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 ok!
등대교회 홈페이지입니다.

Sermon

내버려두시는 주님의 기이한 사랑

조회수 : 660회

본문 : 요한복음 11:11~16
주일오전예배 | 2021-06-2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로 씻기며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베다니를 지날 때마다 대문을 활짝 열고 쉴 수 있는 방을 제공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훌륭한 가족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가족에게도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입니다. 이 병은 약이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위험을 무릎 쓰고 유대로 올 것을 기대하고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답신이 도착한 이후에도 오빠의 병은 낫지 않았고 주님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씀에 조금 소망을 얻었지만 고통은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오빠를 간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 예수님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래요. 답신이 왔으니 금방 예수님이 오실 거예요. 늦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꼭 오실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혹시 오빠가 죽는다 해도 잠시 동안일 거예요. 주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잖아요. 오빠는 다시 살아날 거예요. 우리는 주님께서 오빠를 살리셨다는 사랑의 증거를 가지고 오래 동안 행복하게 살 거예요.” 나사로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까?”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그럼요. 예수님이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오빠가 잘 알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때 갑자기 오빠의 손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죽은 오빠의 시신 곁에서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오빠의 몸이 썩기 시작했고 냄새가 너무 나 더 기다릴 수가 없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분은 왜 오시지 않은 것일까요?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사실일까요? 그 분은 지금 어디 계신 건가요? 요단 강 건너편에서 지체하고 계십니다. 왜 주님은 그들이 비통한 눈물을 흘리도록 그냥 두셨을까요? 왜 주님은 그때 그 자리에 오시지 않았을까요? 그때 주님을 왜 우리를 돕지 않으셨을까요? 주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정말로 기이합니다. 때로 그 기이한 사랑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주님의 사랑은 놀라운 것입니다.

 

1.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 나사로의 부활 스토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아주 급한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쪽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틀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이라고 하셨습니다. 잠은 내일을 위해서 자는 것입니다. 오늘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자는 것입니다. 계속 누워있기 위해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이라고 하신 이유는 나사로가 다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잠에서 일으키실 분은 예수님입니다. 주님 안에서 잠자는 사람은 나이 때문이든지 사고 때문이든지 병 때문이든지 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깨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다시 깨워주실 분들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도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잠의 목적은 새 날, 새 일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위해 새 일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의 새 일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잠이라도 주님과 함께 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잠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항상 주 안에 계십시오. 절대로 주님 밖에 계시지 마십시오. 주님 밖에서 죽는 것은 영원히 소망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에 아주 둔했습니다. 나사로가 잔다는 예수님의 말에 제자들은 정말 나사로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12-13>
  •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 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시지 않고 잔다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6:39)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죽은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달리다굼하시며 죽은 아이를 잠에서 깨우듯이 살리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든 과정을 듣고 보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요단강 건너편에 계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잠을 자고 있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유대로 직접 가실 필요가 있을까요? 자는 사람은 모기나 파리도 깨울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자고 있다면 마리아, 마르다, 친구들, 동네 사람들이 얼마든지 깨울 수 있습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죽음을 무릎 쓰고 유대로 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행동에서 제자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는 일에 왜 이렇게 둔했을까요? 그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항상 둔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로 가지 말자는 말입니다. 주여 잠 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라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자고 있다면 일어날 텐데 굳이 선생님께서 자는 사람을 깨우러 위협을 무릎 쓰고 유대까지 가실 필요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도 가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거듭해서 예수님께 유대로 가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실제로는 더 많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유대인들의 힘이 닿지 않는 요단강 건너편에 계속 있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하자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단강 건너편에서 안주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요단강 건너편에 머물러 있으면 될까요? 한두 달 혹은 일이 년 거기에 있으면 유대인들의 위협이 없어질까요? 그 이후에는 안전해질까요? 그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이 위협하면 영원히 유대 땅으로 가지 말아야 할까요? 유대로 가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사역을 마무리 하고 계십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안전을 위해 만류한 행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한 일이 하나님의 큰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유대로 가셔야 합니다.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예수님은 무조건 유대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역경지수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역경지수(AQ)Adversity Quotient의 약자입니다. 이 말은 1997년 하버드대 교수인 폴 스톨츠(Paul G. Stoltz)라는 사람이 위기대처능력 AQ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폴은 앞으로의 시대는 지능 지수(IQ)나 감성 지능(EQ)보다 역경 지수가 높은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경지수는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회복탄력성지수> 또는 <고무공지수>라고도 합니다. 폴은 역경을 맞이했을 때 인간의 대처 방식을 등산가에 비유해 3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퀴터(quitter, 포기하는 자)입니다. 퀴터는 산에 오르다 힘이 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삶에서 문제나 역경을 만나면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포기입니다. 퀴터는 역경지수가 가장 낮은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캠퍼(camper, 안주하는 자)입니다. 캠퍼는 인생에 장애물을 만나면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도망가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현실 안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60-70%). 셋째는 클라이머(climber)입니다. 클라이머는 장애를 만나도 끝까지 기어올라 정상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역경에 당당히 맞서 온 힘을 다해 헤쳐 나가는 사람입니다. 클라이머의 주요한 특징은 자신만 역경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함께 정복하는 것입니다. 역경지수가 가장 놓은 사람들입니다. 폴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버린 노정일지라도 등반가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름 아닌 강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위기대처능력 AQ, 36)라고 했습니다. 겨울이 오지 않으면 봄도 오지 않습니다. 인생 겨울을 이겨내는 힘을 역경지수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퀴터? 캠퍼? 아니면 클라이머? 여러분은 클라이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캠퍼였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에 안주해있고 싶었습니다. 퀴터도 있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클라이머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깨우러 간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유대에 있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 나는 그를 살리러 간다. 유대인들이 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다. 그래도 나는 간다. 나는 계속 여기에 안주해 있을 수 없다. 너희들도 여기에 안주해 있지 말고 함께 가자.” 주님의 역경지수는 100점 만점에 100점입니다. 우리 주님을 막을 수 있는 역경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처럼 클라이머가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캠퍼가 되면 안 됩니다. 퀴터도 되면 안 됩니다. 잠언 24:16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믿음으로 기어오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산이 가로막는다 해도
  • 물러서지 않고
  • 계속 싸우리.
  • 기어오르리.
  • 길을 찾아내리.
  • 터널을 뚫으리.
  • 그렇게 못하면
  • 그곳에 앉은 채로
  • 산을 황금의 광산으로
  • 변하게 하리.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인의 신조>중에서

