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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내 잔이 넘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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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23:5
주일오전예배 | 2021-07-0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우리는 씻거나 샤워를 한 후에 몸에 스킨로션을 바릅니다. 스킨로션은 우리의 피부를 보호해줍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목욕을 한 후에 몸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아주 덥고 건조한 날씨에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몸을 지치고 피곤하게 합니다. 이때 몸에 기름을 발라주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원기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잔치 때에는 주인이 문 앞에 서서 손님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이것은 손님에 대한 정중함과 환대의 표시이었습니다. 기름을 발라주지 않는다는 것은 환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때로는 향유를 뿌리거나 발라주기도 했습니다. 향유는 몸에서 나는 땀 냄새를 제거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주었습니다. 아로마테라피(aromatherapy)라는 것이 있습니다. 식물에서 추출하는 방향 성분(정유)으로 심신의 건강이나 미용을 증진하는 기술입니다. 자연의 향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먼 곳에서 온 손님들에게 환대의 뜻으로 기름이나 향유를 발라주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대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 앉으시자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통째로 부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여인을 못마땅해 하며 수근 거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시몬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7:46) 시몬은 예수님을 위해 음식은 준비했지만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손님에 대한 예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솝 우화에 <여우와 황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가 황새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제공된 유일한 음식은 납작한 접시에 담긴 수프뿐이었습니다. 여우는 맛있게 먹었지만 부리가 긴 황새는 납작한 접시에 있는 음식을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황새에게 저녁 식사 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여우가 황새를 환영한 것입니까? 골탕을 먹인 것입니까?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문 앞에서 예수님을 아주 민망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마음은 어디까지가 진심일까요?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까?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까? 시몬의 태도가 아주 애매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까?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까? 안 다니는 것입니까? 주님 앞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십시오. 시몬의 태도는 매우 애매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값비싼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의 몸에 조금만 바른 것이 아니라 아예 부어버렸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극진하게 환대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도 기름이 나옵니다. 여기서 기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또 넘치는 잔이 나옵니다. 이 잔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함께 말씀을 살펴보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기름으로 다윗을 맞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조금만 바른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부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환대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만찬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기름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문 앞에 서서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아주 흠뻑 발라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정중하게 맞아들이셨습니다. 기름을 조금 발라주신 것이 아니라 아예 머리에 부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정중하게 맞으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환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팔을 벌려 다윗을 환영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시편 23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환대하시듯이 우리를 환대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저 문을 들어오실 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머리에 은혜의 기름을 부으신 줄 믿습니다. 조금만 부으신 것이 아니라 흠뻑 부어주신 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환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정중하게 은혜의 기름으로 맞이하셨습니다. 

성경 시대에 기름은 약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상처를 치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은 인생 광야에서 받은 숱한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심신이 지치고 상했습니다. 영혼이 매우 곤고했습니다. 살아 있는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기름을 바르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심신을 치유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기름으로 우리 영혼을 치료하십니다. 상한 마음이 있다면 주님 앞에 나오셔서 그 상처를 내보이십시오. 찬송 중에, 기도 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 주님께 마음의 아픔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여러분의 영혼에 부어질 것입니다. 그 성령의 기름이 여러분의 상한 영혼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은혜의 기름이 부어지기를 사모하십시오.  

양들은 광야를 지나갈 때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광야에는 사나운 맹수 이외에 생각지 않은 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조그마한 코파리입니다. 코파리들은 양의 축축한 코 점막에 알을 깝니다. 알을 까고 이삼일이면 알에서 조그맣고 가느다란 벌레 모양의 유충이 나옵니다. 유충은 콧구멍을 거쳐 양의 머릿속으로 뚫고 들어가기도 하고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살 속으로 들어간 유충은 심한 염증을 일으킵니다. 이 때 양은 아주 고통스러워합니다. 

