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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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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23:3
주일오전예배 | 2021-07-1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시편은 성도들의 시입니다. 시편은 단순히 사람의 감정, 이성, 환경에 따라 지어진 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의해 지어진 시입니다. 그렇다고 지은 사람의 감성이나 이성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실패, 아픔, 은혜, 구원, 감사, 찬양 등이 영감되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 구약의 성도들처럼 생활 속에서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시인입니다. 시편의 시인이 곧 나입니다. 다윗이 나고, 솔로몬이 나고, 고라의 후손이 나입니다. 제가 다윗의 시를 설교하면서 다윗이라고 하지 않고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그 시인처럼 되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시편 속에 있는 시인들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회복입니다. 시편은 회복의 노래입니다. 시편은 실패, 실의, 낙심, 잃어버림을 당한 시인들이 삶의 회복을 갈망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시편으로 기도하고 시편으로 찬송합시다. 시인들의 회복의 경험이 여러분들에게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시인들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커다란 영적 물줄기들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물줄기 중의 하나가 회복입니다. 창세기의 주제는 에덴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는 자유의 회복입니다. 레위기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민수기는 땅을 회복하기 위해 진군하는 여정입니다. 신명기는 말씀의 회복입니다. 여호수아는 땅의 회복입니다. 역사서는 회복한 땅에서의 실패입니다. 역사서는 회복의 실패입니다. 구약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하려다가 결국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회복에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서의 주제는 회복입니다. 구약 성경은 회복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에게는 그 회복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회복자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은 그 회복자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그 회복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회복자이십니다.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시다. 

이 시간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1. 소생  

양들이 넘어져 뒤로 벌러덩 뒤집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물들은 뒤로 뒤집히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뒤집혀도 혼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거북이도 혼자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은 절대로 혼자 일어나지 못합니다. 양은 혼자 일어나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일 것입니다. 넘어진 양은 반드시 누군가 일으켜주어야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양은 뒤집히면 일어나려고 버둥거립니다. 버둥거리면 위에 가스가 차고 이로 인해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습니다. 날씨가 선선하다면 양은 며칠을 살 수 있지만 햇볕이 내려쬐는 더운 날이라면 몇 시간이 못 돼서 죽을 것입니다. 뒤집힌 양은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뒤로 벌러덩 넘어지면 가만히 계세요. 발버둥 치면 가스가 차서 숨이 막힙니다. 목자가 해결해주실 때까지 답답해도 가만히 기다리세요. 내가 해결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일이 더 꼬여요. 더 숨이 막힙니다. 이럴 때는 답답해도 가만히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목자는 수시로 양의 수를 셉니다. 양이 모자라면 목자는 없어진 양을 찾아 들판을 뛰어다닙니다. 목자는 뒤집힌 양을 발견하면 달려가서 천천히 양을 옆으로 누입니다. 가스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다음 양을 천천히 일으켜 세웁니다. 양은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조금 지나면 정상적으로 걷습니다. 양이 죽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입니다. 네페쉬는 살아있는 실체’, ‘목숨’, ‘생명’, ‘영혼’, ‘생기’, ‘’, ‘자아’, ‘인격’, ‘정신’, ‘마음’, ‘감정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뜻이지만 마음 그 이상입니다. 감정이라는 뜻이지만 감정 그 이상입니다. 네페쉬는 살아있는 전존재를 가리킵니다. 네페쉬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 속에서는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쉴 새 없이 반복됩니다. 그 감정이 좋은 것이면 괜찮은데 나쁜 것일 때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좋았다가 갑자기 확 나빠집니다. 올라갔다가 갑자기 뚝 떨어집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사람의 속은 전쟁터입니다. 이 감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2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생령이라는 말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이라는 말이 네페쉬입니다. 영혼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감정은 하나님만이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근심, 걱정, 낙심이 여러분의 영혼을 짓누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입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속에서 감정이 롤러코스트를 탈 때 주님의 은혜를 구하세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소생시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되돌리다, 되찾다, 돌아가다, 회복시키다, 새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슈브는 <원상태로 되돌리다>는 의미입니다. 소생이라는 말은 거의 죽어 가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남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소생시킨다는 말은 죽어가는 시인을 살려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스가랴서를 읽다보면 매우 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는데 사탄이 오른쪽에서 대제사장을 참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탄을 꾸짖으시면서 대제사장을 가리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불에 타다만 나무를 어디에 쓸까요? 어렸을 때 아궁이에 불을 땐 적이 있습니다. 불을 땔 때 부지깽이를 사용합니다. 부지깽이를 오래 사용하면 한쪽 끝이 점점 타들어가 짧아져 나중에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때 저는 이 부지깽이를 아궁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부지깽이의 운명은 불타는 아궁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에 타다만 나무도 소생시키시는 본이십니다. 불에 타버린 쓸모없는 나를 쓰시는 분이십니다. 에스겔 37장에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있습니다. 그 뼈들을 군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해골도 소생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소생시킨다는 말에는 새롭게 하다 또는 고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영혼의 기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해골 같은 내 심령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소생시킨다는 말은 다윗이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왜 넘어졌을까요? 양들이 넘어지는 경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부드러운 장소를 찾아 눕고 싶어 하는 양의 습성 때문입니다(필립 켈러). 양들은 눕기에 편하고 부드러우며 움푹 들어간 둥근 장소를 좋아합니다. 산이나 들에는 양이 눕고 싶어 하는 푹 파인 곳이 많습니다. 이런 곳에서 양은 드러눕기 위해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움직일 것입니다. 이때 양은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져 발이 하늘로 향합니다. 양은 공포감으로 정신없이 발로 허공을 칩니다. 양은 계속 안간힘을 쓰지만 혼자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양들 중에는 꼭 눕기를 좋아하는 양이 있습니다. 이런 양들은 자주 넘어집니다. 크리스천도 양처럼 편안하고 부드러운 생활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생활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실 때도 있지만 환경이 별로 편안하지 못한 곳으로 인도할 때도 있습니다. 좋은 것이 나쁠 수 있고 나쁜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어느 대학의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열을 가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평평한 접시 위에 찬 물을 붓고 그 위에 개구리를 올려놓았습니다. 접시는 개구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뛰쳐나올 수 있을 만큼 평평하고 납작한 모양입니다. 그 접시 밑에 알코올램프를 켰습니다. 심지를 조절해서 서서히 가열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매초 섭씨 약 0.02도씩만 수온이 상승되도록 가열 장치를 조절해놓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약 한 시간 삼심 분 후 그 개구리는 접시 위에서 푹 삶아졌습니다. 개구리 곰탕이 된 것입니다. 만약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었다면 들어가자마자 개구리는 기겁을 해서 뛰쳐나왔을 것입니다(김남준 목사님). 우리는 개구리처럼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 연락에 너무 빠지지 마십시오. 편의주의에 너무 빠지지 마십시오. 마귀가 우리를 은은한 불에 개구리 곰탕으로 끓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마귀는 이 세상을 개구리 백숙으로 만들려고 살살 끓이고 있습니다. 

