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시몬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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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15:21
주일오전예배 | 2021-03-2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데이비드 케이프 목사님의 예수를 위한 바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이 목사님에게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의 발을 닦아 주어라.” 이 음성을 듣고 그는 사람들의 발을 닦아 주기로 작정하고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세숫대야를 메고 걸으며 사람들 발을 닦아 주려면 세숫대야를 주셔야지 내가 사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했는데 정말 세수 대야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표징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확신했고 사역하고 있던 열방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는 대야가 붙은 십자가, 물통, 접의자, 수건 등 20kg이 넘는 짐을 등에 짊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수건에는 예수님께서 깨끗이 씻어주셨다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트레일러에 태웠습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미쳤지요. 진짜 그런 걸 하겠다고? 주님! 사람들이 정말 그들의 발을 닦게 해줄까요?’ 데이비드는 주님, 제가 꼭 얼간이 같아요.”라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그 뒤 데이비드는 주님을 위한 바보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출발하였습니다. 출발한지 1분 만에 조직폭력배 네 명을 만났습니다. 발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가가서 발을 닦아 주어라.” 길거리에 접의자를 놓고 네 명의 발을 닦아주면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발을 다 닦아주고 났을 때 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저 분을 따라 가고 싶다.” 그가 따라왔습니다. 첫 날 모두 16명의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13명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날 밤이었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몇 명의 발을 닦아 주었는지 세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여주는 대로만 맡기고 행하였으면 좋겠다.” 데이비드 목사님은 14개월을 걸으면서 수만 명의 발을 닦아 주면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몇 달 지났습니다. 아프리카 신문들이 그를 매일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4개월이 지나 마지막 목적지에 왔을 때에 아프리카 대통령이 나와 발을 내밀었습니다. 온 아프리카가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바보가 아프리카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직폭력배, 알코올 중독자, 동성애자, 한센병자에서 군장성, 시장,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었고, 초자연적인 치유가 일어나고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고 중독이 치유되며 조직폭력배가 발을 씻겨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며 그와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목사님이 그 때 쓴 일기가 <예수를 위한 바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을 위한 바보가 나옵니다. 그는 방금 시골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는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랐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인데 그것을 대신 지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그것도 일면일식도 없는 사람의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오늘날까지 골고다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으로 성경에 기념되어 있습니다.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매우 의외의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오늘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를 지는 일은 매우 존귀한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매우 의외의 인물이 지치신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며 놀라운 일입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했습니다. 시몬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그를 강제로 끌어다가 예수님 대신 십자가 지게 한 것입니다. 시몬은 정말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 역사상 매우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전에 예수님과 단 한 번의 접촉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은 시몬뿐입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시몬은 미지의 사람이었습니다. 194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이름은 영수(), 영자()였습니다. 1950년대는 영수()와 영숙()이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는 영수()와 미숙()이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길거리에서 영수야!”라고 부르면 서너 명이 뒤를 돌아볼 정도로 영수라는 이름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2008년부터 2019)은 민준(), 서연()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영수라는 이름이 흔했던 것처럼 시몬이라는 이름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아주 흔했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시몬이 두 사람이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가나안 사람 시몬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 아주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 하나이었습니다. 그 이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미지의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 역사상 매우 놀랍고 영광스러운 직책을 수행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시몬을 만납니다. ‘이 일을 누가 하지!’ 고민할 때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이 일에는 이 분이 적합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제가 예측한 사람이 아닌 엉뚱한 인물이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의외의 인물들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종종 당신의 종들을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남겨두십니다. 그러다가 필요하실 때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7천인을 남겨두셨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아주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회개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의외의 사람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을 위해 선택받은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의외의 인물들이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 그 출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또 유대의 귀족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목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항상 시몬이 있었습니다. 지쳐서 더 이상 걷을 수 없으셨던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은 예루살렘의 어떤 유력한 사람이 아니라 시골에서 막 올라온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이전에 주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몬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시몬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시몬이 되십시오.  

