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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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다니엘 6:10
주일오전예배 | 2021-03-1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성경 역사상 다니엘처럼 고귀하고 위대하며 담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 날 무서운 꿈을 꿉니다. 그는 지혜자들을 불러 꿈을 해석해보라고 하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때 다니엘이 제국의 대왕에게 꿈을 해석해주며 고고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4:25) 왕이 교만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짐승처럼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감히 왕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은 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사자 같은 다니엘의 담대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다니엘의 용기는 느부갓네살의 손자 벨사살이 왕일 때도 별처럼 빛이 납니다. 벨사살이 1000명의 귀족을 초청해서 술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왕궁 석회벽에 어떤 글을 씁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두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왕은 벌벌 떱니다. 왕은 지혜자들을 불러 그 글을 해석하는 자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고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해석을 하지 못합니다. 그때 다니엘이 왕 앞에 불려 들어가 왕에게 의연한 자태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5:17) 왕이 주는 상급은 필요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나 줘버리라는 말입니다. 해석만 하면 그만이지 선물이 필요 없다고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지만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의 이 당당한 모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나라가 바뀌었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총리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매우 신뢰했습니다. 간신들은 다니엘을 끌어내리기 위해 30일 동안 페르시아의 왕 이외에 다른 존재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자는 허무맹랑한 법을 제안했습니다. 어리석은 다리오 왕은 음모가 있는 이 법안에 도장을 찍고 공포를 했습니다. 꼭 우리 사회와 같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법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전처럼 기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보다 높은 주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반면에 음모를 꾸미고 얼토당토않은 법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올가미에 걸려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법과 질서를 망가뜨리고 해괴한 법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바입니다. 저는 오늘 하늘의 하나님의 칙령을 세상의 어떤 칙령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순종했던 다니엘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먼저 다니엘이 기도할 때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습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분의 힘으로 용감해졌습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절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벨론 제국 보다 더 강력하고 더 큰 나라의 왕의 힘으로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능력을 힘입을 때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지혜를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분의 지혜로 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그의 지혜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진정한 지혜입니다. 기도가 다니엘을 강하게 했고 담대하게 했으며 기도가 다니엘을 지혜롭게 했습니다. 기도는 신비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할 때 몇 가지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집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할 때 꼭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기도하기 위해 꼭 집으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다니엘은 세계 최대의 나라 바벨론의 총리입니다. 그에게 틀림없이 사무실과 쉴 수 있는 곳과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 같은 것들이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총리 공관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집으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매일같이 처리해야 할 공적 업무의 양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바벨론 세계에서 다니엘 보다 더 바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쁜 시간을 쪼개 굳이 집에 가서 기도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얼마든지 총리 공관에 자기만의 공간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곳에서 기도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다니엘은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침묵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니엘의 행적으로 그 이유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은 우상의 나라입니다. 다니엘이 근무하는 곳 여기저기에 각종 우상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거절했던 다니엘은 기도 또한 그런 곳에서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았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기도하기 위한 구별된 곳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갔습니다. 다니엘의 집에는 어떤 우상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집만큼 기도하기 위해 구별되고 좋은 곳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집에 기도하기 위한 방을 하나 구별해놓았습니다. 다니엘은 그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방에서 기도하는 중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 방은 기도의 방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방에서 성경도 보고 찬송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방이 많다면 문을 닫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방을 하나 만드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짐을 위한 공간, 드레스 룸, 쉼을 위한 공간이 있다면 기도의 방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새벽에 일어나서 거실에 불을 켜면 식탁에 아내의 성경책이 펴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잠이든 것입니다. 기도의 방을 만들 수 없다면 식탁에서라도 기도하십시오. 식탁이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먹는 곳으로 만드십시오. 집에서 종종 찬송의 소리와 기도의 소리와 말씀의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집이 육적인 쉼과 영적인 쉼이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햇살이 세상을 비춰올 때 먼저 하나님의 얼굴빛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햇살 속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이 일을 잠시 멈추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달려가는 시간에는 자신의 집 기도의 방으로 달려가 영의 양식을 먹었으며 모든 일과를 마친 후 한 밤에는 어둠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돌아봤습니다. 