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실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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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9:1~11
주일오전예배 | 2021-05-3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프랜시스 베이컨(1561 - 1626)<4대 우상론>이 있습니다. 베이컨은 사람 속에 있는 편견을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우상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종족의 우상입니다. 종족의 우상은 무엇이든지 인간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새들의 지저귐을 사람들은 새들이 운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새들끼리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새들이 운다는 것입니다.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지 인간의 관점과 잣대로 바라보면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종족의 우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나 중심으로 합니다. 성경읽기, 찬송, 기도, 봉사, 친교를 나 중심으로 합니다. 나 중심은 인간 중심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나 중심 혹은 인간 중심 사고와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버리세요. 신본주의적인 사고를 하세요. 두 번째는 동굴의 우상입니다. 동굴의 우상은 동굴 속에서 본 세계를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특성, 환경, 교양 따위에 따라 사물에 대한 바른 견해와 판단을 그르치는 편견을 말합니다. 동굴 밖의 세계가 있습니다. 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저는 감리교회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감리교만 다녔습니다. 감리교 외에는 좀 이상했어요. 그런데 장로교 목사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장로교가 얼마나 적응이 안 됐겠어요. 장로교회, 감리교, 순복음교회, 등등 교파의 신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그리스도파 등 동굴의 우상에 갇혀 서로 자기가 옳다고 다퉜습니다. 동굴의 우상에 빠지면 자기만 옳습니다. 자기 동굴에 갇히면 안 됩니다. 동굴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시장의 우상입니다. 시장에는 말이 정말 많습니다. 사방에서 온갖 말들이 다 들려오고 그 말들이 자기도 모르게 지식으로 굳어집니다. 하지만 주어들은 지식은 바른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왜곡된 지식입니다. 이것을 시장이 우상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정말 말이 많습니다. 교회에도 말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 성도가 이렇게 말하고 저 성도가 저렇게 말합니다. 이것저것 주어들어 신앙적인 지식이 생겼습니다. 이게 바른 지식일까요? 주어들은 지식으로 바른 신앙적인 판단과 적용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의 토대 위에 있을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 위에 서십시오. 성경으로 시장의 우상을 극복하십시오. 네 번째는 극장의 우상입니다. 옛날에는 극단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극단이 시골을 돌면서 간이극장을 만들고 심청전, 장화홍련전,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드라마를 직접 공연했습니다. 그러면 변 사또, 계모 역을 맡은 배우는 밥을 사먹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나쁜 놈이라며 욕을 하고 작대기로 때리기도 했답니다. 실재와 허구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극장의 우상이란 기존의 이론이나 특정인의 권위에 기대는 편견을 말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극장의 우상이 있습니다. 목사는 진짜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라는 이름만 가지고 살면 안 됩니다. 목사의 권위에 기대면 안 됩니다. 집사는 진짜 집사가 돼야 하고, 권사는 진짜 권사가 돼야 합니다. 직분을 가지고 내가 뭐가 된 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진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진짜가 돼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 극장의 우상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 가를 알아야 합니다. 조금 안다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편견은 안개와 같아 빛을 가립니다. 편견은 인생길에서 만나는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편견을 버리십시오.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본문에서 편견에 가득 차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편견이란 눈꺼풀을 벗겨주시는 예수님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보셨습니다. 헬라어에서 보다라는 뜻의 동사가 네 개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이돈”(εδων)이라는 단어입니다. 에이돈의 명사형이 에이돌론’(εδωλον)입니다. 이 단어를 독일식으로 발음하면 아이돌론이 됩니다. 영어의 아이돌우상이라는 말이 여기서 왔습니다. 요즘 아이돌 가수들이 청소년들에게 인기죠. ‘우상’(아이돌)이라는 말의 어원은 헬라어 보다입니다. 우상은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되 잘 봐야 합니다. 그러면 왜 보다라는 말이 우상이 되었을까요? 에이돈이라는 말은 누군가가 무엇을 보여줄 때 보는 것을 말합니다. 보여주지 않았는데 보게 되면 겉만 보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속은 모르고 껍데기만 보게 될 때 생기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 중에는 우상이 참 많습니다. 대부분 겉만 보고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는 속을 알면 좋아할 수가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겉만 보고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아주 심각한 편견을 갖게 됩니다. 이 편견 때문에 사람들은 엄청난 실수를 합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의 제자들만 이렇게 생각한 것 아닙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우리 한국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래. 내 죄야. 내 죄!.” 지난 주간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암에도 걸리고 우울증도 걸렸습니다. 언니가 그러더랍니다. 남편 체면 깎기니까 우울증에 걸린 거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병든 것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면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병 들어야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건강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잘 아프지도 않아요.