시몬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시골에서 방금 올라온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몰랐습니다. 성경은 시몬을 구레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라는 곳입니다. 지금의 리비아의 수도입니다. 그곳에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2,820km입니다. 하루에 20km씩 걸어서 가면 28일 정도 걸립니다. 중간 중간 쉬면서 가면 한 달이 넘게 걸립니다. 그가 3천 킬로에 가까운 거리를 걸어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리라고 누가 생각을 했을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때 그 자리에 시몬이 있도록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를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몬을 이끌지 않으셨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섭리가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어떻게 역사할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과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는 은혜로 여러분을 이 자리로 인도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이 시몬이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의 영역을 개척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께 필요한 시몬이 되십시오. 억지로라도 시몬이 되십시오. 

시몬은 예루살렘에 다른 목적 때문에 왔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오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시몬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시몬에게 유일한 목적은 그것뿐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자랑거리였습니다. 시몬은 그 자랑거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몬을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몬에게 매우 영광되고 복된 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쪽 길을 선택하더라도 하나님은 저쪽 길을 제시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구했는데 저것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가도록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당황하지 마십시오, 화내지 마십시오. 침착하십시오. 그것이 그 당시에는 매우 힘들고 어렵지만 매우 복된 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냥 순종하는 시몬이 되십시오.  

본문 중간에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시몬은 그냥 구경만 하고 지니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어떤 관심이나 호기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이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서둘러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려고 할 때 로마 군인이 시몬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어이 이 십자가를 지라.” 시몬은 거칠고 위압적인 군인들에게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중에 시몬이 선택됐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여러분을 꼭 집어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된 일입니다. 마가는 이러한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고 말합니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시몬의 두 아들은 초대 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 즉 시몬의 아내를 나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바울은 왜 루포와 그의 어머니를 문안하라고 했을까요? 아마도 시몬의 아내와 두 아들이 시몬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기이합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 가족이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시기를 간곡히 소원하는 바입니다. 보통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제 설교에 집중합니다. 설교를 잘 하나 못하나! 제 설교가 그리 중요합니까? 예 저도 설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 보다 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고 이 교회가 이렇다 저 교회는 저렇다 말하기 전에 시몬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 교회 안에는 구경꾼 평론가가 너무 많습니다. 평론가, 교회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론가나 교회 구경꾼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시몬이 되십시오. 

두 번째로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을 꼭 믿으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짐과 아픔과 죄를 십자가 아래에 다 내려놓으십시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첫 번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시작이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믿지 않고는 결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약속은 믿기만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약속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들에게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믿음의 도를 걸어가십시오. 어두컴컴한 지하도나 뒷골목 길을 통해서는 천국을 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했습니다. 부인한다(ἀπαρνομαι)는 말은 부정하다, 거절하다,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리다, 포기하다, 배반하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의 욕심과 의지, 육체의 유혹, 세상의 쾌락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악으로 더욱 흘러넘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자기 욕심을 배반하십시오. 세상의 죄악을 거절하십시오. 세상의 쾌락을 거절하십시오. 세상이 주려고하는 것들을 거부하십시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십자가를 지십시오. 

자기부인은 삶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입의 설교자>라면 성도는 <삶의 설교자>입니다. 입의 설교자보다 삶의 설교자가 한 수 위입니다. 삶으로 설교하는 설교자가 최고의 설교자입니다. 생활의 설교자가 진정한 설교자입니다. 여러분은 생활의 설교자가 되십시오. 삶의 설교자가 되는 길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은 데이비드 케이프 목사님을 발을 씻어주는 사역으로 내모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삶의 설교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설교는 강단에서 하는 것입니다. 대우받는 일입니다. 반면에 발을 씻어주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고대에는 종들이 하던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데이비드 목사님이 삶의 설교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생활의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시몬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습니다. 시몬은 삶의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시몬이 되십시오.  