이 때 다니엘은 80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나이에 기도하기 위해 매일 같이 집과 집무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번거롭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 날마다 다니엘만큼 집행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절반 정도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온 바벨론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도하기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정기적으로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다니엘 923절에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1011절에는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라고 했습니다. 1019절에는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서에 다니엘이 큰 은총을 받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그의 기도습관에 있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큰 은총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더 큰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다니엘이 꼿꼿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기도하세요. 그래서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다니엘처럼 꼿꼿하게 신앙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의 또 하나의 습관은 기도할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매우 큰 특징적인 습관이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할 때 그의 기도방 창문은 항상 예루살렘을 향해 열려져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몇 년을 기도했을까요? 40, 50, 아니면 70, 그는 그 습관을 수십 년 동안 지켜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 창문을 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런 기도 습관을 어떤 상황에서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의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왕의 칙령을 내렸습니다. 사탄은 수십 년 동안 쉬지 않는 다니엘의 기도를 중지시키고 싶었습니다. 그 칙령에는 왕의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왕의 도장이 찍히면 왕도 그 칙령을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규례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전처럼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집으로 가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동일하게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공개적으로 그 왕의 칙령을 무시했습니다. 이런 강함과 담대함이 어디서 나올까요? 다니엘은 창문을 닫고 몰래 기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문을 꼭꼭 잠그고 기도하다가 누군가가 오면 기도하지 않은 척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무리들이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것을 짐작하고 다니엘의 집으로 무리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다니엘은 칙령에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신의 집 문을 잠그지도 않고 기도했습니다. 한 두 명이 소리를 죽여 가며 조용히 온 것이 아니라 무리를 져서 왔습니다. 종들이 사람들이 몰려왔음을 다니엘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그는 무리들이 온 것을 알았고 기도방을 향해 악한 무리들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도방 문을 여는 순간에도 그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무리들이 오는 것을 알았지만 기도하지 않은 척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대놓고 왕의 칙령, 바벨론 규례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다니엘은 대놓고 몰려온 무리들을 무시했습니다. 다니엘은 사탄을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다니엘의 용기와 담대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니엘이 가졌던 담대함과 성품을 가질 수 없을까요?  

경건한 어체가 아니라 죄송합니다마는 저는 정말 하나님 앞에 쪽팔렸습니다. 쪽팔린다는 말이 속어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쓰지도 않고 쓰고 싶지도 않지만 이 말보다 제 마음을 표현하기에 더 적절한 말은 없는 것 같아서 한 번만 쓰겠습니다. 작년 4월 초에 저는 동사무소 직원들이 주일날 아침에 예배단속 나오는 것을 마주하기 싫었습니다. 문득 교회 문을 잠그고 예배를 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목사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정말 쪽팔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니엘은 집 문을 잠그고 싶지 않았을까요? 저는 다니엘이 전혀 문을 잠그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창문을 열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변하고 환란의 바람이 불어도 하나님 앞에서 쪽팔린 성도는 되지 맙시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연다고 해서 예루살렘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직선거리로 대략 100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볼 수는 없었지만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포로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225절에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멸시받는 포로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분 때문에 비굴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로 교회가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을 했습니까?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왜 예루살렘을 사랑했을까요? 저는 틀림없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제단을 사랑했다고 믿습니다. 다니엘이 바라본 것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었다는 것은 성전을 향해 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억 만리 타국에서 성전을 상상하고 그 성전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성전을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 다니엘이 마음을 하나님께 열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귀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이 다니엘의 마음의 창문을 닫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이 창문을 닫을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대놓고 마귀를 비웃었습니다. 그 문은 아무도 닫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 예수님의 십자가 제단입니다. 그림자이었던 이삭과 구약의 제물들이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 드려졌고 이 모든 것의 실체이신 예수님도 이곳에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제단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상징입니다. 그 제단을 향해 다니엘처럼 마음의 창문을 엽시다.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창을 여세요. 저 위에 하늘 제단을 향해 문을 여세요. 다니엘은 저 하늘 예루살렘 제단을 향해 마음의 창문을 연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문을 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향해 문을 여는 것입니다. 율법이 시온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말씀의 상징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듣기 위해 마음의 창문을 연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예루살렘인 말씀을 향해 문을 여십시오. 이것이 사자 굴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다니엘의 또 하나의 습관은 감사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은 무엇이 감사했을까요? 12-3세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왔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죽거나 다니엘처럼 포로가 되어 바벨론 어디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요? 전쟁 중에 죽지 않았을까요? 부모형제 누구 하나 생사를 알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환관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 하늘 아래서 완전히 혼자였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혈혈단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70여년을 혼자 산 것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도도 못하게 왕이 칙령을 내려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자 굴에 던지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다 막혔습니다. 우울증, 정신분열증, 공황장애, 강박장애 등등 정신질환에 걸리기 쉽지 않았을까요? 다니엘은 그런 상황에서 감사했습니다. 