둘째, 털이 길게 자라거나 진흙과 똥과 가시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부스러기들로 무겁게 엉켜 있을 때 양은 몸의 무거운 체중 때문에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성경에 털 때문에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에서입니다. 에서라는 말은 털이 많은, 거친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에서는 털이 많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에서의 상징은 털입니다. 에서는 이름처럼 세상에서 털 자랑하면서 거친 삶을 살았습니다. 제사장이 지성소를 들어갈 때 절대로 털옷을 입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양털은 자아와 자랑과 개인적인 우선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내 삶에 자라나는 세상적인 털을 잘라버립시오. 그냥 두면 그것이 나를 묶어 죽게 할 것입니다. 세상 자랑을 잘라버리십시오. 서울에 살 때였습니다. 교회와 사택의 거리가 20m 정도입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교회입니다. 차를 쓸 일이 없었습니다. 제 차를 교회 뒤편에 세워놨습니다. 어느 날 지나가다가 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차 밑에서 쉬고 있어요. 나중에 보니 고양이가 몇 마리가 있어요. 고양이 서식지가 됐어요. 고양이 때문에 주변이 더러워졌어요. 오랜만에 차를 쓰려고 문을 여는데 열려 있어요. 도둑이 제 차를 턴 것입니다. 차에 동전이 꽤 있었는데 다 없어졌어요. 세상 더러움에 엉겨 있지 마십시오. 죄의 더러움을 방치 하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양은 털과 몸에 붙어 있는 똥과 진흙 때문에 넘어집니다.  