세 번째로 십자가를 지는 일은 매우 존귀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힘에 겨워 쓰러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그 상처로 몸에서 많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와 탈진상태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를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주변의 구경꾼들을 돌아보더니 시몬에게 가서 그를 예수님 옆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시던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시몬을 끌고 왔을까요? 건장한 체격이라 십자가를 지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리숙하게 생긴 시골뜨기라 그랬을까요? 왜 시몬인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몬이 매우 복된 일에 선택되었다는 일입니다. 

성경은 그가 시골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시골이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개역 개정 기준). 그 중에 세 번이 시몬에게 쓰이고 있습니다(마태, 마가, 누가). 성경은 그가 시골에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이 사람이 시골 사람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였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였을까요? 그래서 순수하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였을까요?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편견을 갖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는 일을 매우 싫어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시몬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영광스러운 일에 선택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길은 인류 구속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인류를 죄 가운데에서 구속하기 위한 마지막으로 남은 일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제가 그때 거기에 있었다면 로마 병정이 부르기 전에 달려가서 땅바닥에 쓰러져 계신 예수님을 부축하고 대신 십자가를 졌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대신 십자가를 져드릴게요. 주님 아파서 어떻게 해요? 주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그 마지막 그 자리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일이 시골에서 온 이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일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베드로나 요한에게 돌아가지 않고 시골에서 방금 올라온 나그네에게 돌아간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이 존귀한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도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처음 예루살렘에 온 시골 사람에게 돌아간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주님 앞에서 도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시골 사람, 시몬이 되십시오. 

