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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이스라엘의 날씨는 우기와 건기, 둘로 나누어집니다. 11월부터 3월까지는 우기이고, 4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입니다. 우기에는 비가 많이 오지만 건기에는 비가 전혀 오지 않습니다. 6-7개월 동안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기 때문에 이 기간에 유대 광야는 갈색으로 변해버립니다. 하지만 11월에 비가 오기 시작해 2월이 되면 이스라엘의 들판은 푸른 풀밭이 됩니다. 예쁜 들꽃도 핍니다. 2월부터 4월 중에 양들은 집 근처 어디서든지 풀을 뜯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나운 맹수가 없기 때문에 양들은 마음껏 먹고 뛰며 쉴 수 있습니다. 하지만 5월이 되면 풀을 뜯기 어려워집니다. 건기의 끝으로 갈수록 뜯을 풀이 거의 없어 양들에게는 보릿고개와 같습니다. 이때 양들의 생사는 순전히 목자에게 달렸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달렸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그냥 착하기만 한 목자가 아닙니다. 건기 때 양들의 목숨을 살리는 목자입니다. 죽어가는 양들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목자입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광야는 샘물과 푸른 초장을 숨기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그것을 찾아내는 목자입니다. 영적 건기 때 그 샘물과 그 푸른 초장으로 양들을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막에 감춰진 그 샘물이고 주님이 광야의 푸른 초장이십니다. 우리 인생 광야가 아름다운 것은 그 광야 속에 샘물이신 주님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샘물을 꼭 발견하세요.
건기가 시작되면 목자들은 양들을 이끌고 푸른 풀밭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건기 중에도 풀이 마르지 않는 곳은 유대 광야 북쪽의 산간 지대입니다. 이곳을 가려면 협곡을 지나가야 합니다. 협곡에는 동굴이 있고 이곳에는 맹수들이 숨어 있습니다. 다윗이 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을 지날 때 맹수들이 어디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양들은 물론 목자는 극도로 긴장합니다. 목자가 여행 중에 지팡이와 막대기 그리고 물맷돌을 소지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실제로 이곳을 지날 때 목동들은 맹수들에게 양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협곡에 빠져 죽는 양도 있습니다. 상하고 찢기고 죽는 곳이 이곳입니다. 하지만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완전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안전합니다.
협곡을 지나 산비탈이나 고원에 도착하면 푸른 풀밭이 펼쳐집니다. 양들은 거기서 마음껏 뛰고 먹고 쉽니다. 숲에는 맹수들이 숨어서 양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자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양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사방에서 맹수들이 노려보고 있지만 양들은 들판 한 가운데서 목자의 보호를 받으며 마음껏 풀을 뜯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푸르고 넓은 들판이 있습니다. 그 풀밭에서 양들이 떼를 지어 여기저기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숲에는 배고픈 맹수들이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맹수들은 노려볼 뿐 양들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입맛만 다실뿐입니다. 반면에 양들은 맹수들이 보는데서 풀을 마음껏 뜯으며 여행 중에 지친 몸을 쉬게 합니다. 양들은 원수들 앞에서 풀밭에 누워 쉬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긴 상처들을 회복합니다.
