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믿음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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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1:6~11
주일오전예배 | 2021-06-1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마리아 형제들의 고향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의 감람산 동쪽 비탈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베다니는 무화과의 마을또는 고통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나병환자 시몬이 살던 동네입니다. 구약 성경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이름 없는 마을입니다. 이런 시골 동네가 아주 영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무덤에 묻힌 지 이틀이 지난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런 예루살렘 입성을 이곳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 받으시기 전날 밤 이곳에서 쉬셨습니다. 모든 지상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곳도 이곳입니다. 고통의 장소, 이름 없는 곳이 아주 영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베다니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등대교회가 베다니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20) 우리의 몸,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것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아주 불편하게 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매우 난처한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십니다. 하인들은 바빴습니다. 항아리의 물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사람들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불편했지만 종들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제 떠서 갖다 주라.” 포도주를 달라는 사람들에게 물을 떠서 갖다 주라니요? 잔칫집에 온 사람들에게 물을 먹일 작정인가요? 예수님은 종들에게 다시 불편한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종들이 그 불편한 것을 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불편한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이 병자는 38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걷기는커녕 앉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니요? 먼저 안수기도라도 해주셔야지 않나요? 무조건 일어나라니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불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끼니를 굶은 사람들이 광야에 5천명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 여자들까지 포함하면 2만 명은 족히 넘는 숫자입니다. 그냥 보내면 가는 중에 기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두고 축사하십니다. 축사라는 말은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2만 명 앞에 놓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감사하시는 예수님의 기도가 불편합니다. 기도하시더니 그것을 사람들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2만 명이 앉아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누구에게 갖다 주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자 줄지 않는 기적, 나눌수록 더 많아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편하지만 순종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소경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침으로 흙을 반죽하셔서 소경의 눈에 바르시더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침을 뱉고, 진흙을 눈에 바르시더니, 소경에게 실로암못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방법이 아주 불편합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흙은 침으로 반죽한 사람이 있습니까? 불편해도 너무 불편합니다. 그런데 가서 눈을 씻었더니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불편해도 순종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이해가지 않고 불편해도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바쁘고 피곤하고 힘들어 예배가 불편해도 예배를 드립시오. 은혜가 있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상식적인 일을 계속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편한 일을 계속 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계속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한 명령에 순종할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불편함이 편해졌습니다. 불편한 명령이 편해졌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불편함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편함과의 싸움입니다. 성경에 불편한 말씀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불편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무시하지 마시고 그것이 편해질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 스토리를 계속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종종 하는 요청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베레아 지방의 베다니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려고 합니까?”  

  • <7-8>
  •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59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10:31에도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돌을 들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피해 요단강 건너편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으로 건너가셨습니다.

  • <10:39-40>
  • 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 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은 베뢰아 지방의 베다니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뢰아의 베다니에 얼마나 계셨을까요? 유대 땅 베다니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로부터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마리아 자매로부터 전갈이 온 곳은 예루살렘에서 요단강 쪽으로 3km 정도에 있는 베다니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신 후 이틀이 지난 다음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 예수님께 방금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려고 합니까?”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말은 금방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 했는데 선생님은 무섭지 않으십니까?’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유대로 가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인 없어질 때까지 안전한 이곳에서 있으면 어떨까요?’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유대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 곳곳에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돌멩이를 들고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으로 다시 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시는 것은 유대인들의 위협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토끼가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호랑이 굴로 들어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매우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유대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매우 불편한 곳입니다.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고통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으로 다시 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대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님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돌로 치려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선생님 유대는 위험한데 가시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일은 오늘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불편한 자리로 부르십니다. 아주 당혹스러운 일, 행하기 싫은 일, 마음에 전혀 내키지 않는 일, 아주 불편한 일을 하도록 우리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아주 세게 쿵쿵 두드리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은 힘들지 않고 편안한 것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 있기를 바라는 곳은 박수갈채를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걸어가기를 바라는 길은 아무런 장애나 반대가 없는 순탄한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편한 자리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부르십니다. 여러분! 불편한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세상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불편한 것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불편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베다니로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의 가장 영광스러운 기적을 목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대로 요단강 저 건너편 유대인들의 힘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계속 숨어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클라이맥스를 목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편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라갔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길로만 간다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전혀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신지 모르겠어! 하나님은 안 계신 것 같아.” 내가 편한 자리는 육신적인 자리입니다. 주님은 거기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은혜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불편한 자리로 가십시오. 주님이 행하기를 바라시는 불편한 일을 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거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불편함이 은혜입니다. 불편함과 싸우십시오. 

