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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할렐루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평양시 중구역에 김정일이 쓰던 집무실이 있습니다. 원래는 김일성이 사용하던 곳입니다. 수백 미터 길이의 3층 건물로 철근 콘크리트로 축조하였습니다. 내부는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포격에도 끄떡없도록 건물 두께는 80센티미터에 이릅니다. 본청사로 들어오는 입구마다 40t 이상의 자동철문이 7개나 있습니다. 모두 리모컨으로 열고 닫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문은 탱크로도 공격하기가 힘들 정도로 견고합니다. 납판으로 된 문을 썼기 때문에 핵 방사능의 피해도 막을 수 있습니다.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비상시 지하 건물로 대피할 수 있습니다. 주변은 11미터 높이의 담장이 둘려 있습니다. 평양에만 4개의 관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15호 관저와 집무실이 지하도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100m 정도 내려가면 지하도로가 나타납니다. 김정일은 살아 있을 때 15호 관저까지 운동 삼아 걸어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지하도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폭이 4~5m, 높이는 3m 정도입니다. 걸어서 가면 6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안전한 집이 있을까요? 김일성은 얼마나 불안했으면 이런 집을 짓고 살았을까요? 김정일은 2011년 1월 리비아와 이집트의 민주화 혁명이 있었을 때 “우리도 죽을 수 있다”며 불안해했습니다. 불안한 김정일은 관저 주변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12월에 김정일은 심근경색과 심장쇼크로 죽습니다. 그때 김정일의 나이가 63세였습니다. 그렇게 걱정했던 암살이나 전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역사와 인생은 참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건강의 복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왕은 동서 약 700m, 남북 약 120m에 이르는 아방궁을 지었습니다. 아방궁은 2층 건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진시왕은 아방궁을 짓기 위해 70만 명을 동원했지만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50세에 죽었습니다. 사인은 수은 중독입니다. 하지만 목에 걸린 생선 가시 때문이라는 웃지 못 할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벨론 왕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공중정원에서 살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신비로운 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벨사살 왕도 젊었을 때 암살당했습니다. 고대 왕들이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가장 안전한 집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초막에서 사는 사람 보다 더 불안하게 살았고 더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서울에 지하 벙커가 있는 집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쟁이나 핵의 위험 때문에 지은 집일 것입니다. 여러분! 지하벙커가 없는 집에 살아도 평안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 영원한 집
여러분!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집을 두 번 세 번 잠급니다. 더 견고한 자물쇠를 만듭니다. 하지만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마음은 잠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늘 무언가에 쫓깁니다. 문을 자물쇠로 꼭꼭 채웠지만 평안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땅의 집이 아니라 하늘의 집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잠시 살다가 말 집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집”입니다. “영원한 집”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어떤 결점도 없다는 뜻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어떤 불안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완전하고 어떤 결점도 없는 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최후의 소원입니다. 다윗은 이 땅에서 많은 것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최후의 소원은 하늘의 집이었습니다. 다윗의 소원이 여러분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후의 소원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최후의 소원은 저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왜 다윗은 이 영원한 집을 바라보았을까요?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집들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슬픔, 고통, 괴로움이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들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BC 1,405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이 왕이 됐을 때가 BC 1,010년입니다.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계속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까지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성입니다.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것을 다윗이 정복했습니다. 다윗은 거기에 성을 건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다윗성이라고 했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을 짓고 거기 살았으니 얼마나 안전했겠습니까?
다윗은 목동이었을 때는 들판에서 양들과 함께 잤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왕이 되었지만 사울에게 쫓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들이나 굴에서 잤습니다. 왕인데 집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이스라엘이 400년 만에 정복한 성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다윗이 살던 시대에 예루살렘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거기도 안전지대는 아니었습니다. 난공불락이었지만 죄악이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좋은 곳에서 다윗은 성경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부하 장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다윗은 죄악으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집 안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나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이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불안, 초조, 염려, 두려움, 기가 막힘, 안절부절, 황당함, 어이없음, 어쩔 줄을 모름.
