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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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23:2
주일오전예배 | 2021-04-2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전서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돌보다는 말은 보살펴 부양하거나 수발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먹여주시고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 시대에 아삽이라는 시인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80:14). 여기 돌보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파카드입니다. 파카드는 감독하다, 세심하게 보살피다, 자세히 보다라는 뜻입니다. 농사 중에 가장 손이 많이 가고 힘든 농사가 포도농사라고 합니다. 모든 농사가 다 그렇지만 포도 농사는 아주 세심한 농부의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아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 하나님을 포도원지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상하고 섬세한 손길을 바라는 시인의 간구와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도 당신을 포도원지기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27:3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소원처럼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돌보십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 보다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손길이 가장 많기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축 중에 가장 손이 많이 가고 돌보기 어려운 동물은 무엇일까요? 양입니다. 양은 정말 까다롭고 민감한 동물입니다. 시편 23편은 짧지만 다윗의 전 생애를 담고 있는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돌보셨는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하나님은 까다롭고 민감하며 매우 소심한 동물인 양을 대하듯이 자신을 세밀하게 돌보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한 그루의 포도나무처럼, 한 마리의 어린 양처럼 돌보십니다. 저는 이 시간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은 히브리어로 떼쉐인데 땅을 덮고 있는 작고 부드러운 풀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비가 온 후에 축축한 땅에 돋아나는 어린 풀”, “식물의 새싹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삼하23:4, 38:27). 여기서 푸른 풀은 한 번만 푸른 풀이 아닙니다. 계속 새롭게 돋아나는 풀입니다. 뜯어 먹어도 뜯어 먹어도 다시 돋아나는 풀입니다. 항상, 늘 푸른 풀밭입니다. 푸른 풀은 색깔만 푸른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부드러운 풀입니다. 지친 양들의 원기를 회복시켜줄 수 있는 풀입니다. 먹기에 편안한 풀입니다. 소화에 부담이 되지 않는 풀입니다. 마른 풀은 뻣뻣해 먹기가 어렵습니다. 위에도 부담이 되고 푸른 풀에 비해 영양도 적습니다. 목자가 양에게 먹게 한 것은 뻣뻣하고 마른 풀이 아니라 부드럽고 신선한 푸른 풀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부드럽고 신선한 풀을 배불리 먹게 한 다음 그 푸른 풀밭에 누워서 쉬기도 하고 잠도 자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드럽고 싱싱한 영적 목초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뜯어 먹어도 뜯어 먹어도 항상 푸른 풀밭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초장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풀밭입니다. 날마다 새싹이 돋아나는 풀밭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새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게 하시지 않습니다. 과거의 은혜로 현재를 살게 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은혜로 지금을 살게 하십니다. 내일은 새로운 풀을 먹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풀밭은 다함이 없는 풀밭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풀밭입니다. 다른 풀밭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풀밭으로 가시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초장으로 오십시오. 예수님의 풀은 부드러워 먹기 좋습니다. 영혼의 위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을 아주 편안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 초장에서 우리를 먹게 하시고 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목자는 왜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누워 쉬게 할까요? 그것은 양에게 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집니다.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우기이고, 4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입니다. 우기에는 비가 많이 옵니다. 11월부터 비가 내려 1월이 되면 유대 광야에 풀이 돋아나기 시작해 2월이 되면 광야가 푸른 풀밭이 됩니다. 이때 유대 광야는 푸른 풀과 이름 모를 들꽃들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모합니다. 양들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4월 건기가 시작되면 푸른 풀밭이 메마른 광야로 변합니다. 2월부터 풀이 마르기 전인 4월 중순까지는 집 근처 어디서나 마음껏 풀을 뜯을 수 있지만 4월 말부터는 풀이 말라 푸른 풀을 뜯을 수가 없습니다. 5월이 되면 웅덩이들까지 다 말라버려 물을 마실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건기가 있고 우기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영적으로 물이 많고 촉촉한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메마를 때도 있습니다. 영적 건기에는 싱싱하고 부드러운 양식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영적 기근이 올 때가 있습니다. 항상 풍년이 아닙니다. 푸른 풀이 메말라 버릴 때가 있습니다. 푸른 풀이 정말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이 메마를수록 더 목자를 바라보십시오. 마음이 메마를수록 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건기가 되면 목자들은 짐을 꾸려 양들을 데리고 푸른 풀밭, 맑은 냇가를 찾아 양들을 위한 매우 위험한 여행을 떠납니다. 건기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말라버린 건기에 목자들이 양을 끌고 가는 곳이 어디일까요? 그곳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계곡입니다. 대낮에도 해가 두 세 시간만 드는 곳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해가 전혀 들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이 그늘이 져 있기 때문에 푸른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늘에서 자란 풀은 아주 부드럽습니다. 목자는 바로 이 풀을 찾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물웅덩이도 마르지 않습니다. 시원한 샘물이 있습니다. 시원한 바람도 붑니다. 이곳이 바로 덥고 메마른 건기에 양들이 먹고 쉴 수 있는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는 길이 험지입니다. 골짜기입니다. 가는 길목 곳곳에 맹수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얼마나 험하고 위험했는지 다윗은 이곳을 가리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4)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말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목자와 양은 푸른 초장, 맑은 물가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선한 목자는 양이 있기에 음침한 골짜기와 맹수들을 피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있기에 음침한 골짜기와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협곡을 지날 때 목자는 피리를 붑니다. 맹수들은 피리 소리를 듣고 양들에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피리 소리를 듣고 안심하고 따라갑니다. 삯군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지 않습니다.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수고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슬을 먹게 하고 메마른 풀을 먹게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라는 말이 헬라어로 호 포이멘 호 칼로스입니다. 칼로스는 아름다운, 좋은, 유용한, 선한, 착한, 고상한, 훌륭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훌륭한 목자, 유용한 목자, 고상하고 착하며 아름다운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위해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피리를 부십니다. 말씀의 피리 소리가 계속 우리 귓전을 울리고 있습니다. 찬송가 303, “천국음악 소리 같은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말씀의 피리 소리를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목자가 있을까요? 삯꾼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지 않습니다. 그냥 맛없고 뻣뻣한 마른 풀을 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분께 우리를 위한 신선한 양식이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을 따라가세요.  

