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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 인생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그네라는 말이 48번 나옵니다. 객(손님)이라는 말이 27번 나옵니다. 남의 나라 땅에 임시로 머물러 산다는 뜻인 ‘거류’라는 말이 67번 나옵니다. 창세기 20장 1절에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거류민이라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성경에 계속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거류민, 손님, 나그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날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갈 곳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천국을 향해 가는 <천국 나그네>입니다. 여러분! 나중에 꼭 천국에서 만납시다. 천국으로 오세요. 제가 보기 싫으셔도 꼭 저 있는 곳으로 오셔야 합니다. 절대로 다른 곳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이 시카고로 휴가를 가려고 하다가 시카고에 눈보라가 휘몰아친다는 뉴스를 듣고 휴가지를 따뜻한 플로리다로 바꿨습니다. 플로리다 날씨가 덥다 못해 아주 뜨거울 때였습니다. 플로리다에 도착한 남자가 호텔에서 아내에게 당신도 내일 잘 오라는 이 메일을 보냈습니다. 남편이 먼저 가고 아내가 다음날 따라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소를 잘못 입력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가정은 목사님의 가정이었는데, 목사님이 돌아가셔서 사모님이 장례를 마치고 막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리고는 기겁을 하면서 비명을 “악!”하고 질렀습니다. 사모님의 비명을 듣고 옆집 아줌마가 달려왔습니다. 사모님은 얼굴이 하얗게 돼서 말도 못하고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죽은 남편에게서 온 메일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저 영원한 하늘의 성, 천국을 향해 여행 중인 천국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시고 꼭 천국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천국 나그네들이 모여 세상에 살면서 별 일 없는지 안부를 확인하는 천국 나그네들의 공동체입니다. 저는 세상에 살면서 억울한 일, 답답한 일, 기가 막힌 일을 만나 마음에 상처를 입은 천국 나그네들에게 천국 소식을 전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천국 아나운서입니다. 여러분! 한 주간 힘드셨죠? 힘내세요. 세상에 살다보면 나그네의 서러움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에서 여러분이 모든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행이 다 끝나면 본향인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인생이 나그네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은 나그네의 아버지이라는 은혜로운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그네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나그네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우리 인생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끝부분에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이 신약성경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παρεπίδημός)입니다. 파레피데모스는 낯선 사람, 외국인, 나그네, 체류자, 체재자, 거류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곳에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임시로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야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히 살 본향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 떠나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본향은 어디일까요?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 위의 성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향인 천국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천국 나그네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저 천국을 향해 가는 <천국나그네>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히브리어로 나그네를 게르라고 합니다. 게르는 구약 성경에서 ‘나그네’ 또는 ‘객’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게르의 원래 의미는 자기의 본토를 버리고 낯선 땅으로 이주해 어딘가에 얹혀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제주도로 들어오고 있는 난민들을 게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게르에는 여행이나 누구의 집에 찾아온 손님(객)이라는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게르(난민)라고 했습니다.
<창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가나안 땅 사람들에게 아내의 무덤을 사면서 한 말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그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게르이고 ‘거류하는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솨브인데 이것은 일정한 지역에 거주는 하지만 개인 소유의 땅은 가지지 못한 자나 일당 근로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을 가리켜 가나안 땅에서 얹혀서 사는 난민 또는 그곳에서 일당 근로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62년 정도가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자신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내 난민 길의 세월이 130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내 조상도 나그네였고 나도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 다윗도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대상29:15>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우리 조상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도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이 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400년 정도 됐을 때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의 영토를 애굽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확장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중동의 강자가 되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넘볼 수 없는 강한 나라가 됐습니다. 부자나라, 잘 사는 나라, 주변 나라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다윗은 그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나그네와 가나안 땅에 잠시 살고 있는 거류민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이라” 주님 앞에서 이 땅이 부귀공명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조상들처럼 <나그네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도를 한결같이 나그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 계신 천국으로 갈 천국 나그네입니다. 원로가수이셨던 고 최희준 선생님이 부른 <하숙생>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최희준 씨는 인생을 구름처럼, 강물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나그네. 이게 인생이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영적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희준 씨는 서울대 법학과를 나왔습니다.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하숙생> 이 노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말년을 정말 힘들게 보내셨습니다. 노래는 영적인 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분의 인생이 노래처럼 됐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말합니다. 