셋째, 양이 넘어지게 되는 주요 원인은 양이 너무 비대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비대한 양은 건강하지도 못하고 생산성도 약합니다. 체중이 무거울수록 발의 움직임이 느리고 둔합니다. 그래서 비대한 양일수록 잘 넘어집니다. 성도들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풍요로움이 신앙심의 표준은 아닙니다. 돈과 출세가 은혜의 표준이 아닙니다. 번성이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이 아닙니다. 호세아 4:7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심각한 책망을 받은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3:17) 그런데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일곱 교회 중에 가장 심각한 책망을 가장 부유했던 라오디게아 교회가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세의 교회들을 상징합니다. 우리 시대 교회의 표상이 계시록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입니다.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겨울철만 되면, 폭포 밑쪽에서 독수리 시체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하늘의 제왕이고, 날개의 길이만 1 미터가 넘는 독수리가 왜 죽어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봤습니다. 겨울철이 되면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 쪽 추운지방에서 죽은 양이 얼음에 묻혀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떠내려 온다고 합니다. 그때, 나이아가라 폭포 상공을 날고 있던 독수리는 얼음에 살짝 얼려진 양의 시체를 발견하고, 하강하여 그 얼음 안에 있는 양고기를 먹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으로 얼음을 움켜쥐고는 부리로 얼음을 깨서 그 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죽은 양 얼음덩어리는 계속 물살을 따라 폭포 쪽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걱정하지 않고 계속 고기를 뜯어 먹습니다. 얼음덩어리가 폭포 쪽으로 가까이 가면 독수리는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날지 못합니다. 얼음을 잡고 있던 날카로운 발톱이 얼음 속에 파묻혀 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독수리가 얼음을 발톱으로 잡으면 체온으로 얼음이 살짝 녹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얼어붙는 것입니다. 이때 독수리 발톱이 얼음에 파묻히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양고기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발톱이 얼음덩어리에 파묻혀 얼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폭포 끝에 다다른 독수리는 얼음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 양의 시체와 함께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겨울철에 폭포 밑쪽에서 독수리의 시체가 발견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적 침체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손으로 꼭 움켜쥔 것이 우리를 세상 속으로 끌고 갑니다. 그것을 빨리 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손에 잡고 있는 좋지 않은 것을 놓으십시오.

2. ()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소생, 회복. 치유하심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도하심입니다. 만약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그냥 방치해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틀림없이 우리는 다시 깊은 수렁으로 빠져 버릴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귀신이 나간 후에 그 사람의 마음의 집이 깨끗해졌습니다. 수리도 했습니다. 하지만 빈 집 상태로 있었습니다.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와 보니 집은 있는데 주인이 없어요. 그 귀신이 친구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그 빈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마음의 집이 이전 보다 더 난장판이 됐습니다. 마음의 집에는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신 다음 그냥 두시지 않고 당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길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곧다또는 기준(norm)’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곧은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쉬운 길, 보기 좋은 길, 재미있는 길, 즐거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곧은 길,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인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 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기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번영의 길, 출세의 길, 색다른 길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번영의 길이 아니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베두인 족들이 광야에서 양을 칩니다. 건기가 되면 광야가 다 말라버립니다. 그 마른 광야에 하얀 줄이 반듯하게 쳐져 있습니다. 이 줄은 양이 지나간 자국입니다. 양이 목자를 따라서 한 줄로 갑니다. 무리를 지어 가지 않습니다. 한 줄로 갑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이 지나가면 광야에 줄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곧은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의의 길은 똑바로 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똑바로 가라는 말입니다. 시편 11절에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똑바로 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똑바로 가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똑바로 간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똑바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똑바로 가는 길이 복된 길입니다. 똑바로 가는 길이 성공하는 길입니다. 똑바로 가세요. 