  • <10:11-12>
  •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험한 골짜기를 지나 푸른 풀밭이 나오면 목자는 양들에게 마음껏 풀을 뜯게 합니다. 왜 목자는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할까요? 광야와 맹수들의 위협과 아주 험한 협곡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심신이 지쳐 있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목자가 마련해준 야외 레스토랑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마음껏 풀을 뜯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마련해준 노천 침대에서 눕기도 하고 자기도 합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 중턱에 가면 천정도 벽도 없는 노천 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산 중턱 노천에 침대가 노여 있는 것입니다. 하룻밤에 37만원이나 되는 고급 호텔입니다. 한쪽 아래로 아레강이 보입니다. 침대 바로 옆에는 푸른 풀 사이로 들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들꽃 사이에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자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경험일 것 같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아름다운 노천 임대를 제공합니다. 양들은 그곳에서 쉼을 갖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주님의 푸른 풀밭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코로나19시대에 주님의 푸른 초장이 아니겠습니까? 이곳에서 영적 양식을 드십시오. 저는 지난 주간에 우리 등대교회 성도님들의 푸른 풀밭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부드러워 먹기 좋고 싱싱해서 영양도 많은 영적 풀이 자라는 영혼의 푸른 풀밭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먹고 먹어도 계속 새롭게 돋아나는 푸른 풀밭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등대교회가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늘 푸른 주님의 풀밭이 되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대교회는 주님이 마련한 푸르고 싱싱한 영적 레스토랑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푸른 레스토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에서 푸르고 푸른 예수님의 풀을 뜯어 드시기를 바랍니다. 이 풀은 뜯고 또 뜯어도 다함이 없는 푸르고 푸른 풀입니다. 계속 새 풀이 돋아나는 풀밭입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는 하지만 풀을 뜯어 주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목자가 양에게 풀을 뜯어서 먹여주는 그림은 없습니다. 뜯어 먹는 것은 항상 양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초장에서 말씀의 풀을 뜯어 드십시오. 예수님의 풀밭에 왔다가 절대로 그냥 가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풀을 먹고 가십시오. 그래야 원기가 회복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풀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쉼이 있습니다.  

