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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1922~2020)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동전을 던져 결정했습니다. 소크라테스(BC 470-399)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다이모니온(daimonion)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는 몰라도 항상 자신에게 옳은 길을 제시해준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이몬의 소리를 내면의 소리 또는 양심의 소리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이몬을 지성의 신이라고 합니다. 다이몬의 소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크라테스만이 압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잠시 방에 불을 끄는 게 더 좋은 결정을 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두운 환경에서 인간이 더 객관적인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와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조명 변화에 따른 참가자들의 심리를 조사한 결과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조명이 밝으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관계자는 조명이 밝을수록 자신의 기분과 취향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결정 결과가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조명이 낮을 경우 사람들은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을 한 뒤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조명이 밝을수록 기존의 취향이나 기분이 더욱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빛을 열로 받아들이며 이 열이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따져봐야 할 문제가 있으면 평소보다 실내의 조명을 낮추는 게 훨씬 현명한 결론에 도달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수님은 매우 과학적이고도 심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하시기 전에는 밤에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마14:23, 막6:49, 눅5:16, 눅11:1). 마가복음 3장 13절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당신께서 원하는 자들을 12제자로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는 밤이 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12제자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달 전에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은 구세주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의 신앙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선택한 곳이 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변형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도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 전날에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도 하시고 무언가 중요한 일을 결정하실 때 가신 곳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은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일을 수행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중요한 일은 밤에 혹은 새벽에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산인 교회에 올라와서 기도하며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산에 올라가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와 내기를 하듯 동전을 던지지 마십시오. 다이몬의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에 최선을 아십니다. 내가 보기에 나빠도 좋은 길이 있고, 내가 보기에 좋아도 나쁜 길이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무리와 제자라는 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세 번째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했는데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이 산은 어디일까요? 사람들은 이곳을 갈릴리 호수 북쪽(북서쪽으로 8km정도)에 있는 핫틴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산의 정상은 평지라고 합니다(눅6:17).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팔복을 선언하셨다고 해서 팔복산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 산에 팔복교회를 세웠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올라간 산이 시내산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산을 신약의 시내산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처럼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이 산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산의 이름이나 이 산이 어떤 산이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에 중요성이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당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자리를 잡으시고 앉으셨습니다. 앞뒤 상황을 볼 때 예수님은 일부러 한적한 산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간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지금 예수님은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무리는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일반 대중들을 말합니다.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사역으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많은 부분이 길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대화를 하시면서 성읍을 거니셨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도 예수님이 걸어가실 때 뒤에서 옷을 만졌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막15장)도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나면서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도 길에서 고쳐주셨습니다. 길에서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역을 길에서 하신 것은 아닙니다. 손 마른 사람은 회당에서 고치셨습니다(마12장). 열병으로 앓고 있던 베드로의 장모는 집에서 고쳐주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들로, 산으로, 바다로 쉴 새 없이 다니시며 3년 공생애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에 자리를 마련하고 앉으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공식적 교육의 자세이었습니다. 유대인 가정에는 아버지의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식탁에도 아버지만 앉는 의자가 따로 있습니다. 다른 자리는 돌아가면서 아무나 앉을 수 있지만 아버지 자리는 아버지만 앉을 수 있습니다. 또 집 안에 아버지 의자가 있습니다. 이 의자에는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을 때에도 아무도 앉을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만 앉는 의자입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중대한 사안을 가족들에게 알릴 때 이 의자에 앉아서 말을 합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중요한 용무도 이 자리에 앉아 계실 때 말씀드립니다. 이 의자는 아버지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산은 예수님의 의자입니다. 산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식 자리, 엘리베이터, 회사의 로비 등 아무 곳에서나 회사의 중요한 사항이 회사의 대표에게 보고되지는 않습니다. 또 중요한 사항이 이런 곳에서 결재가 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안을 듣고 말해야 할 때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방으로 가지!” “내 방으로 와!” 사장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보고를 받고 거기서 결재를 합니다. 대표의 권위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장의 의자는 크고 좋습니다.