 

2. 내가 기뻐하노니  

예수님은 제자들이 상황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자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주 의아하기도 하고 유감스럽기도 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나사로가 죽을 때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 때문에 내가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 <14-15>
  •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시니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다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주님께서 잘 못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요? 단어를 잘 못 선택하신 것이 아닐까요? ‘기뻐하노니가 아니라 슬퍼하노니라고 말씀하셔야 맞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제자들이 아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신 친구 나사로가 지금 이 시간에도 썩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냉동시설이 없던 때입니다. 마르다의 집에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뻐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주님은 신자의 슬픔을 기뻐하시나요? 이상한 일입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는 주님을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주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해할 수 없어도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한 결과 때문입니다. 주님은 슬픔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으로 인한 결과를 내다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잠시 동안의 시련이 그 제자들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할 것을 아셨으며 또한 당신께서 그들의 신앙적 성숙을 크게 중히 여기시므로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비통한 일마저도 기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했다는 말은 내가 거기서 나사로가 중병으로 죽어갈 때 도와주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재난을 막아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나사로를 그냥 죽게 두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일부러 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일부러 도와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늦게 가려고 일부러 이틀이나 지체했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은 것은 너희가 나를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주지 않은 하나님의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버려두는 사랑, 도와주지 않은 사랑, 정말 주님의 사랑은 기이합니다. 하지만 놀랍습니다. 시련이 은혜입니다. 시련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가 시련을 당하도록 야속하게도 그대로 버려두십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께 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느냐고 왜 우리를 버려두시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시지 않는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 다 응답해주신다면 그것은 어쩌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기 전날 밤 밤이 새도록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때 그 침묵이 응답이었습니다. 그 침묵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주시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사야 55:8-9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이를 망치고자 한다면 고생을 모르게 하십시오. 어릴 때는 팔에 안고 다니고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귀여워하며 성인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아이를 돌보듯 보살피십시오. 그러면 영락없이 아이는 큰 바보가 될 것입니다. 만일 아이를 세상에서 무용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그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마십시오. 힘이 드는 일을 하게 하지 마십시오. 아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얘야, 이렇게 힘든 일은 다시는 하지 마라.”고 말하십시오.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고 행여 실망하지 않도록 보호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아이가 건달이 되어 여러분들을 비탄에 빠지도록 확실하게 가르쳐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할 일을 하게하고 곤경에 부딪히게 하며 의도적으로 위험 가운데 던져둔다면 그는 시련을 참아내는 인간다운 인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혜 없고 어리석은 부모가 아니라 가장 지혜로운 부모이십니다. 