감사와 기도는 이란성 쌍둥이입니다. 감사는 기도의 다른 모습입니다. 감사와 기도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습니다. 한 면만 있는 동전은 동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감사는 기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반쪽짜리 기도입니다. 기도와 감사는 자동차의 왼쪽 바퀴와 오른쪽 바퀴와 같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한쪽 바퀴에 바람이 빠진 것과 같습니다. 기도와 감사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와 같습니다. 기도와 감사는 동시에 굴러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는 부부와 같습니다. 기도가 남편이라면 감사는 아내입니다. 부부가 나란히 같이 있어야 하듯이 기도와 감사는 나란히 있어야 합니다. 기도와 감사는 오른발과 왼발과 같습니다. 다니엘은 사탄의 협박 앞에서 기도의 오른쪽 다리와 감사의 왼쪽 다리, 두 다리로 굳게 서서 기도했습니다. 

정기적으로 계속하는 기도가 다니엘의 힘과 용기와 지혜의 원천입니다. 규칙적인 신앙생활이 다니엘의 고귀한 성품을 만들었습니다. 에스겔 1414절에 비록 노아, 다니엘, ,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계속 무릎을 꿇는 것이 우리를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기도의 방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기도가 우리를 좀 더 고귀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정말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결코 구하거나 찾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축복을 받아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자동차의 한쪽 바퀴가 펑크가 난 것과 같습니다. 기도의 바퀴에 에어를 넣는다면 감사의 바퀴에도 동일한 압력의 에어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라는 자동차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다니엘의 기도의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벨론에 교활하고 사악한 자들에 의해 해괴망측한 칙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아무도 30일 동안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사자 밥이 되게 할 것이다.” 다니엘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에는 또 다른 유대인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도 기도하는 무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칙령이 발표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30일 동안만 기도를 쉬자고 했을 것입니다. 잠시 기도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니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잠시 기도를 쉬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로 인해 마귀는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요? 하지만 마귀들은 다니엘을 볼 때 고통소리를 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그 해괴망측한 칙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기도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창문은 다 닫혔지만 다니엘의 창문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했을 것입니다. 융통성이 없고 완고하며 고집이 세다고 했을 것입니다. 기도 30일 안한다고 어떻게 되지 않는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전처럼 동일한 태도로 기도했습니다.  

만약 이런 법안이 오늘 우리사회에 발의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럴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회에 지극히 적은 수가 모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합리화할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으니 기도를 잠시 쉰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 코로나19로 그대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겁먹고 그분의 십자가를 피한다면 우리는 피한 그 두려운 것들보다 더욱 가혹한 운명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곰을 피해 달아나보십시오. 사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뱀을 피해 숨어보십시오. 용이 여러분을 삼킬 것입니다. 가벼운 짐을 지기를 거부하면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당할 것입니다. 풍속이 문란한 시대에 여러분 자신도 문란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절망적인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믿음은 항상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비록 앞에 사자가 있을지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피하거나 숨지 마십시오. 기괴한 칙령을 만든 교활한 자들 앞에서 숨지 마십시오. 다니엘은 숨지도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에는 전진기어만 있지 후진 기어는 없습니다.  