엑스 카테드라(ex cathedra)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한 있는 자에 따르면”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의자로부터’(from the chair)라는 뜻입니다. 의자에서 권위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로마 교황은 의자에 앉아 있을 때에만 천주교의 결정 사항을 공포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교황이 교황좌에 앉아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포할 때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황무오류, 성좌선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엑스 카테드라입니다. 교황의 권위가 이 의자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황의 의자는 순금으로 둘려있습니다. 이런 것은 고대 왕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의자를 크게 만들어 각종 진귀한 보석으로 아름다운 장식을 했습니다. 산은 하나님의 성좌 선언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시더니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의자는 황금 의자도 아닙니다. 크고 좋은 사장의 의자도 아닙니다. 보석으로 장식된 고대 왕의 의자도 아닙니다. 온 우주가 모두 예수님의 의자입니다. 시편에 하나님께서 물 위에 자신의 의자를 베푸셨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보좌를 하늘에 베푸셨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보좌를 산에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만의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왕들이 흉내낼 수 없는 곳에 앉으십니다.
왜 예수님이 산에 앉으셨을까요?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보훈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할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길을 가시면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길을 거닐면서 가볍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의 자리에 앉으셔서 진지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도덕 선생님은 흰색, 노란색, 빨간색 분필을 가지고 다니시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나오면 흰색으로 밑줄 치셨습니다. 중요한 것에는 노란색을 치셨고 더 중요한 것에는 빨간색을 치셨습니다. 강조하시는 것에는 빨간색 분필로 별표를 하셨습니다. 시험에 꼭 나오는 것은 별표를 몇 개씩 하시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이 이 꼭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강조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꼭 들어야 할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하십시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기도의 산에 오르십시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으십시오. 예수님처럼 하십시오. 고민이 있다면 예배의 산에 오르십시오. 아픔이 있다면 찬양의 산에 오르십시오. 거기서 눈을 감고 주님처럼 어둠 속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산에서 중요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산에 올라가야 내 인생에 중요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말씀을 아무 곳에서나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산에 가셨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디서 나는지도 모르는 다이몬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분에 따라 결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고민해도 인간 속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영적인 산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교회는 오늘 우리가 올라야 할 영적인 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산에 올라야 합니다.
두 번째로 무리와 제자라는 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우리 독자들을 의아하게 하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똑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1절에서는 ‘열 두 제자’라고 하더니 2절에서는 ‘열 두 사도’라고 바꾸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사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1절을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동일한 사람들을 1절 앞부분에서는 무리라고 부르더니 뒷부분에서는 “제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무리가 갑자기 제자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무리’는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반면에 제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마데테스, μαθήτης)입니다. 헬라어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배우다, 익히다’는 뜻의 동사(만다노, μανθανώ)에서 온 말입니다. 특별히 마데테스(μαθήτης)의 본래 뜻은 ‘자신들의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전문적으로 쏟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또 마데테스는 ‘배우는 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귀의자(歸依者)’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자는 12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반 성도를 가리킵니다. 즉 모든 기독교 일반 신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무리를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실 때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따라왔고 어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은 산에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을 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자로서의 제자’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배우는 학생을 말합니다. 또 제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명령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눅14:26,27,33). 그리고 제자는 최고의 의무를 완수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제자 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마28:19).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리가 되지 마십시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군중이 되지 마십시오. 정해지지 않았던 불특정 다수가 되지 마십시오. 군중은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할 때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 뒤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마귀가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군중은 마귀에게 이용당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많은 무리 중에 콕 찍어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셨는데 자신을 군중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께 배우는 학생이 되십시오.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제자가 되십시오. 