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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여러분! 질병 많은 세상에서 건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불안한 세상에서 평안하시기를 축복합니다. “9988234”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십 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앓고 삼일 째 죽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으면 자녀들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또 자녀들도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부모도 자식도 다 아쉽습니다. 반대로 너무 오래 아프면 본인도 힘들고 가족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조금만 아파야 본인도 좋고 가족도 좋다는 말입니다. “9988234” 이 말에는 자녀들에게 노환의 부담을 주지 않고 일생을 편안하게 마감하기 위해서는 노인 스스로 건강관리에 관심을 갖고, 질병 예방에 적극 힘써야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100세입니다. 여러분! 죽을 때까지 아프지 마시고 강건하십시오. 9988234! 오래 오래 사시다가 조금 앓고 자식들이 다 모이면 자식들 얼굴 한 번씩 보시고 유언을 한 다음 평안하게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품에 안기시는 그날까지 몸도 마음도 강건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끝이 평안한 복을 주셨습니다. 다니엘 12:13에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입니다. 다니엘은 적어도 83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많은 나이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인생의 마지막에 평안히 쉬면서 자기의 몫을 누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인생의 끝에 안식의 복, 샬롬의 복을 누렸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할 때 노년이 평안하고 강건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다니엘이 인생 끝에 주님께 받은 평안과 안식의 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 말은 문자적으로 하면 “그러나 너는 끝까지 가라”는 뜻입니다. 끝까지 못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끝까지 갈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것이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끝까지 형통할 것이고 끝까지 평안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니엘처럼 끝까지 가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평안하시고 끝까지 강건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받기를 축복합니다. 다니엘 12장 13절 말씀을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너는 마지막까지 네 길을 가거라. 네가 죽어 평안히 잠들어 쉴 것이다. 너는 마지막 날에 일어나서 네 상을 받아 누릴 것이다.” 우리말성경은 부활의 소망을 담아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평안히 잠들었다가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상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71편의 지은이는 인생을 꽤 오래 산 노인입니다. 대적, 원수, 내 영혼을 엿보는 자, 심한 고난, 깊은 곳, 구원 등 시인이 사용한 언어를 보면 시인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한 노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설교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인생의 시작과 끝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시인은 매우 좋은 시작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의 시작을 좋게 했을까요? 시인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을까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을까요? 아닙니다. 시인의 시작을 좋게 한 것은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17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교훈했다는 말은 배웠다, 가르쳤다, 훈련했다는 뜻입니다(히, 라마드). 시인은 인생의 시작을 주님의 가르침에서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으로 인생을 시작한 시인은 그의 인생의 끝나는 날까지 주님께 가르침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18절에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가 늙어도 주님께 배우고 싶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죽을 때까지 주님께 배우겠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주님께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왜 시인은 일생을 주님께 배우고 싶어 했을까요?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배우면 쉼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쉼이라는 말에는 원기 회복하다, 상쾌하게 하다, 기운이 나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쉬게 합니다. 솔로몬은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12:12)고 했습니다. 피곤하다(히, 예기아)는 말이 고통스럽다, 아프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공부는 사람을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공부는 우리를 쉬게 하고 새 힘을 얻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공부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 집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마르다는 집안 일로 매우 분주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들었습니다. 속이 상한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가 자신을 돕도록 말씀 좀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고 하셨습니다. 여기 ‘좋은’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가도스(άγαθός)입니다. 아가도스는 “선한 영향력이 있는, 아름다운, 착한, 선한, 즐거운, 좋은, 올바르고 너그러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배우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주님께 배우는 것은 나쁜 것, 악한 것이 조금도 없는 선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배우십시오. 주님은 최고의 스승이십니다. 주님은 아름다운 스승이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주님께 배우기를 소원하십니다. 그 배움 속에서 쉼과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 배워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께 배울 수 있습니까? 온 세상이 주님의 교실입니다. 주님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로 가르치셨습니다. 공중의 날아가는 새로 가르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 땅바닥에 널려 있는 돌, 겨자씨, 진주, 보석, 나무, 풀, 바람, 땅, 바다, 하늘, 동전, 등불, 소금, 빛, 등등 주변에 있는 사물들로 교훈하셨습니다.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이야기로 가르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탕자의 비유,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등등 성경 시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들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귀로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발락의 재물이 탐이나 거짓을 예언하기 위해 발락의 신하들을 따라가는 발람 선지자를 나귀가 말을 하게 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 들판의 양들로 다윗을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주님의 학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주님의 교실, 주님의 훈련장입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서 배우십시오. 다윗은 매 순간 뛰고 있는 심장 박동 소리에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시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킬르야, 콩팥, 내장, 개역성경-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은 주님께서 우리를 교훈하시기 위한 교보재입니다. 자연과 사물에서 배우십시오. 만나는 사람에게서 배우시고 생활에서 배우십시오. 아이에게서 배우고 어른에게서 배우십시오. 선인에게 배우시고 악인에게도 배우십시오.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사건에서 배우십시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입니다. 그런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탈무드에는 “나는 스승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친구에게서 많이 배웠고 심지어 제자들에게서도 많이 배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만난 사람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훈련장입니다. 여러분! 생활 속에서 배우십시오.
