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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아나이다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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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1:17~27
주일오전예배 | 2021-06-2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마리아야, 오빠는 하늘나라 갔어. 이제 어쩌겠니? 예수님은 이제 그만 기다리고 장례를 치르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언니, 조금만 더 예수님을 기다리면 안 될까? 예수님께서 오시면 야이로의 딸처럼 우리 오빠를 살려주실 거야. 나는 믿어.” “마리아야, 네 마음은 알겠지만 이제 오빠는 죽었어.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네. 도대체 왜 안 오신 걸까? 도대체 왜? 우리를 사랑하시기는 한 걸까?” “언니, 그런 말 하지 마. 틀림없이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야.” 마르다가 말합니다. “나는 식사는 물론 시달리면서까지 예수님을 도우려고 애를 썼는데 왜 예수님은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셨을까? 이것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오빠가 죽었잖아. 예수님이 어떻게 지키시지도 못할 약속을 하셨지! 사람 애간장만 다 타게 해 놓고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저버리셨을까? 오시지도 않으셨고 아무 기별도 없으시잖아. 나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어.” 예수님은 왜 마리아 3남매의 행복과 직결되는 나사로의 생명을 건져주시지 않았을까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3남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주께서 자기의 모든 백성을 다 사랑하시지만 이 세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택한 자들 중에 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는 특별히 사랑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시련을 주셨습니다. 보석공은 돌을 세공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1급 희귀한 다이아몬드라면 다듬고 또 다듬고 또 다듬을 것입니다. 주께서 다른 사람에게 시련을 아끼실지라도 자기가 매우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천국에서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은 지향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지난 봄에 어떤 분이 제 아내에게 오렌지 자스민 한 그루를 주셨습니다. 아내는 그것을 예쁜 화분에 좋은 흙을 넣어서 심었습니다. 아내는 이제까지 자기가 가져본 화초 중에 제일 예쁘다며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있습니다. 만약 흔한 것이었다면 아내는 정성스럽게 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원사는 하찮은 품종의 나무는 잘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귀한 것이라면 햇볕이 잘 들고 흙이 좋은 곳에 심어놓고 거름을 주고 주변을 수시로 정리해줄 것입니다. 전지가위로 필요없는 가지를 잘라주며 나무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해줄 것입니다. 시련은 불순물을 제거해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은 조금도 시련에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문을 활짝 열고 시련을 반갑게 맞이하십시오. 그리고 시련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님의 발자국 소리가 너희 뒤에서 들리는구나! 시련이여 어서 오라. 주님이 너를 보내셨구나! 너는 사랑하는 자녀에게만 보내시는 주님의 사랑의 징표다.” 마리아의 형제들은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시련은 주님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여러분! 시련을 당하거들랑 그것이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임을 생각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 이어서 나사로 부활 스토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피해 잠시 머무셨던 곳은 요단 동편에 있는 베다니이고 마리아의 형제들이 사는 곳은 요단 서편에 있는 베다니입니다. 동 베다니에서 서 베다니까지의 거리는 42km입니다. 열심히 걷는다면 하루정도, 조금 천천히 걷는다면 하루 반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을 때입니다.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께서 오셔서 보셨다고 했습니다. 보셨다는 말이 헬라어로 휴리스코(ερίσκω)입니다. 휴리스코는 찾다, 찾아서 얻었다, 찾아서 발견했다, 드러나다, 관찰하여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시험하고 조사하고 관찰해서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확인했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또는 지적인 이해, 발견의 의미도 있습니다. 종합적인 의미의 발견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사람들에 의해 아주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죽은 척 한 것이 아닙니다. 지어낸 스토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냥 장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죽은 것을 확인합니다.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나오기 전에는 장례를 치룰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 마르다의 고난,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모든 상황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보셨다면 우리도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 고난을 아실까? 나를 보고 계실까? 하나님이 내 시련을 모르시는 것 아닐까?’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아주 명확하게 아십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상황을 확실히 아십니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이 입증된 후 나흘이 됐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망 후 3일간 영혼은 시신 주변을 배회한다. 다시 들어갈 기회를 찾아서이다. 그러나 시신이 변용하기 시작하자 영혼은 떠난다(레온 모리스, 148).” 변용되었다는 말은 썩어 사람이 문드러졌다는 말입니다. 나흘이나 되었다는 말은 이미 시신이 썩어 형태가 변형되었다는 뜻으로 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민간설화에서 죽은 후 삼일까지는 죽어도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흘은 민간설화에서도 완전히 죽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간입니다. 나사로는 의학적으로 설화적으로 완전히 죽었습니다. 실신한 것이 아닙니다.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이 세 번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입니다.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후 바로 살리셨지만 나사로는 나흘이 되었을 때 살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나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은 과학으로도 민간 전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입니다.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다시 살아났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실신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민간 전설이나 의학 등 어떤 형태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살이 썩어서 문드러지고 진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창조 역사입니다. 나사로는 새롭게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나사로는 새 인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지음을 받아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님의 새 창조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나사로의 장례식이 나흘째 계속됐습니다. 장례식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 <18-19>
