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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세 부류의 신앙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입니다. 이 세 부류는 신체적인 나이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구분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아이와 은혜 안에 있는 청년과 은혜 안에 있는 아비입니다. 신체적인 나이가 많아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했던 니고데모는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자였으며 나이도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반대로 나이는 어린데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아비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젖 뗀 후에 성전에서 머물고 있던 사무엘은 비록 어린 아이였지만 영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아비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은혜 안에 있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전혀 두려움 없이 들어갔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영적으로 매우 강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 이 세 구분은 이 세상 호적에 있는 나이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하늘나라 호적인 생명책에 따른 구분입니다.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저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은 하늘나라 호적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늘의 호적에 따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아이입니까? 청년입니까? 아니면 아비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영적인 초등학교에 다니고 계십니까? 영적인 대학에 다니고 계십니까? 아니면 모든 학교와 시험을 졸업한 아비가 되어 계십니까? 본문에 아이란 말이 1회, 청년이란 말이 2회, 아비란 말이 2회(하나님 아버지까지 포함하면 3번)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강조점이 청년과 아비에게 있고 아이게는 그리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학교 과정에서 어린이 집, 유치원을 다니고 계시다면 빨리 졸업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장성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 상태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물러있지는 마십시오. 입혀주고 먹여주며 안아주어야 하는 아이에서 빨리 벗어나십시오. 아기와 같은 연약한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강한 청년이 되십시오. 더 나아가 흔들림이 없는 아비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은혜는 계속 자랍니다. 은혜는 결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성인이 되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시간 저는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청년들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청년들의 힘의 근원에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년들이 가진 힘으로 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청년들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청년들에게는 용솟음치는 힘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힘이 있고 신체적으로도 힘이 있는 나이입니다. 국어사전은 청년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창 힘이 넘치는 시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요한도 청년들은 힘이 세다고 했습니다. 14절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강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이스퀴로스입니다. 이스퀴로스는 ‘힘이 있는, 힘이 센, 튼튼한, 강력한’이라는 뜻입니다. 청년의 특징은 강한 힘에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말한 강함은 어떤 의미의 강함일까요? 신체적인 강함일까요? 육체의 힘일까요?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강함은 신체적인 의미에서 강함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강함입니다. 신앙적인 강함, 믿음의 강함입니다. 요한은 신체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젊은 사람들을 청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청년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년입니다. 이 자리에는 여러 연령층의 분들이 앉아계십니다. 청년도 있고 장년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영적으로 강한 청년이 되시기를 요청합니다. 믿음이 강하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80세, 나는 안 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렙은 가나안 정복하고 분배할 때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14:10~12) 갈렙은 청년과 같은 힘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마음과 영혼이 푸르고 푸른 청년으로 삽시다. 영적인 힘이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청년입니다. 세상에 청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도 청년이 있습니다.
청년의 특징은 새로움에 있습니다. 청년은 푸를 청(靑)자에 연 년(年)자를 써서 ‘푸른 나이’ 또는 ‘푸른 세대’라는 의미입니다. 청년은 새로 오는 세대입니다. ‘청년’이 헬라어로 네아니스코스입니다. 네아니스코스는 ‘새로운, 최근의, 낡지 않은, 신선한, 젊은’이란 뜻의 네오스(νέος)에서 온 말입니다. 청년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는 새로움, 신선함, 힘 등등입니다. 청년은 새 세대입니다. 그들은 낡은 것에 매여 있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새롭게 생각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지 않고 새로운 사고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청년들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청년들의 특징은 새로움의 추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움은 어떤 의미의 새로움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주의 청년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의 새로움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의 왕의 결론은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전에 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 것이 없습니다. 모두 죄 아래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새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새 것은 저 하늘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 있는 것입니다. 주의 청년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위에 있는 것으로 새로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은혜를 받았을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는 새롭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이 새로워지는 느낌, 마음이 정결해지는 느낌 이것이 은혜 받았을 때의 감정입니다. 세상은 하늘의 은혜로만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만 새로워질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추구하십시오. 믿음으로 새롭게 되십시오. 예수님 믿으십시오. 회개하십시오. 회개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주의 청년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 있는 청년입니다.