그런데 최고의 스승은 성경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는 모든 것에서 배웠지만 결국 성경 말씀이 나의 최고의 스승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9:7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시편 119:98에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원수는 뱀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뱀은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뱀의 독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 뱀의 독으로 세상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뱀의 지혜와 독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성경의 지혜입니다. 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배우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알아야 될 필요가 이는 모든 것을 세상에 있는 권위자들로부터 완전히 알아내고 해낼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세상의 아비가 마귀인데 세상에서 어떤 선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빛의 아버지 없이는 어떠한 참 빛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에 의해 그 영혼 깊숙이 타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하늘의 지식도 바로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배우십시오. 성경에서 배우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최고의 스승님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너무 잘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했습니다. 믿음은 일생에 최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시인은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비롭고 놀라운 삶이 있습니다. 은혜 속에 성장하여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학교에서 가서 예수님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에서 건짐받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배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안 배워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제자 되기를 목적하십시오. 그러면 노년에 그 거룩한 배움을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계속 주님께만 배웠습니다. 시인은 중간에 다른 스승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학교 이외에 다른 학교도 찾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교훈 외에 다른 교훈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약간의 진보를 보이다가 후에 보면 어리석게 끝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한 때는 하나님께 배우는 척 하다가 싫증을 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 안에서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여호와께만 굴복하여 다른 선생을 찾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노인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 영혼이 다른 교리의 바람에 절하지 않고, 아무 바람이 지나가도 굽어지는 갈대처럼 흔들리지 아니하였나이다. 오히려 견고히 서서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아니하나이다.”
여러분! 주님께 계속 배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께 계속 배우면 계속 평안합니다. 주님께 죽을 때까지 배우면 죽을 때까지 평안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잠언 3:17에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예레미야 29:11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길로 가지 마십시오. 성경에 주님의 평안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배우십시오.
제가 목사가 된지 올해로 20년입니다. 전도사까지 포함해서 30년 가까이 교회 사역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참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말 안 바뀝니다. 왜 안 바뀔까요? 예수님께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님께 배우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지만 예수님께 배우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예수님께 배우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때뿐입니다. 잠시 후에는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원래 지기 모습 그대로 삽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여러분! 교회만 다니지 마시고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두 번째로 노인의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는 기도 속에 담겨진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노인은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18절 a)라고 기도했습니다. 9절에도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자신이 늙어가고 있고 힘이 쇠약해져 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신이 늙어 연약해져도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시편에는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9:10, 16:10, 27:9, 37:28, 38:21, 60:10, 71:9, 71:18, 108:11, 119:8, 138:8). 또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쫓아내지 마소서, 떠나지 마소서, 숨지 마소서’ 같은 표현도 자주 등장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지 않을까 매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왜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와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시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사람은 사람을 버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버립니다. 친구도, 충신도, 애국자도 버림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계속 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점점 늙고 있으며 힘이 빠져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월 앞에 인간의 무능함과 무가치함을 느꼈습니다. 그때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늙고 병들고 나약해지면 버리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던져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아주 오래 전에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당신 앞에서 쫓아내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은혜를 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렇게 많은 시련과 환난을 속에서도 우리가 죽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잡으실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왜 이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성경에 나오는 실수들은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딸들이 주는 술에 취해 두 번이나 인사불성이 되어 두 딸과 동침했습니다(창19장).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했습니다(창38장).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아들들이 성전에서 음행을 저질렀음에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때 엘리가 매우 늙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젊을 때 일천번제를 드리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었을 때는 하나님을 크게 떠났습니다. 열왕기상 11장 4절에 “솔로몬이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시인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왜 늙었을 때 실수했을까요? 어른은 젊은이 보다 더 많은 지혜와 경험이 있어 젊은이에 비해 실수할 확률이 매우 적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적은 사람 보다 더 안정적입니다. 그렇다고 어른의 지혜와 경험이 마귀의 유혹을 완전히 막아주는 방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늙어도 끝가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니 늙을수록 은혜를 더 많이 받아야 합니다, 더 성경을 보고, 더 기도하고, 더 찬송합시다. 우리는 끝까지 믿음의 고삐를 꽉 잡고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젊어서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늙어서는 더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은 물론 세이레 금식기도도 했습니다. 다니엘이 노년에 안식의 복을 누린 것은 은혜를 더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이 기도는 “끝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저의 아이가 세 살 때의 일입니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습니다. 양손으로 그네 줄을 꼭 잡고 재미있게 탔습니다. 그네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얼마나 탔을까요? 아이가 갑자기 줄을 잡은 양손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지듯 꽝하고 떨어졌습니다. 저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왜 아이는 줄을 잡은 양손을 놓았을까요? 한 참을 타니 그네가 익숙해져서 줄을 잡지 않고도 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네는 줄을 꼭 잡고 타야 합니다. 