  •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18절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많은 예수님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기적들은 아주 짧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아주 길고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한 가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썩었습니다. 살이 문드러졌습니다. 벌레가 생겼을 것입니다.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아주 종합적인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중에 최고 정점에 있는 기적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이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탄의 무리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원수들의 목전에서 놀라운 밥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사흘 장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시대 이스라엘은 날씨가 덥고 냉동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그날 바로 장례를 했습니다. 죽자마자 썩기 시작해 하루가 지나면 썩은 냄새가 많이 납니다. 4일이 되면 형체가 많이 일그러집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죽었을 때 즉시로 매장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문상일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첫째 날로 정식문상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넷째 날로 약식문상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는 넷째 날인 약식문상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장례가 나면 유족들과 함께 며칠을 묵으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넷째 날에 모인 사람들은 중에는 상당수가 며칠 씩 마리아 마르다와 함께 했을 것입니다. 약식문상일인데도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은 나사로의 형제들이 유대인들에게 많은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나사로의 형제들처럼 주위로부터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총 받는 그리스도인, 진상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빠가 죽은 다음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나흘이나 지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은 마르다는 뛰어나가 예수님께 자신의 탄식을 모두 쏟아 놓았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이 나사로 옆에 계셨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께서 멀리 계셔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마르다의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영적인 것, 육적인 것, 믿음, 불신 등 여러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르다가 가진 영적인 마음입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하는 섭섭함도 있었습니다. 왜 여기 계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맞습니까하는 원망도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마음입니다. 또 이 말 속에는 믿음과 불신도 섞여 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예수님의 병 고침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어쩔 수 없다는 불신도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이기시지 못하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전능한 능력이 아닌 제한적인 능력을 믿었습니다. 멀리 계셨기 때문에 치료할 수 없다는 제한적인 믿음입니다. 죽은 자는 어쩔 수 없다는 제한적인 믿음입니다. 이것은 되는데 저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내 생각과 내 이성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십시오.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루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상하게도 모순된 존재입니다(아더 핑크, 382). 놀랍게도 그들 안에는 두 가지 인격이 존재합니다. 영적인 생각이 있는가 하면 육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한쪽은 믿는데 다른 한쪽은 의심합니다. 한쪽은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다른 한쪽은 세상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싶은데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참 그리스도인 같은데 어떤 때는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자인가 하는 때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목사 같은데 어떤 때는 내가 목사인가 하는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있다고 했습니다(5:16, 개역성경).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까 탄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마징가Z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만화영화 등장인물 중에 아수라남작이라는 아주 이상한 캐릭터가 있습니다. 한쪽은 여자이고 한쪽은 남자입니다. 남자이면서 여자이고 여자이면서 남자입니다. 어떤 때는 여자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남자 소리가 납니다. 남자 소리와 여자 소리가 동시에 날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인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세상을 향한 마음을 이기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마음이 점점 커져 육적인 소욕을 정복하기를 바랍니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애매한 말을 계속했습니다. 예수님이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아주 믿음이 있는 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에는 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개입니다. 첫 번째의 것은 아이테오라는 말로 이것은 일반적인 구함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의 것은 에로테오라는 말로 이것은 간곡한 청원을 말합니다. 전자는 피조물이 창조주께 은혜를 구할 때 사용하는 말이며, 후자는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표현해주는 말입니다(아더 핑크, 383). 신약성경에서 전자의 경우를 예수님께 쓴 경우는 마르다가 유일합니다. 마르다의 말은 예수님을 선지자나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늘 분주해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피조물로 끌어내리는 우를 범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래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로 자신을 포장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피조물로 끌어내린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2절 끝에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안다고 고백합니다. 믿는 신앙이 아닌 지식에 머물러 있는 신앙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서 굉장히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신앙이 아니라 아는 것에 불과한 신앙입니다.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것도 굉장히 어설픈 지식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마르다였습니다. 