젊음이 아름답고 힘이 있어 좋지만 이 시기에는 위험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젊을 때는 강한 만큼 강한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은 육신의 죄의 유혹에 강한 시험을 받습니다. 강하고 젊은 사람일수록 유혹은 더 강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힘이 강한 주님의 청년들에게도 강한 시험이 있습니다. 14절에 끝에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젊은이들에게 흉악한 자의 강한 도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강한 자에게는 강한 시험이 있는 법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로 나타난 것이 흉악한 자의 시험입니다. 요셉이 세상을 구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다윗은 수금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물맷돌로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마귀가 가만히 두었을까요? 아닙니다. 마귀는 사울을 충동해 다윗을 향해 창을 던지게 했습니다. 강한 자에게 강한 시험이 있습니다. 이런 법칙은 신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은 강한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대통령은 더 강한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장, 대통령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강인함은 쓸모가 없어집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강하게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블레셋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중에 삼손 보다 더 강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끊임없는 블레셋 사람들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강렬한 육체의 유혹이었습니다. 삼손은 그 시험으로 영적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강함이 육체의 정욕 때문에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젊고 강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욕에 쓰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청년은 자신 속에 있는 동물적인 힘이 자신의 영을 끌고 가지 못하도록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더욱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체적인 힘, 신체적인 강인함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크고 힘이 센 말을 좋아합니다. 또 사람들은 튼튼한 다리, 육체의 강함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당신을 바라보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건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육체의 힘 보다 영적 힘을 가진 주의 청년이 되십시오.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 세 부류 중에 청년들은 영적 중산층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중산층'은 중간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는 계층으로 최근에는 주로 샐러리맨을 지칭합니다. “중산층이 많아야 사회가 안정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산층이 많은 사회가 활력이 있고 강합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 사회가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중산층을 살리려고 여러 가지 정책을 펼칩니다. 교회도 중산층이 많아야 건강하고 힘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도 중산층이 있어야 하고 영적으로도 중산층이 있어야 합니다. 중산층이 바로 청년들입니다. 오늘 교회는 청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청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잃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의 중산층이 되십시오. 영적인 힘과 하늘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주님의 청년들이 되십시오. 아비가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들림이 없이 견고한 아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 전에 우리는 청년이 되어 주를 위해 힘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의 청년들의 힘의 원천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주님의 청년들의 강인한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청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4절)
“너희 안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안에 받아들여진 말씀이 있습니까? 성경 안에 기록된 말씀 말고 내가 내 속에 받아들인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이 진심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마음 속에 받아들인 말씀입니다. 귀로 듣기만 한 말씀이 아니라 내 삶에서 경험되어진 말씀입니다. 내가 받아들인 내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말씀, 어떤 권사의 말씀이 아니라 내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다가 눈이 꽂히고 마음에 감동된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말씀이 내 힘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나가려고 할 때 사울이 자신의 군복과 칼과 갑옷과 투구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갑옷과 투구와 군복을 입었지만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익숙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삼상17:39). 다윗은 익숙하지 않은 사울의 것들을 벗었습니다. 왕의 갑옷과 투구와 칼이 얼마나 좋은 것이었겠습니까? 하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것이어야 합니다. 남의 것은 소용없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받아들인 내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속에 내 말씀이 있는 사람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내 말씀이 있는 사람은 완전무장한 군인과 같습니다. 다윗, 다니엘과 같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십시오. 내가 성령에 감동받은 내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거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메노입니다. 메노는 ‘남아 있다, 그대로 남아 있다, 산다, 거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들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13절과 14절에 쓰다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요한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열성적으로 편지를 쓰고 또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편지를 쓰고 또 쓴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13절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14절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청년들을 위해 과거에도 편지를 썼고 지금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에게 쓴 편지가 청년들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싫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들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더하거나 뺀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메노는 매우 친밀한 교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산다(NIV, the word of God lives in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산다는 말은 함께 생활한다는 뜻입니다. 청년들은 말씀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청년들 안에서 집을 짓고 살면서 청년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왜 강할까요? 청년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거하다’(메노)라는 말을 아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요14:20)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입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기록한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에 모두 이런 흐름이 있습니다. 왜 요한은 거한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고 있을까요? 말씀만이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말씀이 거하게 하십시오.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말씀이 살게 하십시오. 말씀이 마음의 변두리에 살게 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마음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게 하십시오. 말씀이 마음의 절친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꿀송이처럼 단 말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의 강력한 힘이 됩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면 찔러도 아프지 않습니다. 속에 말씀이 있으면 때려도 안 아파요. 말씀이 없기 때문에 실망하고 낙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세요. 크리스천의 힘은 말씀에서 나옵니다.
우리 마음에는 말씀의 집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말씀의 집을 지으십시오. 집을 짓듯 말씀을 한 절씩 차곡차곡 마음 속에 쌓으십시오. 히브리서 13:5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무엇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생각하고 기도하고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말씀을 쌓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쌓이고 또 쌓여 집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기둥을 세우고 말씀으로 벽을 쌓고 말씀으로 지붕을 씌우십시오. 마음 속에 지은 말씀의 집이 환란의 바람이 불 때에 그 바람을 피하게 하는 나의 피난처가 됩니다. 하나님을 바꾸어 놓은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의 집은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말씀의 집을 지으십시오.