예배가 불편하십니까? 예배가 편해질 때까지 계속 예배하십시오. 기도가 불편하십니까? 기도가 편해질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성경읽기가 불편하십니까? 성경읽기가 좋을 때까지 성경을 읽으십시오. 믿음은 불편함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이 좋고 편하고 영적인 것은 불편합니다. 세상적인 것이 불편해지고 영적인 것이 편해지도록 기도하고 훈련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것입니다. 세상 편한 것, 세상 좋은 것을 따라가면 잠시는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은 고통과 허무와 멸망입니다. 영적으로 불편한 것을 따라가면 당장은 불편할 수 있지만 나중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축복이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듣기는 너무 좋으나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꽃길만 가게 해줄게. 꽃길만 가세요.”라는 말입니다. 꽃길만 걷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장담합니다. 꽃길만 걷는 사람은 반드시 망합니다. 꽃길만 가라고 축복해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꽃길의 끝은 멸망입니다. 꽃길은 저주의 길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법칙입니다. 신앙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하고 좋은 해변길이 있었는데 불편한 광야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불편한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불편한 길을 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왕의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그런데 그때부터 다윗의 삶은 불편해졌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에 쫓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다윗을 다윗이 되게 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정말 육신이 불편한 일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불편한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다시 가자는 말은 다시 일하자는 말씀입니다. 다시 가자는 말은 다시 도전하자는 뜻입니다. 다시라는 말은 방해하는 자들 때문에 포기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다시라는 말이 헬라어로 팔린(πλιν)입니다. 팔린은 다시, 더욱, 나아가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더 깊이, 강화하여, 그 이상으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가자는 말은 더 힘을 내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가자는 말씀에는 이전 보다 더 큰 역사를 이루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가자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하자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다시 가자는 말은 편한 이곳에서 벗어나 불편한 곳으로 가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곳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으로 가자는 말입니다. 여기가 아니라 유대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라는 말은 반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반복하자는 말입니다. 여러분! 다시 가십시오. 다시 하십시오. 다시 도전하십시오. 다시 일어서십시오. 죽을 때까지 다시 하십시오. 불편해도 중단하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주저앉지 마십시오. 다시 하십시오. 다시 하십시오. 불편해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사로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죽음을 잠이라고 하십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 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왜 잠이라고 할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입니다. 잠은 쉼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죽음을 잠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도가 하늘 안식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의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진심으로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안식입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부활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쉼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청와대의 계신 분을 친구로 둔다면 정말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와대가 아니라 저 하늘나라 보좌에 제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종이며 자녀이고, 백성이며 친구입니다. 저는 지금도 주님의 친구이고 죽어도 주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저를 살아 있을 때는 친구로 삼으시고 죽으면 버리시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저는 항상 주님의 친구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저는 영원한 친구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를 지금도 사랑하시고 죽어도 사랑하십니다. 죽어도 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죽어도 예수님의 사랑은 천국에서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내 친구가 아니라 우리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늘나라 친구입니다. 죽으면 우리의 육적인 관계는 모두 끊어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됩니다. 우리에게는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합니다. 

구약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보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시편1165절에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귀중한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카르입니다. 야카르는 보배롭다, 귀중하다, 가치 있다. 훌륭하다, 보석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왜 성도의 죽음을 보배로운 것으로 생각할까요? 성도가 세상에서 받는 마지막 시험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시험이 없습니다. 죽으면 하늘의 완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아주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이사야43:4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살아있을 때도 보배롭고 죽은 후에도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유다서 19절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싸웠다고 했습니다. 천사장은 왜 시체 때문에 사탄과 싸웠을까요? 그것은 시체가 헛된 것에 쓰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으면 썩어서 냄새나는 시체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죽음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것입니다. 성도는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께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성도의 죽음이 잠이며 귀중한 것이라면 빨리 죽기 위해 자살을 해도 될까요? 절대 안 됩니다. 자살은 인간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기독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자살은 독생자를 보내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은혜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살인을 금하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살에도 적용됩니다. 자살은 회개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절대가치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존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강영선, 한신대 교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라고 물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자살이 죄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셰익스피어의 물음에 대답하겠습니다. 자살은 매우 큰 죄입니다.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자살은 전혀 보배롭지 않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자살은 육체를 더럽히는 행동이 아니라, 영혼을 더럽히는 행동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자살은 첫째, 자신을 사랑하라는 자연법을 거역하는 행위며, 둘째, 공동선과 집단에 손해를 끼치거나 모독이 될 수 있으며, 셋째, 생명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마십시오. 867년 니콜라스 1세는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로 했습니다. 니콜라스의 견해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매우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성령님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317)라는 초대교회 지도자는 그의 저서 신의 교훈에서 자살자는 살인자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의적이 아닌 것처럼, 세상을 떠날 때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야 떠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끝까지 사십시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사십시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살아야 할 하나님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사십시오. 믿음으로 사십시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십시오. 