누이시며라는 말은 눕게 만드시며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눕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눕게 하실까요? 때려서요? 협박으로요? 아닙니다. 눕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바츠입니다. 라바츠는 쭈그리다, 기대다, 휴식하다는 뜻입니다. 양은 눕지 않습니다. 여기서 눕게 한다는 말은 쉬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누워서 쉬게 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눕게 하지 않습니다. 양은 매우 민감한 동물입니다. 다른 짐승들은 아무 곳에서나 뒹굴고 놉니다. 하지만 양은 조건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필립 켈러 목사님의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필립 켈러는 목사가 되기 전에 실제로 호주에서 8년간 양을 치며 목동 생활을 했습니다. 이 책에서 필립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에 관한 이상한 사실은 양들은 저들의 성질 때문에 네 가지 필요조건이 충당되지 않으면 눕게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에서 양 목장으로 가장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한 목장에서 살았던 이중수 목사님(미국 올랜도 새길 교회)시편23이라는 책에서 똑같은 말을 합니다. 양은 조건이 갖추어져야 눕습니다. 네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싸움이 없어야 합니다. 양들은 정말 많이 싸웁니다. 양들 중에는 박치기 족이 있습니다. 양들은 멀리서 봐야 합니다. 가까이 가지 마세요. 더럽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동물이 양입니다. 가까이 가면 반드시 실망합니다. 양은 머리를 맞대고 뒷다리에 힘을 주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목에 힘을 잔뜩 줍니다. 그러다가 서로 들이 받습니다. 박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박치기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때까지 계속 박치기를 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입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꼭 사람 싸우는 것 같습니다. 양들 사이에서는 박치기 소리가 하루 종일 납니다. 얼마나 세게 박는지 박치기 소리가 1.6km 밖에서도 들린다고 합니다. 뿔이 엉키고 두개골이 손상을 입을 때도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둘 다 죽습니다. 목자는 박치기 족들을 격리 수용하든지 팔아버린다고 합니다. 박치기 족이 없어야 다른 양들이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양과 똑같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박치기 족이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부목사로 사역한 교회가 5개입니다. 다섯 교회가 다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속에 들어가 보면 크고 작은 분쟁과 다툼이 다 있습니다. 분당에 있는 어떤 교회 목사님이 그러는데 하루도 조용하게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더래요. 다툼이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싸우지 맙시다. 참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나타나면 양들이 싸움을 멈춘다고 합니다. 목자가 나타나면 양들의 행동이 아주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목자가 있는데도 싸워요. 서울에 있을 때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8년을 싸우다가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장로님 한 분, 고등학생 한 명이 죽었어요. 그 정도면 싸움을 멈추어야 하는데 그대로 계속 싸우는 거예요. 제발 싸우지 마세요. 만약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없는 교회, 하나 밖에 없는 교회를 만들어 봅시다.  

둘째, 양은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양은 아주 소심하고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숲 속에서 작은 토끼 한 마리만 뛰어나와도 앞 다투어 우르르 도망칩니다. 한 마리가 뛰면 다른 양들까지 영문도 모르고 함께 도망갑니다. 양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보호 수단은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들이 안심할 때가 언제일까요? 그것은 목자가 눈에 보일 때입니다. 양들은 옆에 목자가 있을 때 안심하고 자리에 눕습니다. 양에게 목자 없는 쉼은 없습니다. “누이시고의 주어는 가 아니라 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입니다. “내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가 아닙니다. 푸른 풀밭을 찾아내는 것도 내 일이 아니라 그분 일입니다. 그분 책임입니다. 우리의 일은 그분께 눈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뚫어져라 그분만 바라보면 됩니다. 목자 없는 만족은 없습니다. 목자 떠난 쉼은 없습니다. 양은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눕습니다.  

  • <3:5-6>
  •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셋째, 곤충이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들은 특히 여름에 코파리와 말파리와 쇠파리 및 진드기들에게 시달려 거의 미칠 지경이 됩니다. 이 해충들로부터 고통을 받을 때 양들은 누워서 쉴 수가 없습니다. 양들은 해충이 몸에 달라붙는 것을 막기 위해 일어서서 발을 쾅쾅 구르기도 하고, 머리를 흔들며 몸을 재빠르게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 여러 종류의 방충제를 사용합니다. 1년에 한 번씩 소독통에 양을 집어넣고 머리까지 잠기게 합니다. 이것을 딧핑(dipping)이라고 합니다. 양을 소독통에 넣고 몸에 붙은 기생충, 벌레, 오물들을 떼어내는 작업입니다. 양들은 딧핑을 정말 싫어합니다. 안 들어가려고 버팁니다. 어떤 양은 정말 더럽다고 합니다. 여기저기에 쓰레기를 붙이고 다닙니다. 지푸라기, 과자봉지, 노끈, 나뭇가지, 철사 등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양들도 있습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양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영적인 소독이 필요합니다. 소독약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영적 소독약으로 영혼에 붙어 있는 기생충들을 떼어내야 합니다. 수시로 성도는 영혼에 붙어 있는 죄의 오물들을 말씀과 기도로 떼어내야 합니다. 또 영적인 딧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욕탕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딧핑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깊이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한 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룩한 딧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딧핑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딧핑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러분! 뜨거운 기도로 한 번씩 영적 딧핑을 하세요. 이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들로, 산으로 놀러가는 것이 쉼이 아닙니다. 진정한 쉼은 성령 안에서 영혼의 오물들을 깨끗하게 떼어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풀밭에 누울 수 있습니다. 

