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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제가 가장 많이 읊조리는 성경 말씀은 시편 23편입니다. 저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어둠 속에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새벽에 눈을 뜨면 이불 속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읊조리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중얼거리다보면 제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평안히 잠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잔잔해지고 고요해지며 아주 평안해집니다. 어둠 속이 잔잔한 호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저 보고 이제 편안히 쉬라며 파도가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마음 속 저 밑바닥부터 뜨거워지기도 하며 새로운 힘이 용솟음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또 지은이의 심정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심중에서 나온 것이라야 심금을 울리 수 있습니다. 보고 경험한 것을 심중에서 말할 때 감동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이 말한 것은 다윗이 직접 겪은 것이기에 더욱 더 맛이 있고 감동이 됩니다. 다윗은 더운 여름날에 물가로 양떼를 몰고 가는 방법을 상기하였고 냇가의 시원한 곳에 양떼를 쉬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겨울이 닥쳤을 때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양떼를 인도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병든 양을 고치는 방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에 양을 상징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생활과 심중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수십 개의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엘, 엘로힘,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여호와 라파(여호와는 치료하신다), 여호와 샬롬,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기), 등등. 여호와 로이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많은 이름 중에 하나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입니다. 이 시간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로이는 방목하다, ~을 돌보다, 풀을 뜯다, 먹이다, 다스리다는 뜻의 동사 라아에서 왔습니다. <여호와 로이>는 양을 먹이고 돌보는 목자처럼 양 같은 우리를 먹이시고 돌보시는 여호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아주 실재적이고 친근한 표현입니다. 목자는 한 해의 대부분을 들판에서 양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한 번 양을 치기 위해 나가면 양과 함께 들판에서 5-6개월을 지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규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야생에서 살기 때문에 정결규례도 잘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자를 부정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불경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서슴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목자와 양은 아주 친밀한 관계입니다. 목자는 양이 100마리이건 200마리이건 다 이름을 붙여줍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모든 양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아주 친근한 이름입니다. 개똥이, 돌쇠, 마당쇠, 순이, 방울이, 민들레, 진달래 등등 우리식으로 말하면 이런 식의 이름들입니다. 이름이기는 하지만 별명 혹은 애칭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우리는 양을 짐승이라고 생각하지만 목자는 양을 가족처럼 생각합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은 물론 생김새, 기질, 성격까지 알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동물이 아니라 가족으로 생각합니다. 목자에게 양은 동물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목자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보다 양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들판에서 함께 뛰어다니고 함께 먹으며 함께 잡니다. 양은 목자에게 가족입니다. 양과 목자는 아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아주 친근하고 실재적인 표현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의 딸이 어려서부터 애완견을 키웠습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타지로 취업을 나갔습니다. 원룸을 얻어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개를 키울 수가 없는 거예요. 개가 하루 종일 좁은 원룸에서 혼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집사님이 키우게 됐습니다. 그리고 딸은 주말에만 집에 와서 개를 봤습니다. 바쁠 때는 한두 달 못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바쁘기도 하고 개를 좋아하지 않아요. 개 때문에 볼 일을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집사님이 개 때문에 고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집사님에게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다른 사람 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집사님이 하는 말이 “개를 다른 사람 주면 우리 애 우울증 걸려요.”예요. 그 청년에게 개가 어떤 존재인지 아시겠습니까? 그 청년에게 개는 짐승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한 집에서 함께 자란 가족이에요. 아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율법적이고 규범적이며 엄격한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과 종의 엄한 관계, 왕과 신하의 상명하복의 관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그 딱딱하고 경직된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당신이 기르시는 짐승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아주 충격적인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안아주고 꼬리치며 뛰어 올라 혓바닥으로 핥는 주인과 애완동물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나는 당신이 기르시는 개똥이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삶에서 나온 아주 친근한 생활의 표현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함께 먹고 뒹구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어디쯤에 계신 엄격하고 호랑이 같이 무서운 분이 아니라 목자처럼 친근하고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친근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양을 돌보시는 목자 같으신 하나님을 삶의 들판에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믿고 섬겨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기르시는 들짐승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나는 양처럼 매우 미련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양은 가장 어리석은 짐승 중에 하나입니다. 