양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들이 받습니다. 땅에 머리를 문지르고 머리를 흔들며 뒹굴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파리가 양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닐 때 어떤 양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정신을 잃습니다. 미친 듯이 뛰거나 내달리기도 하고 발을 구르며 괴이한 행동을 연발합니다. 풀을 뜯지도 않고 온 종일 숲 속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이 때 양들은 젖이 줄어들고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즉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파리 떼가 나타나면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기름을 발라 주면 양들의 행동에 즉각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분개와 광란과 자극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양들은 다시 조용하게 풀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누워서 안락하고 만족하게 쉬곤 합니다. 

여러분! 양과 사람이 아주 유사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파리가 꼬일 때가 있습니다. 잘 되는 일에 파리 한 마리가 초를 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파리는 신앙생활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나 말씀으로 영적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럴 때 영적 파리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를 날아다니며 윙윙 거려 신앙생활을 흩어놓으려고 합니다. 파리에게 당해보십시오. 사소한 일에 넘어져 보십시오. 왠지 모르는 비참함에 빠집니다. 수치심으로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마치 구제불능의 크리스천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자괴감이 빠집니다. 이것이 사탄의 파리 전략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름이 순간순간 필요합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양들 사이에 전염병도 퍼집니다. 바로 옴이라는 피부병입니다. 옴은 주로 양들의 머리에 기생합니다. 양들은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문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때 옴이 상대 양으로 전염됩니다. 목자는 양이 옴에 걸렸을 때 머리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기름은 양의 몸을 깨끗하게 소독해줍니다. 심한 경우에는 양을 세척 탱크에 집어넣습니다. 옴이 다 죽을 때까지 양을 푹 담가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전염병이 있습니다. 그 전염병은 우리 머리를 통해 들어옵니다. 눈으로 귀로 어떤 때는 손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접촉합니다. 텔레비전, 인터넷, 군중,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잘 못된 사상들이 우리 눈과 귀를 통해 우리 머리를 끊임없이 비벼댑니다. 얼마나 비벼대는지 어린이나 어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자녀, 부모, 남자, 여자, 기술인, 지식인 사회의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마치 기형적으로 급속하게 번져갑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쉽게 오염시킵니다. 오늘날 이 전염병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순수성을 잃게 합니다. 영적 피부병으로 오염된 신앙을 다시 순수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양들을 짝짓기를 합니다. 암양을 차지하기 위해 수양들은 싸움을 벌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 밀며 힘 대결을 합니다. 그러다가 머리로 상대방을 박습니다. 이 충격으로 양들은 불구가 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짝지기의 계절이 되면 목동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미끄러운 기름 때문에 서로의 머리가 빗나가 우스꽝스럽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싸울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며 싸웠습니다.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얼마나 교인들이 많이 싸우면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생겼을까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싸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납니다. 마귀가 얼마나 쾌재를 부르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교회에서 싸울 일이 있으면 피하세요. 손해를 보더라도 무조건 피하세요. 정의를 세운다고 싸우지 마십시오. 싸우는 게 정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싸움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성령의 기름입니다. 

다윗은 인생의 광야에서 속으로 밖으로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치명적인 상처도 입습니다. 어제 어떤 분하고 통화를 하는데 이놈의 일 계속 해야 되는 거냐?”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만나는 일을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생각지 못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자꾸 생깁니다. 마음은 지치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삶이 상처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분만 그런가요? 이것은 다윗만 그런가요?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상처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치료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요즘 많은 치료법이 있습니다. 미술치료, 음악치료, 문학치료, 무용치료, 돌고래치료, 운동치료 등등. 미술, 음악, 무용,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내면에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치료들이 완전할까요? 그 치료들은 틀림없이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내면치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내면 치료사들은 치료하는 과정에서 내담자를 하나님을 만나게 인도합니다. 왜요? 완전한 치료자는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야 온전해집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계속적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번 은혜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는 끊임없이 생각지 못한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사람은 계속 상처를 입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고백하세요. 하나님께 말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십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은혜는 우리를 완전히 치료하십니다.