이때 다윗이 바라본 것이 <영원한 집>입니다. 영원한 집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쳐들어오는 적(원수)들이 없어야 합니다. 죄가 침투하면 안 됩니다. 죽음이 없어야 합니다. 병 들지 않아야 합니다. 외롭지 않아야 합니다. 가족이 있어야 합니다. 슬픔, 고통이 없어야 합니다. 불안하지 않아야 합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집이 있을까요? 아무리 좋아도 이 세상에는 이런 집이 없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별 것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의 집은 아무리 좋아도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바라본 것이 <여호와의 집>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하늘의 집에 살 것을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살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저 영원한 아버지 집을 바라보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하늘의 집에 대한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바로 자신의 평생에 함께 했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2.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1) 선하심
‘선하심’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영어로 good, best 입니다. 우리말로 ‘최고로 좋다’, ‘제일 좋다’는 뜻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 제일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또 ‘무조건 좋다, 다 좋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무조건 좋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다 좋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좋으신 분, 다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푸른 풀밭, 맑은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와 험산 준령과 가파른 절벽으로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수금을 타고 있는데 사울 왕이 귀신에 들려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습니다. 죽을 뻔 했습니다. 사울을 피해 블레셋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살기 위해서 적장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척 한 적도 있습니다. 아들이 죽이려고 쫓아왔습니다. 시글락에 있을 때는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당할 때는 죽도록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길은 좋은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길에서 억울한 일을 만나셔도 기가 막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 좋으신 분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하면 다 좋아집니다. 꼭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택하여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은 시점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과일을 살 때 좋은 것을 고릅니다. 잘 익고 맛있는 것으로 고릅니다. 썩은 것, 흠이 있는 것, 나쁜 것은 고르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에 마트를 갔는데 한 상자에 10,000원도 안 돼는 복숭아가 있어요. 아내에게 사자고 했더니 아내가 살펴보더니 한 알이 썩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다른 상자의 안 썩은 것 한 알을 이 썩은 것과 바꾸어서 사는 것은 양심에 걸리는 일이냐고 물어요. 저는 양심에 걸리는 일은 아니지만 그냥 이 썩은 것 있는 상자를 그대로 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지고 와서 썩은 곳을 도려내고 제가 먹었습니다. 그 썩은 복숭아는 지금 제 뱃속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과일 고르듯이 자신의 자녀를 고르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고르셨습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은 우리가 썩은 복숭아와 같은 상태이었을 때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썩은 복숭아와 같은 상태에 있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보혈로 썩어서 곪고 있는 영혼을 고치셨습니다. 곪고 있는 부분을 도려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흠이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조건 없이 고르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런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자녀된 우리에게 항상 신실하신 것입니다. 저에게는 80이 넘으신 노모가 계십니다. 제가 잘 났든 못났든 저의 어머니에게 저는 항상 아들입니다. 저의 어머님이 제가 잘 할 때는 아들로 인정하시고 제가 못할 때는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시지 않습니다. 제가 잘 하든 못하든 저와 어머니의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확신하건데 저의 어머님은 제가 잘 하든 못하든 제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에게 선하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자녀 삼고 보니 시원치 않아요. 자꾸 죄를 지어요. 자꾸 딴 짓을 해요. 자꾸 엉뚱한 짓을 해요.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요. 선택한 것이 후회가 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회개도 하고 예배도 정성껏 드려요. 하나님 마음에 ‘내가 좀 참을 것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부르셔서 다시 자녀를 삼으셨어요. 그런데 또 엉뚱한 짓을 해요. 그래서 다시 버리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가 버리셨다 할까요? 하나님이 변덕쟁이신가요?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변치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이 선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셔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 창조 기사가 나옵니다. 이 창조 기사를 읽다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이 말이 1장에 7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사용된 “좋았더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말씀이 조금 달라요. 앞의 6번은 그냥 “좋았더라”인데 마지막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좋은 것이 하나씩 쌓이고 쌓여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더 좋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 인생은 점점 좋아집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나중이 더 좋아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것만 있지 않습니다. 나쁜 것도 많습니다. 좋은 일도 당하지만 나쁜 일도 많이 만납니다. 왜 그럴까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좋게 만드셨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만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당할 때 시간이 가면서 더 좋게 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또 나쁜 일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결국은 좋게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기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다 더해져서 하나님의 선을 이룹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인자하심
‘인자하심’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인자, 은총, 은혜, 무한한 자비, 용서, 이해”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를 신약성경 헬라어로는 아가페라고 합니다. 우리말 중에는 아가페를 대체할 단어가 없습니다. 보통 아가페를 사랑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사랑보다는 자비에 가깝습니다. 구약성경에 헤세드라는 단어가 총 245번 나옵니다. 모세오경 20번(319페이지), 선지서 27번(365페이지), 지혜서 13번(욥, 잠, 전), 역사서 58번(421페이지), 그리고 시편 127번(105페이지) 나옵니다. 헤세드라는 말이 시편에 월등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은 삶에서 겪는 희로애락을 진솔하게 표현한 성도들의 기도이며 노래입니다. 시편에는 인자, 긍휼, 은혜, 자비, 선하심, 사랑이라는 말이 수 없이 나옵니다. 성도들이 위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했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헤세드를 바라보았습니다. 고통 중에 성도가 구해야 할 것이 헤세드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낙심될 때나 아플 때나 성도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헤세드입니다. 시편의 시인들은 삶 속에서 헤세드 헤세드 헤세드 외치며 살았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성도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성도가 사는 방법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했습니다. 내 평생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내가 사는 모든 날 동안”입니다. 내가 사는 모든 날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택한 백성에게서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서 이웃 마을로 가는 직선도로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5-600m 정도 되는 길입니다. 저는 한 여름에 이 도로를 막 뛰었습니다. 