짐승들은 각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다 있습니다. 하지만 양은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양은 시력이 아주 나쁩니다. 2-3m 밖에 보지 못합니다. 난시입니다. 그래서 눈 앞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면 그걸 졸졸 따라다닙니다. 양을 치는 개들이 옆에서 뛰어다니면 그게 목자인 줄 알고 따라갑니다. 이러한 양 떼의 형편없는 분별력을 야생 개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생 개들은 양 떼를 교묘히 유도하여 좁은 골짜기로 몰아넣은 뒤 잡아먹곤 합니다. 인간들은 바로 그 점을 응용하여 양치기 개를 훈련시킵니다. 양은 시력이 나쁘기 때문에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여름에 풀을 뜯었던 곳을 모릅니다. 겨울에 쉬던 곳을 모릅니다. 방향을 바꾸어 생각해봅시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이 얼마나 미련한 동물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미련한 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맹수가 자신을 삼키려는 것을 잘 모릅니다. 믿음의 길을 자주 떠납니다. 믿음의 길을 벗어나면 다시 헤쳐 나오지를 못합니다. 은혜의 초장을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나는 양처럼 어리석은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나를 돌봐주십시오. 나를 먹여주십시오. 나를 책임져주십시오.”라는 고백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양처럼 어리석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십니까? 나의 본성이 양과 같다는 것을 자백한 일이 있습니까? 아굴은 잠언 30:2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지혜자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어리석음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신이 행한 해 아래서 수고가 얼마나 무익한지 한탄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어리석은 인간임을 고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대 지혜의 왕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학교에서 우리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참된 지혜라는 것은 하늘의 강한 빛에 의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돌보심이 필요하다는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나는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며 제멋대로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양에 대한 이미지는 온순함과 착함입니다. 화를 낼 줄도 모르고 온순한 사람을 “저 사람은 양처럼 순한 사람이야.”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놓으셨습니다. 염소는 영벌에 들어가지만 양은 영생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양은 구원받은 백성들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양은 온순한 동물이 아니라 매우 사납고 억센 동물입니다. 이기적이고 고집이 센 동물입니다. 새끼 양들이 배가 고파 어미로 보이는 양들에게 다가가서 우유를 얻으려 하면 양들은 매정히 뿌리치고 가버립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자기 먹이 찾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멋대로 가버립니다. 위키 백과사전은 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화를 잘 안 내고 온화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온순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양을 유순한 동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양은 실제로는 매우 억세고 사나운 동물이다. 염소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고집이 세서 다른 동물에게 박치기를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기 때문에 양치기들도 애를 많이 먹는다."
이사야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양은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고집한다는 점에서 양과 매우 비슷합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나는 양 같아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으면 내 길로 가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기적이고 제 멋대로 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말씀 기도 찬송입니다. 말씀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이지만 그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 아닙니까? 저는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은혜, 자비, 불쌍히 여김, 은총이라는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해주세요.”라고 고백이 아닙니까? 찬송한다는 것은 은혜를 감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고집스럽고 제 멋대로 인 양 같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나는 양처럼 의존적인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야생양은 혼자서도 잘 살지만 집에서 키우는 양은 사람에게 의존해서만 살아갑니다. 양을 들판에 갖다 놓으면 살 길을 결코 찾지 못합니다. 닭을 풀어놔 보세요. 혼자서도 잘 삽니다. 말을 풀어놓아보세요. 집에서 키우는 것보다 훨씬 살이 쪄 있습니다. 개, 고양이,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양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는 동물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는 내 목자라는 말은 “나는 절대로 하나님 없이는 못 삽니다.”라는 뜻입니다. 양은 천성적으로 똑바로 가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만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먹이를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낭떠러지에 그대로 떨어져 죽게 될 것입니다. 양은 누군가 이리 저리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양은 넘어지면 혼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목자가 올 때까지 누워 있어야 합니다. 뒤집힌 양은 버둥거리다가 배에 가스가 차면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죽기도 합니다. 뒤집혀 있던 양은 일으켜 주어도 바로 중심을 잡지 못해 중심을 잡을 때까지 목자가 양을 붙잡아주어야 합니다. 양은 방어 능력이 제로입니다. 빨리 뛸 수 있는 다리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으며 발톱이나 뿔도 없습니다.
