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

조회수 : 21회

본문 : 시편 23:4
주일오전예배 | 2021-05-09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여러분! 고비 사막을 아십니까? 고비 사막은 몽골과 중국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막입니다. 길이(남서쪽~북동쪽)1,610 km이고 폭(북쪽~남쪽)800 km입니다. 봄이 되면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하와이까지 괴롭히는 황사가 여기서 날아옵니다. 이 고비 사막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있습니다. 고비는 원래 비가 많이 오는 곳이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고비는 하나님께 햇볕을 내리쬐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비의 간청을 들어주시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거셨습니다. 그것은 다시는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비는 햇볕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그 조건을 수락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비에게 햇볕을 내려주었습니다. 고비엔 차츰 물이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땅이 비옥하고 살기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고비는 메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고비엔 계속 햇볕만 내리쬐었습니다. 결국 고비는 사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비는 하나님께 햇빛과 비를 골고루 섞어서 알맞게 내려달라고 기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고비는 황량한 사막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맑게 갠 날만 계속되면 우리 인생도 사막과 같이 메마른 인생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맑은 날이 좋은 것은 흐린 날, 비 오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흐린 날,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그리고 맑게 갠 날이 적당히 있어야 우리 삶이 아름답습니다. 맑은 날만 계속되면 인생은 사막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와 함께 있으면 더 없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때를 따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목자는 때로 기운이 소진된 영혼을 소생케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목자와 함께 있는 양의 축복입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항상 목자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목자는 느닷없이 양떼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했습니다. 왜 목자는 양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적 유익이 무엇이고 또 그 안에서 영혼의 생수를 발견하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말은 죽음의 그림자 같은 골짜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 “죽음의 그림자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죽음의 그림자와 같이 음산한 분위기가 나는 기분 나쁜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때로 우리 인생은 매우 깊은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같은 골짜기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걷는 길입니다. 어떤 분은 그 길을 통과했을 것이고 어떤 분은 아직 통과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 그 길을 걷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그 골짜기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인생이 고달프고 힘이 들었는지 다윗은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을 <죽음의 그림자 같은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 같은입니다. 죽음의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죽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을 지날 때 겁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겁을 먹고 주저앉습니다. 어떤 경우는 뒤돌아갑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그림자 같은 골짜기를 보고 뒤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장망성(멸망의 도시)을 떠나 시온성을 향해 가는 크리스찬의 인생역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크리스찬이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크리스천을 불렀습니다. “여보세요, 잠깐만요! 그 길로 가면 정말 어마어마한 사자 두 마리가 길 가운데 떡 버티고 있소. 그 놈들이 잠든 채 하지만 실제론 깨어 있단 말이요. 가까이 갔다간 뼈도 못 추려요.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되돌아가는 길이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불신과 겁쟁이였습니다. 크리스천은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요? 안전하게 지나가는 방법은 없나요?” 그러나 불신과 겁쟁이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런 방법은 없어요. 헛걸음 하지 말고 우리랑 함께 돌아갑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들의 말에 눈도 깜짝이지 않고 말했어요. “하지만 난 돌아갈 수 없어요. 그 곳은 머지않아 불 심판을 받게 될 거예요. 그곳에서 죽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이 힘든 길을 가겠어요.”  

그리고 크리스천이 몹시 비좁은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약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문지기가 사는 조그만 오두막집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의 앞쪽에 두 마리의 사자가 길을 막고 누워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제 죽음만이 있다고 생각한 크리스천은 오던 길을 되돌아갈까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문지기(경계)가 크리스챤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그렇게도 용기가 없으십니까(4:40)? 사자들은 사슬에 매여 있으니 무서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자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고 믿지 않는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사자들을 거기에 매어둔 것입니다. 길의 한 가운데로 오시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안전하게 지나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아주 조심스럽게 길 한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을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문지기의 말처럼 사자들은 쇠사슬 매여 있었습니다. 사자는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이 골짜기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림자 같은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가 아닙니다. <죽음의 그림자 골짜기>도 아닙니다. <죽음의 그림자 같은 골짜기>입니다. 죽음의 그림자처럼 보일 뿐이지 죽음의 골짜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골짜기를 지날 때면 인생이 끝날 것 같습니다. 인생이 정말 고달픕니다. 낙심도 되고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이러다 내가 죽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합니다. 이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가 아닙니다. 죽음의 그림자 골짜기도 아닙니다. 죽음의 그림자 같은 그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는 골짜기일 뿐입니다. 겁만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결박해버리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러면 목자가 양을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광야에는 동서로 험준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골짜기는 요단강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골짜기 깊이는 250m가 되는 곳도 있습니다. 경사가 급격하고 동서로 골짜기가 형성되어 한낮에도 햇볕이 전혀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낮에도 밤처럼 어둡습니다. 풀이 자랄 수 없는 광야입니다. 게다가 동굴에는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는 맹수들이 숨어 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음산합니다. 양떼가 지나가기에는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그런데 목자는 왜 이 위험한 곳으로 양들을 인도할까요? 