뛴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림자를 제 몸에서 떼어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아주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저를 쫓아오지 못하고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직선도로를 있는 힘껏 막 달렸습니다.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아무리 달려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뛰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림자가 여전히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더 뛰었습니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림자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거머리 보다 더 질긴 녀석이었습니다. 저는 도로 한 복판에 서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림자를 떼어 놓을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가 아주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가만히 있다가 순간적으로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서 있다가 몸을 좌우로 아주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래도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림자를 떼어놓을까? 그러다가 아주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늘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늘에서 가만히 있다가 순식간에 햇볕으로 확 뛰어나오면 그림자가 미처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늘로 들어갔습니다. 그늘에서 손을 양지쪽으로 살짝 내밀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손 그림자가 바로 생겼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발을 쭉 뻗어보았습니다. 또 그림자가 즉시로 생겼습니다. 정말 그림자는 보통 녀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늘에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양지쪽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림자도 즉시로 따라왔습니다. 아무리 해도 그림자를 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림자를 어떻게 뗄 수 있습니까? 제가 빛의 속도 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면 그림자가 없어질까요?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여기서 ‘따르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다프인데 이는 “쫓아오다. 추격하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계속 따라왔습니다. 다윗이 이곳을 가도 따라오고 저곳을 가도 따라왔습니다. 안 따라오는 곳이 없었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죽을 고비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도망가다가 갈 곳이 없어서 해외로 도망갔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의 병사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중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그때 사울의 병사는 쫓아오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국경을 넘어 자신을 따라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단 한순간도 자신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림자를 내 몸에서 떼어내는 것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떼어내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제가 과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빛 보다 더 빨리 움직이면 그림자가 떨어지지 않을까요? 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빛 보다 더 빨리 움직이면 떨어진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사람이 빛 보다 떠 빨리 움직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3. 가장 아름다운 시인 ‘나’
시편 23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어떤 단어일까요? <여호와>일까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주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나>입니다. 그 이유는 ‘나’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3편에 “나”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13번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17번 나옵니다. 번역 과정에서 나라는 말이 4번 생략되었습니다. 나라는 말이 너무 많아서 부자연스러워 네 번을 생략한 것입니다. 나라는 말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많이 나오는 시가 시편 23편입니다. 23편이 6절까지 있으니까 한 절에 나라는 말이 세 번씩 나오는 셈입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계속 나, 나, 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23편에서는 나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나는 어떤 나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나’입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여호와라는 단어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17번의 <나>가 등장합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 있는 나입니다. 나는 철저하게 여호와께 의존적인 나입니다. 하나님 없는 나는 생각할 수 없는 나입니다. 하나님 없는 다윗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지난 밤 자기 전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잤습니다. 목사님이 초강력순간접착제를 샀습니다. 성능이 궁금해서 접착제로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안 떨어지는 거예요. 강제로 떼어냈더니 피부가 벗겨졌습니다. 한 쪽은 벗겨지고 다른 한 쪽은 벗겨진 피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붙어 있는 것을 칼로 긁어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야 회복이 됐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초강력순간접착제와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다윗은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착’ 붙습니다. 환난이 오거나 시험이 오면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착’ 붙는 거예요. 그리고 안 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께 착 붙는 초강력순간접착제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포스트잇 신앙이라는 거예요. 포스트잇은 바람만 살짝 불어도 떨어져요. 여자들이 그냥 떼도 떨어져요. 솔로몬은 여자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졌어요. 여러분! 포스트잇 신앙이 아니라 초강력순간접착제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엊그제 길을 가는데 앞에서 여학생 세 명이 걸어와요. 중학교 1학년 정도 돼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예쁩니까? 아이들을 지나쳐 가는데 뒤에서 ×× 욕이 툭 튀어나와요. 깜짝 놀라서 쳐다봤어요. 요즘 아이들 입에서 천박스러운 욕이 막 튀어나와요. 요즘 아이들은 욕이 아니면 말을 못할 정도로 욕을 많이 해요. 요즘 사람들을 건드리면 욕, 원망, 불평, 분노가 막 튀어나와요. 작년에 운동을 하려고 교회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어떤 남자 분이 운동기구에 누워서 그냥 있어요. 조금 기다리다가 안 하는 것 같아서 “선생님, 안하시면 제가 좀 하면 안 될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양반아! 하는 거 안보여?”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라서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막 도망을 왔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속에 분노가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짜면 욕, 원망, 시기, 미움, 분노가 나와요.
걸레를 짜면 때 구정물이 나옵니다. 걸레 인생이 되지 맙시다. 뾰루지를 짜면 피지가 나옵니다. 뾰루지 인생이 되지 맙시다. 예수님을 짜면 무엇이 나올까요? 우리를 향한 위한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십자가 사랑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을 짜면 무엇이 나올까요? 찬송이 나옵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가 나옵니다. 다윗은 온갖 역경 가운데 살았습니다. 사람이 고난과 역경에 찌든 삶을 살면 짜증과 원망이 나옵니다. 불평과 저주가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온갖 역경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짜증과 원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시가 나오고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승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아름다운 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곤고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인생길이 얼마나 힘이 들어요? 정말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원망 불평이 많이 쌓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당하는 아픔을 아름답게 노래로 승화시킵시다. 원망 불평이 가득한 나가 아니라 아름다운 시인으로서의 나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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