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등대교회는 베다니처럼, 성도는 나사로의 형제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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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1:1~5
주일오전예배 | 2021-06-0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4복음서에는 37개의 예수님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 마가복음 22, 누가복음 22,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8개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어떤 것일까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일까요?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두 개로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일까요? 먹으면 줄어들어야 하는데 먹을수록 늘어나는 기적.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도 최고의 기적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기적 중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적들 중에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복음서의 첫 번째 기적은 마태복음 8장의 나병환자를 고치는 기적이고 마지막 기적은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가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는 기적입니다. 153의 기적을 제외하면 복음서의 마지막 기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기적을 제외하면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미 장례가 끝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됐고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살이 짓무르고 문드러졌습니다. 무덤에 들어간 지 만 이틀이 됐습니다.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적들 중에 맨 마지막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기적은 우리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땅에 묻혀 썩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죽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썩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살이 썩고 흔적이 없어져도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나사로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무덤에 묻힌 자들을 미래의 어느 날 살리실 것이라면 지금도 온갖 고난으로 넘어진 일으켜 세우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이 시간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스토리의 서론 부분을 살펴보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메시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가난하고 비참한 곳이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곳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라는 착하고 순박한 3남매가 즐겁고 화목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나사로, 둘째가 마르다, 셋째가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순서로 세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아니라 막내부터 형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어떤 병자라는 말을 맨 앞에 써서 장남인 나사로를 의도적으로 맨 나중으로 뺐습니다. 마르다는 그녀(마리아)의 자매라고 했습니다. 막내인 마리아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순서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은혜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에서가 장남이지만 야곱이 먼저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라고 말합니다. 야곱에게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게는 두 아들, 세라와 베레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세라 보다 베레스를 먼저 언급합니다. 요셉에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에브라임을 므낫세 보다 먼저 말합니다. 이 순서들은 은혜 순서입니다. 성경은 3남매 중 막내인 마리아를 항상 먼저 언급합니다. 성경은 은혜 순입니다. 성경은 서열순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성경은 돈이나 지위나 권세 순이 아니라 은혜에 따라 순서가 정해집니다. 역사는 힘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갑니다.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손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의 사람이 되십시오. 은혜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에서는 나중이 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먼저인 사람이 되십시오.  

성경에 베다니가 두 곳 나옵니다. 요한복음 128절에 나오는 베다니는 요단강 동편(건너편)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다니는 요단강 서쪽에 있는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베다니는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6절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43절에도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성 내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성 밖 외진 곳에서 모여 살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베다니는 나병환자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다니는 무화과 동네”(집이라는 뜻의 베이트와 무화과라는 뜻의 테에나의 합성어) 또는 고통의 집”(집이라는 뜻의 베이트와 가난한, 비참한, 고통이라는 뜻의 아니의 합성어)입니다. 이름처럼 베다니는 비참하고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사람들이 혐오하는 나환자촌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누추하고 비참한 땅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의 3년 공생애 사역 중에 가장 크고 놀라운 기적의 장소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는 주로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서 머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주로 베다니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살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자주 머무시는 복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37가지 기적 중에 클라이막스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누추한 땅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절망의 장소가 소망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저주의 땅이 은혜의 땅이 되었습니다.  