제가 목사이잖아요. 목사님들이 집 안에 누가 아프거나 큰 사고를 당하면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 목사 숨은 죄가 있는 것 같아.” 아주 대놓고 말합니다. 참 잔인하죠? 욥에게도 친구들이 아예 대놓고 말했습니다. 제자들도 맹인을 앞에 두고 아주 대놓고 그랬습니다. ‘저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이서 맹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인은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가슴이 말이라는 비수가 꽂혔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라 보지도 못하는데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졌겠어요. 눈을 뜬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짓지.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지 마세요. 귀에 들리는 대로 말하지 마세요. 그거 우상입니다. 그거 편견입니다. 그거 정말 무서운 살인 도구입니다. 그거 때문에 당사자는 평생 가슴앓이를 하면 삽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겉모습만을 보고 막말을 하면 그냥 흘려보내세요. 모두 편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잘 안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 편견에서 나오는 말은 올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꽁꽁 묶어 아무것도 못하게 합니다. 그 아픔 때문에 몸부림치며 살게 합니다. 

1절 앞부분에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길 위에 있는 인생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길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모두 어딘가로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맹인은 거기서 앉아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8절에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앞으로 나갈 때 평생을 거기 있던 사람입니다. 맹인이라는 올무에 매여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한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편견에 매여 있지 마세요. 사람들의 독설에 가슴앓이 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삐뚤어진 눈에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예수께서 .... 보신지라예수님의 눈길이 이 맹인의 눈에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따가운 눈이었습니다. 편견의 눈, 정죄의 눈, 혐오의 눈이었습니다. 거지이기 때문에 기피하는 눈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눈은 애정의 눈이었습니다. 자비의 눈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영어 see라는 단어에는 보다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헬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에이돈은 지각하다 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아픔, 맹인의 서러움, 맹인의 마음, 맹인이 살아온 인생을 아셨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셨을 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네 인생을 안다. 내가 네 인생의 수고와 아픔을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자식이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여기 오시기 전에 여러분을 보시고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당한 서러움, 아픔, 괴로움, 갈등을 아십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감동이 아닙니까? “나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나타내시고자 사람을 맹인이 되게 하시는구나!’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병 주고 약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병이 들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어려운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일들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고 싶어 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고단한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도와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이 말씀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빠진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 목표’(ἵνα)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이 주어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목적’(휘바)라는 단어가 주어입니다. 이 말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목적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르곤입니다. 에르곤은 , 표시, 실제적인 증거라는 뜻입니다.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목적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증거를 나타낸다.”, “목적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표시를 나타낸다.” 그러면 누구의 목적일까요? 내 목적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나타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일에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죄를 하말티아라고 합니다. 하말티아라는 말은 과녁에 빗맞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라는 것은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이라는 의미입니다.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화장실 앞에 테라스에 해마다 잡초가 자랍니다. 지금도 망초대 세 개가 자라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뽑지 않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타일 그 좁은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삽니다. 어제도 보고 오늘 새벽에도 봤습니다. 화장실 구석에 조그만 거미가 한 마리 삽니다. 보기 싫은데 잡지 않습니다. 거미가 여기 있게된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화장실 갈 때마다 봅니다. 