손을 놓는 순간 그대로 떨어집니다. 운전자는 끝까지 핸들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 말이 언덕 아래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위험한 길을 다 지나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말을 타는 마수는 말의 고삐를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합니다. 다 왔다고 해서 놓으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유혹을 잘 견디다가 환난이 끝났을 때, 그래서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쌓은 것을 마지막 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이제 늙어서, 머리카락에 희끗희끗 인생의 서리가 내렸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기도는 늙어도 미래를 보며 살겠다는 한 노인의 소망입니다. 노인이 되면 사람들은 뒤돌아보며 삽니다. 옛날 일을 추억하며 삽니다. 옛날 읽을 기억하며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슬퍼하고 어떤 때는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삶을 정리합니다. 삶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늙어도 뒤만 쳐다보며 살지 마십시오. 시인은 늙었지만 뒤가 아니라 앞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이 말은 “늙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늙어도 젊었을 때처럼 동일하게 은혜를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청년 때 받은 은혜가 늙어서까지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청년 때 은혜가 필요하다면 늙었을 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먹을 만나는 그날 아침에 거두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루가 지나면 벌레가 먹고 썩어 악취가 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0년 전에 받은 은혜를 자랑합니다. 지난날의 은혜는 두고두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은 자랑하는 순간 교만이라는 벌레가 생기고 썩어서 악취가 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받은 은혜를 늙은 후에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걸어가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늙었지만 앞을 보고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인생을 어떻게 끝마치고 싶어 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8절에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라고 했습니다. ‘힘’을 개역 성경은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오는 모든 세대에 죽을 때까지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17절에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이한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이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이한 은혜입니다. 선택의 은혜가 기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선택하셨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이합니다.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기이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회개하고 죄를 정복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사는 것이 기이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새 마음을 창조하시는 것이 기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섭리하시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기이합니다. 우리는 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옷을 주지 않습니다. 취직을 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주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이한 곳입니다. 믿는 자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의 삶에는 날마다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경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응답되고 문제가 해결되며 안 되는 일이 이루어지고 병이 치유되며 필요한 것을 시시때때로 공급받는 등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노인은 일생을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노인은 일생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증하며 고백하며 이제까지 살아왔고 죽을 때까지 그것을 계속 전하며 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자신이 받은 은혜와 생명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이것은 이제 인생의 활동 무대에서 내려서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릅니다. 저는 아내에게 종종 말합니다. “내가 갑자기 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울지 마십시오. 찬송을 불러주십시오. 기뻐해주십시오. 나는 천국 갑니다.” 저는 사라질 것입니다. 사라지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뒤를 이어 오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노인들은 이 세상에 남겨 놓을 영적 유산에 대해 집중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늙어서 자녀들을 발치에 모아놓고 영적인 복을 나누어준 것처럼 신자는 후대에 영적인 축복을 주어야 합니다. 돈도, 차도, 집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항상 남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를 남길 기념비를 세우십시오. 여러분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았던 자리는 곧 비게 될 것이며, 오늘 여러분을 알아보던 자리도 이젠 여러분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축복된 보물을 전수하십시오. 여러분은 죽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떠났을 때 “그는 죽었지만 아직도 말하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과 손자들을 불러 모아서 여러분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십시오. 후손이 없다면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가서 말하십시오. 아니면 기록으로 남겨서 여러분의 눈이 감겨져 있을 때라도 다른 눈들이 그것을 보게 하십시오.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김덕권 씨의 글입니다. 기독교인의 글이 아니라 불교인의 글입니다.
필자는 부모님에게 튼튼한 육신 말고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 그리고 전생에 공덕을 쌓지 못했던지 부자가 못되어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별로 없다. 미국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 두 명의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마르크 슐츠’와 ‘에드워즈 조나단’이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신천지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그런데 마르크 슐츠는 ‘내가 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내 자손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도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뉴욕에다 술집을 차려서 열심히 일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생활을 통하여 신앙이 자유의 나라인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컴퓨터로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을 추적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많은 재산을 벌어 자손들이 잘 살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두었다. 그런데 자손들은 교도소에서 5년 이상 형을 산 자손이 96명, 창녀가 된 자손이 65명, 정신이상, 알코올 중독자 58명,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 460명, 정부의 보조를 받는 극빈자 286명이었다. 그 자손들이 정부의 재산을 축낸 돈이 1억5천만 달러, 1800억 원에 이른다.
반면에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왔던 에드워드 조나단은 유명한 프린스턴대학을 당대에 설립하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퍼뜨렸다. 자손들 중에 선교사 목사만도 116명 나왔고, 예일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 86명, 군인 76명, 고급관리 80명, 문학가 75명, 실업가 73명, 발명가 21명, 부통령 한사람, 상하의원 주지사가 나왔고, 장로 집사가 286명 나왔다. 도합 816명이다.
놀라운 것은 이 가문이 나라에 낸 세금과 지도자로서 미국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정부 재산을 하나도 축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무엇을 뜻할까? 유산 중에 최고의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진리를 믿고 신앙하는 믿음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거액의 재물을 유산을 남겨주려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유산이 내 자손들에게 복된 유산이 될 것인지는 고민해 보고 전해주어야 된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열심히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그것을 자손들에게 남겨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결과는 이 유산이 자식들을 망하게 하고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 ‘명예와 존경’ 같은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 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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