시인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상’은 바로 목자가 양을 위해 준비해놓은 저 높은 고원의 푸른 풀밭입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시를 쓰면서 자신이 목동이었을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신이 치던 양에,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이 차려주신 영혼의 밥상을 양들이 마음껏 뜯을 수 있는 푸른 풀밭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셨다고 했습니다. “목전에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얼굴 앞에서”, “얼굴 맞은편에”, “얼굴 앞에 있는 것”(히, 네게드)이라는 뜻입니다. 시인과 원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습니다. 원수는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원수가 바로 맞은편에서 다윗을 노려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시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셔서 그것을 먹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수 앞에서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시면 맛있게 드세요. 그것이 영적인 밥상이든 육적인 밥상이든 잘 드세요.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혹독한 시련으로 먹지 못해 홀쭉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싸움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수가 보고 있든 말든 개의치 않으시고 시인을 먹이십니다. 주님은 영적 건기 때 상처입고 메말라버린 우리 영혼을 은혜의 밥상으로 소생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으로 말라버린 우리 심령을 살찌우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영혼의 만나도 드시고 육신의 만나도 드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영육간에 강건해야 합니다. 싸움은 천국 가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원수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차라르입니다. 차라르는 ‘묶다, 고통을 주다, 괴롭히다, 짜증나게 하다, 쉴 새 없이 공격하다’라는 뜻입니다. 원수는 계속 괴롭힐 것입니다. 이 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수입니다. 마귀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절대로 천사가 되지 않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산에 오르다가 노인은 뱀을 만났습니다. 뱀이 노인에게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저는 한 번도 정상에 올라가 본 적이 없어요.”라고 청했습니다. 노인은 말했습니다. “안 돼, 너는 나를 물 거야.” “절대 물지 않겠습니다.” 뱀은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뱀을 자기 셔츠 안에 넣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노인은 주변을 보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꿈 가운데 하나를 성취했습니다. 그때 뱀이 노인을 물었고 독이 노인의 몸 안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이 소리쳤습니다. “나를 물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뱀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집어들 때 내가 뭔지 알고 있었습니다.” 뱀은 반드시 뭅니다. 뱀을 집어들지 마십시오. 여러분! 술이 여러분을 뭅니다. 술이 결코 생수로 변하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보면 술 광고 포스터가 눈에 띕니다. 술 광고 포스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델이 젊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부 흰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술이 정말 깨끗할까요? 예쁘게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원수를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원수는 계속 괴롭힐 것입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처음 읽을 때 상이 학교에서 잘한 사람에게 주는 상장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잘 한 사람에게 원수가 보는 앞에서 상장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상은 상장이 아니라 밥상이었습니다. 상이 히브리어로 슐한입니다. 슐한은 밥상이라는 뜻입니다. 이 밥상에는 몇 가지 반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음식들이 보기 좋게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차려주시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랔인데 이것은 ‘나열하다, 배열하다, 길게 늘어놓다, 질서대로 놓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인가를 질서 있고 길게 나열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상을 차려주신다는 말은 반찬 몇 가지 정도의 간단한 식탁을 차려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매우 긴 식탁에 여러 가지 음식을 질서 있고 길게 많이 배열해 차려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큰 잔치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들이 보는 가운데 나를 위해 잔치를 베푸시고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는구나.” 하나님은 원수가 보는 앞에서 다윗을 위해 잔치를 배설하시고 아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고 계십니다. 세상 원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밥상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상을 차려주시고’(아라크)라는 말에서 하나님이 시인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귀빈으로 대우하셨습니다.
여기서 밥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상징물입니다. 그렇다고 육의 식탁, 육의 양식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 어떤 분이 제게 떡을 주셔서 아내에게 주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맛있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모두 사람이 마련해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맨 끝에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밥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혜 중에 하나입니다. 긴 밥상에 여러 다양한 반찬이 진설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하게 우리에게 내려집니다. 시인이 말한 밥상은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밥상에 차려진 여러 가지 반찬 보다 더 다양합니다. 다윗은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밥상에 비유했을까요?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저녁 시간에 간혹 이웃 아저씨들이 저의 아버님을 찾아오시곤 했습니다. 아버님을 찾는 손님은 친밀도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집니다. 먼저 아버님과 마당에서 몇 마디하고 가시는 분입니다. 이런 손님이 오면 손님이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아버님이 밖으로 나가셔서 마당에 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시다가 그냥 가십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님이 문을 열어주시는 손님입니다. 이 손님은 아버님과 가까운 사람입니다. 손님은 문에 걸터앉아서 식사를 하시는 아버님과 이런 저런 말씀을 주고받습니다. 대화 중에 아버님은 밥 먹자고 권하시지만 이 말은 인사입니다. 그 분도 들어오지 않고 아버님도 강권하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는 아버님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손님입니다.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저녁 먹자고 하는 손님입니다. 어머님은 밥을 한 사발 수북하게 퍼서 오십니다. 사발에 담긴 밥보다 위로 나온 밥이 더 많습니다. 손님에 대한 아버님과 어머님의 환대입니다. 두 분은 밥을 드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손님은 식사하시면서 속상한 일들을 털어놓습니다. 서로 들어주고 달래주면서 상한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식탁의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대하십니다. 마당에 서 있게 하지 않으십니다. 문턱에 앉아 있게 하지 않으십니다.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밥을 퍼주십니다.