등대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양입니다. 사람은 양과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고 살아갈 수 있는 방편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부르고 나를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를 의지하지 마세요. 사람을 바라보며 살지 마세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나온 것을 먹을 때 행복이 있고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갈 때 평안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반역을 가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생활은 비극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피차간에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처지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갖는다든지, 건강한 체력을 갖는 것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지속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나에게 주시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음식, 옷, 건강, 재력 및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헌팅톤(Huntington)은 “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정한 분량씩 분깃을 주십니다. 단번에 그것을 주시지 않으시고 필요에 따라서 분깃을 주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것으로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디(Hardy)는 “나는 하나님의 집에 손님입니다. 아침, 저녁,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세계는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양은 의존하는 짐승입니다. 언제나 어떠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양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다윗이 받은 축복입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적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의존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 없이 못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광야, 산골짜기를 헤매는 양과 같은 상황에 처하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의 길을 떠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마음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채 유리하는 심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라면 방황하는 양의 위치에 있어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리방황하는 개나 고양이에 대해서 듣지 못했습니다. 개는 밖에 나가면 야생개가 돼서 더 건강하고 더 힘이 세집니다. 주인이 필요 없습니다. 고양이도 들로 나가면 스스로 야성화가 되어 주인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리하는 양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그에게는 주인이 있습니다. 지난 2월 24일에 호주 멜버른 북부 랜스필드에서 양이 한 마리 발견됐습니다. 털이 35킬로나 되었습니다. 털의 무게가 양과 같습니다. 그대로 두면 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동안 버려진 양이었습니다. 1998년에 뉴질랜드의 한 농장에서 ‘슈렉’이란 이름의 양이 잃어버렸다가 2004년에 6년 만에 다시 찾았는데 털 무게만 27kg이었다고 합니다. 랜스필드의 양은 잃어버린지 7-8년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에 주인의 표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양과 주인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어디 있어도 하나님의 양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유리하는 자기의 양을 울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이 유리하는 양같은 생각이 들 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의 양입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사르입니다. 하사르는 줄어들다, 감소하다, 결여되다, 결핍을 당하다,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내 목자이시면 줄어들지 않는다, 결핍이 없다, 모자라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씀의 시제가 미완료입니다. 미완료라는 것은 동작이 완료되지 않았을 때 쓰는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에도 부족함이 없었고 지금도 부족함이 없으며 미래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는 과거에 대한 시인의 감사와 현재에 대한 시인의 만족과 미래에 대한 시인의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면 지금부터 영원토록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는 다윗의 이 시가 실제로 입증이 된 참된 진리임을 여러분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 한 구절이 수년 동안 들에서 기도하며 양과 함께 생활하던 다윗의 영혼을 진리의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나왔다고 믿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실 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했을 것입니다. 만약 경험하지 않았다면 성령께서 감동하셔도 다윗은 이런 고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삶에서 입증한 진리입니다. 또 누군가가 시편을 편집할 때 성령께서 편집자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이 시가 성경 시편에 수록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는 이 시가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에 성경에 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였기 때문에 포함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목동들이 다윗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삶 속에서 이 구절이 참되다는 것을 경험했고 그것을 입으로 간증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편집자는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 시는 사람들의 생활과 입을 통해 참된 진리임이 입증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성경 시대에 입증이 된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성경 시대 인물들에게 입증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는 현대인들에게서도 입증이 되었습니다. <이롬황성주생식>의 대표인 황성주 박사는 『성서 건강학』이라는 책에 특이한 정신과 치료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 박사는 로이로제나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는데 “하루 두 번 아침저녁으로 시편 23편 묵상”이라는 유명한 처방을 내린 바 있습니다. 미국의 하워드캘리 박사도 “성경은 나에게 동료의사의 역할을 해준다. 성경말씀은 매우 훌륭한 의술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처방대로 했을 때 단 한사람도 치료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다.”라고 절실한 고백을 했습니다. 매일 밤 불면증과 번민으로 시달리는 장관이었던 남편에게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취침 전에 시편 23편을 읽어주어 신앙을 회복시키고 불면증을 완치시킨 슬기로운 부인도 있습니다. 시편 23편이 사람의 병을 치료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현대 의학이 입증한 진리입니다.