군중은 때에 따라 세상의 도구, 악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성경은 산 위에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2절에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대화를 할 때 ‘말을 한다’, ‘이야기를 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 대신에 종종 ‘입을 열었다’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습니다. 언제 이런 표현을 쓸까요? 말을 전혀 안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하면 ‘입을 열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또 정부나 사회 주요 기관에 있는 사람이 중요한 일에 대해 언급할 때도 ‘입을 열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하고 진지한 말을 할 때 ‘입을 열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냥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입을 열었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하시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자리를 잡으시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입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심령’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와 있지만 성경 원문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나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성경도 복이라는 말이 맨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자리를 잡으시고 앉으신 다음에 첫 번째 하신 말씀은 “복되도다!”입니다. 예수님은 복이라는 말을 8번이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팔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산에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복입니다. 그러면 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기에 예수님은 무리를 산으로 끌고 가셔서 입을 어렵게 여시더니 첫 번째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이라는 단어하고 꼭 같은 말이 시편 1편 1절에 나옵니다. 시편은 150편까지 있습니다. 지은이가 다 달라서 그렇지 장수로 따지면 성경66권 중에 가장 긴 책이 시편입니다. 이 가장 긴 시편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단어가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도 복입니다. 그런데 이 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히브리어에서 복(아쉬레이)의 어원적인 뜻은 ‘똑바로 걷다’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조금도 치우치지 않고 아주 똑바로 가는 것이 복에 대한 히브리어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to go strait'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이 꾀든, 죄인이 꾀든, 오만한 자가 꾀든 이 세상 누가 흔들고 꾀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똑바로 가는 거예요.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가는 거예요. 무슨 일을 만나도 주저앉지 않고 똑바로 가는 거예요. 이것이 시편 1편 1절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이게 복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돈에 흔들리지 마세요. 사람에 흔들리지 마세요. 환난에 흔들리지 마세요. 절망에 주저앉지 마세요. 힘을 내십시오. 강건하십시오. 그냥 똑바로 가세요. 이게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그런데 이것 쉽지 않습니다. 정말 쉽지 않아요. 좌우로 치우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볼 것 많고, 하고 싶은 것 많고, 먹고 싶은 것 많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안치우칠 수가 없습니다. 직장 생활, 사회생활, 단체생활을 해보세요. 어느 한쪽에 끼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손해볼 것 같은 상황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편을 만들고 자꾸 끌어당깁니다. 치우치지 않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도 치우치지 마세요. 그냥 똑바로 가세요.
우리 시대에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불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납니까? 어제는 여수에서 산불이 났습니다. 꼭 사고 공화국에 사는 것 같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얼마나 말이 많습니까? 정말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만 보고 똑바로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때입니다. 그래도 흔들리지 마시고 똑바로 가세요. 이것이 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묵상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부드럽게 소리 내어 읽다’, ‘중얼거리다’, ‘속삭이다’, ‘읊조리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부드럽게 소리를 내어 읽는 것, 입으로 계속 속삭이고 중얼거리고 읊조리는 것이 성경 묵상방법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이 묵상해야 할까요? ‘주야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라는 뜻입니다. 묵상은 반복해서 성경을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길을 가면서도 중얼중얼, 일을 하면서도 중얼중얼, 쉬면서도 중얼중얼 무엇을 해도 중얼중얼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말씀을 먹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먹으세요. 끊임없이 드셔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2절 맨 앞부분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입니다. 말씀이 힘입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이 율법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의 산에서 나옵니다. 이사야 2:3에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성전이 우리가 올라야 할 하나님의 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옵니다. 5장 2절에 예수님이 ‘입을 열어’라고 했습니다. 왜 성경기자 마태는 예수님이 입을 열었다고 했을까요? 바로 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먹을 때 우리는 앞으로 똑바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우리 입에 넣을 때 우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을 배우세요. 2절의 ‘가르쳐’라는 말은 미완료 시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그 가르침은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지금도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심령을 채우세요. 그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줄 것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말씀을 이렇게 의역하고 싶습니다. “똑바로 가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또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똑바로 가십시오. 애통하는 자여!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산에 서셨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산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산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산에 오르셔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시고 똑바로 가십시오.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것이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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