넷째, 양이 누울 수 있으려면 배고픔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양은 배가 고프면 밤에도 잠을 안자고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닙니다. 양은 배가 고프면 독초도 먹습니다. 플라스틱도 먹습니다. 닥치는 대로 먹습니다. 양은 배가 불러야 비로소 잔디에 누워 쉽니다. 목자는 양이 쉴 수 있도록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다. 우기에는 푸른 풀밭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건기에는 푸른 풀밭이 아무 곳에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양들에게 푸른 풀밭은 목자의 작품입니다. 양은 목자의 초장에서 풀을 뜯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초장에서 풀을 뜯으십시오. 스스로 양식을 찾아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독초를 먹을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영적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간 기사에 아귀를 시장에서 사다가 요리를 하려고 배를 갈랐더니 배 속에서 500ml자리 플라스틱 생수병이 나왔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세상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양식을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초장에서만 풀을 뜯으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영적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네 가지 조건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만족시켜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억지로 눕게 하지 않으십니다. 저의 아이들이 아기 때입니다. 밤이 되면 아이를 재웁니다. 재울 때 노는 아이를 데려다가 그냥 눕히지 않습니다. 먼저 깨끗하게 씻깁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충분히 먹입니다. 그 다음에 누입니다. 잘 분위기를 만들어줍니다. 저도 아이 옆에 주어 손으로 아이 가슴을 토닥여줍니다. 잘 시간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합니다. 아이를 씻기고 갈아입히고 먹인 다음에 아기를 누워놓고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옆에 누워서 함께 잡니다. 여름에는 덥지 않게 해줍니다. 땀띠가 생기지 않게 해줍니다. 겨울에는 춥지 않게 해줍니다. 건조하지 않게 해줍니다.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줍니다. 억지로 재우려고 손으로 눈꺼풀을 쓸어내리지 않습니다. 스스로 잘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쉼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초장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초장에서만 계십시오. 다른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주님의 초장에서만 풀을 뜯고 주님의 초장에서만 누우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초장에 있을 때만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이 말씀을 공동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누이시며라는 말은 눕고, 자고, 놀고, 쉬고를 의미합니다. 중국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 위에 눕고(누울 당) 엎드리며(엎드릴 와) 있게(, 있을 재) 하시고푸른 풀밭 위에서 한가로이 뒹굴며 노니는 양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풀밭에 눕고 엎드리며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푸른 풀밭은 목자가 있는 곳입니다. 푸른 풀밭은 주님 앞입니다. 푸른 풀밭은 주님 품 안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품에서 우리가 노니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초장에서 주님을 만나세요. 

저의 아이가 세 네 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만화로 된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500 페이지 정도 되는 굵은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읽어주려고 했는데 아이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바람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번에 다 읽어주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완전히 지쳤습니다. “그만 읽을까?” 했더니 더 읽어달라는 거예요. 너무 지쳤지만 그만 읽어달라고 할 때까지 읽어 주자!’라고 마음을 먹고 창세기를 다시 열었습니다. 지칠 때도 됐는데 안 지치는 거예요. 계속 읽어달라는 거예요. 결국 제가 반을 조금 더 읽다가 손을 들고 뒤로 누워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정말 행복하고 아이가 예뻤습니다. 잊지 못하는 기억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품 안에서 엎드리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놀기도 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품에 계세요. 주님의 풀밭에 계세요. 여기에 있을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는 참 만족이 있습니다.  

참회록11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한줌 흙에 지나지 않는 피조물이오나 감히 입술을 열어 당신에게 찬양을 드립니다. 당신에게 찬양을 드릴 때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안식)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주님 안에서만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습니다. 스위스의 성자로 불리는 카알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카알 힐티(1833~1909)는 아주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이 책은 날짜 별로 묵상하는 글이 있습니다. 425일 오늘 날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엾은 벌레와도 같은 우리에게 가능하다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하나님도 나를 기뻐하십니다. 내가 기뻐집니다. 내게 만족이 있습니다. 내게 행복이 넘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기뻐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19세기 영국의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배부른 돼지 보다 영혼의 목장에 누운 양이 되십시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기보다 만족한 한 마리의 양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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