이곳을 지나야 요단 동편에 있는 푸른 풀밭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깊은 골짜기 가운데에는 생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양들은 이곳에서 물을 마심으로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목자는 이곳을 지날 때 양들의 안전을 더욱 신경 썼습니다. 두려워 떠는 녀석은 직접 안고 지났습니다. 사나운 맹수들을 막대기로 쫓으며 신속하게 지났습니다. 이곳에서 양들은 목자의 보호를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곳은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그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목자이셨습니다. 사나운 맹수들로부터 보호해주셨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골짜기에서 생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새 힘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지만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은 재난, 상해, 상처, 슬픔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거기서 어떤 재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여호와라는 말이 6190번 나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3598, 예수라는 말은 1391번 나옵니다. 세 단어를 합치면 11089번입니다. 성경은 장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189장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단어가 1장당 평균 10번씩 나오는 꼴입니다. 어린양, , 주 등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를 합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성경에 왜 이렇게 하나님이 많이 나올까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세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기드온, 삼손, 사무엘, 다윗 등등 그들의 스토리에서 하나님을 빼면 그들의 인생이 전개될 수 있나요? 저는 결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왜요? 저도 하나님을 빼면 제 인생에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수 없이 많은 사건들 중에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삭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어디서요?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말로만 듣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목자로 만났습니다. 성경의 스토리는 모두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던 스토리입니다. 그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왜 이렇게 정신적인 질병이 많습니까? 서로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보세요. 전부 혼자예요. 우리나라 전국 가구 수가 2011년에 2,000만 가구를 돌파했습니다. 그런데 인구는 5,000만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니까 가구당 가족 수가 평균 2.5명입니다. 저희는 다섯 명입니다. 보통 4인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사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말이 됩니다. 3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 이러지 않았습니다. 부모 형제들이 같이 살았습니다. 함께 살면서 상처도 받지만 인내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함께 울고 웃으면서 그 안에서 인격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입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내리고 혼자 해결하고 그러다가 더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여러분! 무슨 문제가 생기면 혼자 끙끙 앓지 마세요. 그거 안 좋은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상의하세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함께 해결하는 거예요. 때로는 사람 때문에 상처도 입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새 힘이 생기는 거예요. 살아갈 소망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이 함께 하는 삶의 복이에요. 

더 나아가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께 고백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우세요. 그러면 다윗이 조상들이 만났던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도 다윗이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죽음의 그림자 같은 골짜기에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는 거예요. 그분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체험하는 거예요.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설교 시간에 말로만 듣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제 인생에 잊지 못하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고생스러웠던 시기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과 인간관계가 끈끈합니다. 깊은 우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나요? 마찬가지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생스러운 인생길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인생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끈끈해지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거예요. 인격적으로 깊은 사귐이 있는 거예요. 

성경은 바로 이 함께 하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의 별칭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합니다. 보혜사라는 뜻이 (우리) 곁에(옆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43:1~3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물 가운데로 지날 때도 함께 하십니다. 강을 건널 때 물이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합니다. 불 속으로 행할 때도 불이 우리를 태우지 못합니다.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어떻게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했습니다. 지팡이는 뭐고 막대기는 뭘까요? 둘은 같은 것 같은데 차이가 있습니다. <지팡이>는 길이가 길고 한쪽 끝이 구부러져 있습니다. 구부러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성지에 가면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뿌리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나옵니다. 이런 가지는 그대로 묘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뿌리에서 가지는 길고 얇은데 이것을 잘라서 목자의 지팡이로 사용했습니다. 지팡이를 세우면 사람의 키를 훨씬 넘습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몇 가지 용도로 쓰입니다. 첫째, 양을 인도할 때 쓰입니다. 양은 근시입니다.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사야 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양은 제 멋대로 갑니다. 그래서 종종 대열을 이탈합니다. 때로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수풀에 몸이 걸려 발버둥 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대열을 이탈한 양들을 인도하는 도구가 목자의 지팡이입니다. 목자는 지팡이로 곁길로 가는 양의 옆구리를 쳐서 바른 길을 가게 합니다. 