비참하고 누추한 땅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적적인 장소가 됐을까요? 그곳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친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36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라고 했습니다. 나사로의 기사에 예수님이 그를 사랑했다는 말이 3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가난하고 비참한 동네, 나병환자가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마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된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미리암)가장 사랑받는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039절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결같이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와 구세주 앞에서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겸손입니다. 또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온 몸에 향유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이 여인의 헌신 보다 더 아름다운 섬김을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리아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가장 사랑받는 자가 되었을까요? 그는 어떻게 가장 비참한 땅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리십시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선 곳을 축복의 땅으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중에 가장 아름다운 헌신과 섬김이 있던 곳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3남매가 사는 집의 여주인은 마르다처럼 보입니다. 마르다의 마르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도 없었고 어머니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038절에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 <10:38~40>
  •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자기 집이라고 했습니다. 집의 주인이 마르다입니다. 3남매는 예수님을 사랑해 자주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곳을 지나가실 때면 언제나 대문을 활짝 열고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을 위해 식탁과 침대와 촛대를 마련하였으며 또한 종종 일행을 위하여 진수성찬을 준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르다가 주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오셨을 때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습니다. 집안의 일이 마르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마르다가 3남매가 사는 집의 여주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너무 분주해 예수님께 책망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항상 주님을 섬기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3남매가 모두 좋아했고 모두 동의를 했겠지만 주님을 영접하는 일은 마르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주도자가 되십시오. 주님을 섬기는 일에 나중이 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내가 머무는 땅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곳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주님이 오래 머무시는 곳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머무시지 않는 곳에서, 주님에 대한 섬김이 없는 곳에서 주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섬김과 추억이 있는 땅에서 예수님께 슬픈 소식이 왔습니다. 그것은 나사로가 병 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 형제들의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나사로가 앓고 있는 이름 모를 병은 죽을 병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병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9장에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스토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맹인이 된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말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기쁨의 잔치가 난장판이 될 위기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주님의 영광이 잔칫집에 나타났습니다. 아름다운 땅에서 사랑하는 친구들로부터 슬픈 소식이 왔을 때 주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아픔과 결핍과 위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입니다. 저는 그것을 영광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삶에서 만나는 아픔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영광병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주님을 위해 영광병을 앓는 것은 필연입니다. 여러분! 아픔과 슬픔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누가복음 16장의 거지 나사로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사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성경이 그에 대해 어느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매우 평범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범 그 이하의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나사로가 나병환자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나사로가 널리 알려진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를 통해 3년 공생애 사역 중에 가장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기적의 소재가 된 사람입니다. 그에게서 예수님의 가장 큰 기적이 나타난 것은 그의 훌륭한 성품이나 뛰어난 업적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평범해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범 이하의 사람도 예수님의 가장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사로와 그의 형제들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베다니는 평범함에도 못 미치는 가난하고 비참한 동네입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친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등대교회가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사 속에서 베다니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가 교우 여러분들의 가장 아름다운 헌신과 뜨거운 찬양이 드려지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친구들이 되십시오. 이곳이 예수님께서 오래 머무시는 곳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곳이 아름다운 마리아와 마르다의 섬김이 있는 곳이 되게 해주십시오. 저 봉서산을 보십시오. 내세울 것 없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산입니다. 이 봉서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선한 것을 바라봅시다. 특별하게 하는 것은 저 산도 우리 주변 환경도 아닙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대화 중에 제가 그 집사님에게 쌍용동이 왜 좋은지 몇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먼저 인구가 9만이라고 했습니다. 읍 보다 훨씬 많은 인구입니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 쌍용동입니다. 또 천안역, KTX역과 불당동 신도시와도 가깝다고 했습니다. 쌍용전철역과 천안아산전철역이 있습니다. 쌍용동은 입지 조건이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께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쌍용동에 우리 등대교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쌍용동에 등대교회가 있습니다. 봉서산 밑에 등대교회가 있습니다. 등대교회 때문에 쌍용동은 은혜의 땅이 될 것입니다. 등대교회 때문에 봉서산은 성산이 될 것입니다.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이곳이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등대교회가 베다니처럼 영광의 장소가 되길 바랍니다. 등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마리아의 형제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소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십시오.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엎드리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선 곳을 영광의 장소가 되게 하는 길입니다. 

