는 내용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는 구약 성경 39 권 중 메시아의 예언을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한 책입니다. 다른 성경에도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이 매우 간접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그 표현이 아주 구체적이고 직접적입니다. 예수님과 그 하실 일을 마치 눈으로 직접 본 사람처럼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9:6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했습니다. 메시아 출생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없이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이사야서의 메시아 예언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예수님을 확실하게 담고 있기를 바랍니다. 아주 분명하게 예수님을 담으세요. 예수님이 계신 건지 계시지 않은 건지 모호하게 믿지 마세요. 이사야서가 중요한 이유는 메시아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으로 구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여러분! 그 은혜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이사야의 사역 기간은 BC 739년부터 BC 690년까지 490년 정도로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1:37에 “톱으로 켜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유다 므낫세 왕 때 톱으로 몸이 둘로 잘려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사야서는 어휘가 화려하고 아주 풍부한 책입니다. 이사야서는 신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많은 어휘가 나오는 책입니다. 에스겔서 1,535개, 예레미야서 1,653개, 시편 2,170개, 그리고 이사야서는 2,186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힙니다. 이사야서에는 많은 노래들이 실려 있습니다(포도원의 노래(5장, 27:2-6), 구원받은 자의 감사와 승리의 노래(12장), 바벨론 멸망의 만가(14장), 꽃피는 사막의 노래(35장), 여호와의 종의 노래(42:1-9, 49:1-6, 50:4-9, 52:13-53;12)). 어휘가 풍부하고 내용이 다양하다는 것은 은혜의 경험이 풍부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합니다. 하나만 있지 않습니다. 그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입니다. 이 아모스는 아모스 선지자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귀족 혹은 왕족 출신으로 추정합니다. 왕궁을 자유롭게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복음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1절>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웃시야는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을 뿐만 아니라(대하26:4) 아라비아, 블레셋, 암몬, 마온 등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정복할 정도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웃시야 시대에 남 유다는 가장 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어떻게 웃시야는 나라를 부강하게 했을까요?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대하26:15>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기이한”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팔라입니다. 팔라는 ‘구별하다, 뚜렷하다, 차이를 두다, 경이롭다’는 뜻으로 인간의 능력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웃시야가 도우심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웃시야는 인간의 이해 한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형통했고 강성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여러분의 인생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해져서 나병에 걸려 말년을 별궁에서 쓸쓸히 보냈습니다. 그의 아들 요담은 아버지처럼 정직한 왕이었지만 성전에 들어가지 않아 백성들을 부패하게 했습니다(27:2).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어린 아이를 몰렉에게 불에 태워 제사할 정도로 아주 심각한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유다의 국운이 점점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으나 기울기 시작한 유다의 국운을 다시 회복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리고 유다의 운명이 점점 기울시 시작한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기록한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사회가 어두울 때 받은 계시입니다. 나라가 망해갈 때 받은 계시입니다. 계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존인데 이 단어는 ‘주시하다’, ‘감지하다’, ‘예언하다’, ‘찢다’, ‘쪼개다’, ‘깨뜨리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 묵시, 이상, 계시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중 가장 바람직한 번역은 계시입니다. 하존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거나 알려주실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존(계시)은 어느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깨뜨리고 쪼갠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존을 영어 성경은 vision으로 번역했습니다. vision은 본다는 의미입니다. 하존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귀로 듣는 것도 포함합니다. 이사야에게는 나라의 운명이 점점 기울어져 갈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어둠의 시대에 악에게 굴하지 않고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받은 하존, 계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란한 세상을 이길 수 있으려면 하존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하존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자아를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깨뜨리는 사람입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계시가 없으면 어둠의 시대에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계시가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히브리어 ‘하존’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곳이 사무엘상 3장 1절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상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존입니다. 묵시, 계시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은 vis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을 직역하면 “이상이 흔히 내려오지 않았다”가 됩니다. 이상,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려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여호와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희귀하다(야카르, 귀중하다, 보배롭다)는 말이 보배롭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말씀이 보배로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보석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의미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어려웠을까요? 엘리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엘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백성들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배우지 못한 엘리 제사장의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2:12) 행실이 나쁘다는 말이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성들과 음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손을 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엘리의 아들들은 망할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잠언 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묵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존입니다. 방자히 행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파라입니다. 파라는 묶은 것을 풀다, 통제를 벗어나다, 제멋대로 하다, 고삐를 풀다, 벌거벗겨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묵시(vision)가 없으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NIV 성경은 “계시가 없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자제력을 내팽개치지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KJV 성경은 “비전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멸망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계시가 없는 나라, 계시가 없는 사회, 계시가 없는 가정은 망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을 직역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의 복이다”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비전이고 계시입니다.