시련은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시련 중에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 때문에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자라게 할 것입니다. 시련을 받지 않은 믿음이 참 믿음일 수 있지만 그것은 연약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북극 빙하 속에서도 풀이 자란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런데 빙하 속에서 자란 화초가 사람이 보기에 가장 좋은 파란색을 띤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 북극의 하늘 위에 떠있는 별이 가장 밝게 빛을 냅니다. 이상하죠? 왜 북극 끝에 떠 있는 별이 가장 밝을까요? 사람을 가장 시원하게 하는 물은 사막 속에서 솟아나는 물입니다. 제가 지난 4월에 화분에 오이씨를 심어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었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예쁜 새싹이 나왔습니다. 계속 돌봐주었더니 제법 자랐습니다. 저는 모종을 5월 중순 경에 옥상 화단에 옮겨 심었습니다. 다음날 낮에 가보았더니 오이 싹이 햇볕에 말라 땅 바닥에 붙어 있었습니다. 실내 식물은 외부에 옮겨심기 전에 외부 환경에 적응을 먼저 시켜야 합니다. 시련을 겪지 않은 믿음은 그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난장이와 같이 되기 쉬운 법입니다. 온실 안에서만 산 사람에게는 비바람을 견디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은 역경 속에서 승리할 때 가장 귀한 것입니다. 조그만 연못에서 거대한 믿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큰 믿음은 바람과 파도가 있는 대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나는 내 자신을 멸망으로 안내하는 인도자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어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미련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이 없는 멸망길이 아닌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지금은 고난당하지만 그 고난으로 인하여 축복받게 될 것을 미리 보시고 기뻐하신 것을 보셨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16:20)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16:22) 너희가 근심하나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지금의 근심, 시련이 나중에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3.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러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위험하니 유대로 가지 말자고 합니다. 그때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성경에 도마가 처음 나오는 곳입니다.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이고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둘 다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그가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이름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그의 이름이 왜 쌍둥이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주님은 유대로 가자고 하시고 제자들은 유대로 가지 말자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은 유대로 가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 도마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입니다. 이 말은 유다의 용기에서 나온 것일까요? 아니면 비관주의에서 나온 것일까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유대로 가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하려는 제자들이 다시 유대로 갈 수 있도록 독려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용기와 결단력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려고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주님과 떨어져서 요단 동편에 남아있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라 요단 서편으로 가서 죽기를 각오했던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제자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사건의 한 부분만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두운 면만을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유대로 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거기서 더 유하셨습니다. 이틀 후에 나사로가 죽었다며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내가 거기(유대)에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너희들의 믿음이 더 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누가 예수님께 전해주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건너오신 것이 단순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일부러 요단강 건너편으로 건너오셨습니다. 나사로가 죽도록 그냥 두시기 위해서 건너오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갈 때 그들을 도와주시지 않으려고 오셨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와 손길은 너무나 기이합니다. 우리 아픔과 시련 속에 주님의 섭리와 손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나사로가 죽었고, 예수님이 유대로 죽으러 가시므로 우리도 같이 가서 죽자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기뻐한다고 하셨는데 도마는 죽으러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셨는데 도마는 죽으러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베레아의 베다니로 가신 것은 유대인들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밝은 면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면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면을 보지 못하고 나쁜 면을 보고 있습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고 있습니다. 결론은 생각하지 못하고 과정 중에 하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정말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은혜를 받아도 성향이 안 바뀝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그대로 부정적입니다. 우울한 사람은 은혜를 받고 난 후에도 그대로 우울합니다. 밝은 사람은 그대로 밝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럼 바뀌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밝은 사람은 더 밝아지고, 우울한 사람은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마처럼 어두운 면을 보지 말고 밝은 면을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죽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살 것을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 댁에 가면 장롱 한 가운데에 이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인생은 해석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해석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해석합시다. 아나이스 닌은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마치 우리를 보듯이 본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사물을 보지 말고 예수님처럼 사물을 봅시다. 인지 치료(congnitive theraphy) 전문가 앨버트 엘리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건에 대한 해석이 감정을 통제한다.” 좋게 해석하면 좋아지고 나쁘게 해석하면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앨버트 엘리스는 이 분야에서 프로이드 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인지 치료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해석이 감정을 통제한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달라집니다. 척 스윈돌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10%와 그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 90%로 이루어진다.” 사건이 10이고 해석이 90이라는 말입니다. 길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이 사람이나 이 사람이 부모의 죄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니다.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도마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자.” 주님은 이렇게 해석하십니다. “내가 기뻐한다.”  

꿈보다 해몽이고 했습니다. 꿈 보다 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꿈이 해석하기에 따라서 좋은 꿈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이전글 아나이다 믿나이다
다음글 등대교회는 베다니처럼, 성도는 나사로의 형제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