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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에 “이끌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데려가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창2:15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에덴은 기쁨, 희락,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단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아단은 “스스로 즐겁게 하다, 스스로 즐거움이 더해지는, 즐거움이 증가하는, 즐거움이 늘 새로워지는”이라는 뜻입니다. 에덴은 기쁨이 계속 더해지는 곳입니다. 기쁨이 계속 새로워지는 곳입니다. 스스로 기뻐지는 곳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큰 기쁨이 더해지는 곳입니다. 천국은 계속 기쁨이 더해지고 새로워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기쁨이 계속 더해지는 곳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대로 가십시오. 계속 기쁨이 더해집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반대로 가보십시오. 기쁨이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천지창조 후 동물들의 이름을 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창2:19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끌어 가시니’라는 말은 동물들이 아담에게 스스로 가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이 동물들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아담에게 나왔습니다. 각종 동물이 아담에게 스스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내가 따라가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대로 따라 가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따라옵니다. 세 번째는 아담이 하와를 만날 때 사용되었습니다. 창2:22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20절에 하와를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반드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에는 도와주는 자들, 조력자들이 생깁니다. 아담은 스스로 무언가를 찾으려 하거나 모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구하지도 않았고 결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갔더니 필요한 것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갈 때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의 반대로 가면 은혜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드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명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3절 끝에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유전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살아남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통해 홍수 후에 시작되는 새롭게 펼쳐질 세상에 이전의 모든 생명들을 그 종류대로 다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땅 위에 모든 동물, 땅에 기는 모든 것들, 공중의 모든 새들이 한 쌍씩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그 씨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동물들을 방주로 이끌어 가셨고 노아는 방주로 나오는 모든 동물들을 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사명입니다. 노아는 좋아하는 동물은 방주에 타게 하고 싫어하는 동물은 타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동물을 방주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방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노아는 청지기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목사는 교회 문지기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습니다. 목사에게 오라 가라 할 권한이 없습니다.
방주에는 사슴, 공작새, 꾀꼬리, 백조, 원앙 같은 예쁜 동물들이 탔습니다. 호랑이, 사자, 표범, 곰 같은 사나운 맹수들도 탔습니다. 그리고 쥐, 뱀, 고슴도치 같은 혐오스러운 짐승들도 탔습니다. 방주에는 틀림없이 모기, 파리, 진드기, 말벌도 탔을 것입니다. 노아가 정말 싫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홍수가 끝날 때까지 함께 먹고 함께 자야 할 방주공동체입니다. 방주는 <생명공동체>입니다. 뱀과 개구리는 천적입니다. 하지만 방주 안에서 뱀이 개구리를 해치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습니다.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빨지 않습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도 방주 안에서는 이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잠잠했습니다. 방주는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공동체입니다. 또 방주는 공생공동체입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하는 공생관계입니다. 개미와 진딧물은 원래부터 공생관계입니다. 하지만 방주 안에서는 사자와 사슴도 공생관계입니다. 고양이와 쥐가 공생관계입니다. 뱀과 개구리가 공생관계입니다. 방주 안에서는 모든 동물이 공생관계에 있습니다. 방주 안에서는 원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방주입니다. 방주는 새로운 세상에 씨를 전해야 할 생명공동체, 공생공동체입니다.
등대교회는 하나님의 방주입니다. 등대교회는 공생공동체입니다. 악어와 악어새를 공생관계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생관계가 아니랍니다. 악어새가 악어의 이빨을 관리해준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악어는 평생 동안 3000개의 이가 새로 나기 때문에 이빨을 관리가 필요 없습니다. 악어새의 주식은 악어 이빨 사이에 있는 고기가 아니라 씨앗이나 벌레입니다. 아직까지 악어와 악어새가 어떤 관계인지 명확한 이유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둘은 잘 어울립니다. 왜 잘 어울리는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왠지는 모르지만 그냥 잘 어울리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개와 고양이처럼 이유 없이 어울리기 힘든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잠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는 개미와 진딧물처럼 함께 살아야 할 공생관계입니다. 교회는 공생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신천신지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함께 해야 할 방주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한 쌍씩 방주에 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 정결한 짐승인지 무엇이 부정한 짐승인지 기준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했을까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부끄러워할 때 하나님께서 짐승의 가죽으로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어떤 짐승을 잡으셨을까요? 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똑같은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아들 아벨이 하나님 앞에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에 양이 사용되었다는 성경의 첫 번째 언급입니다. 아담의 손자 에노스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공적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에노스는 어떤 동물로 제사를 드렸을까요? 이것도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후손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에녹, 므두셀라, 라멕 같은 믿음의 후손들은 모두 동일한 짐승들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때 사용된 제물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기준이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도 홍수 후에 조상들처럼 동일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기준은 예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분이 처음으로 나오는 곳이 바로 방주입니다. 방주 안에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다 있습니다. 하지만 구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결한 것과 정결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통해 이 세상의 짐승들을 처음으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셨습니다. 세상에는 정결한 것과 정결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것을 가까이 하고 부정한 것은 피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부정한 것을 멀리 하십시오.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심판으로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통 중에서 의와 불의, 공의와 불공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통 중에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의 방주인 교회에 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 중에 잉태한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졌습니다. 죄용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여전히 부정이 남아 있습니다. 예배로 우리의 부정을 계속 정결하게 합시다. 예배가 기준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경이 있습니다. 예배와 성경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방주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로 방주의 기적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한 후에 방주 앞에서는 정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동물들이 종류대로 줄을 지어 방주로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 나온 것이 아니라 짝을 지어서 함께 나란히 나왔습니다.