목적지는 주님 계신 천국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하지만 구름처럼, 강물처럼 출발지도 목적지도 없이 막연히 흘러가는 정처 없는 나그네는 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옥을 향해 가는 <지옥나그네>가 아니라 천성을 향해 가는 <천국나그네>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나그네의 아버지라는 은혜로운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보호자가 없습니다. 나그네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나그네는 외롭습니다. 성경에서 나그네라는 말은 사회적 약자라는 뜻입니다. 누가 이 난민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겠습니까? 누가 의지할 곳 없는 이 외국인 근로자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나그네들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 중간에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나그네들을 자녀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또 나그네들이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되심을 경험해야 나오는 호칭입니다.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십시오. 하나님은 나그네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인생길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 되심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십니다. 지난 주간이었습니다. 제가 식탁에 앉아서 말씀을 생각하며 “나그네의 아버지시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놀란 얼굴로 “나쁜 놈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그네의 아버지라는 말을 나쁜 놈의 아버지라고 들은 것입니다. 아내는 하나님이 나쁜 놈의 아버지이냐며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계시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쁜 놈의 아버지시구나! 내가 나쁜 놈인데 내게 아버지가 되어주셨으니 하나님은 나쁜 놈의 아버지시구나!’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하나님은 나쁜 놈에게도 아버지가 되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식이 잘 못하면 부끄러워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쁜 놈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본문 앞부분에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위, 신분, 가진 것, 학벌, 외모를 전혀 보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난민이든 나그네든 외국인이든 그리고 나쁜 놈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는 순간 나는 천국 나그네가 되는 것입니다. 믿기 이전에는 구름처럼 강물처럼 흘러가는 정처 없는 지옥나그네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천성을 항해 나아가는 천국나그네입니다. 여러분!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지 마십시오. 천국 나그네가 되십시오. 천국나그네를 다른 말로 순례자라고 합니다. 천국 나그네, 천국의 순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
‘나그네를 사랑하여’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는 난민, 이민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말뿐인 사랑이 아닙니다. 머리 속에만 있는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행동과 책임이 수반된 구체적인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10:1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실 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실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실 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위한 법도 만드셨습니다.
<신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한 묶음(한 뭇)을 떨어뜨렸으면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를 위해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13가지 율법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그 율법 중에 592번째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법을 제정하실 때 나그네를 위한 법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3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법은 2010년 4월 7일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외국인을 위한 법은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질 때 시작됐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현지인에게도 하나님이시지만 외국인에게도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법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그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천국 여행길에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천국나그네들을 보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그네를 보호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학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강한 금지 명령어가 두 번 이어서 나오고 있습니다. 나그네를 압제하는 것은 절대적인 금지입니다. 압제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난폭하게 행동하다, 압박하다, 거듭하여 몰아내다, 내던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힘이나 보호막이 거의 없는 외국인 나그네들에게 난폭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면 나그네 길에서 보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984년 12월 3일 새벽에 인도 보팔시에 있는 미국 기업 유니온 카바이드사 공장에서 (농약 제조 원료인 메틸이소시안이라는) 유독가스 36톤이 누출되었습니다. 이 독가스로 공장 25평방킬로미터 내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다 죽었습니다. 엄청난 사고였습니다. 보팔시 주민 2,800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후유증으로 2만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독가스 부상자가 60만 명에 이르렀는데 실명, 호흡기장애, 중추신경계와 면역체계 이상 등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농약회사 건너편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크리스천이 많이 살았습니다. 인도는 힌두교와 회교가 압도적입니다. 그러다보니 크리스천들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독가스가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가스가 건너편에 기독교인들이 사는 마을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그곳의 사람들을 보호하셨는지 아십니까? 길 하나만 건너면 가스가 마을로 들어가게 될 텐데 이상하게도 가스가 길 앞까지 와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보호로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그 곳에서 선교 활동하던 데일 키이츠만(Dale Kietzman) 선교사에 의해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경기도 일산에 가면 호수공원 근처에 승리교회라고 있습니다. 승리교회는 다문화사역을 하는 교회입니다. 이 승리교회를 게르방교회라고 합니다. 승리교회는 게르방 사역을 21년째 하고 있습니다. 게르는 히브리어로 나그네라는 뜻이고, 방(房)은 한자입니다. 게르방은 <나그네들의 방> <이민자들의 방>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게르방입니다. 세상은 에덴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세상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들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 속상한 일, 답답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하면 게르방으로 오세요. 우리 등대교회가 게르방입니다. 교회는 나그네의 방입니다. 게르방으로 오셔서 주인되시는 아버지께 이르세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억울함을 갚아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게르방의 주인이십니다. 