저도 이 말씀이 진리임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고등학교 때 암송을 했습니다. 지난 35년 동안 이 말씀을 읊조리면서 이 말씀이 참된 진리임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35년 동안 저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믿음이 좋을 때도 인도하셨지만 믿음이 나쁠 때도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할 때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저의 목자셨습니다. 저는 지난 35년간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셨고 나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기쁘고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변함없는 진리임을 경험했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성령의 감동하심과 지은이의 삶과 고대인들의 삶과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입증된 참 진리입니다. 이것은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것도 마음을 경직시키는 딱딱하고 무거운 진리가 아니라 생활 속에 파고 들고 영혼을 감동시키는 실재적인 생활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으로 양식을 삼아보십시오. 이 말씀을 약으로 써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세상은 부족함이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돈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옷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신발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스펙, 실력, 경험, 능력, 학벌, 사회성, 배경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부족, 부족, 부족, 부족, 부족, 부족 … 세상은 온통 부족한 것투성이입니다. 이것을 채우면 저것이 부족하고 저것을 채우면 이것이 부족합니다. 악순환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의지해보십시오. 부족함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크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난관에 처했을 때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탄식을 하면서 “어찌할꼬?”라는 말을 하지 맙시다. 오히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을 의지합시다. 이 말씀을 의지할 때 여러분에게는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에 있는 여러분의 분깃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시다가 실패를 하셨다고 해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찌할꼬?”라는 절망은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의지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는 세상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허탈해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금, 은, 보화를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에 최고의 기업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영혼에 마르지 않는 영적 통장입니다. 이 말씀의 진가를 경험하십시오. 이 말씀의 진가를 경험하게 되면 이 말씀이 참된 진리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에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주신 내용 중에 주일 오전 어린이 집회 설교 제목이 빠졌더군요. 설교제목 좀 알려주십시오.” “그렇습니까? 제목은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입니다.” 평소에 설교 제목을 길게 쓰시던 목사님이었기에 인쇄소 직원은 이상하다는 듯이 한 번 더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 외에 또 있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다음날 주일 아침에 목사님은 강단에 올라서서 설교를 시작하려는데 설교제목이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무언가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목사님은 계속 이 제목을 몇 번씩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목사님은 눈물이 계속 흘러 더 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공동번역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표준새번역 성경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고 번역했습니다. 중국어성경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반드시 결핍에 이르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경상도 버전으로 읽으면 이렇게 된다고 합니다. “여호아가 내 목잔데 내가 머-가 부족할끼 있겠노? 마. 내사 더 이상 바라는 거 엄따!” 이 말씀을 전라도 버전으로 읽으면 “아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냐?” 이렇게 됩니다. 또 전라도 버전으로 잃그면 이렇게도 됩니다. “여호와는 나으 목장께로 나는 오져부요.” 여호와가 내 목자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이 왜 병에 걸릴까요? 왜 아플까요?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만족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고백하는 순간 불만족이 사라집니다.
경북 어느 산골 예배당에서 조사님이 교인들 앞에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한국 교회 초창기에는 전도사님을 조사님이라고 했습니다. 성경봉독 순서에서 조사님은 시편 23편을 봉독했습니다. 어두침침한 등잔불 아래서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 겨우겨우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나마 한글 성경에는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조사님의 한글 실력도 모자라는지라 힘들게 읽어내려 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목…자이시…니내…가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겨우겨우 성경봉독을 마친 조사님과 교인들은 그만,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님은 성경을 내려놓고 참으로 비장한 얼굴이 되어 설교를 시작하며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습네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교우들이 두 손을 들고 “내두! 내두!” 하고 함께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내 목을 자르셔도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초창기 기독교인들의 이런 영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시대에 그런 영성은 이제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요? 세상에 원망 불평 부족함이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매스컴을 보십시오. 온통 부족함 천지입니다. 없다!, 없다! 없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교회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성도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교회도 부족함이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이 주셨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이 사실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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