정말 신비한 광경입니다. 들짐승, 하늘에 나는 새, 땅에 기는 것(곤충류), 기운이 있는 모든 생물들이 짝을 지어 줄을 서서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현재 동물의 종류는 100만 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중에서 곤충이 80만 종입니다. 80만 종의 곤충들이 짝을 지어서 날아왔습니다. 160만 마리입니다. 방주 위의 하늘은 검은 구름 같은 곤충 떼로 뒤덮였습니다. 엄청난 광경입니다. 사람들은 곤충 떼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조류가 8,600여 종입니다. 약 20,000여 마리의 새가 방주 상공을 새까맣게 덮었습니다. 파충류는 6,000여 종입니다. 1,200여 마리의 파충류가 방주 앞에 두 줄로 서 있습니다. 양서류가 3,000여 종입니다. 포유류가 4,000여 종입니다. 10,000여 마리의 들짐승들이 종류별로 두 줄로 서서 방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미스테리한 일이 지금 방주 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행렬은 한 두 시간이나 하루 이틀 만에 끝난 것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5-6일 동안, 최대 7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동물 조련사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조련사는 몇 가지 동물을 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동물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두 가지 동물이 아니라 모든 지상의 동물이 다 방주로 짝을 지어서 나왔습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노아요? 아닙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기적, 방주의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홍수 직전 방주 앞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신비스런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삽시간에 전역으로 퍼졌을 것입니다. 하나 둘씩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방송국이 있었다면 며칠 동안 전국에 생방송으로 방영되었을 것입니다. 당대에 최고의 이슈가 되었을 것입니다. 구경꾼들은 점점 더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동물 농원을 가듯이 사람들은 방주 앞에 모여 구경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신비한 광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고 생각했을까요? 놀랍고 신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계십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기적을 봐도 그것이 기적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노아 시대와 같은 기적을 매주 교회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작년 2-3월 코로나19 심각했습니다.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비대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코로나19로 2주간 폐쇄가 된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성도들은 계속 교회로 갔습니다. 정부에서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구상권을 청구한다고도 했습니다. 매스컴은 온갖 욕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조롱을 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교회를 욕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교회로 가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이전 보다는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교회로 나오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욕하고 조롱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배 몇 달 안 드리면 죽느냐? 꼭 교회를 가야 하느냐? 집에서 예배하면 안 되냐? 별 욕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로 가고 있습니다. “왜 저들은 이 상황에도 교회를 갈까?” 사람들은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주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방주의 기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거부감을 일으키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나라에 이 분을 좋아하시는 분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거부감이 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도 놀라워해요. 제가 설교 시간에 이 이야기를 한다고 했더니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제 아내도 불편한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는 제 아내처럼 불편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 언론들도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국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기이하고 놀랍습니다.