나그네의 아버지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이 게르방에 오신 여러분의 억울함을 다 갚아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픔을 싸매주시고 고쳐주시고 회복시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 나그네로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 하반절)고 했습니다. NIV 성경은 이 말씀을 번역할 때 ‘두려움’이라는 말 앞에 ‘경건한’(reverent)이라는 단어를 덧붙였습니다. 그냥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또 NIV 성경은 ‘여기서’(here)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now and here) 경건한 두려움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행동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고 삽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끌려 다니며 삽니다. 그런데 사람을 의식하고 세상에 끌려 다니며 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께 이끌려 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지낸다는 말은 세상에 낯선 사람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NIV 성경은 ‘나그네’라는 말을 ‘낯선 사람, 이방인’(stranger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낯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익숙한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죄악에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악에 익숙한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죄 짓는 것이 불편해야 합니다. 욕하고 화내고 다투는 일이 불편해야 합니다. 부부 싸움하는 것이 불편해야 합니다. 아내에게 소리 지르는 것이 불편해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이 불편해야 합니다. 원망, 짜증, 불평하는 것이 불편해야 합니다. 왜요? 코람 데오! 나는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의 쾌락에 이방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흔들며 즐겨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세상 연락의 장소에 가는 것이 불편해야 합니다. 연락의 장소에 가는 것이 좋으면 안 됩니다. 쾌락의 장소가 즐겁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유행에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쓰고 먹는 일이 불편해야 합니다. 있다고 막 쓰고 다니면 안 됩니다. 나그네는 근신, 절제, 온유,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을 향해 가는 천국 나그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사람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적 윤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강달희 목사님의 부흥회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1년 내내 부흥회를 다니셨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일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강 목사님이 이사하게 됐습니다. 이사한 후에 보니 집 앞에 슈퍼가 있더랍니다. 목사님이 집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집 앞에 슈퍼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살 때는 안 좋은 것만 골라서 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일하시는 분이 의아해서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사람들이 좋은 것을 사려고 고르다 보면 물건이 상하는데 그러면 안 좋은 것은 누가 사가냐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 보며 살아야 한다고 했답니다. 35년 전에 들은 말씀인데 잊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이 살 때 너무 들었다 놨다 하지 마세요. 별 차이 없습니다.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습니다. 세상은 내 권리를 위해 소리를 높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손해 보고 낮은 자세로 섬기라고 합니다. 세상은 싸워서 이기라고 하는데 성경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사람 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사십시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 안 됩니다. 세상에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윤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성경입니다. 천국나그네는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시119:19>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이 말씀은 주님의 계명의 밝히 알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계명을 밝히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그네는 게르방의 주인되신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저 하늘의 윤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담에 “나그네 귀는 간짓대 귀”라고 했습니다. 간짓대는 대나무로 된 기다란 장대를 가리킵니다. “나그네 귀는 간짓대 귀”라는 말은 나그네가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고 긴 대나무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눈치를 살핀다는 말입니다. 천국 나그네는 귀를 쫑긋 세우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토끼의 귀처럼 하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음성을 듣고 세상 윤리가 아니라 하늘의 높은 윤리를 따라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온 곳도 모르고 갈 곳도 모르는 나그네가 되면 안 됩니다. 구름처럼, 강물처럼 정처 없이 헤매는 나그네가 되면 안 됩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천국나그네가 되십시오. 예수님 믿으세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 세상에 사시다가 나그네의 서러움을 당하시면 게르방인 등대교회로 오십시오.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이 상하면 게르방으로 오십시오. 게르방에 오셔서 하나님께 모두 이르세요. 나그네의 아버지께서 갚아 주십니다.
어떤 선교사 부부가 평생 아프리카에서 사역하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배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대통령은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서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부부를 환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평생 복음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헌신했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몸은 몸대로 망가져 있었고, 연금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허망해진 선교사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허망하고 불공평하군요.. 평생 하나님을 섬겼는데, 고향에 돌아오니 우리를 맞으러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우리는 건강도 잃어버렸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불공평한 일을 그냥 두실까요?”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저 침대에 가서 하나님께 말씀해 보세요.” 선교사는 아내의 조언대로 조용히 침대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기도를 한 후에 선교사는 상기된 얼굴로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정말 속상하다고 고백하면서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고 따졌더니 주님께서 내 어깨를 만지시면서 이렇게 나지막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 우리 고향인 천국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면 우리 주님께서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과 함께 나팔을 불며 맞아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사람의 칭찬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실 칭찬을 기대합니다. 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순례자처럼 묵묵히 우리의 갈 길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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