 

2. 하나님의 이어지는 환대  

하나님의 은혜는 문 앞에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식탁으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식탁에 앉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대 중동에는 물이 부족했습니다. 지금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잔에 물을 부울 때는 넘치도록 붓지 않습니다. 물을 아꼈습니다. 만약 주인이 물을 넘치게 붓는다면 손님에 대한 지극한 환대의 표시입니다. 반대로 잔이 비었는데 주인이 다시 채워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윗의 잔을 채우고 계십니다. 한번 채우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채우십니다. 흘러넘치게 채우십니다. 

고대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장군에게 왕은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부어도 채울 수 있는 잔은 딱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왕은 잔이 넘쳐도 계속 부었습니다. 이것은 왕의 격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왕이 장수를 매우 환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왕은 술을 잔에 붓는 것이 아니라 몸에 붓는 것입니다. 장군은 두 손으로 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습니다. 술이 잔에 넘쳐 머리와 얼굴로 흐릅니다. 술이 팔과 목을 타고 몸으로 흐릅니다. 장군은 긴 전쟁으로 심신이 지쳐 있습니다.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술이 잔을 넘어 손을 타고 온 몸에 흐를 때에 장군의 마음도 녹아버립니다. 상처가 영광이 되는 순간입니다. 전쟁 중에 당한 수 없이 많은 아픔이 회복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운 사람입니다.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개인의 욕심과 정욕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영적인 싸움을 싸우세요. 다윗이 영적 전쟁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잔을 높이 치켜들고 섰습니다. 주님께서 다윗이 들고 있는 잔 위에 기름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 기름이 다윗의 온 몸과 마음을 적셨습니다. 다윗의 온 영혼에 하나님의 기름이 흐르고 있습니다. 상한 몸과 마음이 그 기름으로 녹아버렸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동안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의 잔을 다윗처럼 높이 드십시오. 그냥 계시지 마십시오. 잔을 높이 아주 높이 드십시오. 주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여러분의 잔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 잔이 흘러넘칠 때 여러분의 상한 마음이 치료될 것입니다.

 

3. 영혼이란 잔  

우리는 여러 종류의 삶의 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라는 잔이 있습니다. <남편, 아내>라는 잔이 있습니다. <자식>이라는 잔이 있습니다. <친구>라는 잔이 있습니다. <물질>이라는 잔, <학벌>이라는 잔, <성공>이라는 잔이 있습니다. <명예>라는 잔, <생활>이라는 잔, <직장>이라는 잔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수 없이 많은 서로 다른 삶의 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득 채우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그 잔들이 채워지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잔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잔을 채우기를 소망하는데 그 잔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쪽의 잔이 찬 것 같으면 저쪽의 잔이 비어 있습니다. 저쪽이 찬 것 같으면 이쪽이 빕니다. 다 찬 준 알았는데 하나가 비어 있습니다. 안간힘을 써서 그 하나를 채웠는데 어느새 다른 것이 비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우리들의 삶의 빈잔,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인생의 빈잔, 그래서 인생은 끊임없이 목이 마릅니다. 