여러분! 섬기는 일에는 마르다가 되십시오. 하지만 믿음에는 마리아가 되십시오. 믿음에는 마르다처럼 되면 안 됩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잘 믿어야 할 사람이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나이다가 아니라 믿나이다입니다. 알기만 하는 것,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지 압니다. 세상 끝 날에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귀신 같이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감흥과 감정, 즉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혼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영혼으로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신앙이 아니라 가슴이 뜨거운 신앙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지식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믿는 것이 힘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에 머무는 신앙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찾아온 손님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조문객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19-20절에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맞이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후판타오(ύπαντάω)입니다. 후판타오는 만나러 가다(오다)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손님을 맞이하듯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례식의 조문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방문하러 오신 손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시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태도가 답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문객이 아니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이 말씀은 나는 조문객으로 너희에게 문안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사로를 살리러 왔다는 뜻입니다. “마르다야! 나는 조문객이 아니야. 나는 생명의 주인이야.” 이 말씀입니다. 많은 날 동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그 섬김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손님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손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손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을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섬기십시오. 

그럼에도 마르다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조문객이 하는 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4절에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마르다는 믿나이다가 아니라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상집을 방문하면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살 것이니 위안을 받으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마르다는 나흘 동안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인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24절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대답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조문객들의 인사를 동일선상에 놓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예수님의 말씀이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의 말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에만 있습니다. 두 말을 동일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말씀과 현자들의 말이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에만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세상의 말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마르다를 깨우치시기 위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예수님께서 아나이다 아나이다라고 대답하는 마르다에게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지식이 아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요구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복종입니다. 가장 잘 믿어야 할 사람이 마르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 중에 사람이 죽은 후 나흘 만에 방문한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사로가 유일합니다. 평상시 예수님과 나사로의 형제들이 얼마나 친근하게 지내던 사이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 형제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에 올 때 자주 마르다의 집에 방문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봤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믿음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잘 믿어야 할 사람이 가장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장 잘 믿어야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는 많은 예배를 참석합니다. 2-3, 3-4대 째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자주 찬송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무의식적으로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지만 믿음은 없는 것 아닙니까? 많이 들어 무슨 말이 나오면 아 그거라며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능력은 없는 것 아닙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지식을 자랑하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잘 믿어야 할 자가 믿지 않을 때 예수님은 통분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비애를 느끼십니다. 지금 살리시겠다는 데 마르다는 믿지를 못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은혜를 베푸시겠다는데 마르다는 미래의 어느 날에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현재 은혜를 말씀하시는데 마르다는 미래 어느 날의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애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없는 은혜가 내일은 있을까요? 예수님은 윤리나 도덕이나 가르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마르다를 조문하러 온 조문객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러 오신 부활의 주, 생명의 주이십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예수님께 마르다는 드디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을 볼 때 마르다의 고백은 불완전합니다. 그래도 마르다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십시오. 더 나아가서 주님이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주, 생명의 주로 고백하십시오. 주님은 마르다의 집에 조문객이 아니라 부활의 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손님이 아니라 부활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부활의 주인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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