셋째, 다니엘의 결심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니엘 앞에서 칙령이 제안되었고 승인되었으며 그 칙령에 왕의 도장이 찍혔습니다. 왕은 바로 옆에 있는 다니엘에게 30일 동안 기도하면 안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때 다니엘은 어떻게 했을까요? 고민했을까요? 저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사람들과도 상의하거나 조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도하는 방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하루에 세 번씩 동일한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여전히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심하지도 않았으며 자기가 기도하고 있을 때 그 행동을 어정쩡하게 얼버무리지도 않았습니다. 종들을 불러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집의 문을 지키거나 잠그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원수들을 피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점 근심의 빛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견고했고 평정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단순했고 꾸밈이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할 때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중에 하나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의 기도의 창문이 열린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기도할 때 그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늘 그랬습니다. 부모 형제를 잃고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종살이 하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다니엘의 창문은 힘과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그 창문이 열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창이 자기들을 향해 열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칙령으로 인해 만약 30일 동안 창문이 닫힌다면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다니엘은 사자 굴이 아니라 더 한 곳에 들어간다 해도 그 기도의 창문을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도 흔들릴 수 없었고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 됐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지위를 주신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큰 기대를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기수가 쓰러진다면 전투를 어떻게 치룰 수 있습니까? 기준이 없어진다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사분오열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여러분을 뛰어난 위치에 놓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셨습니다. 조금도 겁내지 마십시오. 이전에 하던 습관대로 예배하고 습관대로 기도하십시오. 결코 해괴망측한 법 때문에 예배를 빠뜨리지 마십시오. 독재자가 법률로 제정해 놓은 것을 비천한 아첨꾼들은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자신이 소크라테스인양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시 말하지만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악법은 법이 아니라 부정이고 부패이고 죄악입니다. 이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찬사를 받는 것은 악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의 음모를 피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하고 앞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만 인용하며 자신을 합리화하지 마시고 소크라테스처럼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분명히 법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인간의 법은 즉시 무효가 됩니다. 하늘의 법에 위배되는 이 땅의 모든 법을 무시하는 것이 모든 시민들의 의무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돌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까? 당신은 더 위험한 곳도 가면서 교회 가서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까? 한 그릇 밥과 쾌락을 위해 더 위험한 일도 하지 않습니까? 서울 지하철 이용객이 하루 730만 명입니다. 비비고 밀치고 정신이 없습니다.” 제가 생명을 경시하는 것입니까? 육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에 떠내려가는 외투를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외투는 건져내고 자신은 물에 빠져 죽는다면 외투가 굳이 필요하겠습니까?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험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위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위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똑바로 나아갔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잘 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도 잘 못된 길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잘 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막고는 있지만 결국 세상은 계속 그렇게 나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잘 못된 길로 가시면서 자신을 합리화하시겠습니까?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은 그 길로 가지 마십시오. 세상의 잘 못된 길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다니엘은 30일 동안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한 번 예배를 쉬어도 괜찮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가는 길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며 원칙을 매도하거나 엄격한 순수성과 훌륭한 진리를 조금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점들과 획들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신앙과 믿음의 조상들의 숭고한 신앙을 기회주의적인 생각과 신앙으로 변질시키며 내 신앙을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다니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집스럽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구원받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오늘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다니엘은 드디어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실재 사자입니다. 그림 사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30일만 기도하지 않으면 되는데 위험을 자초했다며 어리석은 사람이고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다니엘은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다니엘은 사자 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사자 굴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놀라운 자가 되었습니다. 왕이 그를 인정했습니다.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를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다니엘이 사자 굴 속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음 날 사자 굴 속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요? 소설이라고 했을까요? 해괴망측한 법을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들은 사자 굴에 던져져서 다니엘 대신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다니엘은 평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어떤 정치인도, 어떤 지혜자도 이제 바벨론에서 다니엘을 건드리거나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그를 대적하는 음모도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으며 아무도 그를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평화의 항구를 향하여 순조로운 항해를 했습니다.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일 뿐만 아니라 가장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정직일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양심을 지키는 일은 어려움을 감수 할 수 있지만 가장 빠른 길입니다. 진실은 답답해 보일 수 있으나 최고의 처세술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양심을 버리지 마십시오. 양심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이득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반드시 보상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면역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한 수치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킨 것이 선한 양심이라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사람들이 여러분의 강력한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오직 지금 여러분의 발을 굳게 딛고 서십시오. 그리고 지금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오른 한 발 양보를 한다면 내일은 두 발, 모레는 네 발, 그 다음에는 열 발을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한 치를 양보해 보십시오. 세상은 한 치가 아니라 열 자 스무 자를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고하십시오. 한 치도 양보하지 마십시오. 애매한 말 속임수, 또는 거짓과 가까이 하느니 보다는 사자 굴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말쟁이 그리스도인, 궤변론자가 되지 마십시오. 처음에 어려움이 크다 할지라도 그래도 그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다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나머지 날들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전보다 더욱 훌륭하고 더욱 행복한 생활을 제공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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