저는 가끔 아내에게 교회에 누가 올 건데 밥 좀 해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누구예요?”라고 묻습니다. 제가 오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하면 반응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냥 사 먹으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밥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망설이는 단계입니다. 밥을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안 해도 될 것 같은 애매한 사이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밥을 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집으로 오라고도 합니다. 아내가 집에 기꺼이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고가면서 가볍게 인사만 하는 사이가 있습니다. 서서 이야기 하는 사이가 있습니다. 차 한 잔 하는 사이가 있습니다. 함께 밥 먹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도 왔다가 갔다 하는 사이가 있습니다. 시인과 하나님은 함께 밥을 먹는 사이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당신의 집에 시인을 초대해서 직접 밥을 차려주시는 사이입니다. 서서 이야기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잠깐 차 한 잔 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집에 함께 들어가서 함께 밥을 먹는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귀빈입니다. 하나님과 애매한 사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방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문 앞에 서성이지 마세요. 하나님의 집에 당당히 들어오세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밥을 먹는 사이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밥상을 차려주시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막입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떡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떡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식탁 교제의 장소입니다. 떡상에는 1년 365일 항상 떡이 12개가 두 줄로 진설되어 있습니다. 진설해 놓았다고 해서 진설병이라고 합니다. 이 떡은 제사장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안식일 아침에 새 것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떡은 하나에 4.4L의 곡식가루가 사용되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지름이 45cm나 되는 아주 큰 떡입니다. 왕떡입니다. 또 대접, 숟가락, 병, 붓는 잔이 있습니다. 이 모든 기구는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금으로 된 식탁을 배설하셨습니다. 이 식탁은 왕의 식탁입니다. 물론 거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밥을 먹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상징입니다. 내가 너희를 나의 집과 나의 식탁에 초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12개의 떡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이 시대의 하나님의 떡상은 예배입니다. 예배 중에 선포되는 말씀이 우리 영혼이 먹어야 할 생명의 떡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진설병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광야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밥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자녀를 초대하신 광야의 밥상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밥상입니다. 예배는 왕의 식탁입니다. 기독교는 밥상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밥 먹는 곳입니다. 교회는 식당입니다. 마귀가 이 예배를 얼마나 시기했으면 성도들을 교회 못 가게 하겠습니까? 왕의 식탁에 나오시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요즘 코로나로 어렵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시면서 차도 드시고 라면도 드세요. 코로나로 밥을 하기 어렵지만 간단한 간식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오시면 영의 양식도 드시고 육의 양식도 드세요. 식사는 단순히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매개로 한 교제의 자리입니다. 좋은 것을 서로 양보하는 섬김과 사랑의 자리, 신앙의 인격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팀 체스터의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누가복음에 여섯 번의 예수님의 식사에 관한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식사를 중심으로 진리를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러 가시는 중에, 식사를 하시는 중에,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팀 체스터에 의하면 식사가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매개체가 됐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드셨든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7:34)라고 했습니다. 팀 체스터는 “밥상은 은혜가 구현되는 자리다. 밥상은 공동체가 구현되는 자리다. 밥상은 소망이 구현되는 자리다. 밥상은 선교가 구현되는 자리다. 밥상은 구원이 구현되는 자리다. 밥상은 약속이 구현되는 자리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밥상은 하나님의 치료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자리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밥상 앞에서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낙심한 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길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약 성경을 풀어주시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참을 걸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신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먹었다는 말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떼어주셨으니 먹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밥을 받아먹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음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음식을 단순히 육적인 것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음식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을 나눌 때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밥을 먹을 때 신앙이 회복됐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신앙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식사입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와 다른 제자들에게 이를 증언했습니다. 