지난 주간 월요일 저녁 6시쯤에 고등학생 세 명이 5층에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내려갔습니다. 화장실 휴지통에 휴지 말고 다른 쓰레기를 버리고 갔어요. 화요일 저녁 6시 경에 그 세 명이 다시 왔습니다. 옆에 공실에서 놀고 있어서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며 내 보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천정에서 쿵쿵 소리가 나요. 누가 옥상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입니다. 옥상에 올라갔더니 그 학생들이 거기에 있어요. 소화기로 화단과 옥상을 하얗게 뿌려놨어요. 너희들이 한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아이들을 내려 보내고 관리소장님께 연락을 했습니다. 화단을 둘러보니 화단 풀숲에 소화기 두 개가 하나는 이쪽에, 하나 저쪽에 버려져 있어요. 아이들이 소화기를 여기저기 뿌린 다음에 던져버린 거 같아요. 담배를 피우고 쓰레기도 바닥에 그냥 버렸어요. 이 건물 관리 도구를 가지고 장난도 했어요. 화장실에 들어가 봤더니 볼 일을 보고 물을 안 내렸어요. 화장실에 종종 물이 안내려져 있을 때가 있었는데 그 동안 저는 ‘사람들이 일을 본 후 깜빡 잊고 그냥 갔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학생들의 행실들을 보니까 다음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안 내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엘리베이터 문에 침을 두 번이나 뱉고 갔어요. 지저분한 일을 다 하고 간 거예요. 인생을 막 사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없으니까 영혼의 고삐가 풀린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어둡습니다. 사회가 부패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악해지면 사람들이 망할 일만 골라서 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존이 있어야 합니다. 식구들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집에 성경 말씀을 걸어놓으십시오. 사람에게는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막 살지 않습니다.
차별금지법 제 2 조 1항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별이란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 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남성 여성 외에 제 3의 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게 차별금지법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제 2 조 4항은 더 구체적입니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외설스러워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영국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이후에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40배 이상 늘었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2500프로 늘었습니다. 4살이 되면 자신의 성을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4살짜리 어린애가 자신의 성을 선택하다니요. 아이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나는 양성애자다”, “나는 트랜스젠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이라고 주장하고 여자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용한 성범죄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여성 격투기에 참가해 상대 선수의 두개골을 파괴했습니다.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이 여성 달리기 대회에 참가해 15회 연속 우승을 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사람이 여성 역도대회에 출전했습니다. 이게 법입니까? 정말 이상한 법이 차별금지법입니다. 이것보다 더 이상한 법이 평등법입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법안을 국회의원들이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들에게 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이고 어른이고 고삐가 풀려 망할 일을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은 무너졌습니다. 이 세상에는 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미 법이 없어졌습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무속 학원이 특수를 누린다고 합니다. 한 구인구직업체의 조사 결과, 응답자 65.4%가 ‘점 또는 운세를 봤거나 볼 계획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점을 보는 첫째 이유는 ‘심리적 안정과 위안을 얻고자’(33.3%), 둘째는 ‘취업 전망이 막연하고 답답해서’(28.9%)였습니다. 찾는 사람이 많다보니 점집이 늘어나게 되고 직업으로 무당의 길을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속학원을 찾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는 것입니다. 무당이 현대인의 불안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지난 4월 신점을 보러 부산의 한 점집에 다녀온 방모(28)씨는 “복채 5만원을 내고 진로에 관해 물었는데, 언제 어디에서 일하게 될지 구체적으로 들은 건 없지만, 그 뒤로 불안함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점을 치고 불안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노모(49)씨는 “일자리를 잃었을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신점을 봤다”며 “정확한 답보다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 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우리 시대에 계시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계시입니다. 성경을 붙드십시오. 성경이 오늘 우리가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하존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외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선지자는 하늘에게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땅에게 귀를 기울여 보라고 말합니다. 여기 ‘귀를 기울이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잔입니다. 아잔은 ‘듣다, (손으로) 귀를 펴다, 손을 귀에 대고 듣다, 가까이서 듣다, 귀를 기울이다’는 의미입니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 선생님의 소리가 아주 작아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계사 시간만 되면 싫었습니다. 그런데 제 짝은 세계사 시간만 되면 선생님 소리를 듣기 위해 두 손을 귀에 나팔처럼 대고 선생님 소리를 들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두 손을 귀에 댔다가 중요한 내용이 나오면 한 손으로 필기를 하면서도 다른 한 손은 여전히 귀에 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그 모습이 간절한지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늘과 땅이여 내가 전하는 말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에 귀가 있습니까?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 이외의 이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 말은 하늘과 땅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시를 듣지 않기 때문에 선지자가 하늘과 땅을 향해 탄식하며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문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주인공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입니다. 어쩌다가 드라마 주인공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짜증을 냅니다. 말씀을 잘 듣지 못해서 짜증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신문의 철자보다, 드라마 주인공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면 선지자의 첫 일성이 들으라 일까요?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첫 일성이면서 선지서 17권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망해가는 이스라엘이 들어야 할 첫 번째 말씀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양육했다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두 개의 단어로 “키우고 높이 세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줘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열방 중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거역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파솨입니다. 파솨는 이탈하다, 변절하다, 배반하다, 반역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거역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양육하고 높여준 하나님을 반역했다는 것은 모든 선지서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두 번째 죄는 주인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은혜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가축도 주인이 누구이고 누가 자신의 밥그릇을 채워주는지 압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만도 못한 수순으로 떨어졌습니다. 시편 49:20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여러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세 번째 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4절>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허물진 백성’이라는 말은 ‘죄악을 짊어진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행악의 종자’라는 말은 ‘화가 나게 하는 씨’, ‘분노케 하는 씨’라는 뜻입니다.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는 말은 ‘파멸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만홀히 여기다’는 말은 조롱하다, 속임으로 비웃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화가 나게 하고 비웃으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배반, 무지, 떠남, 이 세 가지가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선지서 17권의 첫 번째 메시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선지자들의 첫 번째 메시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죄를 안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나는 은혜를 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 삶에는 감사와 기쁨이 항상 넘칠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하지 않지 않습니까? 오히려 원망 불평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비웃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알면서 죄를 지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알면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비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 3장 13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BC 420년경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300년 동안 선지자들이 동일하게 외친 메시지, 그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회개합시다. 무지를 회개합시다.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을 회개합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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