십자가를 지는 일은 매우 복된 일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 옆으로 시몬을 강제로 끌고 왔습니다. 시몬은 아주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봤습니다. 이제까지 그와 같은 분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거기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군인들의 강요가 없었다면 시몬은 다른 사람들처럼 회중 속에서 무명의 존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믿음의 반열에 들어와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는 일이 시몬에게 부담이 되었지만 그 다음에는 복이 되었습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 고민,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 시몬에게 맡기어지지 않았다면 시몬은 가까이에서 이러한 예수님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수고하고 헌신할 때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 오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아주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아울렛으로 옷을 하나 사러 가면 매장 전체를 돌아봅니다. 여기 저기 꼼꼼히 살펴보고 입어보고 거울에 비춰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아는 어떤 청년이 취업 면접을 보기 위해 온라인으로 옷을 하나 샀습니다. 택배로 옷이 왔습니다. 제 앞에서 옷을 살펴보는데 어깨 부분에 두세 번 정도 박음질이 안 된 곳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찾아낸 그 청년이 신기했습니다.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또 안쪽에 박음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라는 거예요. 바꾸어야 된다는 거예요. 옷을 하나 사는 데도 이렇게 꼼꼼히 보는데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데 가까이 가서 예수님을 정말 자세히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멀리서 예수님을 보지 마십시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가 무엇인지 자세히 보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직접 져 보십시오.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십자가를 무작정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고민하고 생각해보고 살펴보고 져보십시오.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고 봉서산을 올라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정말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짐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바로 뒤에서 좇게 됐습니다. 누가복음 2326절에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 가시고 그 뒤를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십시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누가는 시몬이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했지만 마가는 예수님과 시몬이 같이 갔다고 했습니다. 시몬은 아주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뒤따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께로 가까이 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내가 지금 예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가까이에 계십시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버리지 마십시오. 이것은 나와 내 후손들에게 정말 복되고 존귀한 일입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예수님이 결코 잊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끌고 갔습니다(27:31, 15:20, 23:26). 끌고 갔다는 말은 거칠게 데려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칠게 대했습니다. 때리고 발로 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께 한 것처럼 시몬에게도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몬의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걸음걸이가 더디어지자 군인들은 빨리 가라며 시몬을 발로 찼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처럼 넘어졌습니다. 시몬이 넘어질 때 예수님은 나 몰라라 하시며 그냥 걸어가셨을까요? 저는 틀림없이 멈추어 서서 고맙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몬을 쳐다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시몬 때문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 시몬처럼 고마운 사람이 있었을까요? 냉수 한 그릇도 잊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고 땀을 흘리고 맞고 넘어지며 모욕을 당한 시몬을 예수님은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마가는 성경을 기록하면서 시몬의 두 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굳이 두 아들의 이름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사람을 소개할 때는 고향이나 아버지 아름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시몬은 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성령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이 세상 어떤 명예와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시몬은 큰 아들 알렉산더와 둘째 아들 루포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귀에 닳도록 이야기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간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아버지 시몬에게 인류 구속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문의 영광이고 은혜였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렉산더와 루포는 훌륭한 믿음의 후손으로 자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몬과 그 가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시몬이 되십시오. 하나님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두 명의 남자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 피곤해졌습니다. 십자가가 그들의 등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십자가 끝을 조금 잘라내면 훨씬 가벼울 거라는 생각이 들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십자가가 짧아졌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 안 그래? 그런데도 훨씬 가벼워졌단 말씀이야.”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여행은 계속됐습니다. 한참이 지나서 그 사람은 십자가를 더 잘라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는 다시 가벼워졌고 그 남자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짧아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무척 쉬웠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처음 그대로 십자가를 지고 낑낑거리고 있는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이봐 친구, 자네도 십자가를 좀 잘라내라고. 그러면 훨씬 가벼워진다니까.” 무거운 십자가를 진 사내는 나는 내 십자가를 지고 갈 만큼의 힘을 주님이 내게 주실 거라고 믿고 있어. 여행이 끝났을 때는 이 정도 고생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라고 대답하고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짧은 십자가를 진 사내는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래, 그러다가 길에서 지레 죽고 마는 사람이 꼭 있는 법이지.” 그러고는 길가로 가서 또 십자가를 잘라냈습니다. 이때쯤에 이미 다 잘려 나간 그의 십자가는 그저 시늉뿐이었습니다. 가볍고 편했습니다. 그는 짧은 십자가를 가지고 계속 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물살이 빠르고 폭이 좁은 강이 나왔습니다. 강바닥에는 뾰족한 바위가 솟아 있었습니다. 강둑은 높고 매우 경사져 있었습니다.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강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리를 찾아 여기저기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표지판이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너의 십자가가 너의 다리다.”라고 써져 있었습니다. 이미 짧아질 대로 짧아진 십자가를 들어서 강둑 사이에 놓을 때 그의 손이 떨렸습니다. 십자가는 강둑 저편에 닿지 않았습니다. 소용돌이치며 강 저 아래로, 아찔한 심연 속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짧아진 십자가는 가지고 다니기에는 편했지만, 그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를 주저앉혀버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의 동료가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절망에 비탄,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 삶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내는 톱질소리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십자가가 버려져 있고 잘라져 있습니다. 우리는 옳은 길을 선택하고 있는지. 아니면 쉬운 길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길은 엄청나게 다른 곳에 우리를 데려다놓을 것입니다. “너의 십자가가 너의 다리다라고 쓰인 표지판을 언젠가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차이는 확연히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후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 루포, 내 아들들아! 그때 나는 아무 영문도 몰랐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의 십자가를 지다니! 나는 부끄럽고 당황했으며 억울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내 인생의 영광의 십자가였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은혜였다. 나는 그 십자가를 의지해서 지옥의 강을 건넜다. 그 십자가 때문에 영원한 성에 들어가게 됐다. 너희도 그 십자가를 져라. 그것이 너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다.” 십자가를 자르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칼질이나 톱질을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버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십시오. 십자가가 복이고 영광입니다. 십자가가 생명이고 진리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인생의 안내자입니다. 시몬은 그 십자가를 졌습니다. 시몬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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