세 번째로 우리 각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주어진 시간, 할당된 시간이 있습니다. 유대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 돌로 치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두려워 유대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대신에 사람은 자신에게 일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 전까지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 <9-10>
  •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하루 24시간 중에 낮이 12시간이고 밤이 12시간입니다. 낮은 일하는 시간이고 밤은 쉬는 시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일할 수 있는 시간 혹은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에만 일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밤이 되면 일할 수 없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지금은 내게 맡겨진 일을 할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간이 다 가기 전에는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안에는 누구도 내 생명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게는 아직 감당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명을 마치기 전에 나는 죽지 않고 너희들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낮이 계속되지 않고 밤이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날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부르는 곳으로 다시 가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100, 어떤 사람에게는 80, 어떤 사람에게는 60, 40, 20, 주어진 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내 시간이 짧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짧고 긴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100년이나 50년이나 같습니다. 시간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낮이 12시간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낮 12시간을 짧게 하거나 길게 할 수 있습니까? 아인슈타인이 할 수 있습니까? 미국 대통령이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마귀가 할 수 있습니까? 이 시간은 이 세상이나 저 하늘 위에나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막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끝나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낮 12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입니다. 저는 이 12시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역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 시간 안에는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성역의 시간에는 하나님이 빛이 우리를 비춥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성역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여러분을 비추고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두려워 마십시오. 이 성역이 다가기 전에 우리의 생명을 해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곳, 내가 원하는 육적인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낮 12가 끝나기 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그 일을 열심히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19세기 중엽 영국에 데이빗 리빙스턴’(1813~1873)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개척자로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1840년에 27세 나이에 신학과 의학 공부를 마치고 아프리카로 떠납니다. 당시까지 아프리카 대륙은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습니다. 암흑의 땅이었습니다. 해안 지방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륙의 내부를 탐험한 사람도 없었고 대륙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모를 때였습니다. 그는 맹수와 환경과 주변의 위험과 질병 앞에 늘 노출이 되어있었습니다. 선교 11년 동안 한 사람의 개종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의 친구들이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제대로 된 지도가 없는 때입니다. 길이 없는 때입니다. 리빙스턴은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일세.” 어느 날 리빙스턴이 사자에 물려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그 치명상으로 죽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리빙스턴이 세기에 영원토록 회자될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죽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났으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칠 때까지 정글 속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인류 최초로 횡단했고 선교 지도도 만들었습니다. 최초로 아프리카의 근대화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개척자, 아프리카의 아버지,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지금은 낮12시입니다. 성역의 시간입니다. 사명을 찾고 그 사명을 감당하며 삽시다.  

가곡 중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일까?>(전세중 작시, 김세중 작곡)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앞부분이 이렇습니다.  

  • 산다는 건 산다는 건 붉게 타는 노을과 같은 것
  • 저 하늘가 뉘엿뉘엿 지는 무지개 사랑
  • 오늘도 그렇게 절절히 절절히 불타는가
  • ! 무지개같이 찬란한 시간이여 내 사랑이여

산다는 것은 노을처럼 붉게 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절절히 불타라고 했습니다. 한 주간이 시작됐습니다. 불이 타오르듯 뜨겁게 사십시오. 뜨겁게 사랑하시고 뜨겁게 일하십시오. 삶은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빛이 있는 찬란한 시간입니다. 하루가 남았는지, 1년이 남았는지, 10년이 남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설교 끝나고 내려가다 죽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루라도 하나님의 찬란한 빛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뜨겁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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