결코 이 모든 잔을 누구도 다 채울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잔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이 잔 때문에 콤플렉스에 시달립니다. 이 삶의 잔 때문에 초라해 집니다. 기를 펴지 못합니다. 저도 때로 이 삶의 잔에 대한 욕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 그까지 것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까짓 삶의 잔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이렇게 괴롭힐까요? 그것은 도대체 채울 수 없는 것인가요? , 채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삶의 잔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이 잔은 원래부터 채워지지 않는 잔입니다. 이 잔은 밑이 빠진 독과 같습니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삶의 잔을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헛수고입니다. 이 잔은 차지 않는 잔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잔이 찼다고 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말은 내 잔이 포화상태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고백에 조금 더 붙이면 이런 뜻입니다. “주님!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잔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만 주셔도 족합니다.” 다윗의 잔은 욕심의 잔이 아닙니다. 삶의 잔이 아닙니다. 정욕의 잔이 아닙니다. 다윗의 잔은 영혼의 잔입니다. 지금 다윗은 내가 왕이기 때문에 내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창고에 금은보화를 많이 쌓아 놓아서 내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가 강대한 나라가 돼서 내 잔이 넘칩니다. 내가 주변 나라들을 다 굴복시켜서 내 잔이 넘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내가 많았습니다. “나는 지금 아내를 많이 두어서 내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모든 잔을 다 채워주셔서 내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잔을 하나님 앞에 높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이란 잔에 은혜의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영혼의 잔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이 영혼의 잔을 높이 드세요. 그러면 그 잔이 하나님의 은혜로 흘러넘칠 것입니다. 넘치는 은혜는 여러분의 손을 타고 삶의 잔으로 흘러내릴 것입니다. 이 영혼이란 잔이 흘러넘칠 때 삶의 잔이 비어 있어도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수지 둑 아래에는 많은 밭들과 논들이 있습니다. 저수지 둑 아래에 있는 밭과 논은 저수지에서 물을 공급받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차 있으면 논에 조금 물이 부족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저수지에서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수많은 잔들이 있습니다. 이 잔은 우리가 경작하는 밭과 같습니다. 그 밭에는 콩도 있고 팥도 있고 옥수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잔에 물을 대주는 것은 영혼이란 잔입니다. 우리 영혼이란 저수지에 항상 물이 충만하면 나의 밭에 물이 부족해도 염려가 없습니다. 영혼의 잔에서 흘러넘친 생명수가 어떤 불만족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만족하게 할 것입니다. 영혼의 저수지에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세요. 삶의 빈 잔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삶의 잔은 채울 수 없는 잔입니다. 영혼의 잔이 차고 넘칠 때 우리는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정연희 권사님의 실화소설인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거제도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발을 씻기고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청년 맹의순 씨의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맹의순 씨는 조선신학교를 다니며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패잔병으로 오인 받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까요? 맹의순 전도사님은 기가 막힌 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사랑의 전파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늘 찬송을 부르고 시편23편을 외우면서 중공군 포로 부상자들의 병간호를 위해 밤낮없이 봉사하고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불행히도 이 때문에 과로로 쓰러지고 석방을 하루 앞두고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당시 중공군 포로들은 맹의순 씨의 모습을 통해 참된 천사를 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중공군 포로 환자가 맹의순 씨의 죽음을 추도하며 쓴 글의 일부입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오늘밤, 귀 교회에서 우리의 위로자였고 사랑과 존경의 표적이었던 맹선생의 추도 예배를 드린다기에 우리 모든 사람의 뜻을 모아 서둘러서 이 글월을 드립니다... 선생은 새벽 한 시, 두 시면 늘 병동에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도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시달리는 그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스리는 천사로 우리들 앞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하늘에서 보낸 천사였습니다... 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 주셨습니다. 다 봉독하신 뒤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는 다 그의 얼굴을 보며 그 말씀을 따라 외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중공군 포로들은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눈이 빠지고 여기저기가 찢겨나가 반신불수이었습니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순간순간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 시작한 전쟁으로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웠고 이억 만 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전쟁으로 가족, 친구, 전 인생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찬송이 나았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맹의순 선생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그 포로수용소로 보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들은 이 고백을 잘 먹고 잘 살 때 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고통 속에서 했습니다. 최고의 고통 속에서 그들에게 이 고백을 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은혜로 포로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맹의순은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맹의순은 부유하고 편안할 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포로수용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때 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가 맹의순 씨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갇힌 분노, 환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수고 등 그에게는 별로 감사할 제목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이런 생명의 복음을 주시고 전파하는 사명을 맡기셨다는 감사, 자신의 손으로 이방 땅에 온 지치고 병든 나그네들을 돌보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게 하셨다는 감사에서 나왔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모함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 스데반이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을 때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누가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은 초대교회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정도로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이 박해 중에도 천사와 같았습니다. 그러면 고통 중에 스데반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와 같았을까요? 스데반의 인품이 훌륭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기름부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우리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교회도 개인도 사회도 좋지 않습니다. 사회가 어렵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잔이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2021년 맥추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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