둘째, 마리아와 마르다는 위급한 상태에 있었을 때 주님을 찾고 그분께 그들의 마음의 짐을 낫낫이 쏟아놓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나사로가 병에 걸렸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며 자신들이 겪고 있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사로를 당신이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두 사람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지 그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변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항상 똑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내 사랑을 믿지는 마십시오. 김간의 사랑을 믿지 마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오래 전에 텔레비전 CF 중에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멘트가 있었습니다. 모델은 당당한 얼굴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변심이 당당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연약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신들의 아픔을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에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 마르다 자매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미워하는 자가 병 들었습니다.” 그들의 오빠가 병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오빠를 사랑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빠가 병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변했다거나 예수님이 미워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병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여전이 사랑한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병 들었다는 말은 병이 들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사로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도 없었고 어머니도 없었습니다. 오빠가 죽는 것은 매우 큰 환난입니다. 이런 큰 환난 중에서도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주님! 우리를 버리셨나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군요! 이럴 수 있습니까? 왜 하필 나입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시적인 환난이나 고통으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측량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건강할 때뿐만 아니라 병 들었을 때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 사랑받는 자도 아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사랑받는 자도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아주 위급하면서도 어떻게 손써볼 방법이 전혀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여기서 병이라는 단어가 아스데네이아’(ἀσθνεια)입니다. 아스데네이아는 나약함, 연약, , 질병, , 소심, 마음 약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병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병으로 인해 몸에 나타나는 증상을 가리킵니다(병약함). 아스테네이아는 병이 몸을 계속 쇠약한 상태로 만들고 있지만 정확한 병명도 원인도 알 수 없어 어떻게 손쓸 수 없는 불치의 병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앓고 있는 병은 사람이 어떻게 손써볼 방법이 전혀 없는 병입니다. 그래서 전설을 믿고 낮이나 밤이나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와 천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5:2~5>
  •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나사로가 앓는 병은 이 사람보다 더 중한 병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원인도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빨리 오시지 않으면 오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 매우 급합니다. 빨리 오셔서 제 동생의 병을 고쳐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멀리 계시다면 그냥 말씀으로 고쳐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오빠가 아파서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기들의 마음을 예수님께 있는 그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 마음의 짐을 몽땅 쏟아놓았습니다. 앗수르 왕이 유다를 쳐들어와 히스기야 왕을 조롱하며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그들이 보내온 편지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여호와 앞에 그대로 펴놓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 <37:14-15>
  • 14. 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 15.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앞에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얼굴에라는 뜻입니다. ‘펴 놓고라는 말은 활짝 펼쳐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모욕적인 편지를 하나님의 얼굴 앞에 그대로 펼쳐 놓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그대로 쏟아놓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십시오. 성경 시대에는 전화도, 인터넷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낸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 곳곳을 헤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찾아 자신들의 마음을 그대로 쏟아놓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대로 쏟아놓으십시오. 히스기야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슬픔의 책을 주님 앞에 활짝 펼쳐놓으십시오. 주님이 들으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의 절망적인 상태를 주님께 그대로 알리고 주님의 사랑에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오빠를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가장 좋아 보이는 대로 처리하시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 모든 일을 맡겼습니다. 시편 37: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맡기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저가 이루시고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에 정하신 방법으로 이루십니다. 그의 방법과 때는 우리의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기대하였을지도 모를 시간과 방법은 아니었을지라도 예수님은 그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갈망했지만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로마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기다리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주님은 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실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11:5~6>
  •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5절과 6절을 성경 원문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녀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앓고 있다는 것을 들으셨을 때에, 그때에 그는 참으로 그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머무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빨리 달려가야 할 상황입니다. 여기에 그때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빨리 달려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빨리 달려가실 상황에 거기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이틀을 더 유하신 이유를 성경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이틀을 더 유하셨다.” 예수님이 빨리 가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빨리 가시지 않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자매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아더 핑크라는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쓰라림을 견디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이 자매의 믿음을 강화하고 그로 인하여 더 큰 기쁨을 맛보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들이 고통 받은 후에 그들을 더욱 영광스럽게 위로하기 위하여 그는 사랑 베푸시기를 일부러 지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실 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복주려 하신다는 것, 그러나 그 자신의 방법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배우자.”  

솔직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살과 피를 가진 우리 인간에게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돌아보지 않으십니까?”라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맙시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자매의 믿음을 시험하고 그들로 더욱 인내하게 하고, 그 행복한 결과로 인하여 그들을 더욱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또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잘 기다리도록 기도합시다. 주님의 방법과 주님의 때를 참고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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