세 번째로 청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한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주님의 청년들이 강한 힘으로 한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의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습니다. 14절 끝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가 과거에 청년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청년들의 강함, 청년들 안에 있는 말씀, 그리고 청년들이 흉악한 자를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지금 다시 편지를 쓰는 이유는 청년들이 흉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3절 하반절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청년들은 과거에 흉악한 자를 이겼고 지금도 흉악한 자를 이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에도 흉악한 자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청년의 승리는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아주 확실한 것입니다. ‘흉악한 자’는 마귀입니다. 그는 반역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는 저 하늘 시온성을 향해가는 청년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그 흉악한 자들을 무찔렀고 무찌르고 있으며 다시 무찌를 것입니다.
그러면 청년들은 어떤 의미에서 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그들의 주인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탄을 섬겼고 사탄의 좋은 벗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주인이 생겼습니다. 청년들은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이겼습니다. 때로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정말 많이 넘어졌습니다. 지금도 넘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실거렸고 때로는 주저앉았습니다. 어떤 때는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중간에 넘어지기는 했지만 사탄의 시험에서 이겼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흉악한 자의 수 없이 많은 시험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지독하게 시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한 은혜를 베푸셔서 사탄에게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께 패한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미 그 흉악한 놈은 패한 원수입니다. 끝난 원수입니다. 주의 청년들은 흉악한 자를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 안에 있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 넘어져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시험에 빠져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시험을 이겼고 이기고 있고 앞으로도 이길 것입니다. 숭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사탄이 여러분을 공격해올 때 가만히 있지 마시고 사탄을 공격하십시오. 우리의 공격 무기는 찬송과 기도와 말씀입니다. 칼과 창이 아닙니다. 제가 청년 때였습니다. 청년부 중에 하나가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때는 귀신들림이 많았습니다. 우리들이 찬송하고 기도하자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가버렸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탄이 방패가 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공격하면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록된 말씀으로 사탄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이시자 사탄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씀으로, 예수 이름으로, 기도와 찬송으로 우리를 시험해 오는 마귀를 한 방 먹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절대 떨지 마십시오. 우리가 저항하면 그는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자신을 위한 방어가 전혀 없습니다. 도와주는 자도 전혀 없습니다. 사탄은 외톨이, 영적 세계의 왕따입니다. 따라서 저항하는 자체가 우리의 승리인 것입니다. 저항하십시오. 주의 청년의 기백을 가지십시오.
사탄은 방패만 없는 것이 아니라 공격무기도 없습니다. 사탄이 가진 무기는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이제 사탄에게는 사망권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무기까지 깨뜨리셨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단지 시험할 뿐입니다. 미혹할 뿐입니다. 이제 사망 권세는 주님의 허리에 있습니다. 용기를 가집시다. 믿음 안에서 굳게 섭시다.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하나님은 왜 청년들에게 흉악한 자의 시험을 허락하실까요? 청년들에게는 힘과 기백이 있습니다. 만약 시험이 없다면 청년들은 자만에 빠져 멸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은 청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주 높은 한 수입니다. 하나님은 고수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가 성도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상은 성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저는 집안에 청소기를 봅니다. 청소기는 집안에 떨어진 온갖 먼지, 찌꺼기들을 흡수해버립니다. 청소기를 열어보십시오. 10년 전에 먹은 것이 꿈틀거릴 정도입니다. 만지면 병에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청소기가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집안은 먼지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마귀는 먼지를 흡수해 집을 깨끗하게 해주는 청소기와 같습니다. 마귀는 시험을 통해 청년들 속에 있는 불순물들을 청소기처럼 흡수해버립니다. 그래서 청년의 순수함만을 남게 합니다. 마귀는 미움, 시기, 오만, 혈기, 쾌락, 사치, 나태함, 거짓, 정욕을 흡수해갑니다. 마귀는 영적인 청소기입니다. 스파비스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청소물고기가 있었습니다. 발을 넣고 있으면 발의 각질을 먹어주는 청소물고기입니다. 마귀는 우리 영혼의 각질을 청소해주는 청소물고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참아야 합니다. 시험 후에 우리는 욥처럼 순금처럼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시험을 통해 욥을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바보입니다.
여러분은 아름답고 힘이 있던 청년의 때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지금 청년이신 분, 아직 조금이라도 몸에 청춘의 아름다운 빛이 남아있는 분! 지금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청년의 때는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거룩하게 사십시오.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시간을 아껴 주님의 거룩한 일을 하십시오. 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청년의 추억이요? 청년의 낭만이요? 제가 장담합니다. 다 쓰레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거룩한 청년으로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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