예수님과 식사 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밥이 사람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통해 제자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러한 예는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 • 마가 • 누가 • 요한복음, 4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에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너희로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의 결론이면서 마태 • 마가 • 누가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4복음서의 예수님의 행적은 이것으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행적은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으로 복음서는 완결됐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복음서의 결론을 이렇게 내려놓고 갑자기 21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21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도대체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기에 결론을 다 내려놓은 다음에 다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입니다. 4복음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적이 제자들과의 식사로 마쳐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3년을 배웠지만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고 도망갔으며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안 돼.’ 제자들은 자책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났지만 만날수록 죄책감이 깊어 갔습니다. 실의에 빠진 제자들은 어느 날 갈릴리 바다로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지친 새벽에 해변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야!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이 해변에 올라보니 예수님께서 숯불 펴놓으시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생선구이 냄새가 밤새도록 지친 제자들의 코를 자극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나누며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것이 단절됐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시기는 하셨지만 함께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이신 후에 제자들에게서 떠나 어디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이대로 예수님과의 관계가 끝나는 건가?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우리 아침 같이 먹자!” 그러시더니 예수님께서 친히 밥을 떠주시고 반찬도 떼어주시는 거예요. 그 음식에 제자들의 상하고 지친 마음이 녹아버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회복을 알리는 식사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면 내 양을 쳐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와 함께 한 모든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로서의 사명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하는 일이 식사자리였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사도 요한은 이때의 식사가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복음서의 결론을 내려놓고 별책부록으로 이 해변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 만찬을 첨가했을까요? 요한은 이 식사가 얼마나 좋았으면 이것으로 복음서의 결론을 다시 내리고 있을까요? 이 식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으면 어떤 영국의 설교자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차린 밥상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해변의 식사를 회복의 만찬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생텍쥐베리의 말처럼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 예수님의 레스토랑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 세상 광야 고원 어디쯤 여러분을 위한 예수님의 레스토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밥상에서 여러분이 먹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공개된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세상 사막에 숨겨진 오아시스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들의 푸른 초장이십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수의 면전에서 우리에게 차려주신 밥상입니다.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살과 피로 밥상을 차리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아들의 살과 피로 만든 밥상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귀하고 큰 밥상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밥상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밥상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버리지 마십시오. 반드시 드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여름 목장에서 그것을 마음껏 드시고 영혼이 살찌기를 소원합니다. 시편 23편 5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당신은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려주셔서 나를 살찌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셔서 포화상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양식으로 영혼이 살찌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에 제가 종종 가던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인은 식당 근처에서 오리와 닭을 직접 키웠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날 팔 닭과 오리를 잡습니다. 아주 신선한 오리와 닭을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는 아주 큰 게 나오고 어느 때는 아주 작은 게 나와요. 조금 차이가 나는 때도 있지만 두 배 정도 차이가 날 때도 있어요. 손님으로서 큰 게 나올 때는 좋은데 작은 게 나올 때는 그리 유쾌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오리와 닭이 올 때마다 크기가 다릅니까? 그랬더니 주인이 동절기에는 오리와 닭이 거의 자라지 않고 하절기에는 아주 잘 자란다는 거예요. 봄과 가을에는 조금 자란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절에 따라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거예요. 식물만 여름에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축도 여름에 잘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자께서 저 높은 고원에 여름 목장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왕의 밥을 마음껏 드시고 영혼을 살찌우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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