우리나라 전 대통령인 전두환 씨의 차남 전재용 씨가 목사가 되기 위해 현재 백석대학교 신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합니다. 또 성남 <우리들교회> 전도사로 재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재용 씨는 2006년 경기도 오산의 임야 매각하는 과정에서 불법이 드러나 원주 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전 씨는 “방(교도소)에 앉아 창살 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교도소 안의 종교방에 있던 사람이 부른 것이다.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 찬양,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라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과거 신앙생활에 대해 “새벽기도도 다니고 십일조 열심히 드렸다. 하지만 그 때는 축복 좀 많이 달라는 기도밖에 드릴 줄 몰랐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교도소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네가 목사가 되면 교회를 출석하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내 박상아 씨는 “저희는 누가 봐도 죄인이라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조차 숨기고 싶은 마음인데, 목회자가 된다고 하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거 같았다.”며 절대 반대했다고 합니다. 저도 박상아 씨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릅니다. 만약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교회에 나오게 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사 쿠데타로 1988년 백담사에서 합장을 하던 분들이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기사의 댓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역시나 온갖 조롱과 욕이 달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롱하기 전에 조용히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봅시다. 지금도 방주의 기적은 우리 중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을 방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홍수가 있기 일주일 전부터 동물들은 방주로 모여 들었습니다. 2절 끝에 “네게로 데려오며”가고 했습니다. 3절 중간에 “데려와”라고 했습니다. ‘데려가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카흐(לָקַח)입니다. 라카흐는 ‘취하다, 붙잡다, 이끌다, 받다, 집어 올리다, 데려오다, 옮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네게로 데려오며”라는 말은 “네게로 이끌어”라는 의미입니다. 주어는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모든 동물들을 방주로 이끌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동물들을 방주로 이끌어올 수 있었을까요? 전혀 불가능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곤충 80만여 종, 조류 8,600여 종, 파충류가 6,000여 종, 양서류 3,000여 종, 포유류 4,000여 종입니다. 노아 때는 지금 보다 더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코끼리 한 쌍, 말 한 쌍은 끌고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살이 한 쌍, 파리 한 쌍은 어떻게 데려올 수 있습니까? 노아가 동물들을 방주로 데리고 들어오는 일은 아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들을 방주로 이끌어 들이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에 지상의 동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끄심이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1절에 “방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들어가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뽀인데 “인도하여 들어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노아의 가족을 방주 안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결정은 노아의 가족들이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노아의 가족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이끄심은 노아 시대 다른 사람에게도 있었습니다.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벧전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세상에 의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방주로 들어오도록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이끌어 인도하신 것이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창조 후에 동물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아담에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다른 한 번은 노아 홍수 직전에 있었습니다. 두 번 모두 동물들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러도 오지 않습니다. 사람만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이 다 방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들로, 사건으로, 환경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계속 부르십니다. 하지만 오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방주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구경만 할 뿐입니다. 그들은 죽은 후에 자신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수 없이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방주로 오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방주로 오셨다면 방주에서 떠나지 마십시오. 여기에 머무십시오.
제가 초등학교 때는 시골에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는 천안에서 교회를 아주 조금 다니다가 말았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진학했습니다. 1985년 4-5월의 어느 주의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아침에 공부를 한다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집에 왔습니다. 씻은 다음 슬리퍼를 신고 집 앞에 나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서쪽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집 바로 앞에 논이 있었습니다. 그때 차임벨 소리가 “뎅 뎅 뎅”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예배 시간이 되면 마을마다 찬송가를 틀어주었습니다. 천안 시내에도 그 소리가 매주 났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성령께서 제 마음에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때 제 마음에 교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에 이끌려 집 뒤쪽으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교회를 갔습니다. 교회 마당에 중고등학교 학생들 20여 명이 놀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다 보니 침례교회였습니다. 2층 예배실에 올라가서 무작정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침례교회가 낯선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다니던 교회가 모두 감리교회였거든요. 그 교회가 마음에 내키지 않아 무작정 남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천안감리교회가 나와요. 그쪽에 교회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교회를 찾아 걸어간 거예요. 제가 지난 주간에 두 교회 사이를 지도로 측정해보니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직선거리로 가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갔으니까 적어도 1km 이상을 걸어 간 것입니다. 제가 해가 지기 전에 걷기 시작했는데 그 교회에 도착해보니까 밤이 되었어요. 30-40분 이상을 배회하고 돌아다닌 것입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박미희라는 천안여자 상업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학생이 저를 2층 예배실로 인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교회에서 은혜 받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갔던 침례교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이삭교회라는 당시에 유명한 이단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면 지금쯤 저는 지옥의 자식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천안감리교회를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냥 무작정 간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던 거예요. 그때는 몰랐습니다. 후에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구나!’ 또 내가 어려서부터 다닌 교회가 침례교회가 아니라 감리교회인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중학교 때 침례교회를 갔다면 저는 고등학교 때 집 옆에 있는 침례교회를 다녔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저도 모르는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당신의 손으로 이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십시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기대하며 기다리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갈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 씨를 새로운 세상에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갑니다. 그러다가 멸망합니다.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이끄셨지만 마지막 때는 사람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노아의 기적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행렬이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갔을 때 에덴동산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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