둘째, 지팡이는 양을 재촉할 때도 쓰입니다. 양들은 게으름을 피울 때가 있습니다. 풀을 뜯느라 갈 길을 가지 않고 머뭇거릴 때도 있습니다. 때 목자는 지팡이로 양의 엉덩이를 때립니다. 빨리 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재촉하시는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 음성은 말씀으로도 들리고 삶 속에서도 들립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재촉의 지팡이입니다. 신앙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고난의 지팡이를 드셔서 우리의 엉덩이를 때리십니다. 천국 가는 길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환난을 당하는 일은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고난의 지팡이로 우리의 엉덩이를 때리실 때 빨리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셋째, 지팡이는 양을 다스리는데 사용합니다. 목자는 막대기를 듭니다. 그리고 그 막대기 아래로 양을 지나갑니다. 목자는 양이 지나갈 때 그 막대기로 양을 한 마리씩 헤아립니다. 목자는 지팡이라 자기의 양을 보살펴줍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되시는 주님은 말씀의 지팡이로 여러분을 지적하여 부르셔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양이라교회는 하나님의 지팡이 아래에 있습니다. 

넷째, 지팡이는 규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지팡이는 히브리어로 쉐베트입니다. 쉐베트는 지팡이, 막대기, 곤봉, , 지휘봉라는 뜻입니다. 군대 가면 지휘관이 있습니다. 지휘관이 지휘봉을 들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군대의 규율을 잡는 것입니다. 지팡이로 위험에 빠진 양을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지팡이는 양들을 구원하고 이끄는 사랑의 도구입니다. 

<막대기>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막대기는 올리브 나무의 줄기에서 나온 것을 잘라서 만듭니다. 이것은 한쪽 끝이 망치처럼 되어 있습니다. 막대기는 끝이 뾰족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끝에 철심이 박혀 있습니다. 지팡이는 길지만 막대기는 짧고 굵습니다. 목자가 지팡이는 손에 들고 다닌다면 막대기는 허리에 달고 다닙니다. 목자는 사나운 맹수들이 양을 공격할 때 이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목자는 막대기로 맹수들을 내려칩니다. 뾰족한 부분으로 찌르기도 합니다. 때로 멀리 있는 맹수를 향해 지팡이를 던지기도 합니다. 양들에게 지팡이가 바른 길로 이끄는 인도의 도구라면 막대기는 보호의 도구이었습니다. 목자는 막대기와 지팡이로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덤비는 맹수와 싸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을 찢고 삼키기 위하여 달려드는 원수를 막대기로 내리치십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시고 자신의 피로 속죄를 보장하시며 양을 치는 막대기로 보호하여 주신다는 사실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지팡이가 나를 인도하십니다.” 혹은 주의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십니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아니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인도하십니이다이렇게 고백해야 문맥상 맞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안위(나함)>라는 말은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위로하다(comfort)’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안위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안위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난날 어렵고 힘들 때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화살이 사망에서 날아오르는 전쟁 중에서, 부하들이 자신을 배신할 때, 자녀들 때문에 속이 썩을 때,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괴로울 때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윗은 지난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생각하니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생각하세요. 지난 날에 그렇게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챤인 사자의 골목을 지나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리고서 문지기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의 문 앞에 이르러 손뼉을 치며 문지기를 불러내었습니다. “선생님, 이 집은 무슨 집입니까? 오늘밤 여기에서 묵을 수는 없을까요?” 그러자 문지기가 대답했습니다. “이 집은 산의 주인되시는 분이 지으신 집인데 순례자들에게 안도감과 평안한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 안식이 있습니다. 또 다른 푸른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연의 골짜기, 절망의 골짜기, 실패의 골짜기, 불행의 골짜기, 가난의 골짜기, 불안과 염려의 골짜기, 질병의 골짜기, 배반의 골짜기 등등,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우리를 사자와 같이 위협해도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슴에 생각하며 담대히 나갑시다. 

여러분! 이미 사단의 세력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력화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합시다

이전글 노인 설교
다음글 푸르고 푸른 주님의 청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