다윗은 거미는 아무 곳에나 거미줄을 치는 더럽고 쓸모가 없는 벌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터에서 그는 적군에서 포위되어 빠져나갈 길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간신히 어느 동굴 속으로 숨어들게 되었는데, 마침 그 동굴 입구에는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곧 이어 그를 추격해 온 적군의 병사는 동굴 앞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굴 입구에 거미줄이 있는 것을 보고 동굴 안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또 다윗 왕은 적장이 잠자고 있는 방에 숨어 들어가 적장의 칼을 훔쳐낸 다음, 이튿날 아침에 내가 당신이 자고 있을 때 칼을 가져왔을 정도이니 마음만 먹었다면 당신의 목을 가져오는 것쯤은 간단히 해낼 수 있었소.’라는 말을 전하여,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려는 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가까스로 적장의 침실에 숨어 들어갔는데, 칼이 적장의 다리 밑에 있어서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윗 왕은 단념하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바로 그때 모기 한마리가 날아와 적장의 다리 위에 앉았습니다. 적장은 무의식중에 다리를 움직였습니다. 다윗왕은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적장의 칼을 빼낼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필요 없어 보이는 거미 한 마리, 모기 한 마리도 쓸 데가 있습니다. 정말 필요 없을 것 같은 벌레도 이 세상에 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이 이 세상에 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첫째 아이가 중1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빠 인문계가 뭐야?”하고 물어요. 요즘 친구들하고 인문계에 가야 하는지 실업계에 가야하는지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빠는 실업계를 가든 인문계를 가든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정말 너에게 원하시는 것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기도 마치고 자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과녁도 정 중앙 10점 골드에 정확하게 맞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그런데 아직까지 그것이 무엇인지 저도 모르고 아이도 몰라요. 그래서 저는 기도합니다.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해주세요.” 이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이 일을 찾아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과녁에서 벗어난 인생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 때문에 잃어버린 우리 인생을 찾아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예수님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내가아니라 우리가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남편을 위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발견하기 누가 애써야 합니까? 자식의 인생에 하나님의 계획을 찾기 위해 누가 기도해야 합니까?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누가 함께 해야 합니까?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예수님과 나, 그리고 여러분우리 모두가 이 위대한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여기 하나님 앞에 있게 한 이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에 예수님의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치료하는 데는 아주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6-7절입니다. 

  •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평소에 예수님은 병자를 말씀만으로 고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8:3),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5:8)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23) 그런데 이 맹인을 고치실 때는 진흙을 손수 빚으셨습니다. 빚으실 때 물 대신 침을 사용하셨습니다. 양쪽 눈에 다 붙이려면 진흙이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도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해야 하나요? 묻지 마시고 순종해보세요. 많이 배운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교양 있는 현대인들은 비웃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행위가 맹인에 대한 예수님의 새 창조의 행위라고 믿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도 보면 너무나 유사한 행위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손으로 흙을 빚으셨습니다. 이 손이 바로 하나님의 손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손입니다. 예수님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듯 침을 뱉으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맹인의 눈을 다시 만드셨습니다. 왜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 눈을 다시 만들어주고 계십니다. 아니 눈 때문에 잃어버린 맹인의 인생을 다시 만드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영적인 맹인이 되어 인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눈을 예수님께 맡기세요. 여러분의 인생을 예수님께 맡기세요. 2천 년 전에 침을 뱉으셔서 진흙 반죽을 하신 것처럼 오늘 주님은 성령으로 말씀을 반죽하여 우리 인생을 새롭게 지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더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실로암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학자들이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고 말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한 것은 바로 보냄을 받은 분을 바라보라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인생을 새롭게 빚으실 것입니다. 세상 바라보지 마십시오. 주님 바라보십시오. 그런데 실로암 못으로 보내진 사람은 맹인입니다. 거기서 눈을 씻은 사람도 맹인입니다. 그렇다면 보냄을 받은 사람은 바로 맹인입니다. 예수님은 왜 맹인을 실로암 못으로 보냈을까요? 자신이 이 땅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맹인은 실로암에서 눈을 씻었습니다. 과거를 씻었습니다. 고통을 씻었습니다.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습니다. 가슴이 벅찼습니다. 뛰고 울고 소리 지르고 몸부림치며 찬송했습니다. 새 세상이 맹인에게 펼쳐졌습니다. 실로암에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했습니다. 실로암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실로암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의 눈을 씻으세요. 교회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씻으세요. 아픔을 씻으세요. 과거를 씻으세요. 기도와 찬송과 예배로 영혼의 샤워를 하세요. 성령과 말씀으로 씻으세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 등대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면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하시는 증표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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