하나님은 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의를 지키시고 이루시기 위하여 목숨을 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간혹 불의를 보면 가슴에 불이 탑니다. 하지만 우리 보다 가슴에 더 불이 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가슴에 아무리 불이 탄다고 해도 의를 이루기 위해서 제 아들을 십자가에 달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의를 버리지 제 아들을 버리지 못합니다. 사람은 의로운 것 같으나 의보다는 이익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를 위해 아들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에는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의의 길은 사랑의 길, 희생의 길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의의 자국이 나도록 인도하신다>입니다. <의의 자국이 나도록> 하나님의 의의 자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몸에 있습니다.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있습니다.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자국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의 자국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의의 자국과 사랑의 자국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의 뒤돌아보세요. 죄악의 자국, 슬픔의 자국, 비탄의 자국, 원망의 자국이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요. 우리 삶을 보면 원망의 자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에 난 원망과 슬픔의 자국을 지우고 하나님의 의의 자국을 남기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십니다. 어떻게 내 삶에 하나님의 사랑의 자국을 남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의의 길을 따라가세요. 그 길을 따라갈 때 내 삶에 하나님의 사랑의 자국, 은혜의 자국이 새겨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과 같습니다. 양은 버릇이 고약한 동물입니다. 고집이 세고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중동에서 가장 나쁜 욕 중에 하나가 바로 양 같은 놈입니다. 이 말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돼지 같은 놈쯤 됩니다. 이사야 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정서로 본다면 돼지 같아서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자를 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양 같은 신자, 돼지 같은 신자입니다. 양 같은 인생, 돼지 같은 인생이 선택한 길이라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 16:25) 우리말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길이어도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뿐이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람 눈에는 바르게 보이는 길도 끝장에는 죽음에 이르는 수가 있다.” 내 삶의 방식, 내가 선택한 길,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죽음의 길, 사망의 길, 실패의 길, 불행의 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맡기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시편 23:3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로운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나를 의로운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3. 이름  

하나님이 그 길에 목숨을 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양들의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 그러면 성경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몇 번 나올까요? 제가 성경 검색 창에서 검색해 보니 6190번 나오더라고요. 여기에 여호와를 지칭하는 주라는 말까지 포함하면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흔할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오래 됐습니다. 저희 집에는 아직도 아버지 신분증이 있습니다. 원동기 면허증도 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시려고 따셨던 면허증입니다. 거기에 아버지 함자 석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이미 돌아가셔 고인이 되셨지만 아버지 이름을 그냥 읽지 않고 한 자씩 읽습니다.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 대신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왔습니다. 어머님 성함이 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김 자, 정 자, 예 자를 쓰십니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누구 씨라고 했을 것입니다. 세 글자 밖에 되지 않지만 자식은 부모님 이름을 함부로 읽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님 이름 앞에서 갖는 부담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존중심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라는 존재와 그 이름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 자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막 부른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아버지는 함자 혹은 성함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아버지 이름을 부를 때는 무슨 자, 무슨 자, 무슨 자하면서 존칭을 썼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이런 존칭도 없이 그냥 막 불러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감히 그 이름을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육신의 아버지 보다 못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너무 과한 생각하나요?  

군대 있을 때 일입니다. 저는 행정병이었습니다. 키폰을 사용했는데 부대 내에 있는 모든 전화기의 1번은 모두 연대장 직통 전화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왔습니다. 받으면서 보니 1번이었습니다. 중대장이 중대장실에서 뛰어나와 전화를 빼앗더니 <대위 박남훈입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연대장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차렷 자세로 예 예 하면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서 저를 혼내는 것이었어요. 연대장님 전화를 받는데 자세를 삐딱하게 했다고 하면서 뭐라고 하는 거예요. 군인 정신이 대단하죠.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목욕을 하고 와서 썼습니다. 글자 세 글자를 쓰기 위해 목욕을 했습니다. 쓰던 펜이 아니라 새 펜으로 바꾸어 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쓰다가 실수하면 그 페이지는 전부 다시 썼습니다.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갖고 있던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는데 저는 성경을 읽을 때 삐딱하게 앉아서 읽을 때가 있어요. 엎드려서 읽기도 해요. 종종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세요.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신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들판에 나무에 있습니까? 들판의 꽃에 있을까요? 아니면 저 하늘의 별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한다는 말은 자기 백성의 삶을 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손에 발에 우리들의 말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손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발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함부로 여깁니다. 식당에서 자기들끼리 말하면서 예수! 예수!”라고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도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면 안 됩니까? 예수님! 불자들은 부처라고 하지 않고 꼭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항상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 이름,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예수님, 주님이라고 해야 하기 않겠습니까? 또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우리가 가진 직분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절에서 스님이라고 하지 스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값싸게 부른다면 이 세상 누가 예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하나님의 명예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흔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름을 값싸게 만들고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사랑을 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거셨습니다. 우리 인생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요. 우리 인생을 되찾아주시기 위해서요. 우리도 우리 이름을 하나님을 위해 겁시다.  

공동번역성경은 시편 233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저는 이 말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 길이 참으로 행복한 길이요하나님의 의의 길로 갑시다. 이 길이 복되고 행복한 길입니다. 이 길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이 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합시다. 

<36: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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